거리 묵호
발한동의 시가지 중심지역을 일컫는다. 묵호역 못 미쳐 있는 굴다리로부터 강원은행이 위치한 발한삼거리 일대까지의 거리를 가리키는데, 은행과 상가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다. 1931년 묵호항이 축항되고, 1936년부터 삼척지역에서 생산되는 무연탄 수송을 위해 무연탄을 집산하면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게구석
발한동과 묵호진동 경계에서 서쪽에 위치한 골짜기 또는 그곳에 위치한 마을을 가리킨다. 항구가 조성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와 게가 서식하여 게를 잡았다는 데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게구석 약수
게구석에 있는 약수. 이 약수가 유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물을 마시기 위해 모여 들었다고 한다.
관사로
묵호역 사거리에서 사문재까지의 1.2km 길이의 포장도로를 가리킨다. 이 도로의 중심에 위치한 발한동의 관사촌을 부각시키는 의미에서 관사로라 한다.
관사촌(官舍村)/ 관사터
묵호초등학교 동남쪽 언덕에 있는 마을. 밤나무골의 아래쪽이 되는데, 일제강점기 때 삼척개발주식회사의 관사가 있던 마을이다.
금송야지등
창호초등학교에서 게구석 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가리킨다. 금송야지의 발음 시에는 콧소리가 들어가 금소야지로 난다.
논꼴
묵호진동의 북쪽 아달동과의 경계 지점 못미쳐 서쪽의 산중턱에 있는 곳 또는 그 일대의 마을을 가리킨다. 예전에 산중턱에 논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당재봉/ 오학산(五鶴山)
창호초등학교 뒤에 위치한 해발 159m의 산으로서 사뭇재의 정상이 된다. 사뭇재에 서낭당이 있었던 데에서 일명 당재라고도 했고 이 산봉우리를 당재봉으로 불렀다.
도래/ 도래끝
어달과 묵호진동의 경계 지점에 있는 바닷가를 가리키기도 하고 이곳에 있는 마을을 일컫기도 한다. 동쪽 해변 오솔길이 돌아가는 곳이라는 데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등배산/ 동메산
묵호진동 마을 전체의 동쪽 즉, 논골 입구쪽에 있는 산을 가리킨다.
또째비골/ 도깨비골
묵호진동의 북쪽 까막바위 못 미처 등대가 있는 산쪽으로 올라가는 조그마한 골짜기. 옛날 이곳이 으슥하여 도깨비가 자주 나왔던 데에서 붙은 이름이다. 묵호항 등대에서 내려다보면 이 골짜기가 보인다.
망재
게구석골 옆의 고개를 가리킨다. 물이 들어왔을 때엔 이곳 밑이 절벽이어서 망재절벽으로 부르기도 했다. 물고기를 후리기 위한 방법으로 후리 어망을 앞바다에 놓고 고기떼가 몰려오는 것을 보던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당시엔 풍어제를 지낸 서낭당이 있었다.
묵호/ 먹호/ 안묵호/ 안먹호
묵호의 지리적 범주는 묵호읍이 모두 포함된다. 이 가운데 만우동과 망상동 일대를 제외한 부곡동, 발한동, 묵호진동, 어달동, 대진동, 동호동이 포함된다. 이 중 묵호진동은 묵호 중에서 안쪽에 있는 지역이라 해서 안묵호라 한다. 묵호를 사람들은 먹호라고 부르기도 했다.
묵호뒷장
산지골 입구와 논골 입구 사이에 위치하여 예전에 물건을 사고파는 저자 거리의 역할을 하던 자리로서 어판장 뒤쪽에 해당한다. 전통적인 장이 아니라 상설시장이었으며, 부식물을 파는 가게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묵호등대마을 논골담길
논골은 묵호항과 인접해 있는 자연부락으로 1941년 8월 11일 묵호항이 개항되고 1963년 6월 8일 캄캄한 자다의 불빛 묵호등대가 세워졌다. 당시 풍어로 호황이던 묵호가 어획량이 급감함으로써 지역경기는 점점 침체되었고 마을 주민들은 좋았던 시절의 묵호를 회상하며 추억을 간직하려고 심혈을 기울여 왔다.
묵호역
거리묵호의 굴다리 쪽 사거리에서 해안도로가 난 남쪽 언덕에 위치한 철도역. 1965년 5월에 인근의 구역(舊驛)에서 이전해 왔다.
묵호항
묵호진동과 발한동 동쪽에 걸쳐 있는 무역항. 예전에는 어항이었으나 1931년에 축항을 하고, 1936년부터 삼척 일대의 무연탄을 실어 내면서부터 크게 팽창하여 1941년 8월에 묵호항으로 개항하였으며 1964년에 무역항이 되었다. 축항 이전에는 해안이 가파른 절벽에 바닷물이 이어져 있어 험한 산등성이를 넘거나 배를 이용해 다니던 곳이었다. 해안을 매립하여 축항한 것이 묵호항인데, 이와 달리 현재의 동해항인 북평항은 파헤쳐서 만든 일명 준설항이라는 점이 대비된다.
발한삼거리
거리묵호에서 강원은행 건물을 사이에 두고 안묵호 쪽으로 나가는 길과 사뭇재 쪽으로 오르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
발한천(發翰川)
느릅재 쪽의 큰바란이에서 발원하여 묵호 시가지를 지나 묵호항으로 흘러가는 하천인데 지금은 거의 대부분 복개되었다.
붉은언덕/ 붉은언데기
묵호역에서 옛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오르면 묵호중학교 입구에 이르는데, 그 언덕 일대를 가리킨다. 옛날 이 언덕 일대가 붉은 진흙땅이어서 생긴 이름이다.
비석거리
붉은언덕의 중심지역으로 이곳에 비석이 있어 생긴 이름이다. 이 비석은 고려 충혜왕 때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낸 삼척 심씨의 시조인 진주군 심동로(眞珠君 沈東老)의 신도비다.
산짓골
논꼴의 서쪽에 있는 골짜기 또는 그곳에 있는 마을을 가리킨다. 옛날 이곳에 제당이 있어 산제를 지낸 데에서 유래한다. 산짓골에는 예전에 당집이 많았으며, 지금도 그때 사용하던 정수(井水)가 그대로 남아 있다.
숯골
관사촌의 끄트머리에 있는 골짜기를 가리킨다.
슬기나무재
당재봉에서 내려오는 산줄기로서 창호초등학교 쪽의 고개를 가리킨다.
쓱밭등/ 쑥밭골
논골 위쪽에 있는데, 창호초등학교 앞에서 바다쪽으로 위치한 곳으로 쑥이 많이 자생하던 장소를 일컫는다. 쑥밭등이 옳은 명칭이나 이곳 일대를 가리키거나 인근의 집들을 통칭하여 쑥밭골로 호칭하기도 한다.
墨湖의 地名과 來歷
거리 묵호
발한동의 시가지 중심지역을 일컫는다. 묵호역 못 미쳐 있는 굴다리로부터 강원은행이 위치한 발한삼거리 일대까지의 거리를 가리키는데, 은행과 상가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다. 1931년 묵호항이 축항되고, 1936년부터 삼척지역에서 생산되는 무연탄 수송을 위해 무연탄을 집산하면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게구석
발한동과 묵호진동 경계에서 서쪽에 위치한 골짜기 또는 그곳에 위치한 마을을 가리킨다. 항구가 조성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와 게가 서식하여 게를 잡았다는 데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게구석 약수
게구석에 있는 약수. 이 약수가 유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물을 마시기 위해 모여 들었다고 한다.
관사로
묵호역 사거리에서 사문재까지의 1.2km 길이의 포장도로를 가리킨다. 이 도로의 중심에 위치한 발한동의 관사촌을 부각시키는 의미에서 관사로라 한다.
관사촌(官舍村)/ 관사터
묵호초등학교 동남쪽 언덕에 있는 마을. 밤나무골의 아래쪽이 되는데, 일제강점기 때 삼척개발주식회사의 관사가 있던 마을이다.
금송야지등
창호초등학교에서 게구석 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가리킨다. 금송야지의 발음 시에는 콧소리가 들어가 금소야지로 난다.
논꼴
묵호진동의 북쪽 아달동과의 경계 지점 못미쳐 서쪽의 산중턱에 있는 곳 또는 그 일대의 마을을 가리킨다. 예전에 산중턱에 논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당재봉/ 오학산(五鶴山)
창호초등학교 뒤에 위치한 해발 159m의 산으로서 사뭇재의 정상이 된다. 사뭇재에 서낭당이 있었던 데에서 일명 당재라고도 했고 이 산봉우리를 당재봉으로 불렀다.
도래/ 도래끝
어달과 묵호진동의 경계 지점에 있는 바닷가를 가리키기도 하고 이곳에 있는 마을을 일컫기도 한다. 동쪽 해변 오솔길이 돌아가는 곳이라는 데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등배산/ 동메산
묵호진동 마을 전체의 동쪽 즉, 논골 입구쪽에 있는 산을 가리킨다.
또째비골/ 도깨비골
묵호진동의 북쪽 까막바위 못 미처 등대가 있는 산쪽으로 올라가는 조그마한 골짜기. 옛날 이곳이 으슥하여 도깨비가 자주 나왔던 데에서 붙은 이름이다. 묵호항 등대에서 내려다보면 이 골짜기가 보인다.
망재
게구석골 옆의 고개를 가리킨다. 물이 들어왔을 때엔 이곳 밑이 절벽이어서 망재절벽으로 부르기도 했다. 물고기를 후리기 위한 방법으로 후리 어망을 앞바다에 놓고 고기떼가 몰려오는 것을 보던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당시엔 풍어제를 지낸 서낭당이 있었다.
묵호/ 먹호/ 안묵호/ 안먹호
묵호의 지리적 범주는 묵호읍이 모두 포함된다. 이 가운데 만우동과 망상동 일대를 제외한 부곡동, 발한동, 묵호진동, 어달동, 대진동, 동호동이 포함된다. 이 중 묵호진동은 묵호 중에서 안쪽에 있는 지역이라 해서 안묵호라 한다. 묵호를 사람들은 먹호라고 부르기도 했다.
묵호뒷장
산지골 입구와 논골 입구 사이에 위치하여 예전에 물건을 사고파는 저자 거리의 역할을 하던 자리로서 어판장 뒤쪽에 해당한다. 전통적인 장이 아니라 상설시장이었으며, 부식물을 파는 가게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묵호등대마을 논골담길
논골은 묵호항과 인접해 있는 자연부락으로 1941년 8월 11일 묵호항이 개항되고 1963년 6월 8일 캄캄한 자다의 불빛 묵호등대가 세워졌다. 당시 풍어로 호황이던 묵호가 어획량이 급감함으로써 지역경기는 점점 침체되었고 마을 주민들은 좋았던 시절의 묵호를 회상하며 추억을 간직하려고 심혈을 기울여 왔다.
묵호역
거리묵호의 굴다리 쪽 사거리에서 해안도로가 난 남쪽 언덕에 위치한 철도역. 1965년 5월에 인근의 구역(舊驛)에서 이전해 왔다.
묵호항
묵호진동과 발한동 동쪽에 걸쳐 있는 무역항. 예전에는 어항이었으나 1931년에 축항을 하고, 1936년부터 삼척 일대의 무연탄을 실어 내면서부터 크게 팽창하여 1941년 8월에 묵호항으로 개항하였으며 1964년에 무역항이 되었다. 축항 이전에는 해안이 가파른 절벽에 바닷물이 이어져 있어 험한 산등성이를 넘거나 배를 이용해 다니던 곳이었다. 해안을 매립하여 축항한 것이 묵호항인데, 이와 달리 현재의 동해항인 북평항은 파헤쳐서 만든 일명 준설항이라는 점이 대비된다.
발한삼거리
거리묵호에서 강원은행 건물을 사이에 두고 안묵호 쪽으로 나가는 길과 사뭇재 쪽으로 오르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
발한천(發翰川)
느릅재 쪽의 큰바란이에서 발원하여 묵호 시가지를 지나 묵호항으로 흘러가는 하천인데 지금은 거의 대부분 복개되었다.
붉은언덕/ 붉은언데기
묵호역에서 옛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오르면 묵호중학교 입구에 이르는데, 그 언덕 일대를 가리킨다. 옛날 이 언덕 일대가 붉은 진흙땅이어서 생긴 이름이다.
비석거리
붉은언덕의 중심지역으로 이곳에 비석이 있어 생긴 이름이다. 이 비석은 고려 충혜왕 때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낸 삼척 심씨의 시조인 진주군 심동로(眞珠君 沈東老)의 신도비다.
산짓골
논꼴의 서쪽에 있는 골짜기 또는 그곳에 있는 마을을 가리킨다. 옛날 이곳에 제당이 있어 산제를 지낸 데에서 유래한다. 산짓골에는 예전에 당집이 많았으며, 지금도 그때 사용하던 정수(井水)가 그대로 남아 있다.
숯골
관사촌의 끄트머리에 있는 골짜기를 가리킨다.
슬기나무재
당재봉에서 내려오는 산줄기로서 창호초등학교 쪽의 고개를 가리킨다.
쓱밭등/ 쑥밭골
논골 위쪽에 있는데, 창호초등학교 앞에서 바다쪽으로 위치한 곳으로 쑥이 많이 자생하던 장소를 일컫는다. 쑥밭등이 옳은 명칭이나 이곳 일대를 가리키거나 인근의 집들을 통칭하여 쑥밭골로 호칭하기도 한다.
중앙시장
발한삼거리 뒤쪽에 위치한 시장을 가리킨다. 발한동과 묵호 일대의 제일 큰 상설시장이다.
해맞이길
망상동사무소의 북쪽 7번 국도에서부터 오학산을 돌아 창호초등학교 아래쪽을 지나 묵호 등대가 있는 곳까지의 2.9km 길이의 새로 포장한 도로를 말한다. 새천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새 희망과 소원성취를 비는 해맞이의 이미지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해맞이길이라 이름지었다. 이 도로를 일명 신산복도로(新山伏道路)라 하고 산 너머 반대방향에 있는 도로를 구(舊)산복도로라고도 한다.
후리터
묵호항 부두일대를 가리켜 후리 어업을 하던 곳이라 후리터라 하였다.
중앙시장
발한삼거리 뒤쪽에 위치한 시장을 가리킨다. 발한동과 묵호 일대의 제일 큰 상설시장이다.
해맞이길
망상동사무소의 북쪽 7번 국도에서부터 오학산을 돌아 창호초등학교 아래쪽을 지나 묵호 등대가 있는 곳까지의 2.9km 길이의 새로 포장한 도로를 말한다. 새천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새 희망과 소원성취를 비는 해맞이의 이미지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해맞이길이라 이름지었다. 이 도로를 일명 신산복도로(新山伏道路)라 하고 산 너머 반대방향에 있는 도로를 구(舊)산복도로라고도 한다.
후리터
묵호항 부두일대를 가리켜 후리 어업을 하던 곳이라 후리터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