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알아..? 네가 날 버린 그 순간부터 내 안은 온통 피로 얼룩져있어. 헤지고 헤져서…
이젠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아. 내 상흔은 아무리 좋은 약을 발라도 지워질 수 없어.」
수많은 기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어우러져 시끄러운 웅성임이 가득한 이 곳 앞에 경찰차가 멈춰서자 한 순간 웅성임이 멈췄다.
차에서 내린 건장한 강력반 형사 두 명이 붙잡고 오는 건 뜻밖에도 긴 생머리의 청순하게 생긴 여자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이들에게 거의 들려오다 싶이 하고 있었다. 그 여자가 보이는 순간 멈춰졌던 웅성임이 다시 커졌다. 특히나 기자들은 마이크와 카메라를 들이대며 여자에게 이것저것 하나라도 더 질문하려 소리치고 있었고, 경찰들은 그런 그들을 제지하며 여자를 끌고 가고 있었다.
"5년이나 사귀고, 약혼까지 약속했던 남자를 어떻게 죽이게 된겁니까??"
"하 진양! 그 사람을 사랑하긴 사랑했습니까??"
"죽인 동기가 뭡니까??"
"하 진양! 한 마디라도!!"
기자들에게 질문을 받고 있는 여자의 얼굴엔 아무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고 여자의 눈동자는 텅 비어있었다. 그런 여자의 상태에도 여전히 기자들은 자신들의 질문만 하기 바빴고, 그 모습을 보다 못한 형사 한 명이 소리쳤다.
"언론 사절입니다! 다들 비키세요!!"
사람들을 다 뚫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오르자 그제야 조용해진 주위에 강형사가 한 숨을 내셨다.
"정말이지 귀찮은 양반들이예요. 특종을 위해서라면 눈에 베는게 없는 쓰레기들 주제에."
"허허. 자네도 참."
"사실이 그렇잖아요. 아마 기자들이라면 특종을 위해서 이년처럼 그런 난잡한 살인이라도 서슴없이 할껄요."
강형사 보다 2살 위인 한형사가 강형사의 거친 입담을 못 당하겠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자 강형사가 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젊고 미래가 보장된 년이 왜 이런 짓껄이를 벌였나 몰라요."
"궁금하면 물어보든가."
"묻는다고 입을 여는 년이였음 벌써 알고도 남았겠죠. 이거야 원, 아무리 지랄해도 입을 안여니. 피곤해 죽겠어요. 선배."
"의사들이 실어증일 수도 있다고 하니까 일단은 지켜봐야지. 뭐."
띵동_ 5층입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대화를 멈춘 둘은 몸상태가 안좋아 보이는 진을 철창안에 가둬놓고, 모처럼만의 휴식을 즐기기 위해 휴게실로 갔다.
지금 자신의 귀가 정상인 건가…? 아니. 정상이 아닐꺼야. 정상이면 이런말이 들릴리 없잖아.
스스로를 쇄뇌시키며 진은 앞을 바라봤다. 허나 담담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은형의 모습에 진 스스로 쇄뇌시킨 환상은 바닥에 널부려져 있는 유리조각처럼 깨.져.버.렸.다.
"난 그 여자랑 결혼할거야."
"……"
"…미안하다. 네가 무슨 소릴 해도 할 말 없다."
"……어째서야..? 어째서…!!! 왜 내가 아니라 다른 여자야..?"
"…도저히 그 애를 버릴 수가 없어. 난."
더는 듣지 말았어야 할 소리를 들은 것처럼 진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럼 난…? 난 어떻게 돼도 상관없어..?"
"……"
"하..하하..날 사랑하긴 했었니…? 이렇게 쉽게 버릴꺼라면 왜 내 앞에서 사랑을 맹세하고, 왜 나와 사랑을 나눴니..?"
"…널 사랑했단 사실은 부정하지 않아. 지금도 널 사랑해."
"그러면!! 그러면 나와 약혼하면 되잖아! 당신 애? 얼마든지 내 자식처럼 키워줄 수 있어! 그렇게 허망하게 잃어버릴 당신이라면 이렇게 열렬히 사랑하지도 않았어!"
"…널 사랑하지만 그 애도 사랑해. 그 앨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져버려서.. 널 지워야만 할 것 같다. 정말… 미안하다. 진아."
진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잔인한 사람. 내 앞에서 다른 여자와의 사랑을 논하는 사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용서하지 않아.. 주먹진 손이 사정없이 떨려왔다.
"흐..흐흑...어떻게..이럴 수 있니...어떻게..!!! …나 당신 용서하지 않아. 내가 아픈만큼 당신도 절대 행복해질 생각따위 하지 마!!"
"……"
"..흐..당신과 그 여자. 당신 아이까지..절대 용서하지 않아. 내 마음에 난 상처 수 만큼 되돌려줄거야."
자리에서 일어난 진은 가방을 쥐고는 카페를 뛰쳐 나왔다.
아침부터 그와 만날 이 시간을 기다리며 설레이고 꾸몄던게 바보같다. 그는 다른 여자와 함께 있다가 내게 이별을 고하러 나왔을 뿐일텐데. 너무나도 바보같아서 자조적인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하..하하하!!.....흐흐...흑흑..."
까페에서 멀리 벗어났다고 느낄쯤 더는 버틸 수 없음에 진은 주저앉아 흐느껴버렸다. 진은 맹세했다. 오늘 가슴 속에 난 수 많은 상흔들을 잊지 않겠다고. 그대로 당신에게 돌려주겠다고. 진은 '오늘만 오늘만이야'라고 중얼거리며 마음껏 눈물을 터트렸다.
잔인했던 내 사랑… 당신에겐 나 외의 행복따윈 없어.
*
법정 안. 엄숙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법원장의 목소리가 법정을 가득 메운다.
"피고인 하 진은 지 은혜양과, 1살된 갓난 아기 강 은하를 칼로 난도질해 죽인 혐의와 강은형군을 총살해 죽인 혐의 인정하는 겁니까? 대답을 못 하는 점을 감안해 고개로라도 대답해 주십시오."
"……"
"다시 한 번 피고인 하 진에게 묻습니다. 살인한 것을 인정합니까?"
모두가 숨죽인 채 진만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창백한 안색으로 멍하게 허공만 응시하던 고개가 조용히 끄떡여진다. 살인혐의를 인정한 진때문에 또 다시 법정 안이 술렁거리자 법원장이 조용히 해달라 말하지만 여전히 술렁이자 탕탕탕_ 크게 세번치니 다시 조용해지자 법원장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피고인 하 진은 일가족 살인죄로 교수형을 처할 것을 선포한다."
탕탕탕_!!!
법원 가득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진은 조용히 눈을 내리감았다. 경찰들이 와 진의 손목에 밧줄을 끌고 갈 때까지도 진은 눈을 뜨지 않았다.
*
1년 후.
어느 덧 강은형과 헤어진지 1년이 지나버렸다. 그와 헤어졌던 시간 동안 이제까지 모아둔 돈을 다 털어 성형을 했다.
더는 그가 알아보지 못하게. 그리고 그를 사랑했던 얼굴을 지우고 싶어서 한 선택이었지만 후회스럽지는 않았다.
붓기가 다 빠지자 완전히 다른 여자가 된 난 실험삼아 레스토랑에서 스폰서와 미팅하는 강은형의 옆좌석에 앉아 식사를 했다.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식사할 동안 강은형은 옆좌석에 앉은 사람이 나라는 걸 전혀 알아채지 못 했다. 그 모습에 비소가 흘러나왔다.
"하. 내 가슴속엔 이렇게나 수많은 상흔들이 존재하는데. 넌 잘도 웃고 있구나. "
강은형은 1년 전 그날 나와 완전히 헤어졌다고 생각하겠지만 난 아니었다. 하루도 강은형이란 이름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늘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그가 웃고, 그의 어린 아내 지 은혜가 웃고, 그의 아기가 강 은하가 웃을때마다 내 방 벽의 칼자국은 하나씩 늘어갔다.
내 상흔을 잊지 않기 위해서. 꼭 되돌려 주겠다는 그날의 나의 맹세를 위해서 긋기 시작한 칼자국은 이젠 너무도 많아 벽지가 헤져서 너덜너덜할 정도였다.
그걸 보니 그 동안 나의 고통이 느껴졌다. 나의 눈은 더 이상 예전의 그 눈이 아니었다. 강은형이 늘 투명하다고 했던 내 눈은.. 피로 물들어졌다.
"…확실하게 짓밟아 주겠어. "
분노에 쉰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동안 괴로웠던 나의 슬픔은 강은형이 출장에서 돌아오는 내일 저녁에 모든게 끝난다.
내일 저녁...............
#푸름 아파트
지금 시각은 4시 50분. 6시에 도착할 강은형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그의 집 앞에 와있었다. 내 손엔 미리 카피해논 그의 집 열쇠가 들려져 있었다. 강은형이 사는 곳은 아기자기한 놀이터와 하얀 아파트가 어우러져 깨끗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었다.
…이곳이야말로 내가 있어야 할 곳이었는데. 하하..하..정말이지..바보같군.
그렇게 그 더럽히놈에게 당하고도 여전히 강은형을 떨쳐내지 못 한 스스로가 바보같아 웃음이 나왔다.
-…약해지지 마. 하 진. 그 동안 네가 겪었던 고통을 이 따위 시덥지못한 감정으로 더럽히지 마.
귓가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헤어지고 난 뒤 한 달 부터 들리기 시작한 소리.
그 소리에 힘이 났다. 다신 약해지지 않을 힘이. 열쇠를 꼭 쥐고선 그의 집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살에 와닿는 따뜻한 공기에 기분이 나빠졌다. 그렇게 멍하니 잠시 서있는데 인기척을 느낀 그의 아내 지은혜가 현관으로 나오더니 이내 내가 서있는 걸 보고는 놀랐는지 소리쳤다.
"누구...시죠..?"
"....벌써 날 잊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지은혜."
"설마....진이씨....?"
"쿡쿡. 내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그거 영광이군."
"...당신이 도대체 여긴 어떻게…!!"
"오랜만이야. 지 은혜씨."
"...왜...왜..여기에.."
얼빠진 지은혜의 모습이 웃겨 미소가 감돌았다. 정말 미련하고도 바보같은 여자를,
그런 여자를 사랑한 강은형 너는.. 정말 용서가 안 되려고 하네. 날 감히 이따위 년때매 버리다니........
"글쎄. 왜 일까. 내가 왜 당신 앞에 서 있는 건지 당신이 한 번 맞춰 봐."
"……"
"왜 갑자기 꿀먹은 벙어리가 되셨나? 그 조만한 입으로 강은형을 사로잡았잖아. 그 대단한 입으로 아무말도 안한다니. 이거 "
"나가주세요. …당신은 이미 은형오빠랑 끝난 사이잖아요. 더는 우리 가족사이에 끼지 말아주세요."
그래. 이제야 너답군. 내 옆에서 강은형을 뺏어간 년 같아.
순식간에 그 년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고통에 소리치는 목소리가 듣기 싫어 뺨을 계속 내리쳤다.
-짝, 짝, 짝!!
"말 하랬지 누가 기어오르라고 그랬나? "
입가에서 피가흐르고 있는 지은혜는 정신이 없는지 머리카락을 붙잡은 내 손목에 손톱을 파넣고 있었다.
"아파? 겨우 그정도에 아픈거야? …진짜 화나네. 난 그딴 아픔 수십번도 더 겪었어!! 하루라도 술 없이 잠 든 날이 없었다고! 이런 나와 반대로 넌? 매일 아침 그와 함께 눈뜨고 그와 함께 웃고 떠들며 행복했잖아? 이젠 나도 행복해져야 겠어."
"으..윽...이..런다고 뭐가 달라져요..!?"
"네가 내 입장이 아니니까 그런말을 할 수 있는 거겠지. 네 화를 자초하는 구나."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는 지은혜의 빰을 한 대 더 내리친 뒤 주머니에 넣어 놓았던 칼을
꺼내 그대로 그 녀의 복부에 찔러 넣었다. 칼을 잡은 손에서 뜨거운 액체가 느껴졌다.
"으-앙.응애.응애."
지 엄마에게 다가 온 죽음을 아는걸까. 아이의 울음소리가 슬로우 모션처럼 느릿하게 들려왔다. 그 울음 소리때문인지 몰라도 내게 기대어 부들부들 떨고 있던 지은혜의 입가에서 피가 흐르는 모습이 느릿하게 보이더니 갑자기 급속도로 아래로 추락했다. 주저않은 지은혜를 따라 같이 주저앉은 난 그녀의 복부에 꽂혀 있는 칼을 뽑아냈다. 덕분에 피가 뿜어져 나와 얼굴에까지 피가 튀어버렸다.
지은혜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벙긋 거린다.
"아.........아........기....으...."
"아, 아기? 너의 1살 된 공주님 은하? 하하. 그래, 걱정하지 마. 네 소원대로 너 가자마자 바로 뒤 따라 보내줄 테니까. 하하하."
정말이지 미친 듯이 신이나 웃고 있는 가운데 피에 얼룩져 가고 있는 지 은혜가 두 눈을 부릅뜨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이지 그게 너무 거슬려서 그녀의 심장 부분을 한 번 더 찔러 버렸다.
"그러길래 빨리 죽지. 왜 자꾸 꿈틀거려. 짜증나잖아. 지 은혜. 안 그래?"
숨을 멈춘 그녀를 확인 하고선 그녀를 끌고 안방 침대에 대충 걸쳐 놓았다. 눈을 부릅 뜬 채 숨을 멎은 그
녀의 모습이 이렇게도 통쾌할 수가 없었다. 숨을 고르고는 안방을 훝어보니 침대 옆에 위치한 아기 침대가 보였다. 그 곳에서 아기를 꺼내니 정말이지 강은형을 쏙 빼닮은 그의 아이가 보였다.
"응-애. 응애. 응애"
"강은형과.... 지독히도 빼닮았구나. 너."
계속 시끄럽게 울고 있는 아이를 보니 속이 뒤틀렸다. 생각해보면 너 때문에 그와 헤어진건데. 너만 없었어도… 내가 이렇게 아프지 않을 수 있었어. 킥킥.
"넌 어리니까 한 번에 죽여줄게. 아가. 두려워 하지는 마렴. 그곳에 가면 니 엄마랑 아빠도 있을테니까. 하하하."
"으앙-"
-푸욱_!!!
*
2015번이라 적혀있는 철문이 열렸다.
교도관이 들어와서는 진 앞에다 식판을 놓아주고는 그냥 나가던 평상시와는 다르게 오늘은 나가지 않고 진을 계속 바라보고 있다.
사람의 인기척에 명상에서 깨어난 진은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그녀가 눈뜨는 모습에 교도관이 기다렸단 듯이 말을 걸어왔다.
"…내일이 되기전에 먹고 싶은 것 없어? 말해 봐. 특별히 부탁해서라도 사다줄테니까."
교도관의 말에 진은 번쩍 정신이 드는 기분이었다.
…벌써 내일이었나. 햇빛조차 잘 들지 않는 방 안에선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저 물 흐르듯 흐르는 시간에 온 몸을 편히 맡기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 말을 못 했었지. 미안. 그럼 바닥에다 손으로 글씨 써서 보여 줘."
친절히 말하는 그의 성의는 고마웠지만 아무 것도 생각이 없었다. 얼마 안남은 시간만큼은 내가 바라고 바라는 것들만 생각하면서 보냈으면 했기에 거부의 표시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몇 번이나 더 귀찮게 묻던 그가 계속되는 거부에 겨우 나가자 그제야 아까와 같은 조용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귓 속에서 한 동안 잠잠하던 소리가 또 다시 들려왔다.
-…아직도 강은형이 보고 싶은거야?
그렇지 않아.
-강은형은 널 이렇게 만든거나 다름없는데 그를 보고 싶다 말하는 거야? 그는 네게 상처밖에 주지 않았어.
알아. 나도 잘 알아!!
-그럼 계속 증오해. 이제와서 약해지지 말고 증오해. 그래야 하 진 너 답다고.
……나 다운게 뭔데…?
-미쳐서 증오로 가득찬 모습. 그게 가장 너 다워.
……싫어. 이젠 모든게 끝나버렸고 난 지쳐버렸어. 내 마음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아.
-하.하하하. 네 입에서 그런말이 나오다니. 너도 어쩔 수 없는 여자군.
그래 난 네 말처럼 어쩔 수 없는 여자인지도 모르지… 근데. 더는 강한 척 할래야 할 수가 없어. 모든 건 끝났고 이제 나도 끝이야. 마지막만큼은… 예전의 나로서 죽고 싶어.
진은 자꾸만 자신을 흔들리게 하는 소리에 귀를 틀어막고는 엎드렸다.
마지막 만큼은 혼자서 생각하고 싶었는데…… 나같은 살인자에겐 그것도 사치란 건가.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를 죽이고서도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24시간 하고서도 조금 남은시간에 흘러버렸다. 복수를 하고서도 남은 것이 없는 불쌍한 나의 모습이 너무도 보잘 것 없어서 흐른 것이라 믿고 싶지만 마음 한 구석은 다르게 외치고 있었다.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는 거 아니야?'
…난……
*
철컥_
문을 따고 들어온 은형은 지금쯤 나와서 자신을 반겨야 할 은혜가 안나오자 이상함에 서둘러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낯선 여자가 쇼파에 앉아 있는 모습에 잠시 멈춰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는 여자인데. 고개를 잠시 갸웃거린 그는 조심스레 그녀에게 물었다.
"저, 실례지만 누구신지."
"벌써 날 잊어다고 말하고 싶은건 아니겠지? 강 은형."
".....!!..."
"킥킥. 놀라기는. 왜? 내가 오면 안될 곳이라도 온 건가?"
".....하..진.."
"……"
"…여긴 왜…"
"그년이랑 똑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군. 지겹지만 친절하게 대답해 주지. 너한테 선물주려고 왔어. 그동안 아주 행복하셨으니까 이젠 내 불행을 받을 때도 됐잖아? 킥킥. 기대해도 좋을 거야."
"…너!!!…"
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방으로 달려간 은형은 안방 문을 열자마자 풍겨오는 비릿한 피냄새에 걸음을 멈췄다. 믿지 못 하겠단 듯 몇 번이나 눈을 깜박하며 방 풍경을 바라보던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거...은혜랑..은하 아닌거지.... 지금 이거 꿈인거지...."
"이거 꿈 아니야. 현실이라고. 아직도 정신 못 차리셨나?"
"…너..!!!"
"하루라도 눈물 없이 밤을 새운 적이 없었어. 늘 내 손엔 술이 들려있었고. …정말 하루하루가 절망적이었지. 근데 도저히 죽는 것 만큼은 못 하겠는거야. 난 이렇게나 불행한데 네가 웃는 꼬라지를 보니까 이대로는 억울 했어. 그래서 생각했지. 똑같이 되갚아 줄때까지만 살자고 말야. 킥킥. 어때? 나의 작품이? 아, 제목은 막 떠올랐는데."
"......하 진....."
"인과 응보."
"......하 진!!!!!"
이를 갈며 소리치는 그의 모습이 꼭 자신이 미치기 직전의 모습같아 진은 비소를 흘렸다.
그런 진을 보던 은형은 벽에다 주먹을 박았다.
"…나한테만 하면 되잖아.. 왜 죄없은 내 아내와 아이를 이렇게 만든거야!!!"
"네가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아서 말해주는데…."
"...입 닥쳐!!!"
"너도 그렇게 될거야."
진은 자켓 안주머니에서 작은 총을 꺼냈다. 천천히 안전장치를 풀고는 총구를 강은형의 심장 부근에 조
준했다.
강은형은 주먹을 부르르 떨며 계속 진을 쳐다보다 눈을 감았다.
"…그래. 나도 죽여. 차라리 내 아내와 아이가 있는 곳으로 보내."
정말 웃기지도 않아.
"누구 멋대로? 넌 죽어도 그들 곁엔 못 가. 이게 내게 너에게 내리는 마지막 저주거든.
…이젠 진짜로 안녕이다. 강은형. Bye."
-탕!!!!!!!!!!!!!!!!!!!!!!!
조금이라도 주저함은 없었다. 그저 강은형이 심장에서 부터 붉은 피를 뿜어내고 있는 광경을 무미건조하게 보고 있을 뿐.
쓰러진 그에게로 다가갔다. 흥건한 피때문에 걸을때마다 질척거렸다.
그의 엎어진 몸을 앞으로 돌려놓고는 피가 흘러나오는 심장가에 머리를 기대고 누웠다.
이젠 더는 들리지 않는 심장소리가 모든게 끝났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갑자기 지탱해주던 것이 사라진 느낌이 허망했다. 그래서 웃음이 났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쾅_!!!
"꼼짝 마! 널 체포한다!!"
그렇게 난 강은형의 그림자에서 벗어났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
이제 몇 분 앞으로 다가온 죽음. 하지만 두려움이나 주저함 따위는 없었다.
그저 계속 가슴에 쌓인 것들이 나오지 못 하고 멤돌기만 하기에 답답할 뿐이었다.
문이 열렸다. 오늘은 교도관 둘이 들어와선 내 팔을 잡아 끌었다.
매끈한 바닥에 나의 마지막을 알리는 발자국 소리들만이 조용한 복소를 가득 메웠다.
그들을 따라 들어 간 곳엔 벌써 준비가 끝나있는 올가미가 보였다. 검은 천이 머리 위부터 씌어지고 목에 끈의 감촉이 느껴질 때 까지도 난 답답했다.
낮은 소리를 지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십시오."
"........."
말 따위를 입밖으로 내 뱉는 것 따위는 잊어버린지 오래다. 더 이상 이 세상에 남기고 싶은 것도 없었다. 하지만 계속 답답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