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가 가장 바쁜 추석 전날이다.
부족했던 잠 충분히 자고 난 다음 점심 먹고 느지막이 오라고 했더니 3시가 지나서 아들 내외가 도착했다.
고요하고 적막한 작은 연못 같은 집안 분위기가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며느리와 나는 나란히 서서 전을 부치고, 남편과 아들은 밖에 내놓았던 큰 화분을 안으로 들여놓는 작업으로 분주하다.
이제야 사람 사는 집안 같다.
아들은 청소기를 돌리고 밀걸레로 마루를 닦는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못 본 아들의 새로운 모습이다.
그동안 공부만 했지 집안일에는 전혀 관심 없던 아들이 장가가더니 참 많이도 변했다.
물티슈로 구석구석 먼지까지 닦아내는 모습에 더 많이 놀랐다.
가르치지 않아도 저리 잘하는구나 싶다.
인간의 적응력은 참 대단하다더니 과연 그렇다.
컴퓨터 키보드 한자 키가 작동하지 않다고 했더니, 아들이 자신의 방에서 새 키보드와 마우스를 꺼내와서 오래 썼던 키보드에는 이물질이 끼어 더 이상 쓰지 못한다며 바꿔주었다.
전 부치기를 마친 며느리가 다용도실의 세탁기를 보고는
"어머니, 이 세탁기 얼마나 오래된 거죠? 모델이 상당히 구형이네요."
큰아들 신혼 때 장만한 건데, 전셋집이 중간에 팔리는 바람에 빌트인이 되어 있는 집으로 이사하면서 우리 집에다 주고 간 것이니 12년이 된 것이다.
그동안 고장도 없이 잘 썼던 고마운 세탁기가 며느리의 한 마디로 갑자기 고물로 전락해버렸다.
"드럼세탁기의 수명은 통돌이보다 짧대요. 12년 되었으면 갈 때가 지났네요. 제가 바꿔드릴게요."
"드럼 세탁기가 한두 푼하는 것도 아닌데..."
"직원 할인 혜택이 있어서 괜찮아요."
아들이 자상하다지만, 이런 데까지 신경을 쓰지 못하는데 며느리가 시원시원하게 미더운 말을 해서 속으로 많이 놀랐다.
며느리는 그 어렵다는 언론고시 패스하고 방송국에서 PD로 근무하다 우리나라 굴지의 S사에서 영상 전문가로 재직 중이다.
월급도 아들보다 많다고 한다.
결혼식 때도 양가 부모들은 한 푼도 쓰지 못하게 하고 둘이서 다 감당했다.
현실적이고 현명해서 40년이 되어가는 헌 아파트를 내주었더니 인터넷 검색으로 일일이 업자를 구해 기둥과 벽만 남기도 모두 뜯어내고 올 수리를 주도한 것도 며느리였다.
수천만 원이 넘게 들었을 텐데도 우리에게 전혀 손을 벌리지 않았다.
더 감동했던 건 큰며느리와 똑같은 반지를 해주겠다고 했더니, 장롱 안에 놓아둘 반지는 필요하지 않다며 둘이서 가는 금반지를 맞추어 끼던 일이다.
이런 며느리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1년 전 결혼식 때부터 기특했던 상념에 잠기던 나에게 며느리는 2차 융단 포화를 터뜨려 더한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어머니 이참에 거실에 벽걸이 텔레비전도 하나 놓으세요."
12년 전에 큰아들이 장만해준 텔레비전은 안방에서 남편 혼자만의 차지라는 걸 감지한 센스쟁이 며느리의 부추김에 나는 커다란 희망에 부풀어 두둥실 구름을 탄 기분이 되었다.
금방 대답을 못하고 어정쩡한 내 표정을 읽은 며느리가
"어머니 걱정 마세요. 들여올 날짜만 정해주시면 오빠와 제가 와서 설치하는 걸 지켜볼게요."
정말이지 나는 두 말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며느리는 척척 알아서 언행이 일치한다.
이번 추석은 이렇게 많은 일들이 꿈결처럼 이루어지려는 계기가 된 셈이다.
살다 보니 이런 꿈같은 일이 현실이 되기도 한다는 걸 알았다.
산다는 건 좋은 거란 노래 가사가 이렇게 마음에 와닿을 줄이야!
첫댓글 글을 읽는 동안에도 감동되는데 옥덕아우님의 행복한 미소가 절로 나오겠다.우리가 큰것을 바라는것이 아니고 며느리의 마음씀씀이에 감동을 받는 힘없는 늙은이 라는것이다.ㅎㅎ
큰며느리 몫까지 하느라고 애쓰는 작은 며느리가 더 기특합니다.
언니 말씀이 맞습니다.
추석 쇠느라 신경 썼더니 늑간신경염이 와서 늑골 근처가 뜨끔거립니다.
행복해 하는 아우님 모습 생각하니 나도 행복해요 건강쌔요
잘하려고 애쓰는 모양이 한없이 사랑스럽네요.
언니 건강 잘 챙기세요.
아우님의 행복한 모습을 행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네요.. 이런 작은 것에 감동하는게 사는게 아닌가요.
맞습니다.
사는 게 별 거 아니고 이런 작은 일에서도 행복을 느끼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