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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London)
영국의 수도.
잉글랜드 남동부에 템스 강 연안에 있다.
한때 대영제국의 산업·상업·정치의 중심지였다. 잉글랜드 남동부에 템스 강을 끼고, 북해로부터 65km 떨어져 있다.
수목이 울창하고 휴식공간이 많아 도시경관 자체가 비교적 여유있는데다 사람들은 오랜 전통을 지닌 시민의식을 갖고 있어 도시적 삭막함이 덜한 편이다. 대부분의 다른 거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20세기말의 눈부신 발전을 따라잡는 데는 실패했으나, 지난 세기들의 많은 장점을 보존하는 데는 성공했다.
지도를 보면 그레이터런던은 들쭉날쭉한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센트럴런던은 불규칙한 모양으로 중앙에 자리잡고 있으며 전체면적의 1/6 정도를 차지한다. 보통 런던 시로 부르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지역이며 현재는 금융기관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 센트럴런던에 포함된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매년 점점 더 많은 초고층 빌딩들이 들어서고 있음을 알 수 있으나, 도시 규모에 비해서는 적은 편이다.
런던에서는 빌딩보다 일반주택 건설이 더 활발한데, 초기에는 대부분 단독 세대를 위한 주택들로 지어졌으나 최근에는 1층 혹은 2층짜리 다세대용 아파트로 개조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인구밀도가 높은데도 공한지가 많다. 템스 강은 런던에서 가장 규모가 크게 연속되는 휴식공간이다.
그동안 런던의 도시 외양을 바꾸어놓고 도시생활에 영향을 주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25년간은 제국이 해체되고 세계적 지배력이 상실되는 시기였다. 3세기 이상에 걸쳐 형성되어온 국가적 사명감과 가치관도 갑자기 사라져갔다. 런던 시민들은 저임대료 주택의 대량 건설을 포함한 거대한 사업을 통해 일단 전쟁 피해가 복구되자 이젠 또 전쟁 후유증으로 극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려야 했다.
전시중의 군가와 연설에서 약속했듯 다시 광명은 찾아왔으나, 새로운 신세계에 대한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유명한 영국식 '그럭저럭 해나가자 주의' 대신 과학적 계획주의가 생겼고, 표면적으로나마 '유능한 비전문인주의' 대신 '전문기술인의 프로주의'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실수와 서투름은 여전했다.
20세기 중반은 당황과 모방 그리고 정력적 임시변통의 시대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고 이때에 런던 사람들은 오랜 미덕인 자신감과 상상력 그리고 용기를 재확인했다.
경관
템스 강은 서에서 동으로 뱀처럼 구불구불 굽이쳐 흐르는데, 이 강이 지나는 타원형 백악분지는 오래되지 않은 침전물 층이 두텁게 쌓여 있으며 제3기 시신세(BC 5억 780만~3억 660만)의 단단한 바위층, 모래, 점토, 자갈과 템스 강의 충적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센트럴런던은 오랜 세월에 걸쳐 쌓였으며, 그 높이가 6m에 달하는 '매립지'로 이루어졌다. 최초의 촌락들이 형성된 곳은 급수가 잘 되는 자갈 언덕들 위였으며, 점토로 만든 벽돌을 이용한 도시 건설이 여러 세기에 걸쳐 계속되었다.
템스 강 유역의 기후는 전형적 영국 제도 동단의 기후이다. 센트럴런던 중앙에 위치한 세인트제임스 공원의 연평균 강우량은 597㎜이나, 템스 강 유역 다른 지역의 강우량은 해마다 변화한다. 1월~7월의 평균기온이 3℃~22.5℃로 기온은 온난하고 변화가 심하지 않은 편이며, 시 외곽 지역보다는 도심 지역이 더 따뜻하다.
1956년 대기정화법령이 통과된 이래, 인근 교외에서는 물론 도심에서도 햇빛을 볼 수 있는 날이 많아졌으며 겨울철의 평균 시계거리 또한 1.6km에서 6.4km로 늘어났다. 스모그 현상도 사라져, 이제는 그 유명한 '황색의 농무(濃霧)'현상이 드물게 나타난다.
런던은 이곳에서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동식물들로 인해 동식물학자들이 깊은 관심을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런던 시 안에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 식물은 약 269종에 달하며, 시 외곽에 서식하고 있는 식물의 수효는 그보다 훨씬 많다. 세인트폴 성당에서 32km 이내 지역에는 1900년 이래 1,835종의 현화식물과 양치식물, 221종의 이끼류, 68종의 우산이끼가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길들인 야생 비둘기, 유럽산 참새, 흰머리 갈매기, 찌르레기과 새 등의 4종류가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다. 템스 강에는 울지 않는 벙어리 백조가 있고 런던 탑에서는 갈가마귀를 볼 수 있다. 런던 시에서는 갈색 쥐, 검은색 쥐, 집쥐도 발견된다. 고슴도치와 박쥐도 가끔 모습을 보이고 있고 여우는 그 수효가 상당히 증가했으며, 나비와 나방도 자주 눈에 띈다.
주요 지역
템스 강과 그 주변 지역
전통적인 식민지 건설 유형에 따라 외국 침략자들(AD 43년에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의 침공이 있었음)은 도로와 강물이 교차하는 지역을 택해 그곳 원주민을 축출하고 다리와 도시(론디니움)를 건설했다.
로마 시대에는 강물의 폭이 지금보다 넓고 깊어, 로마인들은 요새화한 도시 내부로 배들을 끌어들일 수가 있었다. 로마인들은 이 도시를 무대로 무역을 행했는데, 로마인들이 철수한 이유와 그 시기가 명확하지 않은 앵글로색슨 시대에도 무역은 계속되어 이 도시를 부유하고 강대하게 만들었다. 웨스트민스터 강나루에서 3.2km 상류에 있는 지역에 로마 시대에는 조그만 촌락, 색슨 시대에는 종교 공동체, 11세기에는 왕실 건물이 들어섰으며, 후에는 웨스트민스터 시로 성장했다.
상업 도시와 왕실 도시 사이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시에 수문이 달려 있는 귀족과 주교들의 저택들이 건설되었으며, 마침내는 채링크로스 광장으로부터 런던 시의 10대 성문 중 하나인 템플바에 이르는 도로가 놓이게 되었다. 18세기 종반 무렵까지는 도로보다 강이 주요 수송로 및 교역로로 사용되었다.
런던 시에서 사우스워크 자치구 사이의 템스 강 유역에 놓인 다리는 모두 목조였으나, 1176~1209년에 마침내 석조의 런던다리가 세워졌다.
런던 다리의 19개 아치에는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는 템스 강물이 휘몰아쳐, 1831년까지만 해도 작은 보트로 '쏜살같이 다리 사이를 통과하는 게임'이 스릴 넘치는 런던 풍물의 하나였다. 이 다리 위에는 1170년에 순교한 성 토머스 아 베켓을 기리는 예배당이 있다. 곧이어 요새화된 양끝 성문 사이로 난 도로 양편에 상점들이 들어섰고 그 상점들 위로 주택들이 세워졌는데, 1358년 기록에 의하면 그 수가 독립된 건물 138개동에 달했다.
여기에 엘리자베스 여왕 1세 시대에는 물레방아 제분소들까지 들어서 이 다리 주위는 더 혼잡해졌다. 1760년 다리 위의 주택들은 철거되었으며, 같은 해에 성문들도 철거되었다. 그러나 다리는 그후 71년간을 더 존속해 총 수명이 622년에 달했다. 1969~72년에 런던 다리는 서서히 복원·교체되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타워다리는 1886~94년에 호레스 존스 경에 의해 런던 다리에서 2.4km 하류에 세워졌다.
그는 타워 다리 건설 이전에 이미 빌링스게이트·스미스필드·레든홀 시장 등을 설계한 뛰어난 설계자였다. 타워 다리는 런던 다리나 시에서 소유·관리하는 2개의 다리인 블랙프라이어즈(1756~69)와 사우스워크(1813~19)보다 외양이 훨씬 정교하다.
노르만인의 영국정복 이후 템스 강을 통한 외국과의 무역은 증가했으며, 런던 다리에서 바다 쪽을 향한 강 일대에 대한 제방공사가 12세기에 착공되어 14세기에 완공되었다. 이 제방공사를 위해 남쪽 제방 쪽으로는 로더하이드와 뎁트퍼드, 그리고 북쪽 제방 쪽으로는 아일오브독스에 있는 습지를 110㎢ 매립했다.
이 지역은 몇 세기가 지난 후에도 습지로 남아, 항만시설 건설을 위한 굴착공사가 수월했다.
이후 템스 강에서의 제방 공사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재개되었는데, 이무렵 런던은 도시 쓰레기를 이 강에 쏟아붓는 일을 중단했으며, 대형 배수관도 설치했다. 1864~70년 템스 강 북쪽 제방 곳곳에, 둑과 그 위로 난 도로(블랙프라이어즈 다리로부터 웨스트민스터 시에 이름)를 지탱하는 돌들 사이로 대형 배수관들이 설치되었다.
약 15ha 면적의 습지가 매립되어 공원용지가 되었다. 1874년에는 새로운 대형 배수관이 설치된 첼시 제방이 완공되었다. 국회의사당 일대에서만 잠시 그 연결이 중단되는 이 제방의 총연장은 7km이다. 국회의사당 맞은편 강기슭에는 1869년 홍수조절용으로 앨버트 제방이 건설되었으며, 이 제방은 1910년 일반인 통행로로 이용하기 위해 주회관 앞쪽이 확장되었다. 템스 강에서 마지막 제방공사가 행해진 것은 1951년이다.
강기슭을 일직선으로 고르고 돌로 둑을 쌓음으로써 런던 다리까지 차오르던 조수가 약 30km 상류에 있는 테딩턴 둑까지 차오르게 되었다. 런던이 1세기에 약 30cm씩 내려앉고 있기 때문에, 런던 다리에서의 평균 만조는 1세기에 약 90cm씩 높아지고 있다. 런던 다리에서의 만조 높이는 하류 쪽으로 69km 가량 떨어져 넓은 하구에 자리잡고 있는 사우스엔드에서보다 1.2m정도나 높다.
런던에 있는 제방들은 1971년 이후에 높이를 45cm 정도씩 높이는 증축 공사를 했는데, 이는 템스 강을 따라 북해로부터 거센 파도가 밀려올 경우 생길지도 모를 홍수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런던 다리로부터 12.8km 하류에 위치한 울리치 지역의 실버타운에는 이동 가능한 홍수 방벽이 만들어져, 1982년부터 가동되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여왕 1세 재임기간중에 런던 다리와 런던 탑 사이의 북쪽 제방에 '법으로 인가된 부두들'을 건설하여, 관세 상품을 취급하는 선박들은 모두 이들 부두만을 이용하도록 했다.
그러나 곧 이들 부두만으로는 이용 선박을 모두 수용할 수 없게 되어, 1663년 의회는 양쪽 제방에 법으로 인가된 또 다른 부두들을 건설하도록 허용했다. 부두 이용률은 1700~70년 사이에 배로 증가해, 1770년경 어퍼풀(런던 다리로부터 1.6km 남짓 아래에 위치한 유역)은 수용 허용치인 600척을 훨씬 상회하는 1,776척의 선박을 수용하고 있었다.
선박들이 싣고 온 상품들은 작은 보트에 옮겨 실어져 부두로 수송되는데, 선박들이 한꺼번에 몰려 몇 주일씩 수송이 지체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해적들의 습격을 받아 약탈을 당하기도 했다.
1802년 영국은 아일오브독스 북단에 웨스트인디아 부두를 건설해 선박에서 곧장 경비병들이 배치된 부두로 짐을 하역해 안전한 창고에 보관할 수 있도록 했다. 1805년에는 웨핑에 런던 부두가, 1806년에는 아일오브독스 하류에 이스트인디아 부두가 건설되었다. 현재 웨스트인디아 부두를 제외하고 19세기초에 건설된 부두들은 모두 폐쇄되었다.
오늘날 런던 항은 3그룹의 부두, 즉 아일오브독스의 웨스트인디아·밀월·포플러 부두와 약 9.6km 하류의 로열빅토리아·로열앨버트·킹 조지 5세 부두, 그리고 런던 다리로부터 약 41.6k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틸버리 부두를 중심으로 운용되고 있다. 1909년 런던항구관리공사(PLA)가 창설되면서 템스 강 및 런던 항에 대한 운영권과 모든 부두에 대한 소유권을 넘겨받았다.
1960년대에 템스 강 상류에 있던 부두들이 폐쇄되고 강변지역에 대한 개발이 진행되면서, 쇠퇴일로를 걷던 부두 및 공장들과 낙후된 주택사업으로 대변되던 몇 km에 달하는 이 지역 일대가 활력이 넘치는 모습으로 일신하게 되었다. 강력한 오염방지 정책에 힘입어 템스 강도 깨끗해지게 되었다.
런던 시
흔히 '스퀘어마일'(The Square Mile)이라고 불리는 런던 시는 실제에 있어 1평방 마일보다 조금 크다(2.7㎢). 1,000년 전통을 자랑하면서도 늘 개혁의 기수였던 이 구시가지는 고대의 우아함과 현대의 효율성, 그리고 구시대의 관행과 새로운 시대의 자극이 한데 뒤섞여 있는 세계적인 금융 중심지이다.
이제는 영국에서 원자재가 생산되지 않고 실제 교역되는 상품들 중 극소수만이 런던 항구에서 취급되지만 세계 상품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시의 중심부에는 공한지가 있고, 이 공한지에서 8개의 거리가 사방으로 뻗어 있다. 남쪽에는 런던 시장 관저가 있다. 이 건물은 18세기 중엽 조지 댄스(1대 시장)가 시장의 관저·사무실·법정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설계한 것인데 지금까지도 시장으로 선출된 사람은 재임 1년 동안 이 관저를 사용하고 있다. 시장 관저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유서 깊은 금융가인 롬바드가가 있다.
콘힐과 스레드니들 가 사이에는 1567년 토머스 그레샴 경이 세워서 3번 복구된 '왕립 거래소'의 건물이 있다. 길 건너편에는 1층 높이의 고풍스런 18세기 건물 가리개 뒤에 20세기의 영국은행 본점이 있다. 건물 동쪽 좁은 길 건너편에는 증권거래소(1968)가 우뚝 서 있다. 북동쪽으로 조금 가면 런던 조합이 있던 자리에 1425~45년 처음 세워져 2차에 걸쳐 복원된 동업조합 건물이 있다.
런던 법인은 영국 내에서 설립허가 없이 활동하는 유일한 법인체이다.
유권자들은 시의회 의원과 시참사회 의원들을 선출하는데, 동업조합 조합원들은 그 의원들 중 매년 2명을 시장 후보로 지명하며 시참사회 의원들은 2명 중 1명을 시장으로 선출한다. 현존하는 동업조합은 90개 이상이며, 빠르게는 12세기에 설립된 종교 및 사교 우애단체들을 모체로 한다. 약제사·금세공사·생선업자·안경제조업자 등과 같은 전문직업인들의 조합은 지금도 자신들의 분야에서 제품의 고품질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일부 동업조합에서는 직업훈련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장학금을 지급하거나 각급 학교와 대학에서의 연구·교육을 지원하는 곳도 있다.
템플 성당은 런던 시의 권력구조에서 또다른 일면을 대변하고 있다.
원래 템플 기사단의 잉글랜드 본부였으나 훗날 기사단이 해체된 후 최초의 법학회관이 되었는데, 변호사들이 이곳에 사무실을 열어 다음 세대의 법정 변호사들을 훈련시켰다. 이러한 법학회관의 전통은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법학회관의 4개 건물인 미들템플·이너템플·링컨스인·그레이스인 등은 평화로움·예의바름·일관성의 보고이다. 링컨스 인과 그레이스인은 런던 시의 북쪽 경계지역에 위치해 있다. 법학회관은 18세기 들어 거의 전부 개축되었으나, 템플 성당에는 13세기에 증축되어 여러 곳을 개축한 노르만식 둥근 교회가 그대로 남아 있다.
플리트가 맞은편에서 챈서리로(대법관청로)가 시작되는데, 그 서쪽에는 왕립법원이, 동쪽에는 공문서국(Public Record Office)이 있다.
웨스트민스터 시
국왕이 움직일 때마다 따라 움직이던 법원이 관례를 깨고 웨스트민스터 시에 자리를 잡자, 대법관청이나 재무재판소(Exchequer) 같은 행정관서들이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16세기에 들어설 무렵에는 국회제도가 정착되었다. 상원에 의석을 가진 귀족들이나 교회 고위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저택이 권력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는 것이 여러 면에서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런던 시와 웨스트민스터 시를 잇는 스트랜드가에는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주택이 들어섰다. 그러나 9세기 무렵 앵글로색슨 시대에 이미 로마 시대의 성벽 밖에는 세인트클레멘트데인스 교회구 교회가 있었고 이 사실은 9~11세기에 간헐적으로 계속된 덴마크의 점령기록에서 확인된다.
이 교구 교회의 '쌍둥이'격인 교회로 스트랜드가 훨씬 서쪽에 있는 세인트메리르스트랜드 교회에 대해 처음 언급된 것은 1147년이다. 오늘날 이 두 교회는 도로 중앙 조그만 안전지대에 서 있는데, 세인트클레멘트 교회는 15세기에 세워진 탑 주변이 1680년 렌에 의해 개축되었고, 세인트메리 교회는 1714~17년 제임스 깁스에 의해 개축되었다.
스트랜드가 남쪽에는 서머싯 하우스가 있다.
1776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아마 현대에 들어와 특별히 정부 관공서로 지어진 최초의 건물일 것이다. 이 건물은 윌리엄 챔버스 경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유언장 보관소가 있다. 스트랜드가의 이 지역에서 북쪽과 서쪽으로 길이 약 1.2km, 폭 약 0.8km 정도로 평행4변형을 이루고 있는 지역은 런던의 극장과 영화 개봉관이 대부분 몰려 있는 곳이다. 스트랜드가는 거의 19세기 중엽까지 런던 최고의 극장·호텔·쇼핑 가 중 하나였다.
웨스트민스터 시는 영국 내 모든 도시 중 가장 부유한 곳이다.
이 시는 템스 강을 따라 템플 성당에서 첼시 다리까지, 북쪽으로 소호와 할리가를 거쳐 그랜드유니온 운하까지 뻗어 있다. 이 도시에는 영국에서 가장 이상적인 주거지가 있으며, 별로 쓸모없는 땅이라 해도 웨스트민스터 내에 위치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상당한 가치를 지닌다. 웨스트민스터 시에는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영국성공회), 웨스트민스터 성당(로마 가톨릭), 버킹엄·웨스트민스터·세인트제임스 궁전들, 주요 정부관서들, 영국 제1의 쇼핑 구역들, 뉴스코틀랜드야드, 화려한 호텔들, 마담 튜소의 밀랍 세공품 박물관, 4개의 미술관 등이 있다.
미술관들 중 트라팔가 광장에 있는 국립미술관과 복스홀 다리 근처에 있는 테이트 미술관은 세계적 수준이다.
쇼핑 구역 및 시장들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소매 쇼핑 중심지는 옥스퍼드가로서, 1909년 '은퇴한' 시카고 소매상 고든 셀프리지가 이곳에 최초의 고급 백화점을 지었다.
그밖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쇼핑가로 리전트가, 피카딜리 광장, 색빌가, 지금도 유명한 재단사들이 직접 세계 최고의 신사복을 만들어내고 있는 유명한 새빌 가 등이 있다. 벌링톤아케이드, 본드 가, 저민가 등도 유명한 쇼핑 구역으로 손꼽힌다. 피카딜리 광장 동쪽 채링크로스로 일대는 세계적인 중고서적 집결지이다.
켄징턴하이가와 나이츠브리지 또한 사람들이 즐겨 찾는 쇼핑 구역이다. 나이츠브리지에 있는 헤로드 백화점은 서유럽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가장 유명한 백화점이다. 동쪽으로 1.6km 가량 떨어진 하이드 공원 남쪽으로 나이츠브리지·벨그라비아·첼시 지역의 대부분이 모여 있는 일대에는 나이츠브리지 상점들이 밀집되어 있다. 센트럴런던에는 지금도 몇 개의 야외시장이 남아 있는데, 대부분은 과일과 채소만을 파는 청과물 시장들이나 여러 상품을 취급하는 종합시장들도 있다.
가장 유명한 2개의 종합시장은 이스트엔드가의 페티코트로(미들섹스가)와 노팅힐게이트에서 조금 들어간 포토벨로로에 있다.
이스트엔드가
런던의 이스트엔드가는 런던 시 동쪽 끝에 있는 성문 너머, 리 강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다.
중세에 색슨족의 세인트던스탄 교회를 중심으로 한 방대한 스테프니 교회구의 일부분이었고, 17세기초에 이미 빈민들이 모여드는 지역이 되었다. 19세기에 각종 부두가 건설되면서 임시고용의 기회가 늘고 의류·가구 산업이 발전하자, 점점 더 많은 빈민들이 임시고용의 기회를 찾아 앞을 다투어 이곳에 모여들었다.
일찍이 병원들과 자선단체들이 세워졌지만 과밀한 주택에 배수시설조차 전혀 없는 열악한 환경 때문에, 1840년 베스날그린의 평균 사망연령은 16세였고 노동자계층의 사망자 중 반수가 5세 이하의 어린이였다.
19세기 후반에 수많은 이주민 집단이 계속 이 지역으로 몰려들었는데, 그들은 가난 외에 인종적·종교적 편견과 외지인에 대한 배타감에까지 시달려야 했다. 이 시기에 살인자로 악명높은 '잭 더 리퍼'가 출현했으며, 사람의 생명은 싸구려로 취급됐다.
이스트엔드는 제2차 세계대전중 런던에서 가장 철저히 폭격되고 파괴된 지역이었다. 재건 당시 이 지역의 인구밀도는 훨씬 떨어졌고, 많은 가정이 이 시기에 건설된 정부지정 뉴타운에 새로운 집과 직업을 갖게 됐다. 인구는 물론 산업도 타워햄릿 자치구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전되기 시작했다.
이 자치구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스피틀필즈는 17세기말 위그노 비단직공들이 프랑스를 떠나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계속 이주민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가장 최근의 이주민들은 인도인과 파키스탄인들로, 이들은 초기에 건너온 서인도인들과 어울려 살고 있다. 20세기초에 아일랜드인과 동유럽 유대인들도 소수 이주해왔다.
사우스런던
그리니치·루이셤·사우스워크·램버스·원즈워스 등과 같은 런던의 안쪽 자치구들은 템스 강 남쪽 제방에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사우스뱅크(South Bank)라는 말은 1951년 전영국 페스티벌을 위해 지어진 음악·미술 복합단지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사우스뱅크 일대에 세워진 최초의 상설 건물은 로열페스티벌홀로서 세계 유수의 관현악단과 발레 공연단들이 이 홀에서 매년 450여 회의 연주회와 공연을 갖는다. 퀸엘리자베스 홀(1967)과 그 홀의 실내악 공연장인 퍼셀룸에서는 각각 1년에 300~400회의 연주회가 열린다.
1968년에 개장한 헤이워드 미술관에서는 중요한 미술 전시회들이 열린다. 국립영화관은 세계 각국에서 제작된 고전 명화들을 상영한다. 수년간 올드빅 극장(1816)을 빌려 쓰던 워털루 역 뒤편의 국립극장은 1970년대 중반 사우스뱅크 워털루 다리 동쪽에 있는 현재의 건물로 이사했다.
블랙프라이어스 다리와 런던 다리 사이에 있는 강변지대를 뱅크사이드라고 하는데, 이 지역에는 셰익스피어글로브 극장과 그 경쟁 극장들이 들어서 있다.
런던 다리의 끝에 위치한 이 지역 일대에는 14세기에 초서, 17세기에는 셰익스피어가 언급했던 여인숙들이 몰려 있다. 특히 조지 여인숙은 1667년의 사우스워크 대화재 후 재건되어, 1889년 건물 윗부분을 헐어낸 채 지금까지도 영업중에 있다. 1721년 사우스워크의 유명한 의과대학 부속병원인 가이스가 건립됐다. 사우스워크와 램버스는 모두 제2차 세계대전중 심한 폭격을 받았다.
지금도 많은 사우스런던 주민들이 쇼핑을 하는 브릭스턴 지역은 런던 시에서 흑인들이 모여 사는 대표적 지역이다. 이 지역의 많은 광장들이 새로 수리되었다. 템스 강 상류 쪽에 인접한 원즈워스 자치구와 다소 격이 떨어지는 배터시 공원은 템스 강 기슭 일부를 공유하고 있다.
광장들과 공원들
건축가 인니고 존스(1573~1652)의 유작들이 소수 남아 있다.
그리니치 자치구에 있는 퀸스하우스(1616)와 화이트홀 궁의 연회장은 현존하는 그의 대표작들로,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고전양식을 그 나름대로 해석하여 건축한 역작으로 손꼽힌다. 존스가 런던을 위해 기여한 것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시 광장이다. 메디치가(家)의 코지모 1세가 건축한 다르메 광장을 모방한 이 광장은 이후 200년간 런던 시 건축 양식의 모델이 되었다. 코벤트가든 광장(1630)도 유명한 존스의 걸작이다.
런던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들 중 일부는 귀족들과 왕족 출신 지주들을 위해 지어진 것이다.
1660년 사우샘프턴 지역 백작은 블룸스베리 광장을 만들었는데, 이 광장은 결혼으로 인해 베드퍼드 공작가에 넘어갔다. 귀족과 왕족 출신 지주들은 일련의 화려한 정원 광장들을 만들었다. 그중 베드퍼드 광장(1775)은 런던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 중 하나로 손꼽히며, 러셀 광장(1800)은 가장 규모가 큰 광장이다. 교사·학자·화가·배우·작가 등이 오랫동안 블룸스베리 광장에 출입하면서 이곳의 독특하고 친근한 분위기가 더욱 정감있게 되었다.
1907~30년 이 광장의 인근 개인 저택에서 회합을 가지곤 하던 예술가와 지식인 모임은 블룸스베리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 모임의 유명한 인물들로는 버지니아 울프, E.M. 포스터, 리턴 스트레이치, 존 메이너드 케인스, 아서 윌리 등이 있다. 또 이 지역에는 런던대학교와 그 단과대학, 버크벡 칼리지, 런던 위생·열대의학대학, 극예술 로열 아카데미, 슬레이드 미술학교, 코토울드 연구소의 미술관 등이 있다.
블룸스베리 광장의 명소 중 하나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대영박물관(1753)이다. 1823~52년 이 박물관의 현재 건물이 건설되었으며, 박물관 부설도서관은 1973년 대영도서관에 합병되었다. 대영박물관은 이집트·서아시아·동아시아·그리스·로마·영국 등지의 고미술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원래 모든 광장은 개인 소유의 정원이나 공원으로 지어졌으며, 광장 문 열쇠를 갖고 있던 소유주 외에는 누구도 출입할 수가 없었다.
레스터 광장의 경우도 원래 공동 목축지였던 땅을 레스터 백작이 자신의 도시 저택을 치장할 목적으로 탈취한 것이다. 이 광장은 1680년에 저택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1870년에 비로소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링컨스인필즈는 1894년까지 사유지였다. 정원들에는 현재까지도 대부분 울타리가 쳐져 있으며, 정원 소유주들 외에는 아무도 출입할 수가 없다.
모든 광장 중 가장 유명한 트라팔가 광장은 늘 대중에게 공개되어왔고, 정원도 딸려 있지 않다.
트라팔가 해전(1805)의 영웅 호라티오 넬슨 제독의 동상이 승전기둥 위에 서 있으며, 포장이 잘 된 넓은 광장 주변에는 7개의 주요 간선도로가 뻗어 있다. 이 넓은 광장에서는 매년 수많은 대중집회가 열리며, 쉬어가고 싶은 관광객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휴식 공간이 되고 있다. 트라팔가 광장 북쪽 대부분을 국립미술관이 차지하고 있으며, 바로 그 옆에는 국립초상화미술관이 서 있다.
이 미술관들 동쪽에는 제임스 깁스가 지은 세인트마틴인더필즈 교회(1722~26)가 자리잡고 있다. 그 서쪽에는 1910년에 세워진 해군본부 아치가 우뚝 서 있어, 버킹엄 궁으로 이르는 산책로인 맬 입구를 장식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권력의 중심부인 화이트홀 궁으로 통하는 길이 나타난다. 이 궁은 지금도 정부의 행정관서 부지로 이용되고 있다.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대 건축물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건축물들 사이사이에는 여전히 정부 업무를 보고 있는 연회장(1619~23)이나 호스가드퍼레이드(1760) 같은 우아한 18세기 건물들이 산재해 있다.
매일 오전 11시가 되면, 머리에 깃털을 꽂은 근위기병대 군인들이 검은 말을 타고 경비를 선다.
훨씬 남쪽에는 옛 재무부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의 대부분은 현재 내각 관청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내각 관청은 통로를 통해 총리 관저인 다우닝 가 10번지에 있는 각의실과 연결되어 있다. 가까운 의회광장을 따라가면 국회의사당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이 나오는데, 국회의사당 시계탑에는 13t이나 되는 유명한 시계 빅벤이 매달려 있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은 참회왕 에드워드가 건설해 1065년에 헌당식을 가졌으며 상당 부분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수많은 영국의 초기 집권자들과 국가적 영웅들이 이 성당에 묻혀 있다.
화이트홀에 있는 관청과 다우닝가 뒤편에서 버킹엄 궁이 있는 서쪽으로 가면, 세인트제임스 공원이 나타난다. 이 공원은 런던의 서쪽 끝 지역에 아름다움과 평온함을 더해주는 6개의 중앙왕립공원 중에서도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아름다운 공원이다.
세인트제임스 공원 북쪽 경계지역에는 유명한 산책로 맬이 있다. 맬은 버킹엄 궁 앞의 퀸빅토리아 기념관까지 통하는 화려한 공식행사로이다. 1703년 버킹엄 공작에 의해 건설된 버킹엄 궁은 1762년 조지 3세가 구입한 뒤, 빅토리아 여왕에 의해 왕의 런던 거주지가 되었다. 이 궁에 왕이 머무르고 있는 동안에는 지붕 위에서 왕기(王旗)가 펄럭인다.
버킹엄 궁의 정원 옆에는 화려한 그린파크 공원이 있고, 그린파크에서 도로 하나를 건너면 유명한 하이드 공원과 켄징턴 공원이 있다.
한때 헨리 8세의 방대한 금렵지 중심부로 웨스트본 강과 티번 강에서 용수를 조달하는 하이드 공원과 켄징턴 공원은 합쳐서 총면적이 249ha이다. 하이드 공원 남서쪽 모퉁이에는 공개질의가 행해지는 유서깊은 노천광장인 마블아치와 연설자 코너가 있다. 이곳에서 잔디와 아름다운 숲을 지나 3.2km 정도 걸으면 켄징턴 공원 남서쪽 모퉁이에 다다르게 된다. 켄징턴 공원 안의 이탈리아풍 수생식 정원에서는 롱워터가 흘러나온다.
이 롱워터는 한때 하이드 공원 안쪽까지 흘렀으며, 서렌타인 호라 불렸다. 켄징턴 공원은 19세기 중엽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이 정원의 유명한 앨버트 기념관은 높이가 약 53m이며, 실물보다 조금 큰 175개의 인물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앨버트 기념관에서 0.4km 이내에 로열앨버트 홀, 자연사박물관,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 유명한 여러 영국 공공건물 등이 있다.
마블아치 북쪽에는 과거 헨리 8세의 금렵지 중 일부였던 리전트 공원이 있다.
이 공원에는 왕립 동물협회 동물원과 리전트 운하(그랜드유니언 운하)가 있다. 앞서 말한 동물원은 매우 시설이 잘된 중급 규모의 도시 동물원으로 왕립 동물협회 소유의 대규모 동물원은 휩스네이드에 있다. 인근에 위치한 소호는 오래전부터 외국에서의 이주민들을 위한 특별 휴양지였다. 처음 이곳을 찾은 외국인은 16세기의 종교전쟁을 피해 피신온 프랑스인 망명객들이었다. 1677년에는 그리스인, 19세기에는 이탈리아인들이 이곳을 찾았다. 이들 3개 민족은 지금도 지저분한 나이트클럽들과 옛 모습이 남아 있는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보헤미아인들 거주지에 모여살고 있다.
지금은 이들 3개 민족 외에 홍콩에서 온 중국인들의 수효도 갈수록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외곽에 있는 왕립공원은 모두 4곳으로 이들은 그리니치·리치먼드·햄프턴코트·부시 공원이다.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은 그리니치 공원으로, 런던 다리에서 9km 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니치 공원에는 그리니치 천문대가 있는데, 이 천문대는 국제협정에 따라 본초자오선의 기준이 되어 그리니치 표준시의 근거가 되었다.
1948~58년 왕립천문대는 이스트서식스에 있는 허스트몬코옥 성으로 이전되었다. 리치먼드 공원에서 1.6km 정도 아래쪽에는 큐 정원(과거의 왕궁이 있기는 하나 왕립공원은 아님)이 있다. 이 정원 안에는 왕립식물원, 4개의 박물관, 연구·훈련 센터, 세계 도처의 나무와 식물 등이 있다.
행정
그레이터런던은 행정적으로 제각기 다른 12개의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기 및 가스 공급과 병원 서비스 부문에서는 4개의 전기국, 3개의 가스국, 4개의 대도시지역 병원국을 거느린 행정지역의 일부이다. 런던 시는 자체 경찰력과 시장을 수반으로 하는 자체 행정조직을 갖고 있다. 런던의 교육 부문은 이너런던(Inner London) 교육 당국이 관할하며, 아우터런던(Outer London)의 자치구들은 자체 교육체제를 갖고 있다. 업무별 관할구역은 우편 지역이 1,460㎢, 런던 시의 경찰업무와 별개인 메트로폴리탄 경찰 지역이 2,007㎢, 런던 운송국 지역이 2,304㎢, 메트로폴리탄 상수도국 지역이 1,450㎢이다.
주민
그레이터런던 집합도시 안의 인구감소 현상은 런던 시의 경우 1851년, 이너런던의 경우 1901년, 아우터런던의 경우 1951년 이래 계속되고 있다. 집합도시를 에워싸고 있는 광범위한 외곽지역은 계속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데, 이 외곽지역은 그린벨트 지역 너머에 있는 위성도시들도 포함하며, 그 규모는 런던에서 빠져나오는 주요 간선도로와 철로를 따라 계속 확대되고 있다.
매년 수십만 명의 주민들이 도시를 빠져나가고 있으며, 그보다 적은 수의 '새로운 런던 시민'들이 제2차 세계대전중의 폭격과 도시재개발사업으로 옛 '마을'의 정취를 잃은 도시지역으로 유입되고 있다. 호텔과 사무실같이 현대적 건축물이 건설되면서 사람들의 사고방식에도 변화가 생겨, 노동자 계층은 과거 그들이 갖고 있던 열등감에서 해방되었다. 보다 개선된 주택보급 및 교육, 완벽한 의료혜택, 사회보장 등은 오랜 사회복지제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개선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예전에 비해 훨씬 활동이 약해지긴 했으나 공립 및 사립 학교 출신 동창생 모임들은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회원들을 돕고 있다. 사회는 한층 개방되어 '좋은 가문, 학교, 연대'가 더이상 출세에 필요한 요건은 아니다. 그러나 센트럴런던의 여러 지역은 여전히 공작가들의 소유로 되어 있고, 이사회를 귀족들로 채워넣어 대외적으로 과시하려는 회사들도 아직 많다.
사회 개방화와 대조되는 어두운 부분도 있어, 과거의 식민지 출신들로 대부분 유색인종인 이주민 소외계층이 가장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미천한 일을 하며 비참하게 살고 있다. 당국에서는 이주민들이 인종차별로 해를 입지 않도록 법으로 보호하면서, 런던 생활에 더 빨리 동화될 수 있도록 특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역사
도시 건설과 초기 이주민
실질적인 런던의 역사는 로마 점령기로부터 시작된다.
오늘날 런던 다리에서 콘힐에 이르는 그레이스처치가는 로마 점령 당시 런던 다리로부터 로마인들이 바실리카풍의 교회를 세웠던 론디니움의 중심부까지 뻗어 있었다. 로마인들이 이곳에 정착한 지 17년 후 부디카 여왕이 이끄는 이케니 족(族)이 반란을 일으켜 이 지역을 약탈했다. 그들이 방화한 흔적을 따라가 보면, 당시에 이미 서쪽 월브룩을 지나 훗날 세인트폴 성당이 들어선 언덕까지 촌락이 형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방화사건이 있은 이후에, 중앙통로 길이가 약 150m에 이르는 보다 큰 규모의 바실리카풍 교회가 건설되었다. 이 교회가 서 있던 자리에 지금은 철과 유리로 이루어진 1881년도 작품 레든홀마켓이 자리잡고 있다. 도시를 방어할 목적으로 북서쪽 경계에 크리플게이트 요새가 지어졌으며, 성벽은 2세기말에 비로소 건설되었다.
지금도 바비칸(런던월) 경계지역과 타워힐에 있는 조그마한 공원에 가면 그 당시 성벽의 잔해를 볼 수 있다. 이 성벽들이 중세에 재건·확장되면서, 성문의 추가 건설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올드게이트, 올더스게이트·비숍게이트·크리플게이트·루드게이트·뉴게이트 등과 같은 로마 시대 성문들은 그대로 보전되었다. 로마 군단은 5세기초에 로마로 철군했는데, 이후 2세기 동안 런던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2세기 동안에도 로마인들이 건설한 거리의 양식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중세에 건설된 칩사이드가와 캐논가는 로마 점령기의 동서 도로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런던이 언제 어떻게 색슨인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밝혀주는 자료는 전혀 없으나, 교황 그레고리 1세가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로마에서 영국으로 파견한 597년에 이미 런던은 다시 중요한 도시가 되어 있었다. 켄트의 왕인 애설버트 1세는 세인트폴 성당을 지었으며, 604년 멜리투스가 이 성당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다음 세기에 성인 비드는 런던을 육지와 바다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시장이라고 묘사했다. 이후 런던은 1세기 이상 앵글로색슨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알프레드 대왕(849~99) 시대 및 데인족과의 전쟁 기간중 다시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중세의 런던
런던의 재정적·군사적 중요성과 이에 따른 정치적 중요성은 노르만족의 영국 정복(1066) 시기에 분명해진다.
정복왕 윌리엄 1세가 취한 첫 조치들 중 하나는 런던 시민들에게 참회왕 에드워드 밑에서 누렸던 것과 똑같은 법적 지위를 허용하고, 런던 시민에 대한 어떤 음해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헌장에 서명한 것이다. 그가 런던 성벽 바깥 쪽에, 런던 탑에 딸린 위협적 아성으로 노르만 양식의 화이트타워를 세운 것도 그만큼 런던의 잠재적인 힘을 중시한다는 적극적 의사표시였다.
화이트타워는 높이 27m 가량의 4각형꼴(가로 35m, 세로 32m 가량) 건축물이다. 성벽의 바닥 두께는 약 4.5m이고, 꼭대기 두께는 약 3.3m로, 각 모서리마다 탑들이 서 있다. 리처드 1세는 새로운 축성법을 익혀 십자군원정에서 돌아와 이 아성 중앙탑 둘레에 일정한 간격으로 동심형 탑을 세우는 작업에 착수했는데, 이 작업은 헨리 3세 때에 완료되었다.
이후 사실상 모든 왕이 자신의 재임기간중 런던 탑에 조금씩 손질을 가해, 이 성채는 거의 모든 시대의 영국 건축양식이 종합된 건축물이 되었다. 제임스 1세 때까지 공식적인 왕의 거주지였던 런던 탑에는 왕립 조폐소, 왕립 동물원, 공문서 보관소, 천문대, 병기창 등이 들어서 있다. 흔히 이곳을 역사가 오래된 처형장으로 생각하나, 실제 런던 탑의 1,000년 역사 중 이곳 감옥에서 집단 처형이 있었던 것은 겨우 6번뿐이다.
그밖의 모든 처형식은 엄밀히 말해 런던 탑 성벽 밖에 있는 타워힐에서 이루어졌다. 이 성채는 예로부터 늘 국사범들을 투옥하는 감옥역할을 해왔다. 처음 이 감옥에 투옥된 국사범은 더럼 주교(1101)이며, 마지막은 나치 독일의 제2인자였던 루돌프 헤스(제2차 세계대전중 투옥)였다. 이곳에는 현재 왕실 보석들과 역사적 가치가 있는 영국의 무기·갑옷·투구 등이 진열되어 있다.
1135년 헨리 1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런던 시민들은 직접 영국왕을 선출할 수 있는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해 스티븐을 왕으로 선출했고, 그는 3주 후에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1136년경에는 대화재가 발생하여, 런던의 많은 목재가옥과 세인트폴 성당이 불에 탔다. 복구사업이 진행되면서 석조 및 타일로 된 가옥들, 포장된 거리, 뚜껑이 없는 하수구, 도랑 등이 건설되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거리가 정화되었다.
12세기말에 덴마크 상인들이 들끓던 런던에 독일인들 수효가 늘어났다. 독일인들은 1598년까지 템스 강변 스틸야드에 자신들의 무역거점을 갖고 있었다. 그밖의 중요한 무역상들로는 프랑스 가스코뉴인, 플랑드르인, 북부 이탈리아인 등이 있었다. 북부 이탈리아인들은 은행가로서 지위가 확고해지자, 1290년 유대인들을 약탈·투옥·추방했다.
유대인들은 이후 수세기 동안 런던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
1400년 110개에 달한 런던의 동업조합들은 빈궁한 군주들을 돈으로 매수해 점점 더 많은 자유를 획득해나아갔다. 그들은 왕이 자신들의 일에 간섭치 못하게 하였으며, 더 나아가 런던 시의 자치권을 얻어냈다. 1192년 최초의 런던 시장인 헨리 피츠에일윈이 시장업무를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332년부터 시의회가 있었다는 정확한 증거자료가 남아 있다. 나라 전체가 불안하면 런던의 안정도 깨어지기 때문에, 런던은 강력하고 안정된 중앙정부를 지원했다. 이런 현상은 특히 에드워드 2세(1327 폐위)와 리처드 2세(1399 폐위)의 폐위, 영국 농민의 반란(1381), 잭 케이드의 반란(1450) 등과 같은 사건에 강력하게 작용했다.
튜더 왕조 시대의 런던
16세기 중엽에 런던은 무역과 인구 면에서 급성장했다.
1530~1600년 런던 시민의 수효는 3배로 증가했다. 초과 인구의 경우 처음에는 종교개혁 당시 헨리 8세에 의해 몰수되었던 종교기관 부지에 생활터전을 잡았다. 런던 시는 종교단체들의 자선이 끊김으로써 생겨난 공백을 메우기 위해, 1547년 빈민구제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기근 때에는 빈민들에게 곡물을 배급해주었으며, 5개의 왕립병원인 세인트바돌로매·크라이스트·베들레헴(베드램으로 알려진 정신병원)·세인트토머스·브라이드웰 병원을 새로 만들거나 재건했다.
이 시기에 설립된 민간 자선시설들은 지금도 계속 운영되고 있다. 무역업은 무스코비사(1555), 후에 레반트사로 바뀐 터키사(1581), 동인도회사의 독점사업으로 인해 더한층 번창했다. 1605년에 런던의 인구는 놀랍게도 무려 7만 5,000명이 되었으며, 인구억제법이 있는데도 런던 성벽 밖에 또 15만 명이 모여 살았다.
원래 런던 다리 가장 끝에 있는 사우스워크는 런던의 26번째 자치구가 되었다. 비단 직조, 유리 및 마졸리카 도자기 제조 등과 같은 새로운 업종들이 대부분 동업조합의 제한규정을 벗어난 곳인 성문 밖에서 생겼다. 헨리 8세가 남쪽 제방 뎁트퍼드에 해군 공창을 건설하자, 북쪽 제방 강기슭에 있는 웨핑 여기저기에 오두막이 들어섰다.
1529년 헨리 8세가 울시 추기경의 요크 저택을 화이트홀 궁으로 개조하고 들판 너머에 세인트제임스 궁을 짓기 시작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시는 왕궁을 중심으로 도시 전체의 윤곽이 보다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웨스트민스터 시와 런던 시 사이에는 귀족들의 대저택이 세워지기 시작했는데, 그 대저택들은 강가 쪽으로 정원이 있었고 각기 자체 수문이 달려 있었다. 이 저택들 반대편 스트랜드가에는 법원 개정기간중 마을에 머무는 지체높은 사람들의 고상한 임시 거주지들이 늘어서 있었다. 런던이라는 지명은 오래지 않아 런던 시와 웨스트민스터 시, 인가가 빽빽히 들어선 그 중간 지역 모두를 포함하는 지명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재임기간(1558~1603)중 런던은 전 영국을 지배한 전성기를 맞는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런던의 시민군·재력·후원 등을 자신의 통치기반으로 삼았다. 1585년과 1589년 해외파병 인력의 1/4을 조달했고, 스페인의 침공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무장한 자체 '시민군'을 조직했다.
17세기의 런던
시민군의 전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찰스 1세는 무역으로 생기는 런던의 이익을 감소시키는가 하면 의회에 대해 그러했듯이 런던의 특권을 경시하다가 1642년 런던을 공격했으나, 턴엄그린에서 런던 시민군에게 저지당했다. 요새화된 도시 런던은 왕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가장 강력한 의회편이 되었고, 왕당파와의 싸움에서 의회파가 승리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1664~65년에, 1348년의 흑사병 이래 자주 런던을 괴롭혀온 전염병이 기승을 부려 런던 시민 7만 5,000명이 사망했다.
그 이듬해에는 9월 2일부터 9월 5일까지 계속되는 대화재가 발생하여 도시의 4/5를 불태웠다. 도시 북동쪽과 서쪽 끝 모서리의 불타지 않은 지역들에서부터 복구사업이 시작되었다. 합리적인 거리 복구계획은 채택되지 않았으나, 구가로들을 따라 새로 건설된 거리는 이전보다 더 넓어지고 곧아졌다. 1667~71년 대부분의 새 주택들이 건설되었다. 이때의 집들은 벽돌로 지어졌으며, 목골조 건물은 건축허가가 나지 않았다.
규모가 작은 많은 행정교회구들이 합병되었고, 일부 교회들은 화재로 인한 피해를 면해 50개의 교회만이 재건되었다. 세인트폴 성당은 새로 건설되었다. 이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들 설계와 건설 감독을 맡은 사람은 수학자·천문학자·물리학자로서 비공식적으로 건축을 배운 크리스토퍼 렌 경이었다(런던 대흑사병, 세인트폴 대성당).
세인트폴 성당 안에는 렌 경이 새겨넣은 "낭독자여, 기념물을 찾으려 한다면, 그대 주변을 둘러보라"라는 문구가 있다.
런던 시 전체는 거대한 렌 경의 기념물이다. 그가 건축한 교회는 소박한 네덜란드풍의 교회로부터 고딕 양식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다양한데, 거의 모두 고전양식을 자기 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통일된 건축 이념을 토대로 한 웅대한 일련의 변주곡처럼 모두 동일한 섬세함과 샘솟는 듯한 활력이 담겨 있다. 세인트폴 성당의 둥근 천장은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것 중의 하나로, 성당의 나머지 부분과 마찬가지로 바로크풍의 우아한 분위기가 깔린 고전양식이 기조가 되고 있다.
대화재를 기념하기 위해 건설된 기념기둥은 렌 경의 설계기법이 인용된 것으로, 처음 화재가 발생한 왕의 제과점이 있던 푸딩로에 세워져 있다. 이외에도 그는 런던 시 밖에 4개의 교회를 지었으며, 첼시에 있는 로열 병원, 켄징턴 궁의 일부, 그리니치 병원, 그리니치 왕립천문대, 햄프턴코트 궁 등을 건설했다.
찰스 2세 재임기간중에 왕에 의해 박탈당했던 런던 시의 권리가 회복되었다.
제임스 2세 또한 1688년 자신이 도피하기 이전에 박탈했던 런던 시의 권리들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나 런던 시민군의 삼엄한 경계 속에 성직자와 세속 영주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오렌지 공 윌리엄(이후에는 영국의 윌리엄 3세)에 대한 충성을 런던 시청에서 맹세했다.
1694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40명의 런던 상인이 모여 잉글랜드 은행을 설립했다.
이후 런던의 자금시장은 영국의 국사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영국 전체에 미치는 런던의 또다른 영향력은 훌리트가에 모여 있는 전국적 규모의 일간지들에서 비롯된다. 1785년 블랙프라이어스가 안쪽에 세워진 〈타임스 The Times〉 건물은 1974년에 새로운 건물로 옮겨졌다.
현대도시의 발전
조지 4세가 왕위를 계승한 1820년에 이르면, 런던의 전체적인 성격도 많이 변화한다.
인구는 110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1660년에는 도심지 사람들이 여름 행락지 정도로 여겼던 마을이나 교회도 없는 조그만 마을들이 인구밀집지대로 바뀌었다. 건물들 중 일부는 대지주들의 잘 계획된 작품이었고, 일부는 탐욕스런 소지주들의 볼품없는 작품이었다. 베드퍼드·포트맨·파운들링 등의 지역에는 거리 모습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가로와 광장들이 들어섰다. 반면 동쪽의 스테프니 및 베스널그린 지역 일부에는 잘못 지어진 연립주택들이 들어섰다.
현재의 킹스크로스와, 세인트팽크러스 기차역 부근에 자리잡고 있던 아거 시는 아주 볼품이 없었다(도시화, 도시계획).
1689~1820년에 있었던 변화는 특별한 계획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런던 시 당국은 자체 행정력이 확고했고 활동력도 상당했다. 중세 이후 조금도 변하지 않은 런던 시 경계선 밖에 있는 지역들에 대한 행정 서비스와 교통편의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유력한 부동산 개발업자들은 의회로 하여금 자신들이 직접 세금을 징수할 수 있도록 하는 지방세법을 통과시키게 해, 도로포장·거리조명·거리청소·경비대(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구성된 단체) 유지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했다.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건설한 거리들은 부분적으로는 그러한 서비스들 때문에 인기가 있었으며, 그런 서비스들은 대부분 효율적으로 관리·유지되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후세를 위해 거리를 깨끗이 하고 빈민가를 없앴다. 사회적·재정적·상업적 측면에서도 런던은 영국의 중심지였다.
런던은 동·서 인도 및 세계 각국과의 교역에서 생긴 이익으로 축적한 부를 토대로 연극, 문학, 기타 예술 분야에서 영국 제1의 도시로 군림했다.
데이비드 개릭, 올리버 골드 스미스, 새뮤얼 존슨, 조슈워 레이놀즈 경, 가구 제작인들, 은세공사들, 런던에 거주하거나 잠시 방문한 명성 높은 외국 음악가들 등이 이 도시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한정된 면적 때문에 점점 더 많은 문제들에 봉착하게 되었다.
조직화·혁신·개혁
진료소가 새로 지어지고 병원도 확장공사를 하거나 새로 지어져 사망률은 떨어졌지만, 과거 강가의 도시였던 런던이 계속 발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행정·교통체제·위생시설 등이 필요했다.
이 모든 면에서 런던은 1820~1914년에 점진적으로 힘겹게 발전했다. 인구가 1821년의 122만 5,694명에서 1901년에는 658만 6,269명이 되었다. 그러나 런던에는 서서히 혁신이 일어났다. 1829년에는 내무장관을 장으로 하는 중앙집권화된 런던 경찰이 발족, 비조직화되었던 과거의 경비대와 행정교구의 치안담당관 역할을 대신했다. 희미한 석유등 대신 가스등이 들어서 거리조명을 대신하는 혁신이 일어났으며, 가스 광원(光源)과 코크스회사(1812)가 설립되었고 그뒤를 이어 런던 전역에 유사 업체들이 생겨났다.
또 합승마차(1829)가 도로 교통에 혁신을 일으켰으며, 그뒤 10년도 채 되지 않아 철도 수송이 도입되었다. 1845년에 실시된 공중위생 검사 결과, 런던의 공중위생이 가장 밑바닥 수준임이 드러났고, 그결과 1852년에는 깨끗한 식수 보급을 위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1855년 제정된 법령(런던 관리법)에 따라, 수많은 소규모 지방 행정단위들이 통합되었고, 잡다한 시민 참정권이 모든 지방세 납부자에 의한 직접선거로 대체되었다.
대하수관 건설과 같은 주요공사는 런던 공사국 소관이 되었다.
C. J. 블롬필드 주교, 로버트 필 경, 에드윈 채드윅(후에 에드윈 채드윅 경으로 추대됨), 샤프츠베리 백작 등의 개혁론자들에 의해 시작된 이러한 변화들은 그 여세를 몰아 19세기 내내 계속되었다. 새 교회, 새 학교, 보다 나은 치안, 대하수관,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 등등이 개혁론자들의 숙원사업이었고, 트라팔가 광장, 제방, 빈민가를 가로지르는 샤프츠베리로와 채링크로스로 등이 그들의 가장 커다란 업적이었다.
행정체제의 변화는 급격하지 않게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1889년에는 런던 주의회가 런던 공사국의 업무를 떠맡게 되었고, 1899년에는 런던 행정법이 제정되어 교구들이 런던 자치구로 바뀌었으며, 1902년에는 여러 상수도회사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공공기관인 런던 수도국이 되었다.
공공사업과 민간사업이 계속되면서 런던의 외양에 변화가 일었다.
1863년에는 증기철로선인 메트로폴리탄이 개통되고, 1869년에는 홀본 고가다리가 놓여졌다. 템스 강에 연이어 새로운 다리들이 건설되었고, 배터시, 웨스트민스터, 블랙프라이어스, 런던 다리 등이 개축되었다. 여러 해에 걸친 토론과 여론 호소 끝에, 런던 외곽 다리들이 공공관리체제로 들어갔고, 통행료 징수소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또 남부의 간선철로 대부분이 북쪽으로 템스 강을 지나 런던·빅토리아·채링크로스·블랙프라이어스·캐논스트리트 역까지 연결되었다.
이 시기야말로 왕성한 창의력과 막대한 자본이 풍부한 노동력과 결합해 새로운 기술, 값싼 수송비, 막대한 자원 등을 최대한 활용한 시기였다. 기술적인 진보도 끊임없이 이루어져 런던 시민의 생활과 도시 외양을 바꾸어놓았다. 값싼 교외 열차 덕택에 사람들은 근무지에서 점점 더 멀리 떨어져서도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1870년에 제정된 교육법에 따라 설립된 런던 교육국은 모든 런던 시민에 대한 초등교육 의무제 시행에 착수했다. 열차와 말이 끄는 전차는 1861년 도입 당시의 시행착오를 거쳐 1870년대에는 그 중요성을 인정받게 되었으며, 20세기초에는 전기가 동력원으로 개발되면서 유력한 대도시 운동수단으로 부상했다.
이윽고 전기는 지하 교통의 동력원이 되어, 1890년 11월 4일에는 웨일스 공에 의해 킹윌리엄가에서 스톡월에 이르는 세계 최초의 지하전철이 개통되었다. 1914년 이전에 가솔린을 동력원으로 하는 버스가 등장함으로써 현대 런던의 교통체제 윤곽이 완성되었고, 여전히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런던 교외 지역들에 대한 교통로도 활짝 열렸다.
런던의 발달과 함께 필연적으로 도심지역의 땅값이 치솟아 소규모 주택 대신 수많은 대규모 사무실, 공장, 창고 등이 건설되었고, 보다 나은 주택보급 정책과 거리 개량을 위해 공공·민간 자본이 끊임없이 투자되었다.
공습으로 런던에서만 2,600명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한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발전이 잠시 중단되었으나, 전쟁 후에는 오히려 그 발전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한 국가의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의 수도였던 런던은 자체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공공기관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통합과 확대의 시대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은행에서 병원, 그리고 전화교환국에서 발전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것이 확대되었다. 1850년대에 이미 널리 알려진 교통체증이 교통당국의 교통합리화정책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에는 악화되었고, 1939년에 집합도시 런던의 인구는 800만 명을 넘어섰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재건
공중폭격에 의한 대규모 파괴와 주민 소개를 유발시킨 제2차 세계대전으로 현대 도시 런던은 역사상 가장 큰 퇴보를 하게 된다.
공중폭격으로 3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5만 명 이상이 중상을 입었다. 대부분의 공공건물이, 런던과 스테프니 지역의 경우에는 가로망이 모두 파괴되었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과 국회의사당도 폭격을 받았으나 가까스로 대규모 파괴는 면했고, 세인트폴 성당과 시청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반주택과 템스 강 항만시설들은 폭격으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많은 피난민들이 하나 둘 다시 돌아왔는데, 이들은 심각한 주택난과 목재의 건조부패에 시달려야 했다.
대부분의 건자재가 부족해 애를 먹기는 했으나, 이미 과거에 세워놓았던 도시계획과 각종 조사에 힙입어 복구사업이 즉각 시작되었다. 도시 및 농촌 사업계획법(1944)과 연이어 1947, 1954, 1959, 1968년에 나온 관계법들은 복구공사를 위해 유례없이 강력한 원자재 구입 및 공사 명령·통제권을 확보해주었다. 급하게 치러야 할 영국축제(1951) 때문에 로열페스티벌홀과 랜스버리가 지어졌다. 그러나 전후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사업들로는 새 주택건설을 위한 대규모 투자, 각종 서비스의 재개, 런던 항의 복구, 계획적인 도시경제의 전반적인 도입, 각종 산업의 런던 외곽 신도시 및 확장도시에로의 지속적 분산 등을 꼽을 수 있다.
면적:런던 시 2.8㎢, 이너런던 321㎢, 그레이터런던 1,579㎢, 인구 7,172,091(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