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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8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이사야 61,9-11 루카 2,41-5
성모님의 마음은 찾는 마음이다
어제 예수 성심 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티 없이 깨끗하신’이란 수식어가 붙습니다.
죄가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원죄까지도 없으시기에 ‘죄에 물들지 않은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죄가 없는 마음이란 어떠한 마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어린이와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를 짓지 않게 만드는 분 곁에 있어야 합니다.
영화 ‘블랙 스완’에서 주인공은 어머니의 뜻을 따라주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여인입니다.
어머니가 자신을 낳기 위해서 발레를 포기하였기에 자신이 어머니의 꿈을 이루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도 누군가와 깨끗하지 못한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집에서 하게 됩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니 어머니가 자신의 침대 옆에 있었습니다.
너무나 화들짝 놀랐습니다.
자신의 모든 행동을 다 본 줄 알았는데, 다행히 어머니는 눈을 감고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밤새 자신의 침대 옆에 있었던 것입니다.
혹시 자신의 행위를 다 보았는지 몰라 주위를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죄를 짓는 꿈을 꾼 것이었습니다.
죄를 짓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죄와 반대되는 뜻을 가진 사람을 멀리해야 합니다.
반대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와 반대되는 뜻을 가진 분을 찾아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부산 외가댁에 처음으로 간 날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일단 어머니와 외가 친척분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투리를 처음 들어보았기 때문입니다.
잘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외삼촌들에게 저를 맡기고 가신다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잘못 들었거니 했는데 다음 날 아침 일어났을 때 어머니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여기저기 어머니를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 외할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어머니는 밑에 층에서 목욕하고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저를 버리고 간 줄 알고 무척 불안했었습니다.
외가댁은 목욕탕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머니를 찾던 제가, 어느 순간부터는 어머니를 더는 찾지 않았습니다.
죄가 커지는 사춘기 때부터였습니다.
어머니가 계시면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도 안 좋은 비디오를 보다가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면 화들짝 놀라 테이프를 빨리 빼곤
하였습니다.
부모의 법이 아니라 내 안의 법을 따를 때는 이렇게 부모를 찾지 않을뿐더러 그분이 함께 있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죄가 커질수록 부모를 찾는 마음이 식어갑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죄와 반대되는 법을 가지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예수님을 잃으셨습니다.
자녀를 잃은 어머니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찢어지듯 아플 것입니다.
자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에너지를 총동원해 자녀를 찾습니다.
이사야서의 이 말씀이 꼭 성모 마리아의 마음과 같을 것입니다.
“밤새도록 당신을 그리는 이 마음, 아침이 되어 당신을 찾는 이 간절한 심정!
당신의 법이 세상에 빛나는 때 세상 주민들은 비로소 정의를 배울 것입니다.”(이사 26,9)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 밤새 찾고, 아침이 되어서도 찾으려는 마음. 이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성모 마리아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와 반대되는 법이고 그 법대로 사는 것이 정의입니다.
오즈의 마법사에 자신에게 없는 심장을 찾겠다는 양철 나무꾼이 있습니다.
왜 심장을 찾으려고 했을까요? 그것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하니 이미 심장이 생긴 것을 알았습니다.
찾으려는 마음이 이미 거룩한 마음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던 헬렌 켈러도 이 진리를 깨닫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햇살을 향해 얼굴을 들어라.
그러면 그림자가 안 보인다.
해바라기가 그렇게 한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은 죄의 어둠에 들지 않습니다.
죄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기를 원하지 않아서 그분의 법만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하느님 나라에 이르게 하는 길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찾고 나니 결국 ‘아버지 집’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물으십니다.
죄에서 구원해 줄 예수님을 찾는 마음만 있다면
이미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한 것이고 또 벗어나고 있는 것이고 어쩌면 이미 아버지의 집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 간절히 찾는 마음이 곧 성모 마리아의 마음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8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축일의 유래: 요한네스 에우데스(Jean Eudes, 1601-1680)는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의 스승이요, 첫 번째 사도로 불리고 있다. 그는 예수 성심 축일을 지내기 20년 전부터 그의 제자들과 함께 이미 2월 8일을 마리아 성심 축일로 지냈다(1643년). 이후 교황 비오 7세는 성모성심을 축일로 지낼 수 있도록 청하는 모든 교구와 수도 단체에 허락하였다.
1942년 교황 비오 12세는 온 세상을 ‘마리아의 무죄한 성심’에 봉헌하면서 전례등급을 올렸고, 날짜를 성모승천 대축일의 제8부인 8월 22일로 고정시켰다. 그러나 로마 전례 개혁은 다시금 지역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기념일로 환원하고, 1996년부터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로 고정시켰다.
축일의 의미: 이 축일은 마리아의 깨끗하고 열절한 사랑의 마음속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현존의 기쁨을 축하하는 것이다. 아울러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마음에 주님이 거주하도록 안배하시어 거룩하게 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우리 자신도 하느님 영광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도록 마리아께 전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과 예수님께 대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이 그 목표로서 우리도 마리아와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복음: 루카 2,41-51: 소년 예수와 성모 마리아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전하는 유일한 자료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순한 유년기의 예수님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것은 파스카 신비를 완성할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일생을 그려내는 루카에게 마리아가 이미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지혜와 파스카의 특징을 드러내는 그리스도론이다. 예수님이 지혜 자체이며, 파스카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 사건의 배경은 구약의 파스카 축일이다. 구약의 파스카는 당시 예루살렘에서 지내기로 되어 있었다. 또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의무적이었는데, 아마 12살이 그 규정 나이였던 것 같다.
성전에서 학자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광경은 구약의 파스카 예식에서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 파스카 예절에 관한 것을 질문하고 가장 연장자가 파스카의 역사와 의미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는 학자들이 질문하고 예수께서 답하시는 것이, 예수께서 신약의 파스카의 주인공임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을 경탄하게 하는 지혜의 스승, 지혜자체로 보인다.
또 파스카적 용어를 통하여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비의 고통과 기쁨을 미리 체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부활사건과 공통점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다”(2,41; 22,8.13), “사흘이라는 시간”(2,46; 24,46),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룰 필요성”(2,49; 24,7)과 “이해하지 못하였다”(2,50; 24,25)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흘이라는 시간 개념은 성서에 자주 나타나는 주제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야 산으로 사흘 길을 걸었다.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에게 선포하기 위해 고래 뱃속에 사흘간 머물렀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사흘간의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 개념은 고통의 최대치를 드러낸다. 사흘이란 의인들의 최대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마리아와 요셉이 사흘간 소년 예수를 찾아 헤맸다는 것은 의인으로서 최대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를 잃어버린 다른 어머니처럼 극한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을 뜻하며, 훗날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의 고통을 미리 겪으셨다는 것을 아울러 미리 보여주고 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전에서 발견하고 꾸짖는 가운데 요셉을 아버지로 언급하는데 대해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언급하고 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 이 말은 예수께서 이미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아들임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51절ㄴ)는 진술은 신앙의 길을 걷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알아듣지 못함’은 지혜의 결핍이 아니라, 하느님께 열려있음, 내맡겨져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는 목동들이 다녀간 이야기에도 나타난다(2,19). 거기에는 이 신비를 간직한 것만이 아니라, 깊은 묵상의 자세를 보여주는 표현으로 “간직하였다”는 말이 덧붙여지고 있다. 또 이 이야기에서는 ‘찾다-발견하다.’는 신앙의 도식을 볼 수 있다. 불 신앙인은 찾아도 얻지 못하지만 신앙인은 찾으면 얻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을 열심히 찾는 마리아의 신앙을 묵상하게 한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또한 마리아의 신앙을 다른 각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리아와 요셉도 예수님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도 너무나 자주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나 홀로 방황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는 그것을 나 홀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나가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마리아는 사흘간의 고통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는다.
이것은 우리도 잘못하여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졌을 때에, 즉시 다른 곳에서 주님을 찾지 말고 하느님의 뜻으로,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으로 다시 돌아갈 때에 비로소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있고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마리아를 따르는 자세이다.
마리아의 신앙을 본받고 따르도록 노력할 때에 우리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을 따라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께 대한 더 완전한 사랑을 드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은총을 구하며 열심히 살아가도록 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강론>
(2024. 6. 8. 토)(루카 2,41-51)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루카 2,41-46).”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루카 2,48)”
1)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자녀의 사랑은 원초적인 본성이고, 그 자체로 순수하고 단순한 것입니다.
그 사랑에 대해서 무슨 복잡한 신학적인 설명이나
성서학적인 해석을 하는 것은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고, 필요하지도 않은 일입니다.
어린 예수님을 잃어버렸을 때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애타게’ 찾아다닌 것은, 사랑했기 때문이고,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과 걱정을 길게 설명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잃었을 때 그렇게 애타게 찾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오늘날에도 그렇게 ‘애타게’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성모 성심 기념일’을 맞아서 우리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어머니의 슬픔과 고통을 묵상하면서 회개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주님을 떠나는 것과 같고, 주님과 성모님 입장에서는 자녀 하나를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애타게’ 우리를 찾으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여러 곳에서 발현하실 때마다 계속 눈물을 흘리시면서 인간들의 회개를 호소하신 것은, 인간들이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사람들 가운데에는 “나는 죄인이 아니다.
나는 잃어버린 자식이 아니다.” 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 입으로 주장하는 것 자체가,
바리사이와 같은 교만이고 위선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교만과 위선도 큰 죄입니다.
성인 성녀들 중에는 “나는 죄인이 아니다.
나는 성인이다.” 라고 말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성인 성녀들은 끊임없이 회개한 분들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주위에도 분명히 주님과 성모님께
큰 기쁨이 되는 훌륭하고 거룩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처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한 점들을 끊임없이 살피면서
회개를 멈추지 않는 분들입니다.
2) 카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창세 4,8), 그들의 어머니인 하와의 심정은 어땠을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크게 겪었을 것입니다.
아벨의 죽음은 당연히 큰 고통과 큰 슬픔이 되었을 것이고, 살인자가 되어서 하느님 앞에서 쫓겨난 카인의 처지도 하와에게는 큰 고통과 큰 슬픔이 되었을 것입니다.
둘 다 하와에게는 사랑하는 아들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형제간의 갈등이라는 점만 보면, 야곱과 에사우의 일은, 카인과 아벨의 일과 비슷합니다.
야곱과 에사우의 어머니 레베카가 야곱에게 한 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레베카는 큰아들 에사우가 한 말을 전해 듣고는, 사람을 보내어 작은아들 야곱을 불러 놓고 그에게 말하였다.
‘얘야, 너의 형 에사우가 너를 죽여서 원한을 풀려고 한다.
그러니 내 아들아, 내 말을 듣고 일어나 하란에 있는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달아나라.
네 형의 분이 풀릴 때까지, 얼마 동안 그분 집에 머물러라.
너에 대한 네 형의 분노가 풀리고, 네가 형에게 한 일을 형이 잊을 때까지만이다.
그러면 내가 사람을 보내어 너를 그곳에서 데려오게 하겠다.
내가 어찌 한날에 너희 둘을 다 잃을 수 있겠느냐?’(창세 27,42-45)”
이 말은, 어머니의 심정과 어머니의 사랑을 잘 나타냅니다.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아들들 중에 누가 더 잘못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둘 다 똑같이 사랑하는 아들들일 뿐이고, 둘 다 똑같이 지켜야 할 아들들일 뿐입니다.
<여기서 둘 다 잃을 수 없다는 말은, 하나라도 살기를 바란다는 뜻이 아니라, 둘 다 살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3) 지금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들을 보면, 카인이 아벨을 죽인 일과도 같고, 에사우가 야곱을 죽이려고 했던 일과도 같습니다.
성모님의 입장에서는 ‘누가 죄인이냐?’는, 또는 ‘누구의 죄가 더 크냐?’는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이 상황 자체가 성모님의 큰 고통일 것이고, 큰 슬픔일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성모님께서는 인류의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계실 것입니다.
<전쟁은 무조건 중단되어야 합니다.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사는 교회는(신앙인들은) 전쟁 종식을 위해서 계속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내 편, 네 편을 가르기만 하고, 누가 더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기만 하면서, 내 편이 아닌 사람들을 전부 다 죽여서 제거해버리면, 참 평화를 누리게 될까?
참 평화를 누리기는커녕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