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끈 떨어지고 턱 빠지고
김문억
우리 동네 점순네는 가난하지만 따뜻한 집 이었다
제 흥을 못 이겨서 자지러지는 노고지리가 보리 목을 뽑아 올리는 봄날이 오면
온 동네가 꽃무리로 향기 가득 고여 온다.
텃밭을 갈아엎어 상치 쑥갓 씨 뿌려 놓고 여린 잎이 파릇파릇 올라오는 청 유월이 되면 앞산에서는 뻐꾸기 울음 구성지고 느닷없는 소나기가 냅다 후려 치고 지나가는 산골 마을이다.
흐물흐물 하도록 메주콩을 푸욱 삶아 절구통에 집어넣고 해 종일 뒤적거리며 찧어서 뭉친 메주 덩어리를 짚으로 묶어 매어 단다. 위 몫에서 겨우내 발효시켜 뽀얀 곰팡이가 실면 삼짇날 날 잡아서 밀물 드는 시간 맞춰 간 맞춘 소금물에 날계란 한 개 띄워 보고 찰랑찰랑 물을 붓는다. 양지바른 장독에서 장 맛 깊이 드는 유월 아침안개 걷히고 나면 한낮은 제법 덥다.
소담스레 피어 오른 치마상치 푸른 잎을 조심조심 뚝뚝 딴다. 쑥갓 순도 섞어 따고 손자 놈 고추 닮은 풋고추 몇 개 뚝뚝 따서 누르지 말고 사븐사븐 대바구니에 담아온다. 스리살살 수북하게 담아온 푸성귀를 씻는다. 울안에 고였다가 흘러가는 샘물에 흔들어 헹구어서 남은 물 끼 휙휙 뿌려 깨끗이 담아낸 뒤
장독 뚜껑 살금 밀치고 검정 숯덩이 밀쳐 두고 노르스름 곰삭은 된장 한 손 덜어 내어 새악시 덧니 같은 풋마늘 콩콩 찧고 하얀 허리 쪽파 몇 뿌리 도마 위에 눕혀놓고 또르르 똑딱 똑또르르 잘뚝잘뚝 썰어 내어 된장 뚝배기에 담뿍담뿍 보기 좋게 집어넣어 보글보글 끓인다. 끓어올라 넘치려다 안 넘치고 안 넘치다가 스리슬쩍 넘치기도 하면서 맛나니 양념 된장 냄새로 코끝이 벌름거릴제 잘 씻은 보리쌀을 반질반질 윤기 도는 옹솥에 잘 앉혀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면 잉걸불은 고쿠락 앞으로 끌어내 놓고 남은 열기로 진드근히 뜸 들인다.
시아버지 밥 먼저 뜨고 남편 밥 나중 뜨고 상차림을 하다가 남편 밥 시아버지 밥 눈대중이 어리어리 은근 슬쩍 바꿔 보며 상차림을 끝내면 마루에 둘러 앉아 점심밥을 자시는데
한 차례 소나기가 지난 뒤라 향긋한 흙 내음이 코끝으로 풍겨 올 즈음 뻑뻑꾹 뻑뻑~뻑뻑 허허! 봄바람 난 저 뻐꾸기란 놈 이 산 저 산 날며 울 제
푸욱 퍼진 보리밥이 그릇마다 고봉으로 솟았는데 잘 못 건드렸다가는 돌팔매 맞은 올챙이 알갱이 마냥 와르르 무너질 참이라 왼 편에서 오른 편으로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조심조심 숟갈질을 하는데 뜨락에서 놀던 목 짧은 강아지가 밥 냄새를 맡고 섬 가마니 오르다가 미끄러지고 오르다가 미끄러진다. 그 놈이야 넘어져서 코가 깨지든 말든 풋풋한 상치 몇 장을 겹겹으로 추려 올려 멍석 깔듯 처억 펼친 손바닥 위에 올린다. 쌉스름한 쑥갓 순을 엄지손가락으로 뚝뚝 분질러서 상치 위에 겹쳐 얹는다.
조심조심 퍼서 올린 보리밥 한 술을 상치 쌈 위에 부려 놓은 뒤 양념 된장 반 숟가락을 더운 밥 위에 덮쳐 얹고 상치 보따리를 만든다.
어깨 한 번 슬쩍 들어 올렸다가 내리며 숨 한 번 크게 들어 쉰 뒤 황우 장사가 가마니 쌀 들어 올리듯 상치 쌈을 먹을 참이다. 두 손으로 번쩍 쌈 보따리를 들어 올려 하마 같은 입들이 쩍쩍 벌어지는데 시아버지는 여물 씹는 황소 흰 구름 올려다보듯 여유가 만만하고 합죽이 시어머니도 밀가루 반죽처럼 입이 쩍쩍 벌어진다. 벙어리 밥 먹듯이 모두 숟가락만 바쁘다. 입이 미어지게 쌈밥을 우물거리는 점순네 남편 네는 눈물을 질금거리며 비저 나온 밥 알갱이를 연신 손으로 밀쳐 넣는다.
첫 애기 출산한지 얼마 안 되는 점순네도 쌈밥을 잘 여며서 발그레한 입 속으로 들어가는 참인데 눈꼬리에 뭔가가 스치는 것이 있다. 힐끔 돌아보니 하필이면 그 때에 호랑나비 한 마리가 훨훨 홰를 치며 울타리를 막 넘어가던 참이었다. 등불처럼 화안하게 호박꽃이 피어있는 울타리를 휘청거리며 넘어가는 나비 한 마리를 흘겨보던 점순네가 그만 본의 아니게 시아버지 앞에서 눈을 까뒤집게 된 형국이었다.
풀 먹은 옥양목 같은 흰 눈동자를 드러내며 쌈밥을 먹다가 일순간 시아버지와 눈길이 마주친 점순네가 무안해서 쩔쩔매는데 때 맞춰 뒤란에서 울어대는 낮 닭 울음소리가 정적을 깨며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 해 온다.
때는 청 유월이라 모내기도 마무리 되고 찌는 더위로 잠시 농한기를 맞는 때다. 마침 옆 집 사는 박서방네가 아래 마을 사는 사돈네 환갑잔치에 가기 위해 행장을 잘 차리고 점순네 삽작 머리를 막 지나가려든 참이었다. 점순네 온 가족이 마루에 모여 앉아 어찌나 맛있게 쌈밥을 먹고 있던지 자신도 모르게 가던 걸음을 멈추고 서서 바라보게 되었다. 주먹만 한 쌈밥이 너무 맛있게 입으로 들어갈 때 마다 박서방네 입도 저절로 따라 벌어지는 바람에 질끈 동여 맺던 갓 끈이 그만 툭! 떨어지면서 수염달린 턱도 따라서 아래로 툭! 빠지고 말았다지 뭐 유 글쎄!
그 담은 나도 몰러유
김문억 산문 집<스트리킹 하는 시인.2014파루>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