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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주요 거점을 모두 정복하다
수 11:16-23
16 여호수아가 이같이 그 온 땅 곧 산지와 온 네겝과 고센 온 땅과 평지와 아라바와 이스라엘 산지와 평지를 점령하였으니
17 곧 세일로 올라가는 할락 산에서부터 헤르몬 산 아래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까지라 그들의 왕들을 모두 잡아 쳐죽였으며
18 여호수아가 그 모든 왕들과 싸운 지가 오랫동안이라
19 기브온 주민 히위 족속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고 이스라엘 자손이 싸워서 다 점령하였으니
20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을 진멸하여 바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을 멸하려 하심이었더라
21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들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들의 성읍들을 진멸하여 바쳤으므로
22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는 아낙 사람들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남았더라
23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온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분에 따라 기업으로 주매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수 11:16-23 / [이스라엘군이 점령한 지역] 이렇게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군은 다음과 같은 지역을 점령하였다. 북쪽으로는 산악지대와 남쪽으로는 야산지대, 고센 전지역과 저지대와 아라바와 이스라엘 산지와 저지대까지를 이스라엘군이 점령하였다. 17) 곧 세일로 올라가는 할락산에서 헤르몬산 아래 레바논 골짜기에 있는 바알갓까지 전지역을 이스라엘군이 점령하고 그 지역을 다스리던 여러 왕들을 잡아죽였다. 18)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군이 이 지역을 다스리는 왕들과 싸우기 시작한지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19) 앞서도 이야기하였듯이 기브온에 사는 히위 사람들 이외는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치고 이스라엘군의 공격을 받고 쓰러지지 않은 성읍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 다 이스라엘군과 싸웠으나 한 성읍도 그들을 쓰러뜨린 성읍이 없었다. 오로지 기브온 사람들만이 이스라엘군과 평화조약을 맺어 무사할 수 있었을 뿐이다. 20) 이 성읍들이 이스라엘군을 맞아 싸움을 하러 나왔던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신 까닭이었다. 곧 여러 성읍 사람들은 이스라엘군이 쳐들어온다는 풍문을 듣고 이스라엘군과 평화조약을 맺으려는 마음보다는 전쟁을 벌이려는 급한 마음만 먹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스라엘군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셨던 것처럼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철저하게 그들을 쓸어 버렸다. 21)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군은 또한 아낙 사람이라고 부르는 거인족이 사는 지역으로 쳐들어가 공략하였다. 아낙 사람들은 산악지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 그리고 유다와 이스라엘의 전 산악지대에 살고 있었다. 이스라엘군은 이곳으로 쳐들어가 그들을 쓸어 버렸다. 그들이 살고 있던 성읍을 폐허가 되다시피 만들어 버렸다. 22) 그래서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 남아있던 아낙 사람들 몇을 빼놓고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땅에서 아낙 사람들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군을 이끌고 앞서 말한 전지역을 돌아다니며 점령하였다. 점령한 땅은 이스라엘의 지파 수대로 또 지파별로 땅을 나누어 각각 자기들의 몫으로 차지하게 하였다. 그런 뒤에야 그 땅에서 전쟁이 사라졌다.
본문은 여호수아가 정복한 가나안 지역에 대한 개괄적 설명으로 남부 지역 점령에 대하여 언급하고 북방 지역 점령과 가나안 땅 전체에 대한 정복 전쟁을 요약하며 특히 아낙 자손을 멸절시킨 내용과 그 땅의 분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산지와 평지를 점령하였으니(16-20) 여호수아는 고센, 세일, 헤르몬, 레바논의 험한 산지와 넓은 평지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복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산지는 중앙 산지를 말하고, 그 평지는 중앙 산지로부터 지중해 해안 지역에 이르는 평원을 말합니다. 여호수아가 정복한 땅은 남방 한계와 북방 한계로 나누어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일은 에돔 땅이며 산지입니다(창 32:3). 북방 한계로는 헤르몬 산기슭, 레바논 계곡에 있는 바알갓입니다. 여호수아는 그 온 땅을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실재로 아직 정복되지 않은 땅들도 많습니다(수 13:1; 15:63; 16:10). 이것은 가나안 땅의 주요 성읍들을 점령했기 때문에 그 땅을 다 점령한 것으로 간주한 말일 수 있지만 그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창 15:18-20)을 다 이루셨다는 화법일 수도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루 이틀에 전쟁을 마친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그 모든 왕들과 여러 날 동안 싸워 이긴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데 기브온 거민 히위 사람 외에는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연합군이 없이 단독으로 정복 전쟁을 감행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들을 멸절하고(21-23) 여호수아는 아낙 자손을 멸절하였습니다. 이들은 거대한 체구를 가진 사람들로서 모세가 열두 정탐꾼을 보내었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정탐꾼들이 두려워함으로 가나안 정복을 40년 늦추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크게 두려움에 떨게 했던 그들을 진멸하였습니다. 아낙 사람들을 멸절하고 진멸하여 바쳤다는 용어를 거듭 사용한 것은 그들이 완벽하게 승리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에 사는 모든 아낙 사람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멸절하고 오로지 블레셋 사람들이 사는 가사, 가드, 아스돗에만 약간 남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가나안 정복 전쟁을 끝맺고 가나안 땅의 분배가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적용: 하나님께서는 독주곡을 쓰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위대한 협동자가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 더디 이루어지는 것 같아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결단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과정을 이겨내고 한계를 극복하고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은혜를 누리는 삶이 있기 바랍니다.
< 설 교 >
종전선언
수 11:16-23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드디어 가나안 정복을 마쳤습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완전히 정복하기 위해서는 크게 세 단계를 거쳐야 했습니다.
제1단계는 가나안에 있는 모든 성을 점령하는 것이었고, 제2단계는 각 지파별로 땅의 분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3단계는 땅을 분배받은 각 지파가 자기 지역 내의 가나안 세력을 완전하게 소탕하고 그 땅에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여호수아의 사명은 1단계와 2단계의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었으며, 가나안 북부 지역을 정복 함으로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전쟁은 약 7년간에 걸쳐서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가나안 땅에 대한 종전선언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전 지역의 모든 족속을 남김없어 다 멸했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다만 강력하게 대적할 만한 세력이 모두 제거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지금 이 시점에서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멸하지 않은 것은 그들에게 힘이 부족하거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까닭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에게 가나안 족속들을 단계적으로 쫓아내실 것을 말씀하셨고(출 23:29-30), 또 일시에 가나안 사람들을 다 멸할 경우 전국토가 황폐화되어 무너진 도성이나 농토를 재건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을 아시고 소수의 잔존 세력이 남아 있지만 그럼에도 종전을 하게 하시고 잔존세력은 각 지파별로 점차 멸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스라엘은 훗날 각 지파별로 영토를 분배받은 뒤에 자기 영토 안에 있는 가나안의 잔존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일에 소홀히 함으로써 결국 가나안의 잔존 세력들에게 영향을 받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잃고 그들과 같이 타락하고 맙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각 개인의 신앙에 대한 교훈의 말씀이자 동시에 우리를 대적하는 세상사람들에 대한 교훈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후자에 초점을 맞춰서 말씀을 전합니다.
1. 먼저, 16절 함께 읽습니다.
“여호수아가 이같이 그 온 땅 곧 산지와 온 네겝과 고센 온 땅과 평지와 아라바와 이스라엘 산지와 평지를 점령하였으니”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가나안의 모든 땅을 정복했습니다.
남아 있는 자들은 이스라엘과 화친한 기브온 사람들과 힘과 영향력이 미미한 몇몇 잔존세력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여호수아는 점령한 땅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의 지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 이스라엘의 땅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것이었고, 모세를 통해 거듭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창 13:15, 출 6:8).
그리고 이제 여호수아를 통해 그 약속을 완전하게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여호수아에 이르기까지 그 긴 시간 동안 잠시도 멈춤이 없이 계속 이루어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에 거하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차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자손이 사백 년을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긴 후에야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5:13-16).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그 약속을 신실하게 믿지 못하고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과 믿음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정하신 때에 신실하게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한번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잊어버리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마음대로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라 합당한 때를 기다리시며 그 때가 되었을 때에 약속을 이루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는 약속이 이루어지는 그 기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지고 그 때를 참고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사 7:14, 미 5:2)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약속을 믿고 그리스도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난 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때가 이르자 비로소 그 아들을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습니다(갈 4:4).
그리고 그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약속대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죽으셨습니다.
또한 약속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우리들에게 재림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재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실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판단을 믿고 그 약속들을 이루어 주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이어지는 18절 함께 읽습니다.
“여호수아가 그 모든 왕들과 싸운 지가 오랫동안이라”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과 싸운 기간은 약 7년 정도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7년간의 장기전을 펼친 끝에 가나안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가나안은 악의 상징이자 심판의 대상이었지만 하루아침에 쉽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다가 멸망당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악이 드러났다고 해서 곧바로 그것을 인정하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버털 수 있는 한 끝까지 버티며 성도들을 대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고 의로운 삶을 살 때,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우리와 싸우지도 않고 무너지거나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선한 일을 하셨습니까?
사람이 결코 할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을 얼마나 많이 일으키셨습니까?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그러하신 사역을 모두 다 보고서도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까지도 목격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복음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대적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를 죽이고(행 5:56-60), 야고보 사도도 죽였으며(행 12:1-2), 베드로(행 12:3-4)와 바울도 죽이려고 했습니다(행 23:14).
이처럼 성도들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버틸 수 있는 만큼 버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한번 복음을 전했는데 거절당했다고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절당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이미 승리를 허락하신 적들과의 싸움에서도 오랜 시간 분투했다는 것을 기억하며, 인내하며 오래 참음으로 한 영혼을 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그들을 사랑하심으로 그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늘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20절 함께 읽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을 진멸하여 바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을 멸하려 하심이었더라”
그런데 이 말씀은 마치 가나안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해진 원인이 하나님께 있는 것처럼 읽혀집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우리하나님은 그러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악인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분을 하나님께서 가나안 사람들의 마음을 악하게 하신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악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하나님의 은혜로 다스리지 않으시고 악한대로 그냥 내버려 두신 것을 의미합니다(롬 1:28).
이 세상의 공중권세를 사탄이 쥐고 있기에 사람들은 모두 죄의 덫에 걸려 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시면 그 누구도 죄의 덫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데(엡 2:3), 하나님께서 가나안 사람들의 악이 극에 달해 회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기에 그들은 그냥 악에 거하도록 두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어쩔 수 없는 나약함으로 죄의 길을 걷게 될지라도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면 이에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그 은혜의 부르심에 귀를 막고, 그 은혜의 말씀에 마음을 닫아 버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오늘 본문의 가나안 족속들처럼 우리를 죄 가운데 그대로 내버려 두시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가나안 족속들도 자신들의 죄를 인식하고 회개했다면 여리고성의 기생라합처럼 그들을 구원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자비를 외면하고 멸망의 길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시기시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모든 기도제목은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때에 응답되어짐을 오늘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7년의 전쟁을 통해 가나안을 정복한 것처럼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도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님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들도 인내와 오래 참음으로 기도의 응답을 받으며 한 영혼을 구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게 하여 주옵소서.
전쟁은 그쳤다. 그러나...
수 11:16~23 / 권오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가나안 남부 지역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게 된 가나안 북부 족속들은 하솔왕 야빈을 주축으로 거대한 연합군을 결성하는데, 어떤 학자들은 30만 명의 보병과 1만 명의 기병대, 그리고 2만 대의 전차 정도의 규모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이런 가나안 북부 동맹군들은 “메롬” 물가에 모입니다. 메롬은 '높다'는 뜻을 가진 곳으로 상징적인 의미로는 '의기양양한 위엄'을 뜻하기도 합니다. 북부 가나안 연합군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이만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믿었던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수11:6절 말씀에서 가나안 북부 동맹군을 “넘겨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이 무슨 말씀입니까? 저들의 주권도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 믿음으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군사를 이끌고 메롬을 급습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한 가나안 북부 동맹군들은 혼비백산하며 도망치기 시작했고, 이스라엘 군대는 그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멸하였습니다. 가나안 북부 동맹의 전쟁의 준비는 매우 위대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패배는 너무 빨랐습니다. 그들은 갑자기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보다 이러한 승리가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셨기 때문'(수 11:8절)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기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결코 이렇게 싸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말이 그렇지 7년 동안 31번의 전쟁을 치렀다는 것이 어디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런데 23절 말씀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온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분에 따라 기업으로 주매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전쟁은 그쳤습니다. 그런데 22절을 보면 분명히 전쟁은 그쳤는데 가사, 가드, 아스돗은 남았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사실 이 선언은 종전에 대한 선언이었을 뿐, 진짜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특히 그 가운데 오늘 11장 본문에서 가나안 북부 동맹군을 이끌었던 하솔은 여전히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사사였던 드보라 시대에 철병거 900승을 이끌고 가나안과 싸움을 할 정도로 가나안의 강력한 세력으로 자리하며 이스라엘을 20년 동안 두려움에 떨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끝나지도 않은 전쟁, 다 진멸하고 단 한 명도 살려두지 말라고 하셨던 하나님의 뜻을 마치 다 이루어진 것처럼 선포하고 있는 것일까요? 물론 31명의 왕과 족속을 진멸시킨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7년 동안의 전쟁에 지칠 법한 상황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끝났다고 하기 전에는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끝난 것 같지만, 끝나지 않은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힘겨운 싸움을 다 마친 것 같은데, 또 다시 다가오는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 뿐 입니까? 해결했다고, 이제는 다 됐다고 생각했는데, 다 되기는커녕 더 어려운 일을 만날 때도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우리의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싸움은 끊임없고, 도전도 끊임이 없습니다. 피곤하고, 어렵고 힘겨운 시간들이 계속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가지 중요한 믿음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빌3:12~16절 말씀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러므로...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우리의 영적인 마음에 긴장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삶을 어제와 같이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전쟁은 그쳤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어디에 이르렀든지 끊임없이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승리는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여호수아 11:16-23 / 장유진
“여호수아가 이같이 그 온 땅 곧 산지와 온 네겝과 고센 온 땅과 평지와 아라바와 이스라엘 산지와 평지를 점령하였으니 곧 세일로 올라가는 할락 산에서부터 헤르몬 산 아래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까지라 …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온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분에 따라 기업으로 주매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오늘 본문 중에서 16절과 17절의 앞 부분, 그리고 23절을 다시 한 번 읽어드렸는데요. 우리가 이 말씀들을 그냥 읽으면 마치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전부 점령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의 바로 다음 책인 사사기를 읽을 때, 굉장히 당황하게 됩니다. 사사기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여호수아서와 사사기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여호수아서를 선입견을 가지고 읽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서는 여호수아 시대에 이루어진 가나안 정복전쟁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들은 모두가 다 여호수아서 1장에 나오는 조상들에게 약속한 땅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넘겨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여호수아서를 읽다가 ‘온 땅’이라는 말만 나오면 어떻게 받아들이기가 쉬울까요? ‘아!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전부 차지했구나!’하고 생각하게 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11장 16절과 17절에 나온 모든 지역을 합쳐서 지도에 표시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지도를 띠운다) 이 지도에서 오렌지 색으로 표시된 곳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곳입니다. 그나마도 요단강 동쪽은 모세시대에 점령했으니까 여호수아 시대에 점령된 곳은 바로 요단강 서쪽의 반쪽 지역이었고, 나머지 녹색으로 표시된 지역은 나중에 다윗 시대에 가서야 정복을 끝내게 됩니다. 물론 여호수아가 차지한 지역도 그리 좁은 지역은 아닙니다. 그 지역에 살던 가나안 족속들의 세력으로 보면 그 곳을 다 차지한 일도 정말 대단한 일이었지요. 그렇지만 그래도 그가 가나안 온 땅을 차지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여호수아가 ‘그 온 땅’을 정복했다고 말합니다. 마치 가나안 땅 전부를 차지한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다면 ‘그 온 땅’이라는 말은 정확하게 어떤 뜻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여호수아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점령하도록 맡기신 땅 전부를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본문에서 그들이 그 일을 제대로 잘 감당했다고 평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바라보시는 시각을 하나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우리 세대에 맡기신 일이 있고,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일만을 제대로 해내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 혹은 우리에게 맡기신 일’ 우리는 이것을 흔히 소명이라고 부르는데요. 이 ‘소명’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크게 두 가지로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첫번째는 소명은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소명에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것이지요. 물론 성도 개인이나 교회가 특정한 시대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깨닫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시대를 초월하고 개인의 상황을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모든 교회와 모든 성도들에게 맡기신 소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사는 시대에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과 순결함을 지켜내며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열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믿지 않는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거룩함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소명만큼은 시대가 아무리 변하고 환경이 아무리 달라져도 바뀌지 않는 소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이 소명을 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교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이것을 위해서 헌신하며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 무관심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 전체를 바로 이것을 기준으로 평가하시기 때문입니다.
소명에 반응하는 두번째 방식은 소명이라는 것을 자꾸 어떤 ‘크고 거창한 일’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한 나머지 그 소명을 이루어 갈 때 너무 지나치게 그리고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이 경우가 소명에 무관심한 경우보다 더 위험할 수가 있는데요. 큰 일과 큰 결과만에 집중하는 나머지 거룩하고 순결한 삶,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삶을 향한 부르심이라는 성도와 교회를 향한 가장 근본적인 소명을 등안시한 채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히려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일들이 이런 경우에 더 많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동안 한국교회가 가장 심각하게 탈선한 곳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열정과 열심이 없지 않았습니다. 열정과 열심은 정말 대단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문제는 그 지나친 열정이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겉모습을 중시하는 문화와 맞물리면서 그저 큰 일을 통해서 큰 결과를 크게 만들어 내는 일에만 집중되었고, 그래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무시하는 잘못을 많이 저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나 성도 개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목회자들도 그랬구요. 저는 이 세대가 다 가기 전에 하나님의 소명을 위한 깊은 관심과 헌신도 회복되어야 하겠지만, 소명에 이런 오해와 그릇된 열정이 교정되는 일이 더 시급하게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 세대에는 하나님께서 각 세대에 맡기신 소명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성도 개인에게는 그 사람에게 맡기신 역할이 있습니다. 각 세대와 그 세대에 속한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 일만 충실하게 해 내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열정을 대단하게 발휘해서 우리에게 맡겨지지 않은 일까지 해 내는 것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성도로서의 기본적인 소명에 충실하면서 그 때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우리 몫의 일을 잘 감당하면 그것으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정도 반드시 있어야 하겠지만 반대로 그 열정을 잘 다스리고 조절하는 절제와 지혜도 꼭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제까지 이스라엘이 치러온 모든 전쟁과 그 전쟁에 대한 요약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본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치른 모든 전쟁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의 역할을 해 줍니다. 이미 살펴 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여호수아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합격점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가나안 땅 전부를 차지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자신들에게 맡겨진 그 역할을 충실하게 해 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본문을 통해 우리가 몸된 교회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는 자리에 있고, 마지막에 그 분 앞에서 합격점을 받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교훈을 듣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요약적인 기록이기 때문에 본문 속에 나오는 하나 하나의 언급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선택하여 집어넣은 것들이고 그래서 그만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오늘 우리 삶의 자리에서 영적인 전투를 벌이며 우리 삶의 자리를 약속의 땅으로 만들어 가는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단순한 것들이지만, 그래서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꼭 기억해 놓으셨다가 여러분을 위한 영적 전쟁의 승리의 비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우선 성경은 여호수아의 전쟁이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었다고 밝히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호수아서는 우리에게 모든 전쟁의 이야기들을 시시콜콜하게 다 들려주지 않습니다. 아주 굵직 굵직하고 중요한 전투를, 그것도 굉장히 빠른 템포로 전해 줄 뿐입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들을 읽는 우리는 그 모든 전쟁들이 아주 짧은 기간에 끝난 것으로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여호수아 세대의 사람들에게 그 전쟁은 상당히 긴 전쟁이었습니다. 비록 약간의 탈선은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 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러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는 전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전쟁은 결코 하루 아침에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굵직 굵직한 전쟁들이 끝날 때까지 최소한 5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작은 전쟁들이 계속되었을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 전쟁은 아마도 족히 20년은 넘게 이어진 길고 지루한 전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와서 점령한 땅들은 그렇게 긴 전쟁의 결과물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한 방’을 기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나 복권 사업이 성황을 이루고 있고, 아무리 금지해도 투기와 도박은 막을 길이 없는 것이지요. 성도들이 신앙을 생각할 때도 그런 마음은 있습니다. 한 방에 뭔가 대단한 영적인 결과를 얻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한 방’은 없습니다. 때로는 ‘한 방’에 다 된 듯이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런 것은 절대로 오래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 가고, 그래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 나라를 닮은 그런 곳이 되는 일은 절대로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 속에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삶과 신앙에 대해서 조급해 하면 안됩니다. 조급해 한다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내 인생이 천국과 같아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시간, 수많은 전쟁들을 하나 하나 치러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 하나의 전쟁은 모두 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했을 때만 승리로 이어질 수 있는 그런 전쟁들이었습니다. 전쟁의 규모나 군사력의 유불리함은 승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요. 그렇다면, 이들이 그렇게 오랜 기간동안 계속된 전쟁에서 승리하고 또 승리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들 몫으로 맡기신 ‘온 땅’을 차지하는 일에 성공했다는 것은 결국 그 오랜 기간 동안 그들은 전쟁을 치르는 일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에 헌신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삶과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 속에는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해서 정복해야 할 수많은 ‘가나안 족속’들이 있습니다. 이 가나안 족속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 가고 있지 않은 우리 삶과 인격, 사고방식 그리고 신앙의 부분 부분들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가나안 족속들과 모두 싸워서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 하나 하나를 모두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약속의 땅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온 땅’을 차지하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날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가 싸워야 할 우리의 믿음의 싸움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치렀던 전쟁처럼 오랜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신실함이 가장 중요합니다. 길고 지루해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서 끝까지 싸워내는 변함없는 성품을 갖추는 일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 신실함만이 우리가 변함없이 우리에게 맡겨진 싸움을 싸워내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이스라엘의 전쟁에 대해서 알려주는 두 번째 정보는 그들이 기브온 족속 이외에는 그 어떤 민족과도 화친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머지 모든 곳을 전부 정복했다는 것입니다. 원래 기브온 사람들은 히위족속에 속해 있었습니다. 진멸되어야 할 대상 중 하나였지요. 그런데 이들은 살기 위해서 꾀를 냈고 결국 이스라엘의 교만과 부주의함 덕분에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성 전체가 멸망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은 기브온 족속의 입장에서 보면 천만다행인 일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뼈아픈 실수이자 실패였습니다. 그런데, 다행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다른 족속들과는 화친을 맺지 않았고 그래서 나머지 모든 땅을 진멸하여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수 있고, 또 실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정말 뼈아픈 실패가 되지요. 그런데, 그런 실패가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면 바로 그 부분 만큼은 온전히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면 바로 그 부분 때문에 결국 다른 부분도 다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기브온과는 조금 다르지만 사실 우리의 영적인 실패와 신앙적인 침체는 한 번에 모든 곳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취약한 부분이 무너지면 그게 연쇄적으로 우리 삶과 신앙 전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이런 실수와 범죄가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반복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애써야 합니다.
사실 우리들에게는 저마다 인격적이고 현실적인 부분에서, 그리고 신앙적인 부분에서 자꾸 부주의하게 되고, 더 자주 실패하게 되는 취약점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들의 대부분의 영적인 실패는 바로 이런 부분에서 일어나서 우리의 신앙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에서의 실수와 실패를 줄여가야 합니다. 제 경험으로 보면, 이런 부분에서의 실패를 줄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자신의 취약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 부분이 특히 약하고, 그래서 이 부분에서 자주 실패하고 넘어진다.’라고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그 부분을 놓고 특히 더 간절하게 잊지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또 똑같은 실수를 또 다시 반복할 수 있는 상황을 만났을 때 다시 실패하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그렇게 약한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고 또 그 부분을 보강해 놓아야 그 부분 때문에 우리 삶과 신앙 전체가 흔들리고 무너지는 일을 막아낼 수 있고, 나아가서 우리 삶의 더 넓은 부분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약속의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취약점을 그냥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의 여러분의 삶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변해가는 일이 방해를 받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기브온 족속은 하나님께서 진멸하시기로 했던 사람들이었지만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족속들은 그 결정을 뒤집지 못하고 모두 진멸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불공평한 것 아닙니까? 누구는 살려주고 누구에게는 다시 그런 기회를 주지 않고 말이지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아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멸망당한 족속들에 대해서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을 진멸하여 바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을 멸하려 하심이었더라” 분명히 가나안 일곱 족속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은 진멸이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이스라엘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스스로 돌이켜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첫번째 인물이 누구였지요? 라합이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성이 진멸당할 때, 자기 가족들과 함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여리고성 사람들은 끝까지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들었습니다. 마음이 물같이 녹아있었지만 하나님께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멸망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라합의 자리에 기브온이 들어가고 나머지 여리고성 사람들의 자리에 나머지 가나안 족속들이 들어가면 두 이야기는 완전히 같은 이야기가 됩니다.
오늘 본문이 분명히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신 것이라 그들을 진멸하여 바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 그들을 멸하려 하심이었더라’라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가 이 말씀을 마음을 돌이킬 의지도 있고 또 노력도 한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완악하게 만들어서 그들을 죽이셨다고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기회를 주셨습니다. 라합과 같은 결정을 내리고 기브온과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셨고, 그들의 마음에 그렇게 하라는 신호를 계속해서 보내셨습니다. 사실 여리고성의 멸망은 가장 강력한 사인이었고, 아이성의 진멸도 그런 셈이었지요. 그렇지만 그들은 자기 마음의 완악함을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더 완강하게 고집을 부렸습니다. 이것이 어느 순간 도를 넘어섰고, 그것이 아얘 공격 받기도 전에 이스라엘과 싸우겠다고 세를 규합해서 쳐들어 오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그것 때문에 멸망을 당했던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고린도 후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의 성도들을 향해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라는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살펴 보면서 바울이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해서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경고하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안에서 은혜롭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말씀인데요.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일에 대한 아주 중요한 원리 한 가지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 원리는 바로 어느 시점이 지나가 버리면 하나님께서는 은혜 받을 기회를 거둬가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은혜에 풍성한 하나님은 계속해서 은혜받을 기회를 주시고 또 은혜를 주십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기회와 은혜를 계속무시하고 무관심해 하면 어느 시점부터인가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다고 해도 은혜를 주시지 않는 때가 올 수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는 자신의 마음이 완악해지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잘 돌봐야 합니다. 은혜의 기회를 헛되이 여기지 않도록, 또 주시는 은혜를 가볍게 여기지 않도록 자기 마음을 잘 돌봐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완악해지는 쪽으로 움직이기가 더 쉽고,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두면 스스로 은혜를 받을 기회를 모두 잃어버린 그런 상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는 참 불편한 일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기회는 무한정 계속되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시점이 되면 하나님도 은혜받을 기회를 거둬가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상당기간은 전혀 은혜 없이 살아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있을 때 잘해”라고 말하는데요. 영적으로도 그래야 합니다. 은혜의 기회가 주어질 때, 그래도 우리 마음에 은혜를 사모하고 또 소망하는 마음이 남아있을 때, 그 때 마음도 잘 챙기고 주시는 은혜도 잘 챙겨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이 여호수아의 전쟁에 대해서 제공해 주는 정보는 여호수아가 아낙 자손들을 모두 정복했다는 것입니다. 아낙 자손이 어떤 사람들이지요. 이들은 거인족속들입니다. 창끝이 베짜는 베틀북채 만한 어마 어마한 거구들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다윗과 싸웠던 골리앗이지요. 키가 한 3미터쯤 되는 사람들입니다. 민수기 13장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요. 거기는 처음에 모세가 가나안 땅에 정탐꾼들을 보냈을 때, 그들이 모세에게 돌아와서는 이렇게 보고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거기서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 우리가 기억하는 대로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세월이 바로 이 보고 때문에 시작되었으니 아낙자손들이 느끼게 하는 공포심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아낙 자손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고 결국 그들까지도 모두 진멸했습니다.
아낙자손들 앞에서 절망하며 불평을 늘어놓았던 출애굽 1세대, 그리고 그들과 맞붙어 싸워 완승을 거둔 출애굽 2세대. 이 두 세대 간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1세대는 아낙 자손을 믿음이 없는 눈으로 바라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저 공포의 대상이었고,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적이었으며, 결국 그 앞에서 좌절하며 하나님을 심하게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세대는 똑같은 거인들을 바라 볼 때,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렌즈를 통해, 그렇게 회복된 믿음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좌절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겁먹을 필요도 없었지요. 믿음으로 싸우기만 하면 이기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믿고 있으니 그저 싸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다 입니다. 그래서 그 아낙자손들을 진멸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메뚜기가 거인을 넘어뜨리는 기적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여호수아 세대의 정복전쟁을 요약해 주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진 영적인 싸움에서 이기고 우리의 삶과 삶의 자리를 어떻게 하면 우리를 위한 약속의 땅으로 가꾸어 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모든 세대를 책임질 수 없고, 또 하나님 나라 전체를 책임질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적어도 우리에게 맡겨진 우리 몫의 땅, 그러니까 우리 삶의 자리와 우리 신앙만큼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약속의 땅으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사는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우리의 소명이기도 하고, 나아가서 우리 자신을 위한 가장 복된 일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들을 위한 최고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소명을 마친 그 자리에서 우리 자녀들의 새로운 소명이 시작될테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삶의 구석 구석, 그리고 우리 신앙의 모든 부분을 남김 없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믿음의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여호수아의 전쟁이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긴 시간 동안 반복되는 싸움에서 하나님께 순종하여 승리하였듯이 우리들 또한 끝까지 이 싸움을 싸워내야 합니다.
세상은 분명히 거인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지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 앞에서 기죽지 마십시오. 지레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서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 일하시는 가장 크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긴 싸움과 눈에 보이는 거인같은 상황들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완악해 지지 않도록 잘 지켜 내면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견지하시기 바랍니다. 싸움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반드시 끝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믿음의 싸움을 싸운 성도들에게 너희가 ‘온 땅’을 차지했다고 칭찬해 주시며, 영광스러운 안식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믿음의 싸움을 신실하게 싸워내서 내 삶의 온 땅이 하나님의 땅이 되는 복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사, 가드, 아스돗
여호수아 11:16-23
이스라엘 자손의 땅 안에는 아낙 자손이 하나도 없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약간 남았더라(22절) 여호수아는 가나안 점령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다다랐다. 여리고 전투에서 부터 가나안 남방에서 북방까지,평지에서 산지까지 모든 왕들을 죽이고 가나안땅을 점령했다. 그러나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는 아낙 자손이 약간 남았더라고 성경은 말한다. 이는 가나안 점령의 미완성을 말한다. 다 취한 것으로 여기고싶지만 하나님 앞에서 아낙이 남아 있다는 것은 미완성이다. 약간이라는 단어에 주의해야 한다. 미미하게 보이고, 이스라엘의 가나안에 거주하는 삶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소수일 수 있다. 이스라엘 평화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약간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여호수아의 큰 오점이었다. 역사가 입증하는 그 오점의 이유들을 성경은 낱낱히 밝히고 있다. 가사에 남은 아낙 자손의 후손은 사사기 16장 1절에서 삼손을 보내어 점령해야 하는 대적으로 등장한다. 가사에 내려가 대적자들을 점령하려다 들릴라의 유혹에 빠져 대적들에게 두 눈이 뽑히는 삼손이 되고 만다. 가사는 “강한 곳”이란 의미를 가지는데, 거기에 삼손을 보내었는데, 삼손은 “강한 자”란 의미이다. 강한 곳에 강한 자를 보내어 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성장한 자들이 곧 여호수아 시대에 가사에 약간 남았던 아낙 사람들이었다. 여호수아가 온전히 그들을 쳐서 죽였다고 한다면 삼손이 왜 필요했겠으며, 두 눈이 뽑히는 부끄러움이 왜 일어났겠는가? 오늘 가사의 아낙 자손은 우리가 구원 받은 후에 아직도 즐기고 있는 옛 사람이다. 회개를 통해 옛 사람이 온전히 죽어야 하는데, 약간 남겨 둔 것들이 우리를 파멸로 이끌 수 있다는 교훈이다. 가드가 주는 교훈은 사무엘상 17장 1절이하에 나오는 골리앗이다. 약간 남았던 아낙 자손이 이스라엘에게 선전포고를 하였고, 골리앗을 조석으로 40일 동안 여호와 하나님을 욕하도록 했다. 이 어찌 또한 큰 수치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골리앗을 두려워하여 40일 동안 조석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욕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대응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이었다. 가드에 아낙 자손을 여호수아가 철저히 점령했더라면 어찌 이 수치가 일어나겠는가? 하나님이 다윗을 내 보내어 골리앗과 그에 속한 군사들을 죽이시지 않았다면 그 수치는 이스라엘에게 영원한 부끄러움으로 남을 뻔 하였다. 가드의 약간 남은 아낙은 작은 죄들이 장성하여 우리를 위협하는 무서운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고 말한다. 철저히 회개하지 못한 욕심이라는 아낙이 약간 남아 나중에 자라서 사망으로 우리를 떨어지게 한다. 아스돗은 사무엘상 5장 1절이하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기고 그 빼앗긴 법귀에 아스돗이 이른다. 아스돗은 아낙 자손들의 신당이 있는 곳이다. 법궤를 가져다 그들의 신당에 두려했던 사건이 아스돗에서 벌어졌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법궤를 그들의 신의 부속품으로 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최대의 부끄러움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신당에 두었던 법궤로 인해 아낙 자손들의 신인 다곤상이 목이 부러지고 손이 부러지는 일을 통해 다곤 신의 지배 아래 둘 수 없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치명적인 치욕이었다. 약간 남았던 아낙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항전을 선포하는 교만한 자들로 번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약간 남아 있는 작은 세력들이 나중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도록 그들의 수하에 묶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질에 대한 욕심이 나중에는 우리를 물질을 신으로 삼게하고 물질을 위해 사는 자로 잡아 가둘 수 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먹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교훈을 아스돗이 교훈한다. 약간 남은 아낙이 나에게 없는지 묵상하고 아낙을 향해 선전 포고를 하자. 예수의 이름으로 아낙을 진멸하고 예수 사람이 되자.
여호수아서 연구
수 11:16-23 / 권혁승 교수
전체가 24장으로 이루어진 여호수아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전반부를 이루는 첫 12장은 가나안 입국과 그 땅의 점령 과정을 보여주고, 후반부인 나머지 12장은 점령한 가나안 땅을 지파별로 분배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전반부와 후반부 전체를 통하여 부각된 인물은 여호수아이다. 전반부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며 가나안 정복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여호수아는 후반부에서 점령지역을 지파별로 균등하게 분배하여 정착시키는 조정자로서의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호수아서의 가나안 정복 전쟁은 11장 마지막 부분(11:16-23)과 12장을 통하여 마무리되고 있다. 그 중에서 11장 마지막 부분(11:18-23)은 비교적 장기간 지속되었던 가나안 정복 전쟁에 대한 실제적인 결론이며, 그 뒤를 이어 나오는 12장은 모세와 여호수아가 점령한 왕들이 누구인지를 최종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여기에서 전반부의 실제적 결론에 해당되는 11장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내용이 담겨져 있다. (1) 가나안 점령에 대한 역사적이고도 신학적인 마무리(16-20절), (2) 마지막 남은 적인 아낙자손에 대한 여호수아의 군사적 공격(21-22절), (3) 최종적인 결론(23절)이 그것이다.
그러한 결론적인 언급에는 출애굽 사건을 연상시키는 몇 가지 요소들이 들어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는, 출애굽에서 바로에게 하신 것처럼, 여호와께서 가나안 왕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 것이다(20절). 그 결과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들을 진멸시킬 수가 있었다. 출애굽이나 가나안 정복은 적들과 적당하게 타협하여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았다. 완전 전멸을 통한 출애굽과 가나안입국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이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기브온 거민 히위 사람들과 화친을 맺은 일이다. 그것은 분명히 여호수아가 실수로 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 맺은 화친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의 실수를 받아주시고 기브온 사람들을 전멸시키지 않으셨다. 기브온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여호수아의 실수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여호수아를 속아 넘길 수 있을 만큼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운 기브온 사람들의 지혜로움과 집요함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절명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내다보면서 그 역사를 겸허하게 받아들인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살 길을 스스로 마련한 지혜로운 민족이 되었다.
출애굽과 관련된 또 다른 요소는 아낙자손을 멸절시킨 내용이다(21절). 여호수아가 산지에 살고 있던 아낙자손들을 몰아낸 사건은 가나안 정복을 위한 마지막 군사작전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아낙자손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차지한 땅 안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다만 블레셋 지역인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약간 남아 있는 정도가 되었다. 아낙 자손들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었다. 특히 가나안 정세 파악을 위하여 파송되었던 12명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꾼들이 부정적인 보고를 하게 된 배경에는 아낙자손의 위협이 크게 영향을 끼쳤다(민 13:21-33). 여호수아가 마지막 군사작전으로 아낙자손을 몰아낸 것은 가나안 정복이 출애굽 사건의 마무리였음을 나름대로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곧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국을 40년 이상 지연시키고 그 대신에 광야에서 생활하게 하였던 중요 원인을 제거하게 된 셈이다.
11장의 마지막 절인 23절은 가나안 정복의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곧 여호수아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온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나누어 주었고, 그것으로 그 땅에 전쟁이 그치게 되었다. 이것을 통하여 가나안 정복의 최종적 과제는 땅을 점령하는 것에 있지 않고 오히려 점령한 땅을 지파별로 분배하는 것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호수아서가 균등하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