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834) - 안중근 의사의 111주기를 맞아
지난 26일은 안중근(1879∼1910) 의사 서거 111주기다.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중국 뤼순(旅順) 감옥에서 순국했다. 당시 서른두 살이었다. 서울 효창공원에는 안중근 의사의 묘지가 있으나 유골을 찾지 못해 빈 무덤, 지금도 유골을 찾으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정부는 어제(29일)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안 의사 111주기 추모행사를 가졌고 26일에는 전라남도 장흥군 해동사(海東祠)에서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추모제가 열렸다. 해동사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안중근 의사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안중근 의사는 전남 장흥과 연고가 없으나, 제사를 지내는 후손이 없는 것을 알게 된 장흥의 죽산 안씨 문중이 1955년부터 추모 제향을 이어오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순흥 안씨인데, 죽산 안씨는 순흥 안씨에서 파생돼 나왔다. 2019년까지 안중근 의사 제례는 죽산 안씨 시제(時祭)가 열리는 3월 12일에 지냈는데 서거 110주년을 맞은 지난해부터 순국일(3월 26일)에 맞춰 지내고 있다. 이날 추모제에는 전남지사와 장흥군수, 죽산 안씨 문중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취재 열기도 뜨거워 KBS·YTN 등 방송사가 추모제 현장을 중계했다. 3월 1일 한 일간지가 ‘무연고 장흥 산골서 67년째 제사…안중근의 서글픈 가족사’라는 특집기사를 보도한 후 사회적 이목을 끌게 된 탓이다. 안중근 의사 111주기를 맞아 새긴 한두 가지를 살펴본다.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데에 성공한 안중근은 그 자리에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되는 순간까지 "코레아 우라!(러시아 말로 '대한 만세')"를 연호했으며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대한의 독립주권 침탈과 동양 평화의 교란을 자행한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라고 밝혔다
1. 불이 나기 전에 굴뚝을 고쳐라.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은 1910년 2월 14일 중국 땅의 뤼순(旅順) 법정, 사형선고가 내려진 후 안중근 의사는 일본인 변호사의 수첩에 자필로 시 하나를 썼다.
‘굴뚝을 고치고 땔감을 옮겼어도 아무 혜택이 없는데
머리털 그을리고 이마 데인 사람은 큰 대접하는구나.
초나라를 위한 일이었지 조나라를 위한 일이 아니었듯이
일본을 위한 일이었지 대한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네!
이 시는 곡돌사신(曲突徙薪, 구들을 구부리고 땔감을 옮기다)이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를 인용하여 자신의 소감을 적어 내려간 것, 그 사연은 이렇다.
한 나라 때 한 행인이 어느 집 앞을 지나다 굴뚝이 똑바르게 서있고 아궁이 옆에 땔나무가 가득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주인에게 말했다. ‘굴뚝을 구불구불하게 만들고 땔나무는 다른 데로 옮기시오.’ 주인은 그 말을 듣지 않았고, 얼마 뒤 그 집에 큰 불이 나고 말았다. 마을사람들이 달려와 불을 꺼주어 다행히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주인은 잔치를 베풀어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그때 어떤 이가 말했다. ‘예전에 행인의 말을 들었더라면 불이 나지 않았을 테고, 잔치를 베풀어 돈을 쓸 일도 없었을 것이오. 행인의 말은 무시하고, 불을 끈 사람들만 귀하게 대접하니 앞뒤가 안 맞는 일이오.’
여기서 생긴 말이 곡돌사신(曲突徙薪)으로 환란을 미리 예방한다는 뜻,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의거가 이토 히로부미라는 위험한 땔나무를 치움으로써 대한에 불을 내고 나아가 동양평화까지 태우지 않도록 미리 화근을 제거한 일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그 일은 일본이 당할 재앙까지도 미연에 방지한 선각자적 거사라는 것을 일깨고 있다. 안 의사가 예언한 대로 결국 일본은 제국주의 망상에 빠져 온 집안을 불태우고 말았다. 굴뚝을 고친 사람은 무시하고 불끈 사람만 귀하게 여기다가 파국을 자초한 셈이다. 안중근 의사를 흉한이라고 칭했던 일본 지도자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그를 테러리스트라고 부르고 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이 불에 데어 혼쭐이 났는데도 그들은 아직까지 무엇이 화근이었는지를 헤아리지 못한다.(김태관 지음, ‘늙은 철학자가 전하는 마지막 말’에서)
이를 접하며 ‘참새가 어찌 대붕의 뜻을 알랴’는 격언이 떠오른다. 지금도 도처에서 그런 현상을 목도하지 않는가.
2. 안중근 의사 유골은 아직 고국의 품에 오지 못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나라가 주권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순국 111주년을 맞는 안중근 의사의 유언이다. 아직까지 유골은 우리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상황, 안 의사의 유골을 찾기 위해 힘쓰고 있는 분이 있다. 김월배 하얼빈 이공대학교 교수. 다음은 3월 25일, MBC 프로그램 ‘표창원의 뉴스하이킥’ 방송 대담내용이다.
진행자 > 안중근 의사 유골을 찾기 위해서 오랫동안 활동해오셨다. 안중근 의사 유골 발굴,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
김월배 > 안 의사의 유해 발굴은 저 개인만 아니라 모든 대한민국 국민의 무한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저도 국민의 하나일 뿐.
진행자 > 안중근 의사가 돌아가셨을 때 당시 법에 따르면 가족이나 주변 사람이 유해를 돌려달라고 요구하면 인도를 해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그때 인도 받지 못했던 이유가 뭐였는가?
김월배 > 1908년 10월에 제정된 일본 감옥법에 의하면 가족이 원하면 반드시 돌려줘야 하도록 되어있다. 그런데 당시 뤼순 감옥소의 감옥장 구리하라 라는 전옥이 ‘직권으로 처리한다. 그리 알라’하고 가족(두 동생)을 돌려 보내버렸다. 그것이 지금까지 유해를 못 찾은 원인이기도 하다.
진행자 > 그동안 우리 정부도 그렇고 2006년에는 남북이 공동조사를 했는데 왜 못 찾았는지?
김월배 > 1986년에 북한에서도 중국 뤼순에서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을 위한 조사를 했고 2006년에 남북공동조사단을 구성해서 유해발굴을 하려고 장소까지 결정했는데 실제로는 못하고 2008년에 한중이 공동 작업을 했다. 원보산이라고 하는 곳, 지금은 거기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진행자 > 교수님께서 오랜 동안 연구 조사하고 노력해 온 끝에 안중근 의사 매장 추정지로 뤼순감옥 구지묘지가 남은 유일한 희망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이곳이 어떤 곳인가?
김월배 > 저 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나 관계자들도 뤼순감옥 구지묘지를 유력한 후보지로 생각한다. 현재 정확한 매장지를 알리는 사료가 없다. 지금 뤼순감옥 주변이 개발되고 있다. 2008년에 다롄시 문물관리위원회에서 뤼순감옥 구지묘지를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현재까지 대부분 발굴되지 않았다. 일부 훼손되긴 했지만 그나마 현장이 보존돼 있는데 한국 정부에서 노력하여 중국 정부에 지표투과조사, 맨홀조사 방식으로 신청한 것으로 알고 있다. 거기만 현재 사료가 입증돼 있지 않기 때문에 기대하는 유일한 희망이란 뜻이다.
진행자 > 660평이 되는 구지묘지에 대해서 중국 정부와 협조가 이뤄져서 발굴이 이뤄진다, 그러면 유골이 발견될 수 있겠고. 그 유골들이 여러 구가 있다면 그중에서 안중근 의사 유골인지 어떻게 확인하나?
김월배 > 안중근 의사가 순국할 당시는 대부분 통관이라고 해서 원통형의 유골을 묻었으나 안중근 의사는 침관으로 해서 모양이 다르다. 그 모양을 지표투과조사를 통해서 ㅁ자 형태 직사각형 형태의 관이 나오면 그 부분을 파서 현재 채취한 안중근 의사 후손의 DNA와 일치하는 지를 확인하면 된다. 또 중요한 것은 1971년에 공동묘지를 팠을 때 중국인 이름의 약병이 나왔다. 약병에 안중근이란 이름이 적혀있으면 이보다 더한 증거가 없지 않겠는가? 네 번째는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으로 잘라진 왼쪽 무명지, 네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조합이라면 안중근 의사로 단정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행자 > 아직 마지막 기대와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되겠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발굴을 위한 중국의 협조, 남북정부와 국민들의 노력이 유종의 미를 거두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늘이여, 도우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