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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라캉이란 이름이 붙은 책들은 한국에도 적지 않게 출간되어 있다. 다양한 저자와 다양한 분야에 걸친 라캉 연구서들은 현대의 사상적 조류에서 라캉 정신분석이 끼친 영향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라캉 원전의 더딘 번역과 현대 라캉주의 전체 모습을 살필 수 있게 하거나 그 정수精髓를 이해하는 데 토대가 될 만한 텍스트는 드물다는 것은 늘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 해석의 다양성은 당연히 열려 있어야 하지만, 현대적 상황과 대면하여 무엇이 진정으로 라캉적인 태도와 입장인가 하는 물음이 생략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이 결여는 언제까지 방치될 수는 없다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찍이 라캉 세미나의 공저자였으며 라캉의 공식 후계자(라캉의 학통 인정이나 사위로서의 법적 적통 측면에서)로서 라캉 사상의 정통한 해설자로 인정받는 자크 알랭 밀레의 제자인 니콜라 플루리가 밀레의 사상적 개요를 정리한 『상식을 벗어난 현실계-자크 알랭 밀레와 라캉 오리엔테이션』은 현대 라캉주의의 중심 테마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출발점의 의미를 지닌다. 이 작고 간결한 책에는 현대 라캉파의 중심인물인 자크 알랭 밀레의 사상적 진화 과정을 알아 가는 흥미를 주며, 무엇보다 ‘라캉 오리엔테이션L'Orientation lacanienne’이라 부르는 밀레의 라캉 강의의 핵심적 개요가 잘 요약되어 있다.
🏫 저자 소개
니콜로 플루리Nicolas Floury
정신분석가, 철학자. 자크 알렝 밀레의 사상과 라캉 독해의 해설자. 방송 잡지에 정신분석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독과 의존증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2016년 『중독성 주체의 존재론: 부가적 기능De l'usage addictif : une ontologie du sujet toxicomane』을 출간했다.
📜 목차
서문
제1장 철학에서 정신분석으로
사르트르 독해자 밀레
루이 알튀세르에서 자크 라캉으로
진리의 이론
주체 이론
라캉의 논리학적 교리?
정신분석을 향하여
제2장 정신분석 임상
분석경험
정신분석, 심리학, 정신의학
‘섬세한 것’ 혹은 실존의 특이성
정신분석은 특이성의 ‘과학’인가?
정신의학 임상에서 정신분석 임상으로
정신병의 문제
보통정신병
분석경험에서 정동이란
증상과 환상
증상의 형식적 외피
환상의 논리
환상의 횡단: 파스
제3장 라캉적 정치
모택동주의에서 정치 회의론으로
정신분석의 윤리
정신분석에서는 어떠한 정치가 연역될 수 있는가?
문화에서 현실적 난관
욕망은 정치로 회귀하는가?
제4장 현실계를 향하여
정신분석에서 패러다임 변화
의미와 실재적인 것(현실계)의 분리
의미 작용에서 향락으로
신체라는 사건
실재적 무의식
정신분석적 해석에 대한 새로운 귀결
해석 시대의 종언
무의식이 해석을 한다
환상의 횡단에서 증상을 향한 동일화로
정신분석은 위장된 쾌락주의인가?
사람은 누구나 몽상을 한다
참고문헌
역자후기
📖 책 속으로
밀레와 라캉은 어떻게 서로를 알아보았을까? … 자크 라캉의 사상은 체계화되어 있지 않았다. 그 스승은 애매모호해서 손으로 더듬어 알아보아야 하는 상태였으며, 한 가지 생각을 추구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고, 완전히 상반된 생각으로 가는 것조차 주저하지 않았다. 라캉은 그렇게 한 발 한 발 나아가면서 유효한 개념을 구성해 가고 있었다. 따라서 그러한 생각을 풀어서 밝히는 일解明/élucider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 [10-11쪽]
밀레는 1973년 이후 ‘라캉적 오리엔테이션 강의Cours de l’Orientation lacanienne’라는 파리 8대학 강의에서 자기 생각의 주요 부분을 밝혔다. “라캉적 방향 제시는 존재한다. 라캉적 도그마는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존재하는 것은 프로이트라는 사건을 만들었던 텍스트와의 지속적인 대화뿐이다. 즉 경험을 구조화하는 시니피앙의 골격으로, 그 경험을 대결시키는 영구적인 유대교적 성전 해석이 있을 뿐이다”라고 선언적으로 말한다. 해명이란 복잡한 사고의 대양을 잘 헤쳐 나가기 위한 나침반을 만드는 일이며, 그 대양 안에서 자기 자리를 확인해 주는 개념을 창조하는 일이다. [11쪽]
밀레는 라캉이 정신병에 관한 세미나[세미나 3권]에서 ‘현실계le réel’를 정의할 때, 사르트르가 사용했던 ‘즉자’라는 용어를 쓰고 있음에 주목한다. 밀레는 사르트르의 다른 공식에서, 라캉의 주체 개념과 가까운 주체에 대한 구상의 의미를 발견한다. “스스로의 동일성에서 벗어나는 것”, “주체는 자신과 분리되어 있다”, “만약 욕망이 자기 자신에 대한 욕망일 수 있어야 한다면, 욕망은 초월 그 자체가 되어야만 한다” 등이 그것이다. … 욕망은 결코 충족되지 않으며, 우리는 자신과는 다른 것을 욕망하고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생성에 늘 사로잡혀 있는 셈이다. … 여기서 결여로서 욕망의 주체라는 라캉적 구상의 원천을 읽을 수가 있다. 밀레는 사르트르에 대한 라캉적 독해가 존재함을 끌어냈다. 라캉은 사르트르에서 발견한 결여라는 중심 관념에 의지해 무의식의 주체를 구성했다. 실제로 무의식의 주체는 ‘존재결여manque‐à‐être’로서 개념화되었다. 여기서 문제시되는 주체란 당연히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의 주체이며, ‘그것이 있었던 곳에 있어야만 하는’ 주체이다. [24-25쪽]
밀레는 철학에서, 그리고 구조주의적ㆍ논리학적 경향에서 출발하여 정신분석 쪽으로 이행한다. 인간의 조건을 가리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학을 참조하는 것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았다. 비극적인 것을 수학적인 것이나 논리학적인 것으로 치환할 수 없고, 파템pathème-인간이 고통을 당하는 것,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을 마템에 종속시켜서 제시할 수 없었다. 이는 정신분석을 독해하는 철학자의 입장에서 정신분석가 입장으로의 이행으로,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39-40쪽]
정신분석의 주체는 개인이나 인간 그 자체가 아니며 하물며 그 행동도 아니다. 정신분석은 밀레가 끊임없이 반복하듯이 특이적인 것을 다룬다. 그런 까닭에 정신분석은 규범과 무관하다. 캉길렘이 강하게 주장했듯이 개인에게 규범 같은 것이라 할 만한 ‘정신 건강’은 존재하지 않는다. 밀레는 정신 건강이나 그것으로 인도한다고 여기는 치료법과는 대극에 위치하는 것으로 ‘성애적인 것l'érotique’을 강조한다. 성애적인 것은 정신 건강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성애적인 것은, 개개인에게 특이적인 욕망의 장치인 셈이다. 실제로 욕망은 모든 규범 과 대립하는 것이자 ‘규범 밖에 있는extra‐normatif ’ 것이다. 말하는 주체, 말해지는 존재에게 욕망은 본질적으로 누구나 같은 것이 아닌 것, 예외적인 것, 혹은 ‘근본적인 일탈’임을 내포한다. [51-52쪽]
정신병에 관해서는, 분석경험을 통해서 주체를 생산하는 것이 가능한지 어떤지를 알아보는 점이 관건이 된다. 정신분석에서 주체는 밀레가 이해하는 한에서 무의식의 주체이다. … 무의식은 단지 시니피앙의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무의식이 어떤 실체로서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시니피앙)의 효과로서 생성되는 것이다]. 무의식의 주체가 본질적으로 분할되어 있다는 것은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완전히 일치할 수 없고, 언어에 의하여 소외됨으로써 분할되어 있으며, 자기 신체로 환원되지 않고, 무엇보다도 언어에 ‘기생’하는 존재이다. … ($로 표기되는) 무의식의 주체는 태어날 때 주어진(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생산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이러한 주체는 어떠한 디스쿠르의 효과이고, 나아가 어떠한 좌표축에 위치할까? 이 환자에게서 무의식의 분할된 주체를 생산하게 하는 것이 가능할까? 밀레에 따르면, 이러한 의문에 대한 대답은 명확하다. “그리하여 나는 정신병은 주체에 관련된 문제라는 점을 강하게 주장한다. 분명 정신병은 주체의 생산이라는 극한으로 우리를 유도한다.” [64-65쪽]
전이와 해석의 효과를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확정하는 방법에 변화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즉 전이와 해석을 통해서, 주체는 다시 하나의 구조 즉 또 다른 디스쿠르 안에서 살 수 있다. 정신분석에서 디스쿠르는 사회적 유대를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분석적 디스쿠르라는 간접적인 수단을 통해서 새로운 디스쿠르가 출현하고, 거기에서 새로운 유대가 출현하기 때문이다. 분석가는 자신만의 고유한 정치적 실천을 행하며, 이러한 실천은 주체에게 파롤의 효과를 원칙적으로 가져다준다. 분석적 행위는 그 자체로 정치적이며, 이 행위는 필연적으로 분석가의 ‘가장 내밀한’ 판단에 호소한다. [89-90쪽]
정신분석가는 요컨대 무엇도 선택하지 않는 좋은 위치에 있다. 정신분석가는 모든 권력의 막다른 지점을 알고 있기에 좌익도 우익도 아니다. 정신분석가가 얻을 수 있는 정치적 효과는 증례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중요한 점은 주체 각자가 겪는 분석경험을 완수하도록 하는 일이다. … 정신분석은 일종의 탈이상화dés‐idealisation를 유도한다. 정치적 이상이 제시되면 될수록 정신분석은 탈이상화로 흘러가는 셈이다. 밀레는 인생 대부분을 좌익 활동에 바쳤고 68년 5월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인 피에르 빅토르Pierre Victor의 우군이었지만, 분석의 경험 안에서 그 이상은 확실히 사라져 버렸다. [102-103쪽]
과학적 디스쿠르는 사회 변형에 대한 기술 편향적이고 낙천주의적인 관점을 불러왔다. 과학적 디스쿠르는 생시몽파, 오귀스트 콩트, 사회적 기술자들을 낳았다. 그들은 사회가 더 진보할 수 있다고 보고, 인류에게 더 유익한 이상적인 선善을 발견하는 일에 전념했다. 오늘날 이는 시장巿場이 이어받고 있다. 결여를 만드는 사회, 향락이 결여된 사회에서 소비자라는 존재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체는 충실한 향락을 운반해 줄 대상을 끊임없이 찾고, 그 결여를 환각적으로 메우는 일에 지쳐 있다. 사람들에게 ‘즉효성’의 만족을 주는 대상들만이 생산되고, 향락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결여만이 생산된다. 그리하여 시장에는 주체가 쾌락을 맛보는 데에만 도움을 주려는 자율 규제의 지식이 마련되어 있다. 규제와 ‘보이지 않는 손’은 본성상 불공정과 질서의 혼란을 가져옴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선한 것으로 상정된다. 이는 사실상 새로운 ‘지식이 상정된 주체Sujet supposé Savoir’인 것이다. … 이는 현대의 새로운 신적 섭리자providence라고 할 수 있다. [106-107쪽]
현재 시점[2010년]에서 밀레는 진짜 이데올로기 전쟁에 몰두하고 있다. 이 전쟁은 한편으로는 인간 존재를 모든 측면에서 지배하기를 더욱더 요구하는 수치지상주의자나 인지주의자들에 맞서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도처에서 수량화를 내세워 정복하려는 사람들에도 맞서는 것이다. 숫자에 열광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이 기괴하게 왜곡된 모습일 뿐이다. [108쪽]
자크 알랭 밀레의 최근 15년간[1995-2010]의 공헌의 하나는 자크 라캉의 마지막 시기의 가르침을 끌어내어 제시한 점이다. 이 작업은 라캉이 그때까지 구축해 온 모든 것을 재고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를 가리켜 밀레는 “이것은 라캉 대 라캉Lacan contre Lacan이다”라고 말한다. … 밀레는 마지막 시기의 라캉을 통해서 정신분석이 나아가야 할 현실계를 향한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후기 라캉이 보여 주었듯, 현실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향락하는 것으로서 신체를 전면에 부각하는 일이다. 이는 사고의 역사 안에서 들어 보지 못한 실체를 도입하는 것을 의미 한다. 이러한 실체는 철학이 사고할 수 없는 것으로, 정신분석의 고유한 향락을 말한다. [115-116쪽]
향락은 정신분석의 고유한 개념으로 철학과 관련이 없다. 향락은 각자에게 언제나 특이적인 것이기에 그렇다. 향락은 정신분석이 관심을 두는 유일한 실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향락은 선과 악, 쾌와 불쾌를 넘어서 세계에 존재하는 우리의 독특한 존재 방식을 규정한다. 현실계에 의해 방향 지어진 분석의 의도[목표]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타자와 확실히 구별하는 것, 그리고 이 점을 추출해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있다. 결국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이렇게 향락하는 양태이다. 이를 반드시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다른 사람과 똑같지는 않다. 내가 딱히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지금의 나다.” … 반면에 쾌락주의의 향락은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방해받지 않고 누리는 향락이며, ‘[눈에 보이는] 노골적인 욕망’이다. 모든 불쾌를 피하면서 자신의 쾌를 추구하는 것은 정신분석의 목표가 아니다. 정신분석은 행복이나 주체의 건강한 상태를 추구하지 않는다. 분석경험의 끝에서 중시되는 향락은 오히려 향락을 압제적으로 명령하는 현대의 쾌락주의를 단죄한다고까지 할 수 있다. 정신분석은 향락을 금지하지 않는 디스쿠르이며, 향락하지 않는 것도 인정한다. ‘향락하라!’라는 정언명령은 정신분석에 없다. 환상의 횡단이 일단 이루어지면, 좀 더 실재적인 자신의 증상과 동일화가 된다. 이는 분명 향락하는 양태이지만 쾌락주의적 의미와는 다르다. [146-148쪽]
‘사람은 누구나 광인이다. 다시 말해서 몽상가이다’라는 공식은 정신분석의 새로운 임상을 특징 짓는다. 이 공식은 정상성에 참조점을 두고 정신 건강을 기준으로 삼는 것을 근본적으로 거부한다. … 밀레가 부여한 방향성, 그리고 라캉이 밀레에게 부여한 방향성에서 정신분석은 회복[치료]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정신분석은 건강이나 행복을 기대하는 일이 아니다. 분석경험은 자신의 욕망을 다시금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우리를 이끌어 간다. 그리하여 가장 바람직할 경우에는, 분석경험을 통해서 ‘욕망하는 것을 원하거나 원하는 것을 욕망하는’ 데 다다르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분석경험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자신이 ‘치유 불능’이라는 점에 동일화할 수 있다. [150-151쪽]
라캉의 정열은 분명히 ‘현실계’를 향해 있었다. 다시 말해서, 몰의미적인 것l'a‐sensé, 법의 외부를 지향했다. 라캉을 반反철학자라고 일컫는 이유는 분명 현실계를 향한 이러한 정열에 있을 것이다. … 현실계로 방향을 정했던 정신분석에 관련된 모든 패러독스, 그리고 임상 안에서 재발견되는 모든 난점은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현실계는 말해질 수도, 이해될 수도 없는 것이다. 기껏 해야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을 뿐이다. 상식을 넘어선 현실계에 대해서 이 외에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153쪽]
🖋 출판사 서평
라캉 해석의 기준이자, 현대적 상황과의 대결 속에서 ‘라캉의 중재자’를 넘어서 ‘현대의 라캉주의’를 구축한 명실상부한 이 시대의 사상가 자크 알랭 밀레, 그의 제자 니콜라 플루리가 소개하는 자크 알랭 밀레와 정신분석 이론의 개요
라캉 정신분석에 관심이 있거나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자크 알랭 밀레라는 인물을 다 알고 있을 터이지만 그러한 지명도나 그가 현대 라캉주의에서 점하는 위상에 비해 그의 저작이 한국어로 번역되거나 그에 관한 연구가 소개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라캉 원전의 더딘 번역과 함께 현대 라캉주의의 전모를 이해하는 토대가 취약하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물론 라캉이란 이름이 붙은 책들은 그간 한국에서 적지 않게 출간되어 있다. 다양한 저자와 다양한 분야에 걸친 라캉 연구서들은 현대의 사상적 조류에서 라캉 정신분석이 끼친 영향을 보여 주는 것이지만, 현대적 상황과 대면하여 무엇이 진정으로 라캉적인 태도와 입장일 것인가 하는 물음을 추구하기에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를테면 현대 라캉파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어떤 흐름이 생략되어 있는 데서 비롯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인 자크 알랭 밀레는 바로 이 주요한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일찍이 알튀세르의 제자였고 바르트, 캉길렘, 데리다, 푸코의 수업을 듣기도 했으며 모택동주의 운동가였으나 그 후 라캉의 저작과 열정적으로 만나 정신분석가가 된 그는 라캉의 생전에도 라캉 세미나의 편집자 내지 공저자로서 위치를 부여받았을 뿐 아니라 라캉 사후 그의 공식 후계자(라캉의 학통 인정이나 사위로서의 법적 적통 측면에서)로서 라캉 사상의 정통한 해설자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단편적인 소개를 되뇌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어쩌면 자크 알랭 밀레하면 ‘라캉의 사위’를 떠올리는 단순한 연상이 그에 대한 접근을 오히려 가로막는 것은 아닐까 의심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다 라캉을 논리실증주의 안에 가두고 공리화함으로써 라캉만의 풍부함 즉 언표 행위를 사라지게 했다는, 다시 말해 스승의 사상을 교리문답으로 만들어 왜곡했다는 세간의 혐의 같은 게 떠오른다면 난망한 노릇이다.
자크 알랭 밀레는 자신을 단순히 라캉의 중재자라고 정의하지만 그의 역할은 분명 이를 넘어선 것이다. 「구조의 작용」이란 글을 통해 ‘구조주의적 라캉’ 해석을 선보인 치밀한 독법에서 나아가 라캉의 말년 라캉을 라캉과 대립시켜 읽는 일명 ‘라캉 콘트라 라캉’이라는 단절의 독법을 프로젝트로 제시함으로써 라캉 사후 현대 라캉주의의 방향을 암시한 바 있는 그는, 무엇보다 라캉에 의해 승인된 해석가로서 이후 프로이트 대의파École de la Cause freudienne의 지도자로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정신분석의 발전, 그 이론과 임상, 세계정신분석협회Associa- tion Mondiale de Psychanalyse(AMP)를 비롯한 여러 단체의 발전에 공헌한 명실상부 이 시대의 사상가 중 한 사람인 것이다. 그 자신의 표현대로, “말라르메적이고 응축되어” 있는, “헬라클레이토스적 의미에서 어둡고 난해한” 라캉의 존재와 그의 언어를 “볼테르적인 문체로 번역 하여 접근 가능한 것으로” 빛을 비추어 준 그의 해석학적 열정과 노력이 없었다면 라캉의 사상은 그저 난해한 고전으로 파편화된 해석의 대상으로 머물렀을지 모른다. 다양한 주제와 분야의 라캉이 존재할 수 있고(해야 하고), 해석의 다양성은 당연히 열려 있어야 하지만, 현대적 상황과 대면하여 무엇이 진정으로 라캉주의 정신분석의 태도와 입장일 것인가 하는 물음이 생략될 수 없는 한 자크 알랭 밀레가 소환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2010년에 출간된 니콜라 플루리의 『상식을 넘어선 현실계 -자크 알랭 밀레와 라캉 오리엔테이션』은 바로 이 자크 알랭 밀레에 대한 전반적 탐구를 시도한 책이다. 밀레의 제자이며 그 자신 정신분석가인 플루리는 일종의 사상적 연대기 형식을 통해 그간 우리가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자크 알랭 밀레 정신분석 이론의 주요 개념들에 대한 정리를 시도한다. 서두의 고백처럼 이 작고 간결한 책이 밀레의 사상 전체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을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밀레의 사상적 궤적을 스케치함으로써 21세기 초에 시작되어 지금도 실천되고 있는 라캉(적) 오리엔테이션에 의한 정신분석을 조명하는 통해 독자로 하여금 자크 알랭 밀레의 사상을 독해하고 그것을 탐구하고 싶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목적이라는 바람, 딱 그만큼에 부합하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자크 알랭 밀레의 전모가 전해지지 않은 우리에게는 그 자체 훌륭한 입문서이며, 일종의 밀레의 ‘라캉 해설서’(밀레의 라캉 강의는 통칭 라캉 오리엔테이션L'Orientation lacanienne이라 부르기도 한다)로, 나아가 현대 라캉파의 철학과 정치를 사유하는 데 요긴한 텍스트 역할을 해주리라 기대한다.
책은 서문에 이어 전체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은 라캉과의 만남 전후의 밀레를 그려낸다. 언어와 해명에 대한 사랑과 열정에 철학을 선택한 밀레는 교수자격시험을 통과할 무렵 라캉을 만난다. 밀레가 철학에서 정신분석으로 방향을 선회한 이유는 정신분석 안에서 언어가 지닌 미지의 힘을 강력하게 이론화하는 디스쿠르discours를 보았기 때문이며 그는 거기서 언어가 발휘하는 소외의 힘, 운명을 좌우하고 나아가서는 변하게 만드는 힘을, 나아가 즐거움이나 열광의 원천이 되는 해방하는 힘을 발견했다. 분석과 해명에 대한 열정과 야심을 지닌 철학도 밀레는 어쩌면 체계화되지 않은 채 상충된 생각들 사이를 오가며 나아가는 라캉에게 긴요한 존재가 될 터였다. 이후부터 스무 살의 밀레는 예순네 살의 라캉의 충실한 아군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제1장 ‘철학에서 정신분석으로’는 정신분석에 접근하는 밀레의 철학적 토대와 관점을 설명하고 있다. 1964년에서 1968년에 걸쳐 라캉의 저작을 철학적으로 독해하는 밀레의 관점은 모든 점에서 구조주의와 관련되어 있으며 합리주의적 태도를 견지한다. 알튀세르의 제자로서 구조주의의 계보 안에서 주체의 개념이 어떤 논리를 통해 정해져 도출되는지를 보여 주었다는데 그것은 알튀세르를 계승한 구조주의와 라캉의 주체 이론 사이에서 양립 가능하게 하는 체제를 제시하는 일이었다. 고등사범학교 풋내기 철학자였던 그는 곧 구조가 현실계의 전부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연이라는 것은 개념에서 벗어난 곳에 있고, 구조 안에서 이러한 ‘벌어짐fissure’, 구조에 내재하는 균열이 ‘주체Sujet’에 다름 아닌 것이다. 밀레는 규칙에 의거하는 변형을 수용할 수 있게 하는 이론으로서 밀레가 제시한 구조주의적 인과성의 이론(시니피앙과 집합론을 독특하게 접목한)은 ‘구조주의적 라캉’을 한 단계 고양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사르트르에 대한 독해가 역할을 하였다. 밀레는 젊은 철학자 시절에 『존재와 무』에서 라캉적 주체의 이론적 전제들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즉자’ 속에서 결여로서의 욕망의 주체라는 라캉적 구상의 원천을 읽어 낸다. 실제로 라캉은 사르트르의 중심 관념인 결여에 의지해 무의식의 주체를 구성했으며 무의식의 주체는 ‘존재결여’로 개념화되었다. 밀레의 이러한 지적 모색은 라캉에게 다른 차원을 부여했고, 사람들이 라캉을 이해하는 통로가 되었다. 1964년에 시작된 밀레의 라캉의 작업에 대한 구조주의적 구상은 바로크적이며 다양한 의미에서 불가해하고 애매하게 여겨졌던 라캉의 작업이, 그 근저에서 논리가 통하는 엄밀한 것이 됨으로써 한층 더 많은 청중이 이해하게 되었다. 이로써 『에크리Écrits』의 색인을 만드는 일을 라캉에게서 위임받은 그는, 1966년 이후 라캉 곁에서 아주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제2장은 그런 그가 철학자에서 정신분석가로 이르는 지적 여정을 ‘진리의 이론’과 ‘주체 이론’의 심화라는 측면에서 설명한다.
2, 3, 4장은 철학(자)에서 정신분석(가)으로 자신을 규정하는(그가 최종적으로 정신분석가가 된 때는 1980년대 초엽이다) 밀레의 정신분석가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현대 라캉주의를 구축한 라캉 해석가로서의 여정을 요약하고 있다(이는 앞서 말했듯이 자크 알랭 밀레의 라캉 오리엔테이션의 주요한 개념들을 추적해 가는 과정이다). 라캉의 사고를 논리화하려고 한 것은 구조주의 철학자로서의 밀레였지만 그는 나중에 철학적 디스쿠르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선언하고 정신분석으로 전향을 한다. 철학과 정신분석은 서로 이질적인 디스쿠르였다. 따라서 철학자이면서 정신분석가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정신분석적 디스쿠르로 옮겨 간 그는 라캉에게는 교리가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게 된다. “라캉의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Il n'y a pas de théorie de Lacan”는 것이다. 라캉의 일련의 강의는 ‘체계’가 아닌 ‘시리즈’를 형성한다. 라캉 독해의 교훈은 체계를 시리즈로 치환하여, 고정된 것을 소통하도록 하는 것, 획득한 지식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플루리의 이 개론서의 특징은 그것이 이론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데 치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문에서 밝혔듯이 그가 이 책에서 라캉파의 대수학적 문자(마템)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가 다루는 대상인 밀레가 다른 라캉주의 이론가와 다른 특징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죽을 때까지 임상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라캉과 마찬가지로 밀레 역시 이론주의적, 정치주의적 라캉 해석에 몰두하는 자칭 라캉주의자들과 구별되게 정신분석 임상의 현장에서 라캉적 사유의 한계를 극복하고 정신분석의 윤리를 세공해 왔다. 철학은 그 내적 구조와 그 명령에서 상상적인 것(상상계)으로 나아가 버린다. 정신분석 입장에서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해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듣는 것d'entendre이었다. 정신분석은 다른 무엇보다도 각 증례의 특이성 singularité으로 구성되며, 정신분석에 일관된 이론적 작업이 확실히 있다고 할지라도, 우선시되는 것은 언제나 임상이었다. 그러하기에 현대 라캉주의의 이론적 작업은 상징 시스템이 재편성되고 변화하는 문명적 상황에 따라 새로운 임상에 적용되면서 영구히 열린 상태로 남는 것이다. 이 출판사 소개글에서 현대 라캉주의의 진수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진 것도 바로 이 때문이며 여기에서 답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석경험을 무엇보다 중시하며, ‘섬세한 것’ 혹은 실존의 특이성에 주목해 온 밀레는 1998년 ‘보통정신병’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과거에는 기이한 것extraordinaire 이었던 정신병이 우리에게는 보통의 것이 되었다”라고 설명하는 것도 정신질환자를 주체로 복권시키려는 정신분석가 밀레의 일관된 노력의 산물 중 하나이다.
밀레의 관점은 일관되게 현실계를 향해 있다. 임상 현장에서의 전이와 해석의 효과를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확정하는 방법에 변화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정신분석가가 얻을 수 있는 정치적 효과는 증례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으며, 중요한 것은 주체 각자가 겪는 분석경험을 완수하도록 하는 일이다. 정신분석은 정치적 이상주의가 강화되는 현실에서 일종의 탈이상화를 유도한다.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좌익 활동에 바친 밀레가 그 이상주의를 버린 것도 분석경험 안에서였다. 과학적 디스쿠르는 사회 변화에 대한 기술주의적이고 낙천주의적 관점을 불러 왔다. 이는 사회가 진보할 수 있다고 보고 철학자로 하여금 더 유익한 선善을 발견하는 일에 전념케 한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존재 상실을 사회적 이상을 통해 보상받으려 하며 나치의 전체주의는 어쩌면 존재 상실과 사회적 이상의 충원물이 접속되어 빚어낸 환상의 산물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 시장市場이 이어받고 있다. ‘즉효성’의 만족을 주는 대상들만 생산되고, 향락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결여만이 생산되는 시장과 이를 떠받치는 쾌락을 맛보는 데에만 도움을 주는 자율 규제의 지식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새로운 신적 섭리자인 것이다. 밀레는 이러한 현실에서 이데올로기 전쟁에 몰두해 왔는데 그것은 인간 존재를 모든 측면에서 지배하기를 더욱더 요구하는 수치 지상주의나 인지주의자들에 맞서는 것이다. 플루리의 책이 자본주의 전반에 대한 정치적 비판으로 확장되고 정신분석을 자본주의가 봉착한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지렛대로 삼으려 하는 밀레의 인식적 지평의 전체를 보다 구체적이고 역동적으로 설명해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적지 않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자본주의의 미궁 속에서 인간이 주체로서의 욕망을 견지하고 자신의 특이성을 완성하는 방법으로 스스로의 한계와 대면하며 나아가는 현대 라캉파의 중심인물 자크 알랭 밀레의 사상적 개요를 정리해 내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