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한 사람이 최고 ......................................................... 마광수
여자는 야한 여자가 아름답고 남자 역시 야한 남자가 아름답다. 그러므로 사랑은 야한 사
랑이 아름답다. 야한 사랑은 곧 천박한 사랑이요, 야한 사랑은 곧 퇴폐적인 사랑이라고
간주한다 해도 하는 수 없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우리를 매혹시키는 주인공들은 거의 다
야한 여자나 야한 남자들이요, 그들이 벌이는 사랑의 행각은 거의가 불륜적(不倫的)이고
퇴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춘희(椿姬)』에 나오는 마르그리트나 『마농레스코』나 『카르멘』의 여주인공은 다
신분이 천한 여자들이고, 그들이 풍기는 이미지는 요염하고 고혹적이면서 퇴폐적이다. 야
한 남자가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여권신장이 이루 어지기 시작한 20세
기 초반부터인데,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나오는 도리언 그레
이나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 나오는 산지기 멜로즈가 야한 남자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흔히들 정신적 사랑이나 고상한 사랑을 가장 숭고한 사랑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
지만 실제로 우리가 미치도록 빠져들게 되는 사랑은 대개가 다 퇴폐적이고 야한, 그리고
육체적 정염에 불타는 사랑인 것이다. 그 까닭은, 문명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은연중 원
시시대의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에 대해 향수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아프리카나 브라질 오지의 원주민들은 벌거벗고 살면서 자신들의 성기나 유방을
알록달록하게 채색하고 다니고, 또 갖가지 장신구들을 주렁주렁 몸에 휘감고 다니는 것
을 볼 수 있다. 그들에게는 예의니 염치니 윤리니 하는 것 따위의 인간의 문화가 만들어낸
정신적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의 야성적 본능을 전혀 부끄러워하
지 않고 드러내 보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극채색의
화장을 하고 현란한 장신구들을 걸친다.
그런데 스스로 현대의 문명인임을 자부하는 우리는, 남자는 화려하게 화장해선 안 되고
여자에게만 화려하게 화장하고 치장할 권리가 부여돼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사실 여
자들조차 마음껏 야하게 본능적으로 멋을 부리지는 못한다. 조금만 그로테스크하게 치장
해도 ‘흉하다’ ‘천박하다’는 소리를 얻어듣게 되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야성적인
성욕과 미적(美的) 본능은 더욱 억눌려 질식할 것 같은 상태가 되었고, 사람들은 겉으로
는 ‘고상한 아름다움’이니 어쩌니 해가며 점잖은 척 행동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야한 사람,
야한 사랑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의 집단무의식은 사회적 윤리의 제약을 덜 받는 허구적 문학작품
을 통해 본능에 솔직한 주인공들을 창조해 낼 것을 요구하게 된다. 또한 남자든 여자든
모든 독자들이 모성(母性)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마음속의 여인상’은 대
개 ‘야한 여자’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이를테면 지배이데올로기에 충실했던 효녀 ‘심청’
보다는, 스스로 천한 기생이 되어 프리 섹스를 즐겼던 ‘황진이’ 같은 여성이 훨씬 매력적
으로 느껴지게 된 것이다. 이런 심리는 ‘마음속의 남성상’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제는
엄격하고 용감한 남성보다는 유연하고 화사한 남성이 더 멋진 남성으로 간주되게 되었
다.
그러므로 이성에게 진정으로 사랑받으려면 스스로 ‘야한 여자’나 ‘야한 남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위선적인 도학군자들이 지껄여대는 거짓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 대개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한 여자나 야한 남자를 볼 때 우선 천하다고 욕부터 하고 본다. 예
컨대 손톱을 길게 길러 새빨간 매니큐어를 바르고 배꼽이 드러나는 상의에 머리를 알록
달록 물들인 여자를 보면 눈살을 찌푸리고, 머리를 길게 기르고 귀걸이, 목걸이까지 한
뒤 노출이 심한 복장을 한 남자를 보면 변태라고 멸시의 눈길을 보낸다. 그러나 그런 ‘점
잖은’ 사람들의 눈동자는 어느새 야한 여자나 야한 남자 쪽을 향해 고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