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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FOt3oQ_k008&t=27s
희망봉(喜望峯, Cape of Good Hope)
희망봉의 위치
희망봉의 위치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 주 남서부의 케이프 반도 남단에 있는 암석 곶.
희망봉(Cape of Good Hope)
희망봉의 항공 사진
1488년 포르투갈의 항해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을 확인한 후 포르투갈로 귀항하는 길에
처음으로 이 곶을 발견했다.
한 역사적 자료에 의하면 디아스가 이 곶을 폭풍봉으로 이름붙였던 것을 포르투갈의 주앙 2세가 희망봉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 곶의 발견으로 유럽과 인도를 잇는 항로 개척의 가능성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디아스 자신이 희망봉이라는 이름을 명명했다고 밝히는 사료들도 있다.
험한 날씨와 거친 앞바다로 유명한 이 곶은 인도양에서 흘러온 모잠비크-아굴라스 난류와 남극해에서 오는 벵겔라
한류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풀과 낮은 관목림이 특징적인 식생이며, 이 곶은 반도의 남단을 차지하는
희망봉 자연보호구역(1939)의 일부를 이룬다. 희망봉 동쪽 2㎞ 지점의 포인트 곶에는 등대가 있다.
홍해 지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의 희망봉 발견
바르톨로메우 디아스(Bartolomeu Dias)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의 항해 코스
1487년 8월, 디아스는 무장한 캐러벨(위 사진) 두 척과
보급선 세 척을 이끌고 출항했다.
※ 캐러벨(caravel[kǽrəvèl])은 15세기 포르투갈에서 서아프리카 해안을 탐험하기 위해 개발한
고기동성 소형 범선이다.
삼각돛(라틴 범정)을 달아 속력이 빨랐을 뿐 아니라 역풍을 거슬러 항해할 수 있었다. 15세기 말~16세기 초,
즉 대항해시대 초창기의 포르투갈과 카스티야에서 대양항해에 사용된 주력 선급이었다.
포르투갈을 출발하여 보자도르 곶 등 수많은 곶을 넘어 결국 기니 만에 도착하였고 계속해서 전설의 기독교국을
향해 항해했다. 해안선을 통해 항해하던 그는 강력한 폭풍우를 만났고, 13일 동안 헤매다가 우연히 아프리카
최남단, 현재의 케이프타운의 근처인 희망봉에 유럽인 최초로 도착하였다. 희망봉은 이후 귀환한 디아스의 모험담을 들은 포르투갈 국왕 주앙 2세에 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계속하여 전설의 기독교국을 발견하려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계속해서 북동쪽으로 전진했고, 오늘날 포트엘리자베스가 자리잡은 알고아 만(Algoa Bay)까지
이르렀으나, 그 이상은 오랜 항해로 지친 선원들의 반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포르투갈로 귀환하게 되었다.
디아스는 이후 바스쿠 다 가마의 항해에 조언을 했고 그의 인도 항해용 배의 건조를 감독했지만, 정작 항해에는
동승하지 못했다. 그는 이후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이 지휘하는 선단에서 선장 중 한 명이었다. 1500년에 희망봉 근처에서 폭풍으로 인해 배가 부서지며 바다에 빠져 사망하였다.
희망봉(喜望峯, Cape of Good Hope,
위 사진의 제일 위 바다쪽 돌출부)
본래 이곳에서 폭풍을 만났기 때문에 '폭풍의 곶'이라 이름 지었으나,
소식을 들은 포르투갈 왕이 다른 탐험가들에게 겁을 줄 수 있는 이름이라며 '희망봉'으로 이름을 바꿨다.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의 최남단인 희망봉까지 항해했다. 그때까지 유럽인들은
아프리카가 남쪽으로 끝없이 이어진다고 믿었기에 희망봉 발견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곧장 항해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인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발견에 고무된 유럽 탐험대들이 희망봉 너머로 대거 파견됐고
이는 10년 뒤 인도 항로 발견이란 결실로 돌아온다.
남아공 희망봉, 케이프 포인트, 케이프 반도
케이프타운(Cape Town)
케이프타운(Cape Town)은 희망봉에서 북쪽으로 약 50㎞ 떨어진 케이프 반도 북단에 있다. 시의 본역은 대부분
넓은 평지에 걸쳐 있다. 큰 강이 없어 담수의 수요를 저수지 수계로 충당한다.
석유 정제, 화학제품과 비료 생산, 시멘트 생산, 자동차 조립이 주된 산업이다. 가장 중요한 산업이 선박 수리이며, 세계 최대 규모의 건선거가 있다. 경공업으로는 식품 가공, 포도주 제조, 의류·플라스틱·가죽제품 생산 등이 있다.
관광 산업의 비중도 증대하고 있다.[다음백과]
희망봉(Cape of Good Hope)
희망봉(喜望峰, 영어: Cape of Good Hope)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서양 해변에 있는 암석으로 이루어진
곶이다. 1488년에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발견하여 '폭풍의 곶'(Cabo Tormentoso)이라
명명하였으나, 후에 포르투갈 왕 주앙 2세에 의해 "희망의 곶"으로 개명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위키백과]
희망봉(Cape of Good Hope)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웨스턴케이프 주 남서안에 있는 곶으로 케이프타운
남쪽 48km에 위치해 있다. 일반적으로 희망봉이 아프리카의 최남단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최남서단(最南西端)이다. 최남단 지역은 희망봉에서 동남쪽으로 150km 떨어진 곳에 있는 아굴라스 곶
(Cape Agulhas)이다.
끊임없이 불어오는 적도 이남 아프리카 해안의 남동풍이 희망봉에서부터 잦아들기 시작한다. 그 때문에 1488년
희망봉을 돌아 항해한 것은 포르투갈에 의한 극동 항로 개척에서 심리적으로, 그리고 지리적으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남대서양의 그레이트 케이프들(great capes) 중 하나로서, 희망봉은 오랫동은 선원들에게 있어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이었고, 그래서 일반적으로 The Cape라고 불리었다. 희망봉은 범선(클리퍼)이 극동 지역과
오스트레일리아로 향할 때 이용하는 항해로(클리퍼 루트) 상의 중요한 이정표이다.
희망봉이라는 말은 또한 1652년 개설된 네덜란드 식민지 케이프 콜로니(Cape Colony)를 가리키기도 했으며, 1910년 남아프리카 연방(the Union of South Africa)이 결성되기 직전에는 케이프 주(Cape Province)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위키백과]
희망봉의 역사
서유럽의 변방 국가인 포르투갈은 좁은 국토와 부족한 자원으로 인해 매우 가난했다. 오랜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어 농업생산량은 부족했고 지중해와 북해무역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사방이 막혀있는 지정학적인 이유로 인해
세력과 영토 확장, 대외진출, 무역 등에 있어서 매우 불리했다. 이런 한계의 극복이 절실했던 주앙 1세는 대서양
탐사와 북아프리카 개척을 그 돌파구로 삼았다. 이런 해양탐사 사업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이는 그의 아들 엔히크
왕자였다.
엔히크는 1415년에 세우타를 정복한 후, 1419년에 사그레스 곶에 항해 연구소를 설립했다. 연구소에서는 항해사와 지도 제작자, 천문학자, 조선업자 등 항해 전문가들을 모집하여 해양 탐사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했다. 1419년,
마데이라 제도를 탐사하여 식민지화 하였고, 이후 해양 탐험사적으로 볼 때 큰 성과들도 거두었다. 그러나 해양탐사 사업은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 것에 비해 경제적 실익이 적어 반대가 심했다. 결국 1460년에 엔히크가 사망하면서
사업이 중단되고 말았다.[위키백과]
중단되었던 해양탐사는 주앙 2세에 의해 재개되었다. 그의 지원하에 아프리카 서해안 탐사 사업은 큰 진전을
이루었고, 원양항해에 필요한 정보와 경험이 축적되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1487년 8월에 바르톨로메우 디아스(1451~1500)가 왕명을 받아 5척의 배를 이끌고 리스본항을 출발하였다. 인도를 향한 신항로 개척과 전설상에
존재하는 프레스터 존이 다스리는 나라를 찾아 동맹을 맺는 것이 목표였다. 5개월가량 남하하던 선단은 1488년
1월 6일에 아프리카 남서부 해양에서 엄청난 폭풍을 만난다. 폭풍으로 인해 2주가 넘는 시간동안 표류하며
떠밀리던 배는 간신히 폭풍우를 피해 항해를 이어갔으나 30일 넘게 육지를 발견할 수 없었다.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항해하고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된 디아스는 동북방향으로 기수를 잡아 아프리카 남동해안을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3월 12일에 보에스만강 하구에 정박을 하여 휴식을 취한 뒤에 디아스는 계속 항해하여
인도로 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폭풍에 지치고 시달린 선원들과 지휘관들이 극렬히 반대하며 귀국을 종용했고 폭동을 일으킬 기세였다. 욕심을 접고 귀국길에 오른 선단은 5월경에 '폭풍의 곶'을 발견하였는데 디아스는 이 지역
근해에서 거친 폭풍우를 만나 고생을 심하게 했기 때문에 '폭풍의 곶(Cabo das Tormentas)'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어진 긴 항해 끝에 1488년 12월에 리스본에 귀항하였다. 총 항해 일수는 16개월 17일이었으며 디아스가 발견후 이름 지은 '폭풍의 곶'은 주앙 2세에 의해 '희망봉'이라 재명명되었다.[위키백과]
신항로 개척
희망봉 발견으로 인도로 가는 신항로는 곧 열릴 듯했다. 그러나 1491년 7월 아폰소 왕세자가 낙마사하자, 후계자
문제로 정국이 어수선해졌다. 또한 1492년에 경쟁국인 스페인에 지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후
발생한 영토분쟁으로 해양탐사 사업은 정체되었다. 1494년 6월에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분쟁은 해결되었으나
이듬해 1495년 10월에 국왕 주앙 2세(1455~1495)가 사망함으로 다시 추진력을 잃고 말았다.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
신항로 개척사업은 마누엘 1세에 의해 재추진되었다. 왕명을 받은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는 170명의
선원과 4척의 함선을 이끌고 1497년 7월 8일에 리스본의 벨렝항을 출발하였다. 희망봉을 발견했던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의 조언에 따라 항해한 다 가마는 리스본을 떠난 지 316일(10개월 12일)만인
1498년 5월 20일 인도 캘리컷에 도착하여 신항로 개척사업을 완수했다. 이후 포르투갈은 인도와 향신료 무역을
통해 큰 부를 축적하였고 식민지 사업도 지속적으로 진행하였다. 이로 인해 유럽인들은 대서양 개척과 해상을 통한 동방무역에 점차 관심을 가지게 되는 등 대항해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되었다.[위키백과]
희망봉 의의와 영향
희망봉 발견으로 얻은 포르투갈의 가장 큰 수확은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현실로 다가왔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당대 유럽인들에게 엄청난 의미를 가져다 주었다. 그때까지 유럽의 지리학에서는 아프리카의
남쪽에 또 다른 거대한 대륙이 있고, 이것이 아프리카와 연결되어 있어서 바다를 통해 인도로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설이 유력했다. 그런데 이제 인도까지 가는 바닷길의 가능성을 직접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희망봉 발견은 유럽인들에게 희망이었을 뿐이었지 원래 이곳에 살던 코이산(Khoisan)족 같은
현지인들에게는 불행의 시작이었다. 아시아와 유럽 간 원거리 항해 중에 선원들이 휴식을 취하고 보급품을 충전하는 중간 정박지로서 좋은 여건을 가진 이 지역은 유럽인들의 식민지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또한 네덜란드인,
프랑스계 신교도들(위그노), 독일인, 영국인 등이 들어와 주변 지역으로 팽창해 가면서 전쟁과 약탈, 인종차별의
역사가 전개되었다.[위키백과]
한국어 명칭
한자로는 '希望峯'이 아닌 '喜望峯'이라고 쓴다. 일본에서 처음 이 지명을 번역할 당시 Good Hope를 흔히 사용하는 希望(희망)이 아니라 喜望(기쁜 희망)으로 번역했다는 설이 있으나 자세한 이유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또한
희망봉은 지형상 봉우리가 아니라 곶이지만 봉으로 잘못 번역되어 있다. 중국어로는 '好望角'(좋은 희망 곶)이라고 표기하고 있다.[위키백과]
1. 개요
희망봉(喜望峰, Cape of Good Hope)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위치한 곶으로, 대서양과 인도양의 경계 중
하나이자 수에즈 운하 개통 이전 클리퍼 항로(Clipper Route)에서 케이프타운 중간 기항지의 지리적 표징으로
애용되었던 지형이다.
이름은 1488년 이 곳을 통과한 포르투갈 항해사 바르톨로무에 디아스가 '카부 다 보아 에스페란사(Cabo da Boa Esperança)'라고 한 것을 영어로 번역한 '케이프 오브 굿 호프(Cape of Good Hope)'가 근대에 일본어로
중역되었다가 다시 한국어에 수입된 것인데, 일본 국내에서도 정확히 어떤 문헌 또는 저자가 이 표현을 먼저
썼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반대로 중국어에서는 '호망각(好望角; Hǎowàngjiǎo)'이라 부른다.
2. 특징
세간에는 희망봉이라는 이름의 유명세와 대륙 끝으로 튀어나온 반도와 같은 인상 덕분에
"아프리카의 최남단이 희망봉"이라는 인식이 있으나, 실제 최남단은 아니다. 실제 아프리카의 최남단은 희망봉에서 동남쪽으로 더 내려온 아굴라스 곶(Cape Agulhas)이며, 아굴라스 곶 가운데서도 곶 자체가 아니라
곶 서쪽의 해안 절벽이 최남단이다. 해당 해안가 도로변에는 아프리카 최남단을 기념하는 상징물이 있다.
아굴라스 곶(Cape Agulhas)
대서양(Atlantic Ocean)과 인도양(Indian Ocean)이 만나는 지점으로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이다.
서쪽에서 오는 대서양의 차가운 해류(9~15°C)와 동쪽에서 오는 따뜻한(22~27°C) 인도양의 아굴라스 해류(Agulhas Current)가 만나는 곳으로 해양 동식물이 풍부한 곳이지만
바다가 거칠고 바위가 많아 많은 배(124척)들이 난파당한 곳이라 한다.
그래서 ‘바늘 곶(Cape of Needles)’이라고도 부른다.
아굴라스 등대는(Agulhas Lighthouse)는 1849년 지어진, 남아공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등대로
빛이 57km까지 나간단다.
등대는 작은 박물관과 함께 있으며 71개의 좁은 수직 나무계단으로 등대 위로 올라갈 수도 있는데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 다리가 더 후들거렸다.
입장료 R24
아굴라스 곶이 있는 마을의 이름은 L’Agulhas
아굴라스 곶(Cape Agulhas)
오른쪽은 대서양, 왼쪽은 인도양
아굴라스 등대(Agulhas Lighthouse)
현재 등대는 1962년 보수 한 것.
아굴라스곶 등대
아굴라스곶
아굴라스곶
아굴라스곶
아굴라스곶
코발트와 에메랄드빛 바다, 그 위에 앉아있는 산
그리고 산 위를 휘감고 있는 구름 띠
아름다운 모습에 그저 탄복만 연발할 뿐,
말로써 표현하기 어려운 풍경에 그저 감탄사만 연발할 뿐,
바다, 하늘, 구름과 산
오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예술가의 공들인 작품을 보는 듯하다.
아니, 예술가를 뛰어넘은 조물주의 솜씨인 것 같다.
바닷가에 서있는 희망봉 표지판
아굴라스 곶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의 남동쪽에 있는 곶(岬)으로 지명은 포르투갈 어로 '바늘'이라는 뜻으로,
끝이 뾰족한 암초에서 유래한다.
세간에는 희망봉이라는 이름의 유명세와 대륙 끝으로 튀어나온 반도 덕분에 아프리카의 최남단이 희망봉이라는
인식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하지만 정말 최남단은 동남쪽으로 더 내려온 아굴라스 곶이며
아굴라스 곶 가운데서도 곶 자체가 아니라 곶 서쪽의 해안 절벽이 최남단이라고 한다. 이곳 해안가 도로변에는
아프리카 최남단을 기념하는 상징물이 있다고 한다.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아굴라스곶은
희망봉에서 남동쪽 160km 지점에 있다고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관광
희망봉(喜望峯, Cape of Good Hope)
희망봉은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아굴라스곶의 북서쪽 160km 지점에 있다. 케이프타운에 가까운 케이프반도의 맨 끝이다. 1488년 포르투갈의 항해자 바르톨로무에 디아스가 발견하였으며, 당시에는 '폭풍의 곶
(Cabo Tormentoso)'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후 포르투갈 왕 주앙 2세가 '희망봉(Cabo da Boa Esperança)'
이라고 개칭하였다. 1497년 마누엘 1세의 왕명에 따라 바스쿠 다 가마가 이 곶을 통과하여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였다 한다.
'룩 아웃 포인트(Look out Point)'라는 등대가 있는 전망대로 가면, 반도의 최남단인 케이프포인트
(Cape Point)가 내려다보이며, 희망곶에서는 케이프포인트가 올려다 보인다.
자료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희망봉 [Cape of Good Hope, 喜望峰]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룩 아웃 포인트(Look out Point)' 전망대에서 본 캐이프포인트
희망봉은 항해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고 아프리카의 지리도 아직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던 시절에
'드디어 최남단에 도착했다'고 착각하고 붙인 이름이다. 사실 세계지도를 보면 그렇게 명명한 당시 항해사들의
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럽에서 출발해 장장 1만 km에 달하는 지겹디 지겨운 아프리카 서해안을 지나,
대륙이 끝나고 처음으로 동쪽으로 도는 곳이 희망봉이기 때문. 거기다 항공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돌출된 곶인지라 저 끄트머리에서 배를 꺾으면 지금껏 오던 곳과는 반대 방향으로 바다만 펼쳐진 느낌을 준다. 거기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동쪽을 봐도 다음 곶까지는 바다만 있는지라 여기를 남쪽 끄트머리라고 오해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전 세계 해운업과 해양사에도 중요한 곳이다. 이 곳을 통과하는 클리퍼 항로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수에즈 운하가 봉쇄될 경우 유일한 대체 항로이기 때문이다. 파나마 운하를 가로지르는 경로의 경우 태평양과 대서양을
가로질러야 하는 훨씬 먼 경로인데다가 파나맥스 제한 때문에 통과 가능한 선박도 제한되어있고 통과 시간도 오래 걸리며, 북극항로의 경우 겨울에는 아예 항행이 불가능하며 항행이 가능하더라도 유빙 등이 선박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에 쉽게 택할 수 있는 경로가 아니다.
2021년 3월 수에즈 운하 에버 기븐호 좌초 사고 당시, 일부 선박들이 희망봉을 돌아 아시아 또는 유럽으로 향했다. 수에즈 운하 통과와 비교했을 때 추가 연료 비용은 수에즈 운하 수수료와 비슷해서 큰 차이가 없지만 소요 기간은
1주일 정도 더 소요되었다고 한다. 소말리아 주변 동아프리카 해역이 해적으로 잘 알려져서 그렇지 희망봉 근처에도 해적은 존재하기 때문에 희망봉 항로가 수에즈 항로에 비해 더 안전한 항로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3. 역사
한때는 1488년에 바르톨로무에 디아스가 비(非)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이곳에 처음 도달했다고
알려졌지만, 현대 역사학계에서 제기된 설 중에는 헤로도토스의 『역사, Historia』에 있는 기록에 따라,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네코 2세(Necho II)의 명을 받고 항해에 나선 페니키아인들이 기원전에 이미 도달했다는 설도
있다. 요약하자면, 페니키아 항해사들이 이집트 파라오의 명령을 받아 홍해를 출발하여 시계 방향으로 아프리카
대륙을 돌았다는 것. 헤로도토스의 역사에는 페니키아인들이 아프리카의 해안을 따라 적도를 넘어가니 태양이
북쪽(항해사들의 오른쪽)에 떠있었다고 언급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실제로 남반구에서는 한낮에 태양이 북쪽에 떠있기 때문에 정말로 희망봉을 돌았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아무튼,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오는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He, when he had made an end of digging the canal which leads from the Nile to the Arabian Gulf, sent Phoenicians in ships, charging them to sail on their return voyage past the Pillars of Heracles till they should come into the northern sea and so to Egypt. So the Phoenicians set out from the Red Sea and sailed the southern sea; whenever autumn came they would put in and sow the land, to whatever part of Libya they might come, and there await the harvest; then, having gathered in the crop, they sailed on, so that after two years had passed, it was in the third that they rounded the Pillars of Heracles and came to Egypt. There they said (what some may believe, though I do not) that in sailing round Libya they had the sun on their right hand.
그(네코 2세)가 나일강에서 아라비아만까지 운하를 파는 일을 마쳤을 때, 페니키아인들에게 '헤라클레스의 기둥'과 북해(지중해)를 지나 이집트로 다시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페니키아인들은 홍해를 출발하여 남쪽 바다로 나아갔다. 가을이 오면 그곳이 리비아(아프리카)의 어디가 되었건 정박하여 곡물을 경작하여, 추수하고, 곡식을 비축할 때까지 기다렸다. 이 일을 반복하며 항해를 진행하기를 2년, 드디어 3년째 되던 해에 '허큘레스의 기둥'을
통과하였고, 이집트에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는데(누군가는 믿겠지만, 나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들이 아프리카를 돌면서 항해할 때, 태양이 그들의 오른편에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허큘레스의 기둥'은 지브롤터 해협을 뜻한다고 보는 해석도 있고, 지브롤터 해협 근처에 있던
페니키아인들의 신전의 기둥을 뜻한다고 보는 해석도 있으며, 오늘날의 카나리아 제도를 지칭한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아프리카를 돌고 있을 때, 태양이 그들의 오른쪽에 있었다는 기록은 남반구 방향으로 진출한 다음 아프리카 대륙 연안을 타고 희망봉을 돌아서 다시 올라왔다는 결정적인 단서로 읽을 수 있다. 당대의 사람인 헤로도토스의
천문학적 지식으로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겠지만, 현재의 과학적인 상식으로 보면 매우 정확한 관측이었던 것.
한편 고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기의 그리스인 항해사인 키지코스의 에우독소스는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서 아프리카를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서 인도까지 항해하는 여정에 올랐는데, 이 때 오늘날의 희망봉으로
추정되는 위치 불명의 곶을 발견했다고 기록을 남겨서 이에 대한 진위 여부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어쨌거나, 1488년에 바르톨로무에 디아스가 이곳에 도달하였을 때는 '폭풍의 곶'으로 이름 붙였으나 항해를 지원한 포르투갈 왕실의 조언에 따라 희망봉(Cabo da Boa Esperança)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곳을 지나는 항해자들이 인도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리고 전술했듯이 이곳이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이라고 오해받은 것도 있고, 아프리카 해안의 항해에서 동쪽 방향으로 항해하게 되는 첫 관문이라서, 이런
이름이 붙은 것도 있다. 대항해시대의 유럽 항해사들이 인도로 가기 위한 필수 코스기에 이 지역을 독점하다시피 한 포르투갈이 막대한 이득을 보았다. 이 때문에 스페인에서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게 신항로를 찾으라는 임무를
주기도 했다. 1652년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케이프타운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식민화하였다. 나폴레옹 전쟁
중이던 1806년에 영국이 점거하였으며, 1814년에 네덜란드와의 협정으로 영국령이 되었다. 근대에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어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짧은 항로가 생기자 대부분 시장을 잃었고, 현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이름을 날린다.
2019년에는 수에즈 운하의 통행세가 대폭 인상되고, 아덴 만의 해적들에게 선박이 나포될 우려도 있어서
1600년대처럼 희망봉을 돌아 유럽으로 가는 배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이다. 2021년에는 수에즈 운하 에버 기븐호 좌초 사고 때문에 많은 화물선이 희망봉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택했다.
'푸니쿨러' 트램을 타고 산의 중턱까지 올라가는데 편도 4달러, 왕복 6달러!
출처: 인터넷 사진캡쳐
케이프 포인트 정상 마일 포스트 남극점 6,248km, 파리 9,294km, 뉴욕 12,541km 등
대서양은 옥빛, 인도양은 코발트빛을 띠는 것은 두 바다의 온도차 때문이라고 한다.
Remains of Secret World War 2 Radar Station - 1943
제2차 세계대전의 비밀 레이다 스테이션 - 1943
It was on this site that a newly designed 10 cm Admiralty NT 273 S transmitter/receiver was hurriedly erected in 1943 in response to increased enemy U-boat. (submarine) attacks on allied convoys. This station was developed and manned by the South African Defense Force. Special Signal Services (SSS). Later the foundation was converted into the present lookout.
이 사이트에서 새로 설계된 10cm Admiralty NT 273 S 송신기 / 수신기가 연합군 호송차에 대한 적의 U 보트(잠수함) 공격 증가에 대응하여 1943년에 서둘러 세워졌다. 이 스테이션은 남아프리카 방위군, 특수신호서비스(SSS) 에 의해 개발되고 유인되었다. 나중에 재단은 현재의 전망대로 전환되었다.
케이프타운, 희망봉(남아프리카공화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 국가로 동쪽으로는 인도양, 서쪽으로는 대서양과 접하고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인이 처음 개척하여 이주하였고, 1815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어 지배를 받아오다, 1961년 5월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국토의 면적이 121평방 km로 한반도 보다 5.5배의 넓이이며,
행정수도는 프리토리아, 입법수도는 케이프타운, 사법수도는 블룸폰테인으로 각각 분리되어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식민시대부터 이어진 강력한 인종차별 정책으로 1974년 UN에서 축출되기도 하였으며,
1994년 넬슨 만델라 집권 이후 인종차별 정책이 철폐되어 UN에 복귀할 수 있었다. 다민족 국가로 인구 구성은
흑인(79%), 백인(9.6%), 유색인(8.9%), 인도인/아시아인(2.5%)이다.
케이프타운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아시아를 항해하는 선박의 보급기지로 개척한 케이프타운은,
1869년 스웨즈 운하가 건설되기까지 200여 년 이상 보급기지로서의 역할을 지속해 왔다.
남아공의 시초가 된 곳이라 하여 The Mother City라는 별칭이 붙여졌다. 케이프타운은 산 정상이 평평한
테이블 마운틴(1,078m)과 희망봉(Cape of Good Hope)이 있어 전 세계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도시이다.
나미비아 스와콥문트 웰비스 베이 국제공항에서 케이프타운행 비행기를 탑승하고 있다.
비행기는 39인승으로 지금까지 타 본 국제선 여객기로는 제일 작다. 객실 승무원 1명이며, 간단한 식음료 서비스가 있다.
2시간 걸려 도착한 케이프타운 공항. 만델라 전 대통령 그림과 The Mother City 문구가 보인다.
아침 일찍 호텔에서 나와 시내 산책길에 본 테이블 마운틴. 맑은 날씨에 멋진 모습이 큰 기대감을 갖게 한다.
- 테이블마운틴, 케이프타운 시티 투어
여행팀원 다수는 한국인 현지 가이드가 안내하는 테이블 마운틴과 와이너리를 연계한 투어를 신청하였으나,
우리는 시티 투어 버스를 이용하여 개별 관광을 하기로 하였다. 레드 시티투어 버스는 테이블마운틴을 포함하여
케이프타운 시내 주요 관광명소를 순환하는 노선으로 12개의 정류소가 있으며, 0800시부터 2000시까지
20여 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투어버스는 일일권 티켓을 구입하면 원하는 장소에서 하루종일 승하차가 가능하다.
호텔에서 가까운 5번 정류소(Long Street)까지 도보로 이동하여, 레드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테이블마운틴
케이블카 탑승장으로 올라갔다. 테이블마운틴은 7번 정류소에서 내려, 등산로를 따라 2~3시간 걸어 올라가는
방법과 360도 회전하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방법이 있다. 테이블마운틴은 해양성 기후인 케이프타운의 날씨 때문에 일 년 365일 중 제대로 볼 수 있는 날이 60여 일 정도로 제한된다고 한다. 다행히도 우리가 케이프타운에
도착한 다음날은 날씨가 좋아 테이블마운틴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테이블마운틴 투어 후에는
시티투어 버스를 이용하여 캠스베이 등 케이프타운 해변 명소와 위터프론트, 보캅지구 등을 관광하고 시내 중심가에 있는 호텔(Hollow on the Square)로 도보로 복귀하였다.
레드 시티투어 버스 지도. 버스 티켓은 버스기사에게서 구입이 가능하며, 시내 중심가에 있는 5번 정류소
(Long Street)에 투어 회사 사무실이 있어, 여기서 투어버스와 테이블마운틴 케이블카 티켓을 구입할 수도 있다.
케이프타운 Long Street
시티투어 버스 5번 정류소. 레드버스는 시내 관광, 블루버스는 시 외곽을 순회하는 투어버스이다.
레드 시티투어 버스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조금 지나면 테이블 마운틴이 보인다.
테이블마운틴 케이블카
케이프타운 전경
멀리 보이는 섬이 넬슨 만델라가 투옥되었던 감옥이 있었던 로벤섬
테이블마운틴 정상
남아공 국화 프로테아(King Protea)
테이블마운틴에 사는 바위 너구리(Dassie). 어린이들이 신기한 듯 보고있다.
세계 7대 자연경관 표시판
케이블카 반대쪽 캠스 베이가 내려다 보이는 절벽에서는 암벽등반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테이블마운틴을 내려와 7번 정류소에서 다시 레드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케이프타운 해변을 따라 종점인
워터프론트까지 이동하였다.
캠스 베이에서 잠시 하차
- 워터프론트(Waterfront)
테이블마운틴을 배경으로 각종 식당과 노천 카페, 아쿠아리움, 대형 쇼핑몰, 대관람차, 유람선 선착장, 기념품 가게 등이 있는 대규모 관광단지이자 미항이다.
테이블마운틴을 배경으로
넬슨 만델라와 투투 대주교 등 남아공의 노벨평화상 수상 4인의 조각상
- 보캅지구(Bo-kaap)
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의해 남아프리카에 온 아시아계(인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노예들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마을이다. 각자의 집에 알록달록한 여러 가지 색칠을 하여 관광객들의 사진촬영 장소로 많이 알려져 있다. 위터프론트에서 다시 레드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5번 정류소(Long Street)로 이동후 도보로
이동하였다.
보캅지구. 시내 중심가에서 가까워 접근하기 쉽다.
파란 하늘과 테이블마운틴 그리고 보캅지구의 알록달록한 색조가 이국적인 모습이다.
- 희망봉(Cape of Good Hope) 투어
아프리카 최서남단 희망봉은 케이프타운에서 거리가 있고 대중교통으로는 접근이 쉽지 않아 관광객들이
개별적으로는 접근이 어렵다. 여행사에서 헛 베이 물개섬과 채프먼스 피크 드라이브, 볼더스 펭귄 해변, 희망봉 등을 포함 1일 일정으로 전용버스를 이용하여 관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어제 시티버스로 관광하였던 캠스 베이. 뒤편의 테이블마운틴이 구름에 쌓여 있다. 대행스런(?) 마음이~~~
헛 베이 물개섬 유람선 선착장. 물개 한 마리가 육지로 올라와 있다.
유람선에서 본 구름모자를 쓴 테이블마운틴
물개 섬. 많은 물개들이 있다. 나미비아에서 더 많은 물개들을 보아서인지 감흥은 조금
헛 베이 전망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중 하나인 채프먼스 피크 절벽 해안도로 드라이브 코스
볼더스 해변 펭귄. 2,000여 마리의 펭귄이 있다.
희망봉 등대. 희망봉을 내려다 보는 정상에 등대가 있다.
멀리 보이는 해안 끝이 희망봉. 희망봉 근처에 주차장이 있다.
희망봉 등대에서 인도양 방향. 아프리카 최남단(Southern Tip of Africa)은 여기서 200여 km 떨어져 있다.
희망봉 주변에 사는 원숭이 Baboon(개코 원숭이)
타조
희망봉. 생각보다 너무 작다. 조금은 실망~~~
희망봉 정상에서
케이프타운을 떠나는 날 오전. 안개로 테이블마운틴이 보이지 않는다.
희망봉 투어를 끝으로 23일간 아프리카 7개국 23일 종단 여행을 끝내고 다시 두바이를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이번 아프리카 여행은 세렝게티 대평원과 응고롱고로 분화구, 초베 국립공원 등에서의 많은 야생동물들의 모습과
빅토리아 폭포와 나미브 사막 그리고 테이블마운틴 등 경이로운 자연의 풍광들이 나의 또 하나의 버킷리스트를
완성시켜 주는 기회가 되었다. 여행을 함께 한 나의 동반자와 모든 일행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이제 또 다른
버킷리스트를 꿈꾸어 보자.
옮겨온 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