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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기준으로 도랑에 불과한 개울은 사람 무릎에 닿는 독라 입장에서도 만만했다. 독라의 허벅지밖에 안 오는 잔잔한 개울. 산을 내려가는 길도 그만큼 편안했다.
개울은 숲으로 통했다. 멀리까지 먹이를 구하러 왔던 동료들의 흔적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고, 잎망울이 트기 시작한 나무는 개울을 걷는 독라의 머리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쥐고 흔들면, 바닥에 깔린 그림자 사이사이 수천 개의 빛점도 따라서 흔들린다.
따뜻한 봄. 서늘한 바람.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산새가 지저귀는 나뭇가지 사이로 손끝을 뻗고, 독라의 바로 옆에서 졸졸졸 흐르는 개울은 너무나 투명해 그 속의 송사리는 마치 허공에 떠서 헤엄치는 듯하다.
물고기를 잡아 보려던 독라는 연이은 실패 끝에 포기하고, 대신 나뭇가지에 벌레 몇 마리를 꿰어 뜯어먹으며 숲을 걸었다. 꿈틀대는 자벌레를 입에 밀어 넣고 우물대며 빈 나뭇가지를 개울에 던지자, 퐁 하는 소리와 함께 가라앉다가 다시 떠오르더니 물살에 실려 둥둥 떠내려간다.
인기척도, 포식자도 없다. 들려오는 것은 시냇물 소리와 간간히 들려오는 산새 소리, 그리고 솨-하고 잔가지를 헝클어뜨리는 바람 소리. 독라는 배낭을 머리에 받치고 그늘에 잠시 누워, 마스크를 내리고 얼굴을 간질이는 봄바람을 느꼈다.
"행복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는데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편안함. 눈꺼풀이 기분 좋게 감기고, 가슴과 배에서 따뜻한 기분이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다.
독라는 저도 모르게 이곳에서 유유자적 지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나뭇가지를 얽어 세우고 나뭇잎을 붙여 지은 집. 보드라운 흙에 풀을 깔아 만든 침대와, 구덩이에 가득 들어찬 보존식.
하지만 이윽고 상상은 봄을 지나 여름, 가을, 겨울에 이르렀고, 쏟아지는 눈발과 추위, 굶주림, 포식자...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독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자리를 떨쳐 일어나 다시 길을 나섰다.
"편안함에 빠져 죽는 게 행복일 리 없는데스."
산을 내려갈수록 개울물은 점점 불어났다. 해가 중천을 넘을 때쯤 되니, 허벅지에 닿던 물은 이제 허리까지 올 만큼 깊어져 조그만 계곡을 이루었다. 빨라진 물살이 하얗게 부서지며 돌 위로 떨어진다. 평생 잔잔히 흐르는 개울물만 보다가 처음 목격하는 광경에 독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기한데스..."
졸졸졸 떨어지는 물결에 손을 갖다 대니, 물살이 갈라지며 하얀 물방울이 이리저리 튄다. 문득 느껴지는 목마름에 몸을 앞으로 숙이자,
미끄덩, 풍덩.
"데에에엑!"
이끼가 덮인 채 촉촉히 젖은 바위는 대단히 미끄러웠다. 균형을 잃은 독라는 그대로 미끄러져 물살에 휩쓸려갔다.
"데벳! 덱! 데갹! 어푸! 어푸푸! 데푸! 데푸앗!"
허리밖에 오지 않는 물살은 독라를 떠내려 보낸다기보다는 계곡을 따라 굴려 보냈다. 여기저기 부딪혀 멍투성이가 되어 가며 데굴데굴 구르던 독라는 굵은 나뭇가지를 간신히 붙잡고 물가로 기어올랐다.
"데에에에..."
온몸이 욱신거린다. 배낭은 물을 흠뻑 머금었고, 장로가 챙겨 준 보존식도 젖어 버렸다. 마스크는 벗겨져 저 멀리 떠내려갔고, 나무창은 부러진 채 계곡 한가운데 바위틈에 끼어 있다. 마을에서 챙겨 온 물건들이 순식간에 몽땅 못 쓰게 되었다. 멍하니 주저앉아 있던 독라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남은 것들을 갈무리했다. 물에 젖은 고기는 그 자리에서 꾸역꾸역 먹어버리고, 배낭은 꼭 짜낸 후 물기가 마르도록 잘 펼쳐놓았다. 안에 채워진 털들이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눌러놓기 위해 자갈을 모으는 독라의 눈에 이상한 것이 띄었다. 아까 계곡에서 탈출할 때 붙잡았던 나뭇가지다.
다시 보니 그것은 나뭇가지가 아니었다. 색깔은 군데군데 붉게 얼룩진 보라색이었고 이상하게 매끈매끈했으며, 길이는 독라의 키 몇 배는 되면서 굴곡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이 봤다면, 어느 철없는 사람이 산속에 쓰레기를 버려놨냐고 혀를 찼을 것이다. 좀 더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오래 전 누군가 등산이라도 했다가 지팡이를 버리고 내려갔나 보다, 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그런 것까지 알 리 없는 독라지만, 적어도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이건 자연적인 물건이 아니라 인간의 물건이다. 인간의 집이, 두 번째 무리가 정착했던 곳이 가까이 있다.
불길한 기분이 엄습한다. 온몸의 피부가 오톨도톨해지고 속이 쓰려오기 시작한다. 심장이 오그라들어 목구멍으로 밀려 올라오는 듯하다.
"닌겐."
독라가 중얼거렸다.
음절 하나하나가 천근같이 무겁다. 본 적도 없고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지만, 그 이름을 입 밖에 내는 것만으로도 공포가 온 몸을 조여 온다.
바람보다 빨리 달리고, 새보다도 높이 날고, 돌을 부수고, 땅을 가르는 인간. 그런 인간에게 접근해야 한다. 인간의 집에 들어가야 한다.
온몸이 후들거리고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오른손이 왠지 자꾸만 입가로 올라가려고 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마을로 도망치고 싶다. 도망쳐야 한다. 도망쳐야 한다. 도망쳐야 한다. 도망쳐야...
독라는 그대로 주저앉아 주먹을 움켜쥔 채 눈을 질끈 감고 숨을 몰아쉬며 머릿속으로 되뇌였다.
도망치면 안 돼. 도망치면 안돼. 도망치면 안 돼. 도망치면 안 돼. 도망치면 안 돼. 도망치면...
독라는 끊임없이 뇌까렸다. 모든 감각이 갑자기 희미해지더니 별안간 멈추고, 전부 어두운 의식 저 편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희미해지는 의식 너머, 어느새 독라는 캄캄한 공간에 있었다.
한 점의 빛도 없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천장도 없고, 바닥도 없고, 덥지도, 춥지도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끝없는 공간 가운데 혼자밖에 없었지만, 어쩐지 독라는 한없이 편안하고 안전한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 영원히 머무르고만 싶다. 독라는 한참을 정처 없이 걸었다. 어딜 가도 빛 한 점 없이 투명한 어둠뿐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 곳에 머무를 수는 없다. 독라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랫마을을 찾아야 하고, 다른 마을을 찾아야 하고, 무엇보다 독라는 행복을 찾아야만 했다. 결심을 굳힌 독라는 유혹을 떨쳐내고 눈을 떴다.
독라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문 뒤였다. 과도한 스트레스에 위석이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의식이 차단된 것이었지만, 독라가 그것을 알 리 없었다. 어리둥절한 채 주위를 둘러보던 독라는 이윽고 펼쳐놓았던 배낭을 황급히 찾았지만, 푹신하던 터럭은 이미 전부 바람결에 날아가고 녹색 천 조각만 자갈에 눌려 나부끼고 있을 뿐이었다.
밤바람이 불어와 점점 으슬으슬해진다. 바람이 덜 닿는 바위틈에 몸을 바싹 붙이고 넝마를 덮자, 굳어가던 몸이 그나마 한결 따뜻해졌다.
"머리칼과 옷이 있었다면 몸이 마르지 않아 얼어 죽었을 지도 모르는데스."
독라는 스스로를 위로하듯 중얼대며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피곤에 절어 죽은 듯 잠들어 있는 독라의 눈꺼풀을 한낮의 태양이 쪼아댄다. 부스스 일어남과 동시에 허기와 변의를 동시에 느낀 독라는 널찍한 바위 위에 기어올라 엉덩이를 쭉 빼고 힘을 주었다.
뿌직뿌직뿌직...
뱃속을 비우고 녹색 똥더미 옆에 퍼질러 앉은 독라는 속에서 나온 것을 다시 속으로 되돌려 보내기 시작했다. 아리고 떫은 그 맛은 평생을 먹어도 맛있다고 느껴지지는 않지만, 익숙해지면 목구멍에 그럭저럭 쑤셔 넣을 정도는 되었다.
바닥과 손에 묻은 것까지 싹싹 핥아먹은 독라는 바위를 기어내려 냇물에 엉덩이를 씻고, 팬티 한 장과 넝마 한 장만 걸친 채 길을 나섰다.
산을 걸어 내려가기를 계속해 어느덧 다시 늦은 오후, 독라는 자신이 걷는 길이 어딘지 이상함을 눈치 챘다. 우거진 수풀 가운데, 독라가 딛는 땅만 풀 한포기 없이 다져진 흙바닥이었다. 누군가가 꾸준히 밟고 다녀 만들어진 것이 분명한 이 길을 독라는 저도 모르게 따라 걷고 있었다. 뭔가 부자연스럽다. 동물이 다닌 길 같지는 않다. 자연 속에 이렇게 부자연스러운 흔적을 남기는 존재라고는...
인간.
여지껏 애써 외면하던 두 글자가 다시 머릿속에 불타는 낙인처럼 떠올라 고동치기 시작했다. 독라는 문득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그러자 멀지 않은 거리에 보였다.
인간의 집이.
직각과 네모로 이루어진 인간의 기괴한 집은 노을빛을 받고 소름끼치는 색깔로 빛났다. 그리고 그 너머, 먼 곳에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다른 집들이 보였다. 인간의 마을이다.
거대한 암석 같은 인간의 집은 그 자체로 요새였다. 아무리 큰비가 내리고 큰바람이 불어도 미동도 하지 않을 압도적인 요새. 수십 년 간 파내려간 독라의 마을은 이에 비하면 거적때기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사실에, 자연을 넘어선 인간의 힘에, 독라는 다시금 공포로 전율했다.
머릿속이 하얘진다. 다리가 후들대고 시야가 뒤흔들린다. 그에 비해 인간의 집은 너무나 차분하게, 천년 묵은 바위처럼 미동도 않고 서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독라를 미치게 했다. 저 거대한 물체가 나를 집어삼킬 것이다. 당장이라도 도망가야 한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독라는 이미 느꼈기 때문이다.
저곳에서 풍겨오는 강렬한 냄새.
실장석의 냄새. 동족의 냄새를.
저곳에 동족이 살아 있다. 하지만 어째서? 아랫마을은 멸망한 것이 아니었나? 혹시 아랫마을이 아니라 다른 실장석인건가? 그렇다면 아랫마을은 어떻게 된 건가? 아니, 저 집이 아랫마을이 정착했다는 곳이 맞긴 맞는 건가?
무수한 의문이 떠올랐지만 저곳에 들어가기 전에는 어떤 대답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 호기심이, 해답에 대한 갈망이 독라를 한 걸음 한 걸음, 지옥의 문처럼 붉게 빛나는 인간의 집을 향해 홀린 듯이 나아가게 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인간의 집은 점점 커져만 갔고, 멀리서는 미처 보지 못했던 장애물이 독라의 앞을 가로막았다. 담벼락이다.
야트막한 담장이었지만 실장석은 죽었다 깨어나도 넘을 수 없는 장벽. 독라는 들어갈 구멍을 찾으며 담벼락 주위를 빙빙 돌았고, 이윽고 대문을 발견했다. 운 좋게도 대문은 빼꼼 열려 있었지만, 성체 실장석이 지나갈 정도는 아니었다.
문을 열 줄 모르는, 아니 문이 뭔지 모르는 독라는 좁은 틈바구니를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했다. 이곳이 인간의 집인 건 확실하다. 이곳으로 인간이 드나드는 것도 확실한 것 같다. 하지만 실장석도 통과할 수 없는 좁은 틈을 인간이 어떻게 지나간단 말일까?
한참 동안 생각하던 독라는 문을 슬쩍 밀어 보았다. 문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양손을 대고 더 강하게 밀어 보았다. 여전히 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독라는 숨을 들이쉰 뒤,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문을 힘껏 밀어보았다. 거대한 문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스르륵 열린다. 조심스럽게 틈새를 통과하는 독라. 그 순간,
"컹컹컹컹! 컹컹컹컹컹!“
독라를 맞이한 것은 코앞에서 딱딱대며 부딪는 수십 개의 이빨이었다. 익숙한 녹색 천조각과 갈색 터럭이 끼어 있는 주둥이가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며 달려들다가, 독라의 눈앞에서 별안간 탁 멈추었다. 정신이 멍멍하고 어질어질해진다. 독라는 저도 모르게 팬티를 부풀리며 뒤로 주저앉았다. 머릿속을 찢는 듯한 울음소리에 독라의 귓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팽팽한 목줄을 끊어낼 듯 땅을 미친 듯이 긁으며 날뛰는 맹견에게 압도된 독라는, 한 손에 막걸리 병을 들고 쿵쾅대며 뛰쳐나오는 집주인을 알아채지 못했다.
"딸꾹, 저눔의 개새끼가 미칬나, 와 갑자기 짖고 지랄이고?"
"컹컹컹! 컹컹컹컹!"
"잉? 이 참피 아이가? 야가 우째 기어나왔노?"
등 뒤에서 들려오는 걸걸한 목소리에 얼어붙기도 전에, 우악스러운 손가락이 독라를 낚아채 들어올렸다. 순식간에 몸이 솟구쳐 아찔한 높이로 가볍게 올라간다.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한 쌍의 거대한 눈이 독라의 적록색 안구와 마주쳤다.
시야를 가득 메운 얼굴
희번득이는 두 눈
구덩이 같은 입 속에서 꿈틀대는 혀
하얀 머리카락
시뻘건 피부
흉곽을 울리는 목소리
온몸을 휘감은 나무뿌리같은 손가락
독라는 인간을 마주하고 있었다.
"데데데데데데데"
"야는 와 홀딱 벗고있노? 마, 니, 꺼윽, 즈 똥구딩이에 사는놈 아이가? 니 우째 기어나왔노?"
"데데데데"
"야가 자꾸 뭐라 씨부리쌋노? 댔다, 마. 니 기어나올 생각 말고 내일까지만 얌전히 있으라잉."
"데데데데데데"
남자는 독라의 넝마와 팬티를 휙 벗겨다 던졌다. 짖어대던 개가 넝마에 냉큼 달려들어 조각조각 물어뜯기 시작한다, 한 손으로 독라를 가볍게 들고, 상상도 못 할 속도로 인간은 어디론가 걸어갔다. 끼익 하는 마찰음이 들리고, 몸뚱이가 아래로 던져지는 것을 느끼며 독라는 다시금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뜬 독라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사방이 캄캄하다. 잠시 후 달빛에 눈이 익숙해지자, 자신이 깊고 넓은 구덩이 안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방이 똥냄새로 진동하는 구덩이는 사람 가슴까지 오는 깊이었고, 안에서 수평으로 파 들어가 입구에 비해 널찍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수십 개의 적록색 구슬이 달빛에 반짝인다.
"여기가 어디인데스..."
독라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다리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도로 주저앉았다. 구덩이로 떨어질 때 부러졌는지, 두 정강이가 시퍼렇게 퉁퉁 부어 있었다. 재생되려면 아침은 되어야 할 것이다.
할 수 없이 독라는 그대로 주저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어쩌다 이곳에 있게 되었는가. 가만히 앉아 골똘히 생각하자 기억이 차츰 돌아오기 시작했다. 동족의 냄새를 쫓아 인간의 집에 들어왔고, 인간에게 잡혔다. 인간이 뭐라고 말을 했는데... 내일까지 기다리라고? 두려움에 떠느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독라는 입구를 향해 외쳤다.
"밖에 누구 없는데스까!"
아무 대답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데스까!"
밖에서 데샤앗 하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의 적록색 눈들이 재빠르게 사라진다.
"노예가 오밤중에 왜 시끄럽게 지랄인데샤! 운치나 처먹고 닥치는데스!"
입구를 통해 동그랗게 보이는 밤하늘 귀퉁이에서 주름지고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이 보이더니, 지저분한 엉덩이가 쑥 내밀어져 독라의 얼굴을 향해 똥을 푸다닥 푸짐하게 쏟아냈다. 재빨리 옆으로 굴러 녹색 폭포를 피한 독라의 옆에 똥이 쏟아져 사방으로 튀었다.
"와타시의 고귀한 운치나 먹으라는데스! 데프프.“
온 사방이 이미 똥으로 범벅인지라, 바닥에서 구른 독라의 몸은 똥을 피하려는 노력이 무색하게 더러운 녹색으로 칠해졌다. 어둠 속에서 적록의 눈들이 다시 하나 둘 나타나더니, 갓 싸낸 뜨끈한 똥무더기를 향해 꾸물꾸물 몰려와 고개를 처박고 게걸스럽게 삼키기 시작했다.
입구에서 쏟아지는 달빛에 비친 그것들의 모습은 모두 피둥피둥한 독라 실장석이었다. 경쟁에서 밀려나 울부짖는 녀석, 뭉툭한 양손에 똥을 듬뿍 묻히고는 꿀을 찍어먹는 곰돌이 푸처럼 쪽쪽 빨아먹는 녀석, 양 눈에 녹색 똥이 칠해져 요동치는 배를 부여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 입에 똥을 쓸어 넣는 녀석. 수많은 독라들이 벌레 떼처럼 모여들어, 갓 싸낸 똥덩이를 입에 넣으려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먹으라고 준 운치니까 먹어도 되겠지. 독라는 손가락 끝으로 똥을 살짝 찍어 맛봤다. 잘 먹고 싼 똥인 듯 맛이 달짝지근하고 그럭저럭 먹을 만 했다. 색깔도 연녹색인 것으로 보아 똥을 먹고 다시 싼 똥이 아니라 밥을 먹고 싼 첫 똥인 모양이다.
'들실장은 독라에게 운치를 던지고 노예로 삼으려고 하는데스.‘
독라는 장로의 말을 떠올렸다. 노예가 뭔지는 독라도 알았다. 독라의 마을에서는 가끔씩 일손이 모자랄 때 분충이 생기면, 죽이기 전에 노예로 만들었다. 살려두면 골칫거리가 될 수 있으므로 하루 종일 부려먹고 저녁이 되면 죽였다. 그런 일용직 소모품인 노예에게 이렇게 귀한 식량인 똥을 퍼 준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저 위의 실장석들은 들실장이 아닌건가? 들실장이 아니라면 혹시 아랫마을이 망하지 않고...
골똘히 생각하던 독라는 자신의 옆에 아귀처럼 모여든 살찐 독라들을 쳐다봤다. 방금 쏟아진 똥은 삽시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식사를 못 한 한 놈이 발광하여 뱃살을 흔들며, 다 삭아 없어진 이빨로 독라를 물어뜯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랫마을이라면 양손에 있어야 할 손가락은커녕 지성의 편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아까 굴 밖에 있던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고귀한 어쩌고 하는 말투와 천박한 얼굴, 펑퍼짐한 엉덩이만 봐도 어지간한 분충임이 확실하다. 이런 열등한 무리가 아랫마을일 리 없다.
독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신에게 뭉툭한 이빨을 박아 넣으려고 애쓰는 녀석의 머리를 따고 미끈거리는 뇌를 파먹기 시작했다. 꿈틀대는 시체의 코에서 피 섞인 초록색 거품이 뿜어져 나온다. 그 광경을 본 다른 독라들이 데샤아악 하며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쌍의 눈이 있었다.
"오마에는 누구인데스까?"
나이 들어 보이는 실장석 하나가 달빛 속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다른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피둥피둥했지만, 덩치는 훨씬 커서 독라와 맞먹을 정도다. 눈빛은 흐릿했지만 이성의 빛이 분명히 남아 있었고,
그리고 양손에는 다섯개의 손가락이 달려 있었다.
독라는 우물대던 입을 멈추었다. 나이든 실장석도 독라의 손가락을 알아보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마에... 혹시 윗마을에서 내려온 데스까...?"
"...그런데스.“
질문을 던진 실장석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헤 벌린 채 소리 없는 눈물만을 줄줄 흘렸다.
"와타시는 아랫마을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기 위해 내려온데스. 대답할 수 있는데스까?"
"..."
"오마에 말고 살아남은 실장석이 있는데스까? 아랫마을은 어떻게 된 데스까?"
"..."
나이 든 실장석은 대답이 없었다. 독라는 더 이상의 질문을 멈추고, 펑펑 울고 있는 실장석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울음을 그친 실장석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오마에가 찾는 답은 와타시에게 있는데스. 와타시는 아랫마을이 어떻게 되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스. 왜냐하면..."
이어지는 말을 들은 독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랫마을은 바로 와타시가 세운 마을이기 때문인데스.“
실장석은 늙지 않는다. 세포의 재생력이 떨어지고 기능이 퇴화하는 것이 노화의 원인임을 생각하면, 재생력이 무한한 실장석의 수명 또한 무한함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충분한 먹이를 공급받는 사육실장의 얘기일 뿐. 실장석이 육체적, 심리적 손상을 받았을 때 이를 회복하기 위한 에너지가 부족하면, 실장석의 몸은 그만큼의 에너지를 위석에서 충당한다. 잉여 에너지를 보충 받지 못하면 위석은 점점 축나들고, 위석이 축난 만큼 실장석은 늙는다.
야생의 실장석에게 있어 매일매일 양껏 먹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실장석의 대사량에 비해 섭취하는 에너지는 턱없이 부족하고, 이를 메우기 위해 위석은 매일 에너지를 뽑힌다. 누적되는 손실로 모든 에너지가 고갈되어 위석이 파괴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고작해야 수 년. 크게 다쳐 재생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수명은 여기서 더 깎인다.
그런데 지금 독라의 눈앞에는 수 세대, 십 수 년을 살아왔다는 실장석이 서 있다.
"다시 한번 말해보는데스."
"...와타시가 아랫마을을 세운 길실장인데스. 아랫마을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장로. 아랫마을의 시작과 끝을 지켜본 것이 바로 와타시인데스."
"산 아래로 무리를 이끌고 떠난게 오마에라는 말인데스까?"
"와타시가 맞는데스."
"닌겐의 곁에 정착한 것도 오마에의 결정이었다는데스까?"
"와타시의 결정이었던데스."
"와타시의 마을로 길실장을 올려보낸 것도 오마에인데스까?"
"와타시의 장녀를 올려 보낸 것 또한 와타시인데스."
독라는 멈칫했다. 자식을 철저히 남으로 여기도록 교육받은 독라에게, '나의 장녀'라는 말의 어감은 어딘지 모를 이질감으로 다가왔다.
"그렇다면 아랫마을의 소식이 끊긴 건 무엇 때문이었던데스까?"
"그건..."
늙은 실장석은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더니,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며 공허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독라의 마음을 긁는 이질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누가 아랫마을을 망하게 한 데스까? 아랫마을이 실각한 이유가 무엇인데스까?"
독라의 재촉에 아랫마을 장로는 대답 없이 쓴웃음만을 지었다. 이질감은 계속 커져 의심이 되었고, 다급해진 독라는 재차 물었다.
"대답하란데스!"
"...와타시가 원인인 데스. 모두 와타시의 책임인데스."
독라는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가 장로를 바닥에 쓰러뜨리고는, 어깨를 잡고 흔들며 소리쳤다.
"말 돌리지 마는데스! 아랫마을의 실장석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냐는 말인데샤!"
'미친 노예가 밤중에 시끄럽게 자꾸 뭐라고 쫑알대는데샤! 내일 아침에 자판기로 만들어버리는데스!'
천장 너머에서 광분한 실장석의 고함이 들려왔다. 장로는 땅에 누운 채 입을 헤 벌리고, 텅 빈 눈으로 천장만을 쳐다봤다.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되는 끔찍한 기분이, 독라의 등골을 타고 기어올라 온몸에 퍼져나갔다.
"와타시의... 마을은... 사라진 것이 아닌데스..."
장로가 건조한 목소리로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여기 이곳... 그리고 저 땅 위... 오마에는 이미... 아랫마을에 와 있는데스."
장로의 어깨를 부여잡던 독라의 손이 탁 풀렸다. 맥이 풀리고 별안간 졸음이 밀려온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졸리다. 자고 싶다.
독라는 그 자리에 그대로 픽 쓰러져 잠들었다. 한동안 가만히 누워 있던 장로는 독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구석으로 끌고 가 눕혀 주었다.
악머구리같이 떠드는 실장석의 울음소리에 독라는 잠에서 깨어났다. 구덩이 안으로 흘러드는 밝은 햇빛에 잠시 눈을 찌푸렸지만 곧 익숙해졌고, 이윽고 독라의 위치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보이는 입구와 그 주변을 빙 둘러싼 성난 실장석들, 그리고 그 아래에 서서 똥을 맞고 있는 장로의 모습이 보였다.
"어젯밤 시끄럽게 떠든 노예를 당장 끌고 나오라는데샤!"
"감히 와타시의 단잠을 방해하다니 총구부터 아가리까지 찢어 죽여야 하는데샤! 방해하면 오마에부터 죽여버리는데스!"
"제발 진정하시는데스... 어제 날뛴 실장은 갑자기 정신이 나간 독라노예였던데스. 와타시가 저렇게 손을 봐줬으니 그만 노여움을 푸시는데스."
장로는 어제 독라가 잡아먹은 실장석의 시체를 가리키며 간청했지만, 성난 실장석들은 더욱 날뛸 뿐이었다.
"데샤앗! 감히 와타시의 노예를 오마에가 죽인데스!"
"독라를 죽이는건 와타시의 특권인데스! 오마에, 간이 배 밖으로 나온데스? 목숨으로 사죄하는데샤!"
장로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와타시의 짧은 생각을 사과하는데스. 하지만 오늘은 닌겐들이 아나타상들을 모셔가는 기쁜 날 아닌데스까? 고귀한 아나타상들의 은혜로 너그럽게 용서해주길 바라는데스."
시뻘겋게 물들었던 실장석들의 얼굴이 눈 녹듯 풀렸다.
"데프프, 그러고 보니 그런데스. 닌겐노예들이 와타시를 모시러 오는 날이 바로 오늘인데스."
"세레브한 실장생이 기다리는 와타시에 비해 저 독라는 너무나도 초라한데스. 데퍄퍄! 저런 건 죽일 가치도 없는데스.“
분충들이 떠나간 것을 확인하고 우두머리는 한숨을 내쉬며 독라에게 다가갔다.
독라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닌겐이 노예가 되어 저것들을 데려간다니, 대체 무슨 소리인데스까?"
장로는 깊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저 자들은 닌겐의 상품인데스."
독라는 눈을 꿈뻑였다.
"상품이 뭐인데스까?"
"저 자들은 다른 닌겐에게 파는 실장석이라는 뜻인데스."
"...판다는 건 무슨 뜻인데스까?
우두머리는 거래와 시장의 개념을 짧게 설명해 주었다. 독라는 경제의 개념을 단박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저 실장석들이 인간에게 사육되고, 인간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독라의 마을에서 부렸던 노예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남을 위해 존재하는 삶의 끝은 좋지 않은 법이다.
"오늘 저녁이 되면 닌겐이 와서 저 자들을 상자에 쓸어 담는데스. 상자에 담긴 실장석들은 저 멀리 어디론가 실려가는데스."
"실려 간 자들은 어떻게 되는데스까?"
"먹히는데스.“
장로는 간단하게 말했다.
놀랄 것 없다. 세상 모든 동물은 먹고 먹힌다. 어젯밤 독라가 뜯어먹은 실장석의 잔해가 구석에서 냄새를 풍기며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강한 인간이 약한 실장석을 잡아먹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독라는 이 모든 일에 대한 원인을 알아야 했다.
"아랫마을이 어쩌다 '상품'이 되었는지 차근차근 말해보는데스."
장로는 독라의 곁에 주저앉아 회한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와타시는 먼 마을에서 태어나 길실장으로 떠돌다 오마에의 마을에 정착했던데스우..."
젊은 시절, 장로는 급진적이고 야심찬 길실장이었다. 동족들은 인간을 불가해한 공포의 대상으로 여겼지만, 장로는 오히려 인간을 기회의 발판으로 생각했다.
실장석끼리 백날을 교류하고 머리를 맞대도 얻는 이득은 지리멸렬할 뿐, 잘해 봐야 새로운 먹이터를 찾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실장석이 인간과의 교류에 성공할 때마다, 이들은 하루 아침에 수백 년을 뛰어넘는 진보를 이루었다. 아무리 인간에게 쓸모없는 지식이라도 실장석에게 있어서는 거대한 진전이었다.
수십만년 간 맨손으로 살아온 실장석이 도구를 손에 쥐게 되었다. 똥이나 던지는 것이 고작이었던 실장석이 무기를 만들어 침입자를 물리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에게 접근한 최초의 실장석이 아니었다면, 이들은 아직도 맨바닥에서 잠들고 새벽이슬에 얼어 죽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인간은 위험하지만 그 열매는 달다.
그래서 장로는 인간과 더 깊숙이 교류하기로 마음먹었다.
장로가 무작정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장로는 길을 떠돌던 중, 강변공원에서 실장석에게 먹이를 뿌리던 한 애호파를 만난 적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 애호파는 커다랗고 네모난 것을 두 손으로 들고 있어, 그것을 통해 장로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당시 최초로 출시된 PDA형 린갈이었다.
‘닌겐상은 어째서 우리들에게 음식을 주는데스까?’
"음...글쎄.. 재밌으니까? 귀엽잖아!"
‘귀엽다는 게 무슨 의미인데스까?’
"어... 귀여운 게 귀여운 거지! 테치테치 데스데스거리고, 꼬물거리면서 춤도 추고! 보고 있으면 즐겁거든."
즐거움이란 또 무엇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장로는 고개를 돌려 아귀도를 재현하고 있는 실장석들을 바라보았다. 비대한 몸을 흔들며 서로를 밀어내는 실장석. 자신의 노예가 되라며 인간을 위협하는 실장석. 어째서인지 인간은 저 꼴을 보는 것을 원하는 것 같았다. 애호파가 악취미인건지, 린갈이 실장석의 악다구니를 엉뚱하게 번역하는 건지 구분할 길은 없었지만, 장로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저 인간은 '즐거움'을 얻기 위해 실장석을 필요로 한다.
인간이 원하는 것을 제공할 수 있으면 인간과도 교류할 수도 있다.
인간과 교류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원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어느 가을날, 장로는 이름 모를 산을 오르며 개천 건너편에 보이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붉은 돌로 이루어진 거대한 골판지 상자 같은 인간의 집. 그 곁에는 인간의 땅에서 먹이를 훔치려다 머리가 터져나가는 들실장들과, 고함을 지르며 놈들을 쫓아 막대기를 이리저리 휘두르는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장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단풍으로 물든 산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동족의 마을이 자리해 있다고 전해들은 산이었다.
1년 후, 윗마을에 정착했던 장로는 다섯 마리의 독라를 이끌고 산을 내려왔다.
"이후는 순조로웠던데스. 닌겐은 처음에는 우리를 의심했지만 곧 우리를 믿어주었고, 그 믿음이..."
장로는 건조하게 말했다.
"결국 우리를 병들게 한 데스."
장로의 무리는 인간의 집 옆 강가에 자리를 잡고, 텃밭에 접근하는 실장석을 착착 죽여 나갔다. 그 모습은 곧 집 주인의 눈에 띄었다. 긴가민가하던 인간은, 얼마 안 가 이 수수께끼의 독라 실장석들에게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한 달 후, 인간은 린갈을 갖고 나타나 말을 걸었다.
"우리 마당에서 사는 것이 어떻겠냐?"
인간은 어색한 표준어로 말했다.
"밖은 위험하다. 동물들에게 잡아먹히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잡혀갈 수도 있어. 마당 구석에 집을 마련해주마."
바라던 바였다. 인간의 지혜를 배우려면 인간과 밀접히 있어야 한다. 장로는 인간의 뻗은 손을 잡고 흔들며 미소 지었다. 그날부터 실장석들은 인간의 마당 귀퉁이에서 살며, 인간과 공생하게 되었다. 아랫마을의 탄생이었다.
들실장의 기승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산기슭 인간의 밭에 접근하면 덩치 큰 독라들의 손에 죽는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얕보던 독라에게 당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일부 우두머리가 쳐들어온 일이 몇 번 있기는 했다. 하지만 다음날 어김없이 기괴한 조형물이 되어 나뭇가지에 내걸린 그들의 시체를 보고, 들실장들은 차라리 산 속이나 마을 쪽으로 이주하는 길을 택했다.
들실장 문제가 해결되자 아랫마을은 인간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고 둘이서 지내고 있는 장년의 부부는 뙈기밭을 일구고 작은 축사에서 돼지를 키우며 살고 있었다. 실장석들은 밭일을 배웠다. 여섯 마리가 모종삽을 들고 달라붙으면 사람 한두 명 몫은 거뜬히 해냈다. 부부가 가르쳐준 대로 고랑을 파고, 흙을 북돋고, 씨앗을 심고, 잡초를 뽑고, 물을 주고, 수확까지 끝내는 실장들이 맡은 밭은 멀칭도, 농기계도 필요 없었다.
"너희는 내 자식과도 같다." 부부는 실장석을 대단히 아꼈다. "아니, 자식보다 나을지도 모르지."
열심히 일하는 실장석들이 마음에 들어, 부부는 점점 더 많은 것을 베풀었다. 음식물 쓰레기와 똥을 먹는 모습이 불쌍해 잔반이나 돼지 사료를 주었고, 시내에 나가는 날에는 실장푸드와 콘페이토를 사갖고 오는 일도 있었다. 흙바닥에서 찬바람을 쐬며 자는 모습이 안쓰러워 이런저런 헝겊을 모아 잠자리도 만들어 주었다. 밭일을 마치고 흙 범벅이 되어 돌아오면 손수 씻겨 주었고, 날이 궂으면 집 안에 들여보내 주었다. 산에서 내려온 오소리가 밭일을 하던 독라를 물고 달아나자 끝까지 쫓아가 구해내고 치료해 살린 적도 있었다.
처음에 실장석들은 습관대로 눈비를 맞고 똥을 먹으며 살기를 고집했지만, 부부의 말에 끝내 그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너희는 내 자식이다. 자식이 힘들면 부모도 괴로운 법이야.“
자식을 아끼는 부모의 마음. 오랫동안 잊고 살아 온 그 따스함에 실장석들은 인간에게 마음을 열었고, 인간은 실장석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렇게 아랫마을은 인간의 삶에 점점 적응해 들어갔다.
이듬해 봄, 장로는 자신의 장녀를 윗마을로 올려 보냈다. 길실장의 전통대로 인간에게서 배운 농사의 지식을 전수하기 위해서였다. 윗마을의 장로는 인간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것에 우려를 표했지만, 아랫마을이 얻은 지식의 가치를 인정했다. 윗마을의 존재를 은폐한다는 다짐 외에는 별다른 간섭은 없었다.
무사히 돌아온 장녀를 맞이하며, 장로는 자신의 숙원이 이루어진 것을 목격했다. 인간과의 지속적인 교류가, 헤아릴 수 없는 지식의 습득이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
눈을 가리고 비틀대며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불안했던 예전의 삶. 목적도 이유도 없이 숨이 턱에 닿도록 하루하루 노력해도, 매일 밤 잠들기 전 가슴에 남는 것은 허무함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자신들의 노력은 땀 흘린 만큼 충분히 보상받았다. 무감각한 노동의 연속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하루하루가 보람차다.
안전한 집. 풍부한 음식과 물. 인간과 협력하는 삶. 이 모든 것은 정당한 노력에 의해 획득한 것이었고, 이들은 인간의 울타리 안에서 무궁한 번영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인간의 그 울타리 안에서, 인간에게 보호받고 인정받는 삶 속에서, 위석을 타고 대대손손 전해 내려온 어떠한 욕망이 드디어 해소되는 것을 느꼈다.
비록 본인들은 이 기쁨을 노동의 보람이라고 착각할지라도, 마침내 장로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꼈다.
얼마 후 실장석들의 두 눈이 녹색으로 물들었다.
수가 늘어난 실장석들은 밭일뿐만 아니라 돼지를 치는 일도 거들었다. 포대자루를 옮기고, 먹이를 뿌리고, 빈 축사를 청소하는 등의 잡일은 이제 실장석들의 몫이 되었다. 부부의 입가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해가 지나고, 독라인 1세대로부터 2세대, 3세대, 많은 자들이 계속해서 태어났다. 수십 수백 마리의 실장석을 마당에 수용할 도리가 없어, 이들은 이제 낡은 비닐하우스 안에서 살게 되었다. 1세대 실장석들은 은퇴해 부부의 집에서 집안일을 도우며, 자라나는 자손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아랫마을은 더 이상 독라로 살지 않았다. 위생이 보장되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손가락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뭉툭한 손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똥을 먹지도 않았다. 맛있는 음식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자를 솎아내지도 않았다. 분충 때문에 무리가 망할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를 많이 키워내 닌겐상을 도와야 하는데스." 허울 좋은 핑계였다. 태교는 ‘행복은 없다’에서 ‘행복은 있다’로, 끝내 ‘삶은 행복하다’로 변해 갔다.
“뎃데로게~ 뎃데로게~
삶은 행복한데스. 즐거운 일 가득인데스.
찰랑찰랑 머릿결과 보드라운 옷을 입고 태어나는데스~
달콤한 콘페이토, 고소한 실장푸드, 맛난 음식 가득인데스~
세레브한 와타시의 자들은 세레브한 삶을 누리는데스~.“
윗마을로 연락을 올려 보내는 일도 어느 날 결국 그만두었다. 들실장 따위와 더 이상 엮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예전의 생활을 하나씩 버려가며, 이들은 마침내 자신이 왜 여기 있게 되었는지조차도 잊게 되었다. 장로와 1세대 독라들마저도 마찬가지였다. 풍족한 생활이 계속될 것임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은 그들의 손으로 일구어낸 것이었다. 땀과 피로 일구어낸 행복을 사랑하는 자들이 누리게 하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는가? 우리들은 귀중한 존재라고 인간이 말하지 않았는가?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반면 노부부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날로 늘어만 갔다. 동고동락하며 일하던 실장석들의 모습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밭에 일을 보내도 하는 둥 마는 둥, 축사 일을 시켜도 사료만 훔쳐 먹고 농땡이 피우는 일이 부지기수다. 밥은 엄청나게 먹어대 등골이 휠 지경이었고, 비닐하우스에 들르면 피둥피둥한 실장석들이 외치는 욕설에 부부는 더 이상 링갈을 갖고 다니지 않았다.
고향집에 들른 아들이 그 꼴을 보고 당장 육류업체에 팔아넘기려고 했지만, 부부는 아들을 필사적으로 뜯어말렸다. 사람이 어떻게 냉정하게 그럴 수가 있느냐. 짐승도 고마워할 줄 아는 법이다. 언젠가 참피들도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와 줄 것이다.
아들이 경멸어린 눈으로 노려보며 떠날 때, 장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부부가 한숨을 내쉴 때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인간은 우리들을 믿고, 우리들도 인간을 믿는다.
우리들은 인간의 자식과도 같다.
이것이 우리가 받아야 할 정당한 권리이다.
몇 달 후. 전국을 휩쓴 구제역은 수많은 양돈 농가를 초토화시켰고, 노부부의 작은 돼지농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의사가 찾아와 돼지들을 검사하더니, 얼마 후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트럭을 끌고 몰려와 삽시간에 축사를 말끔히 비워냈다. 보상금은 터무니없었고, 당장 막내딸의 학자금도 대기 곤란한 지경이 되었다. 부부는 밤이 늦도록 적막한 돼지우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참피들 묵을 건 줘야제" 눈물을 닦으며 아내가 말했다. "죙일 곯았을낀데."
물론 구제역이 뭔지, 그날 축사와 비닐하우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장로는 보지 못했다.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한밤중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집에 돌아온 여자와, 눈이 시뻘개져 자신들의 팔다리를 우악스럽게 움켜쥔 채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던 남자의 모습 뿐.
"니들은 가족이 아이다." 대롱거리는 독라들이 데덱대는 소리는 남자의 귀에 닿지 않았다. "니들은 첨부터 즘생이었다."
빈 돼지우리 사방에 합판을 두르고 실장석들과 독라들을 던져넣으며 남자가 씹어뱉듯 말했다.
"느이들은 이제 가축이다."
비좁은 우리 안에서 테챠데샤하며 항의하던 백여 마리의 실장석들은, 이윽고 본능대로 분노의 화살을 독라들에게 돌렸다.
'대체 왜?'
무수히 쏟아지는 자들의 손발에 토닥토닥 두들겨 맞으며 장로는 생각했다.
'그렇게 노력했는데 대체 왜?'
장로는 인간의 돌변과 자들의 하극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얻어맞았다. 무엇보다 믿기 힘든 것은 자들이 외치는 욕설들이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자식들이, 그토록 열심히 일해 귀하게 키워낸 자식들이 이제는 혐오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자신을 욕한다. 가슴 언저리가 찌르는 듯 아프다. 쩌적 하는 소리가 뼈를 타고 들려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독라들 역시 충격에 빠져 맞기만 하다가 모두 죽어가고 있었다. 편안한 삶에 올려졌던 실장석들의 위석은 거짓말처럼 쉽게 부서졌다.
자신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독라들 중에는 장녀의 모습도 보였다. 윗마을에 정착해 처음으로 낳았던 장녀. 자신과 함께 산을 내려와 아랫마을을 세웠던 장녀. 길실장의 임무를 완수하고 당당히 돌아왔던 장녀. 하지만 가장 예뻐하던 손녀의 손에 똥을 먹히던 장녀는 ‘데... 데...’하며 중얼대더니, 파킨 소리와 함께 두 눈을 회색으로 물들였다.
그 순간 장로는 자신에게 날아들던 주먹을 뽑아내어 옆구리를 물어뜯던 자실장의 얼굴에 박아넣었다. 살찌고 둔해졌어도 한때 길실장이었던 장로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비만한 실장석을 가볍게 피한 다음 뱃가죽을 양 옆으로 당기자 살이 북 찢어지고 내장이 쏟아진다. 흘러나오는 창자를 허겁지겁 쓸어 담는 분충을 걷어찬 장로는 옆에서 움찔하는 녀석의 머리를 재빨리 쪼개냈다. 얼굴에 분수처럼 튀는 핏방울을 느끼며 장로의 정신은 무의식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날, 피칠갑을 한 채 눈을 뜬 장로는 힘없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는 살점과 내장이 튀어 있고, 살아남은 분충들이 멀찍이 떨어져 공포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전날 밤의 기억이 아득히 떠올랐다. 싸우던 중 피가 눈에 들어갔는지, 가랑이 밑에는 점막에 싸인 엄지와 구더기의 시체가 수북하다.
"마..마레후...프니..프..."
마지막 남은 구더기도 간신히 고개를 들고, 장로를 향해 쌀알만 한 돌기를 바르르 뻗더니 그대로 죽어버렸다.
이윽고 주인집 아들이 들어와 싸늘한 얼굴로 그 광경을 둘러보았다. 잠시 후, 케이지를 든 두 명의 남자가 나타나 헛구역질을 해 가며 살아남은 분충들을 하나씩 집어넣기 시작했다. 인간에게 너도나도 팔을 뻗던 실장석들은 데프픗 하고 장로를 흘겨보며 케이지 안으로 넣어졌다.
"아, 그놈은 넣지 마세요. 늙어서 냄새가 배어 못 먹을 겁니다."
장로에게 손을 뻗으려던 사람에게 주인 아들이 말했다.
너댓 마리의 분충만 남기고 케이지를 가득 채운 두 사람은 트럭에 실장석들을 싣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남겨진 분충들은 고함을 지르다 빵콘한 채 기절했고, 황량한 축사 안에는 묵묵히 담뱃불을 붙이는 주인집 아들과 간신히 고개만 들고 있는 장로만이 남았다.
"자들을 어디로 데려간데스까..."
장로가 힘없이 물었다.
심드렁하게 린갈을 읽은 남자는 대답 대신 담배를 깊게 빨더니 꽁초를 탁 던지고 발로 비비며 말했다.
"저놈들은 상품이다. 참피는 분충일수록 맛있으니까, 저런 놈들도 다 수요가 있거든."
"상품이 무슨 말인데스까."
남자는 거래와 시장의 개념을 짧게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저 자들은 어디로 가는데스까."
"가공 공장으로 간다. 저놈들은 사람들에게 먹히는 거야."
먹는다니 무슨 말이지? 인간을 그토록 성실히 도왔던 우리를? 장로는 경악의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너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참피는 원래 그런 생물이니까. 단지 한때나마, 너희는 다르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내 부모님이 안쓰러울 뿐이야."
"대체 무슨 소리인데샤!"
"모르는 거야? 너희가 그동안 어떻게 해 왔는지 생각해 보라고. 어제 너희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잘못이라면 닌겐을 위해 죽어라고 일한 잘못밖에 없는-"
불현듯 깨달은 장로는 말을 삼켰다.
밭에 운치를 싸고 작물을 갉아먹던 자들의 모습. 훔친 돼지 사료를 옷 속에 불룩하게 집어넣고 게걸스럽게 먹어대던 모습. 그리고 어젯밤 비틀대며 돌아온 안주인의 옷에 잔뜩 묻어있던 녹색 얼룩.
모든 것이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잔인할 정도로 명료하게 이해되었다. 단지 그 동안 외면해 왔을 뿐, 장로는 이 모든 것의 의미를 사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랫마을은 분충의 소굴이었다. 그리고 그 분충들을 교육하지 않고 솎아내지 않은 것은, 아랫마을을 망하게 한 것은, 바로 현실의 안락함에 빠졌던 장로 자신이었다. 인간과 공존할 수 있다고, 인간과 맞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장로의 오만이 독라들과 장녀를 죽게 만들었다.
남자는 멍하게 앉아 있는 장로를 냉랭하게 바라보다 축사를 나가며 말했다.
"이제 이 축사는 돼지우리가 아니라 참피우리다. 너희는 앞으로 가축으로 사는 거야. 동물이면 동물답게 인간을 위해 살다가 인간을 위해 죽으라고. 열심히 자를 낳아서 온 축사를 분충들로 가득 채워주길 바래. 잘 있어라, 똥벌레."
남자가 떠나고도 장로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던데스."
두 눈에서 적록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행복을 찾았다고 생각했던데스."
파리가 뒤덮인 머리가 회색 눈으로 장로를 응시했다.
“닌겐과 함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데스."
그려놓은 듯 적막한 축사의 안에는 햇살을 받은 먼지가 부유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던데스. 왜냐하면..."
눈물을 삼키느라 장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가슴 속에서 쩌적대는 소리가 연거푸 들려왔다.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었다. 길실장의 삶이, 산실장의 삶의 사무치게 그리웠다. 하루하루 힘겹고 위태롭게만 느껴지던 그 삶이...
그리고 이 결말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 장로는 분명히 알았다.
장로는 벌떡 일어나 맨손으로 흙바닥을 마구 파기 시작했다.
"와타시는 더 이상 길실장이 아닌데스."
손끝이 헐어 피가 흘렀다. 두 눈에서는 새까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와타시는 장로가 아닌데스. 와타시는..."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구멍은 키보다도 깊어졌지만 멈추지 않고 파내려가며 장로는 쉬지 않고 되뇌었다.
"이제 와타시는 운치굴의 독라노예인데스."
"그 후 가끔 경쟁에서 밀려난 실장석들이 독라가 되어, 땅 위에서 이곳으로 쫓겨온데스. 그 후손이 바로 위의 실장석들과 이 독라들인데스. 아랫마을은 그렇게 시작되어 이렇게 끝난데스."
이야기가 끝났지만, 독라는 생각을 정리하는 듯 가만히 앉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침묵을 깬 것은 땅 위에서 들려오는 소란이었다.
'노예가 늦은데스! 미친데샤!'
'사죄의 도게자와 스테이크를 바치는데스!'
"닌겐이 온 모양인데스. 상품으로 쓸 분충을 데려가고 있는데스."
장로가 천장을 보며 말했다. 독라는 미동도 않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잘 알겠는데스."
장로의 옛이야기에 대한 대답인지, 인간이 왔다는 말에 대한 대답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독라는 말없이 운치굴 입구 아래로 걸어가더니, 전날 잡아먹은 실장석의 뼛조각을 양손에 피켈처럼 쥐고 흙벽에 박아넣었다.
독라의 의도를 눈치챈 장로가 만류했다.
"와타시의 말을 잊은데스까? 지금 나가면 다메데스, 닌겐에게 잡아먹히는데스! 포기하는데스. 포기하고 오마에는 윗마을로 돌아가 사는데스. 닌겐과 얽히는 실장석은 불행해지는데스."
독라는 등을 돌린 채 흙벽 이곳저곳을 찔러보며 대답했다.
"그것이 오마에가 얻은 답인데스까. 하지만 와타시는 와타시의 답을 얻고 싶기 때문에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는데스."
장로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적당한 위치를 잡고 기어오르려던 독라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장로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오마에."
장로는 독라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길을 떠돌며, 닌겐의 곁에서 살며, 오마에가 찾고 싶었던 행복이란 무엇이었던데스까."
장로는 대답 없이 천천히 그늘 안으로 뒷걸음질 쳐 들어갔다. 적록으로 빛나는 눈만을 남긴 채 장로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고, 이윽고 그 두 눈도 수많은 눈들 가운데 섞여 들어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어깨를 으쓱하고 벽을 팍팍 기어오르는 독라의 등 뒤로 장로의 어렴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행복은...."
지상의 소란에 묻혀 그 뒤는 들을 수 없었다.
축사의 모습은 아수라장이었다. 인부들은 실장석을 케이지에 잡아넣을 필요도 없었다. 입구를 열고 땅에 놓기만 하면 수많은 실장석들이 제 발로 앞 다투어 밀려들어갔다. 인부들은 꽉 찬 케이지를 트럭으로 운반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일하고 있었다. 독라는 기회를 엿보다가 열린 케이지 안으로 몸을 던졌고, 곧 트럭 짐칸으로 옮겨졌다.
요란한 소리와 진동과 함께 인간의 집은 빠르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한낮의 하늘 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뒷산과 붉은 골판지 상자 같은 인간의 집. 그 풍경이 점으로 변하고 이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독라는 오래도록 눈을 떼지 못했다.
인간과의 협력을 통해 영원한 번영을 보장받을 것만 같았던 아랫마을. 그 아랫마을을 멸망시킨 원인은 바로 인간도, 자연도 아니라 다름 아닌...
투실한 실장석의 얼굴이 독라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똥벌레가 미쳐버린데스야. 세레브한 와타시가 있는 곳에 어딜 감히 독라노예가 숨어든데샤?"
케이지를 꽉 메운 실장석들이 독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독라는 실장석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오마에는 행복을 찾은데스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데샤? 사육실장이 되어 닌겐노예가 매일 스테이크를 바치고 거품목욕을 하는 것이 행복이 아니면 무엇인데스? 삶은 행복으로 가득한데스. 데프픗, 물론 오마에처럼 천한 독라에게는 예외인데스."
케이지 안이 킬킬거리는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그런데스까."
독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실장석의 머리에 손을 대고 힘주어 돌려 밀었다. 오도도독 하는 소리와 함께, 나사못을 조여 넣듯이 머리가 돌아가며 몸통 속으로 밀려들어갔다. 팬티를 산더미처럼 부풀린 채 경련하는 몸뚱이를 휙 던지고, 주위를 슥 훑어보며 독라가 말했다.
"다음."
탈출은 어렵지 않았다. 오랫동안 실장석을 운송한 케이지는 독한 배설물에 절어 삭을 대로 삭아 있었다. 철망은 이미 녹슬어 실오라기처럼 약해져 있었고, 군데군데가 끊어져 트럭의 흔들림에 따라 바르르 진동했다. 한참 동안 시체를 철망에 패대기친 끝에, 독라는 철망을 뜯고 트럭 짐칸으로 뛰쳐나올수 있었다.
트럭은 이미 시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실장육 가공공장이 들어선 한 위성도시였다. 바람결이 독라의 매끈한 머리를 스치고, 수많은 나무들과 인간들, 하늘에 닿을 듯한 네모난 바위들이 휙휙 지나친다. 신호에 걸린 트럭이 정차했을 때, 짐칸 너머의 광경이 독라의 눈에 들어왔다. 무수한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곳 - 장로가 말한 공원이었다. 수많은 인간과 실장석이 모여든다는 유일한 장소. 저 곳에 간다면 들실장의 삶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랫마을 장로가 만났다는 ‘애호파’를 직접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운명이 공원에서 자신을 기다림을 독라는 직감했다.
독라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짐칸을 기어 넘어 인도에 착지한 뒤 공원으로 재빨리 걸어 들어갔다. 그 옆으로 두 개의 표지판과, 코팅된 채 고정되어 바람결에 떨리는 종이 한 장이 보였지만 글자를 모르는 독라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두루마리 공원>
<실장석은 유해조수입니다. 먹이를 주지 마세요.>
<공고. 4월 12일부터 14일까지 두루마리 공원의 실장석 구제가 있을 예정이니 유의바랍니다. 후타바시 환경관리과.>
D-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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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만에 눈먼 자의 비참한 결말이었던데스..
처음봤을때도 생각했지만 연출이 정말 뛰어난 데스...장로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어둠속으로 들어가는 부분이 제일 마음에 든 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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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마디가 임팩트 있는데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8.04.04 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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