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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구비 지흠동풍(萬事俱備只欠東風)
일만 만 · 일 사 · 갖출 구 · 갖출 비 · 다만 지 · 모자랄 흠 · 동녘 동 · 바람 풍 |
[뜻]
만사를 두루 갖추었는데 다만 동풍이 부족하다. 어떤 일을 할 때
다른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으나 핵심적인 조건이 구비되지 못한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출전]
위(魏)나라 조조(曹操)는 화북(華北)을 평정한 뒤, 건안(建安) 13년(208) 7월,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형주(荊州)를 공략했다. 그해 8월, 형주의 유표(劉表)가 죽고
그의 막내아들 유종(劉琮)이 뒤를 이었다. 조조의 백만 대군이 형주를 향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유종은 비밀리에 사자를 보내 조조에게 항복해 버렸다. 순조롭게 형주를 접수한 조조는 내친김에 눈엣가시인 유비를 제거하기 위해 유비를 공격했다.
조조는 또 공격의 화살을 손권에게 돌렸다. 유비와 손권은 연합하여 조조에
대항했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적벽대전이다.
마침 조조의 군사들은 모두 북방 출신으로 남방의 풍토에 적응하지 못해 병이 든
데다가 대부분 배를 타 본 일이 없어 배멀미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한겨울인 12월의
찬바람은 바다같이 넓은 장강에 드높은 파도를 일게 했으며, 이 파도에 배가 심하게 요동했기 때문이다. 조조는 이의 해결책으로 배를 모두 쇠고리로 연결한 후,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한덩어리로 만들어 배가 파도에 요동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유비의 군사 제갈량과 동오의 도독 주유는 조조의 선단에 불을 질러 공격하는 화공
작전으로 나왔다. 하지만 당시는 겨울이어서 서북풍만 불고 동남풍이 불지 않았으므로
화공을 할 수가 없어 애가 탄 주유는 앓아눕게 되었다. 제갈량이 문병을 와 ‘동남풍’
처방을 내려 주유의 병을 낫게 해 주는데, 이 부분을 《삼국연의(三國演義)》의
〈제49회 칠성단제갈제풍 삼강구주유종화(七星壇諸葛祭風 三江口周瑜縱火)〉에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각설하고 주유가 산 위에 올라 한참 동안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뒤를 바라보며 쓰러지면서 입으로 선혈을 토하며 인사불성이 되었다. 좌우의 사람들이 주유를 구해 군막으로
데려갔다.
······ 주유는 공명을 들어오게 하라고 지시하고 좌우에 자기를 부축하여 일으키라고 한 후 침상 위에 앉았다. 공명이 말했다. “여러 날 도독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 어찌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예기할 수 있었겠소?” 주유가 말했다. “사람은 수시로 예측할 수 없는
화와복이 있는 것이니 어찌 스스로 보전할 수 있겠소?” 공명이 웃으며 말했다. “하늘에는 예측할 수 없는 풍운이 있으니 사람이 어찌 짐작할 수 있겠소?” 주유는 이를 듣고 실색을 하며 신음 소리를 뱉어 내었다.
공명이 말했다. “도독의 마음속에 번민이 쌓여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소?”
주유가 말했다. “그렇소.” 공명이 말했다. “반드시 화기를 다스리는 약을 써서
풀어야 할 것 같소.” 주유가 말했다.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아무런 효험이 없소.”
공명이 말했다. “반드시 먼저 기를 다스려야 할 것이오. 기가 순통해지면 짧은
시간에 자연히 치유될 것이오.” 주유는 공명이 분명 자신의 마음속 뜻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로써 이를 끌어내기 위해 말했다.
“기를 순통하게 하려면 어떤 약을 먹어야 하오?” 공명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에게 한 가지 처방이 있는데, 도독의 기를 순통하게 해 줄 것이오.” 주유가 말했다.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소.” 공명은 종이와 붓을 달라고 하고 좌우의 사람들을 물러가게 한 후, 몰래 열여섯 글자를 적었다.
‘조공(曹公)을 깨려면 화공을 써야 하는데, 모든 일이 다 구비되었지만
다만 동풍이 부족하구나.’
글을 다 쓴 후에 주유에게 전해 주면서 말했다. “이것이 바로 도독의 병의 근원이오.” ······ (주유가) 웃으며 말했다. “선생이 이미 내 병의 근원을 알았으면 어떤 약으로 나를 고쳐
줄 것이오? 일이 위급하니 즉시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오.” 공명이 말했다. “제가 비록
재주 없으나 일찍이 기인을 만나 기문둔갑의 천서를 전수받아 바람을 불게 하고 비를
부를 수 있다오. 도독이 만약 동남풍이 필요하다면, 남병산에 칠성단을 지으시오.
높이는 아홉 자로 3층으로 짓고, 120명을 시켜 손에 깃발을 들고 주위를 돌도록 하시오.
내가 대 위에서 법술을 부려 3일 밤낮 동안 동남풍이 크게 불도록 하여 도독이 용병하도록 도우면 어떻겠소?”
주유가 말했다. “3일 밤낮까지도 필요 없고 하룻밤만이라도 큰 바람이 불면 대사를 이룰
수 있으리라. 다만 지금 즉시로 해야지 늦어져서는 안 될 것이오.” 공명이 말했다.
“십일월 이십일 갑자일에 바람 불기를 빌어 이십이일 병인일에 바람을 그치게 하면
어떻겠소?” 주유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벌떡 일어나 영을 내려 500명의 건장한
군사를 남병산에 보내 단을 쌓고, 120명을 파견하여 기를 잡고 단을 지키며 사령을 기다리도록 했다.(却說周瑜立於山頂, 觀望良久, 忽然望後而倒, 口吐鮮血, 不省人事. 左右救回帳中. ······ 瑜命請入, 敎左右扶起, 坐於床上. 孔明曰, 連日不晤君顔, 何期貴体不安. 瑜曰, 人有旦夕禍福, 豈能自保. 孔明笑曰, 天有不測風雲, 人又豈能料乎. 瑜聞失色, 乃作呻吟之聲. 孔明曰, 都督心中似覺煩積否. 瑜曰, 然. 孔明曰, 必須用凉藥以解之. 瑜曰, 已服凉藥, 全然無效. 孔明曰, 須先理其氣, 氣若順, 則呼吸之間, 自然痊可. 瑜料孔明必知其意, 乃以言挑之曰, 欲得順氣, 當服何藥. 孔明笑曰, 亮有一方, 便敎都督氣順. 瑜曰, 願先生賜敎. 孔明索紙筆, 屛退左右, 密書十六字曰, 欲破曹公, 宜用火攻. 萬事俱備, 只欠東風. 寫畢, 遞與周瑜曰, 此都督病源也. ······ (周瑜)乃笑曰, 先生已知我病源, 將用何藥治之. 事在危急, 望卽賜敎. 孔明曰, 亮雖不才, 曾遇異人, 傳授奇門遁甲天書, 可以呼風喚雨. 都督若要東南風時, 可於南屛山建一臺, 名曰七星壇. 高九尺, 作三層, 用一百二十人, 手執旗幡圍饒. 亮於臺上作法, 借三日三夜東南大風, 助都督用兵, 何如. 瑜曰, 休道三日三夜, 只一夜大風, 大事可成矣. 只是事在目前, 不可遲緩. 孔明曰, 十一月二十日甲子祭風, 至二十二日丙寅風息, 如何. 瑜聞言大喜, 矍然而起. 便傳令差五百精壯軍士, 往南屛山築壇. 撥一百二十人, 執旗守壇, 聽候使令.)」
제갈량이 제단에 올라 동남풍을 빌자 얼마 후에 동남풍이 불어왔다. 조조에게 거짓 투항한 황개(黃蓋)가 몽충(蒙衝, 폭이 좁고 긴 배로 적선과 충돌하여 침몰시키는 배)과 투함(鬪艦, 전함)을 조조의 선단에 접근시킨 후, 화공을 퍼부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동남풍에 조조의 선단은 불길에 휩싸였고, 적벽 일대는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하고 말았다. 불에 타 죽고, 불을 피해 강으로 뛰어든 사람은 물에 빠져 죽었다. 조조는 대패하여 자신의 근거지인 허창으로 되돌아갔다.
이 이야기는 나관중의 《삼국연의》에 나온다. 정사 《삼국지》에는 제갈량이 하늘에 빌어
동남풍을 불게 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용례]
좋은 직장도 있고, 집도 샀고, 모든 살림살이도 다 장만했으니 이제 결혼 준비는 다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결혼할 여자가 없다니. 정말 ‘만사구비, 지흠동풍’이 아닌가.
〖역사 · 문화 자료─적벽대전〗
관도의 전투에서 원소를 물리쳐 화북의 패권을 장악하고 중국 북부를 평정한 조조는 건안(建安) 13년(208) 7월, 목표를 남쪽으로 돌려 형주(荊州, 호북, 호남, 하남, 귀주, 광서, 광동의 일부를 관할)와 강동(江東, 강소성 무호(蕪湖)와 남경 사이의 장강 유역 동쪽 지역) 공략을 시작했다. 강동의 손권이 먼저 형주를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면 천하의 판도를 예측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유비도 제갈량의 천하 삼분 계책을 받아들여 형주를 근거지로 확보하기 위해 형주의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고, 손권도 노숙(魯肅)의 계책에 따라 세력을 확장하고 조조와 맞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형주를 장악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호시탐탐 형주를 노리고 있었다.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반드시 먼저 차지해야 하는 요충지 형주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렇게 군웅들이 하나같이 형주를 노린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형주의 유표가 형주를 지킬 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해 8월, 유표가 죽고 그의 막내아들 유종이 그 뒤를 이었다. 조조의 백만 대군이 형주를 향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유종은 비밀리에 사자를 보내 조조에게 항복해 버렸다.
순조롭게 형주를 접수한 조조는 내친김에 눈엣가시인 유비를 제거하기 위해 유비의 근거지인 신야(新野, 하남성 신야현)로 말머리를 돌렸다.(당시 유비는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늦게야 이 사실을 안 유비는 급히 강릉(江陵, 호북성 형사시(荊沙市))으로 퇴각하였다. 강릉은 군사상의 요지이자 병력과 물자의 중요한 보급 기지였다. 유비가 강릉으로 퇴각한다는 사실을 안 조조는 5,000의 기병을 거느리고 하루낮 하룻밤 300리를 달려 유비의 뒤를 추격하여 장판파(長坂坡, 호북성 당양현 동북)에서 유비를 공격하였다. 유비는 대패하여 지름길을 따라 유표의 장남 유기(劉琦)가 주둔하고 있는 하구(夏口, 호북성 한구)로 도망했다.
한편, 조조의 백만 대군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강동의 손권은 군사를 시상(柴桑, 강서성 구강시(九江市) 서남쪽)에 주둔시키고 정세 변화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으나, 뾰족한 수가 없어 우선 노숙을 파견하여 상황을 파악하도록 했다. 북으로 올라가던 노숙과 남으로 내려오던 유비가 당양에서 마주쳤다. 노숙은 유비에게 일단 하구로 가 손권의 군사와 연합하여 조조에게 대항할 것을 제안했다. 불감청 고소원이 아니었던가! 유비는 노숙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조조는 강릉을 점령한 후 유비를 치기 위해 다시 말머리를 하구로 돌렸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된 유비는 손권의 도움을 얻기 위해 제갈량을 파견했다. 제갈량은 노숙과 함께 손권이 주둔하고 있는 시상으로 건너갔고, 유비는 번구(樊口, 호북성 악주시(鄂州市) 서북)에 주둔했다.
당시 손권의 강동 지역은 장소(張昭)를 주축으로 하는 주화파와, 주유(周瑜)와 노숙을 주축으로 하는 주전파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손권은 이 두 파의 사이에서 아직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전쟁은 엄밀히 따지면 조조와 유비 사이의 문제이지 손권의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손권의 입장에서는 유비를 돕기도 애매하고, 유비를 돕지 않고 조조의 편에 붙는 것도 애매하며, 그렇다고 뒷짐 지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나 몰라라 하는 것은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비를 돕자니 그 불이 자기 옷까지 옮겨 붙을 수가 있고, 유비를 돕지 않아 유비가 망하면 그야말로 순망치한(脣亡齒寒)이 되며, 조조의 편에 섰다고 해서 조조가 손권을 가만히 놔둘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었다.
제갈량은 손권에게 세 가지를 들어 설득작업에 들어갔다. 첫째, 관망만 하고 있을 경우 결국 손권 스스로에게도 화가 미치게 된다. 둘째, 쌍방이 연합할 경우 반드시 승리한다. 셋째, 조조를 이긴 후에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정립(鼎立)의 형세를 만들자는 것이 그 주된 내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조가 손권에게 서신을 보내왔는데, 이 서신이 바로 적벽대전의 뇌관을 건드린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번에 황제의 명을 받들어 죄인들을 쳤노라.
나의 군기가 남방을 가리키니 유종이 투항을 했더라.
이제 80만 수군을 정비하여 오에서 장군과 함께 사냥을 할까 하노라.
(近者奉辭伐罪, 旄麾南指, 劉琮束手. 今治水軍八十衆, 方與將軍會獵於吳.)
명명백백한 도전장이었다. 형주를 점령하고 유비를 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던 조조의 창끝이 다시 손권에게 향한 것이다. 이 서신에 대경실색한 중신들은 조조에게 투항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하들의 입장에서 보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적에게 투항하는 것이 본인과 그 가족에게 더 안전한 법이다. 그러면 대개는 본인과 가족의 성명을 보존하고 본인은 자리를 그대로 지킬 수가 있으니까. 하지만 주군(主君)은 갈 곳이 없게 된다. 노숙은 바로 이 점을 들어 손권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이제 상황은 유비를 돕느냐 안 돕느냐의 문제에서, 조조에게 투항하느냐 대결하느냐의 문제로 옮겨졌고, 손권은 최종적으로 유비와 연합하여 조조와 싸우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오늘날의 호북 · 호남성에 해당하는 형주와 사천성에 해당하는 익주(益州)는 당시 13개 주 중에서 가장 큰 주였으며,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꼭 손에 넣어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한고조 유방도 익주를 발판으로 하여 일어나지 않았던가. 하여, 일찍이 유비가 제갈량을 맞으려고 삼고초려했을 때 제갈량은 유비에게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정족(鼎足)의 형세를 만들자는 계책을 올렸다. 정족이란 솥의 발을 말한다. 솥은 발이 세 개인데, 이는 물건을 안정되게 세울 수 있는 최소한의 숫자이다.
당시 제갈량의 천하 삼분 계책의 주체는 북방의 조조, 강동의 손권, 그리고 유비였다. 물론 유비가 형주와 익주를 차지한다는 전제하에서였다. 이것을 융중대(隆中對), 즉 융중의 대책이라고 한다. 그런데 융중대가 나오기 7년 전, 동오의 노숙이 이미 천하 삼분의 계책을 수립하여 손권에게 권한 적이 있었다. 노숙의 천하 삼분 계책의 주체는 북방의 조조, 동오의 손권, 그리고 형주의 유표였다. 때가 되면 먼저 형주를 손에 넣고, 이어 익주를 차지한 다음 북방의 조조와 대치하다가 북벌을 하여 천하를 통일한다는 원대한 계책이었다. 그 당시 손권의 나이 18세였고, 형 손책이 죽고 막 대권을 이은 상황이라서 추진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 조조가 손을 써 형주를 먼저 취했다는 사실은 손권과 노숙에게 큰 충격과 위협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두 개 이상의 물체가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지점을 점유하는 것’을 이르러 ‘충돌’이라고 하는데, 적벽대전은 이처럼 조조, 손권, 유비의 야심이 충돌한 일대 사건이었다.
조조와 싸우기로 결정을 했지만 아직 군사력에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어 여전히 주저하고 있는 손권에게 확신을 준 것은 주전파의 수장 격인 주유였다. 주유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동오가 반드시 승리하고 조조는 반드시 패한다는 확신을 손권에게 심어 주었다.
첫째, 조조는 내부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후환이 아직 제거되지 않았는데 경솔하게 남하하여 진공을 했다.(本土未安, 後患未除, 貿然南下.) 조조는 당시 중국의 북부를 막 장악한 상황이긴 했지만 아직 내부가 안정되지 않았고, 서쪽으로는 마등(馬騰), 마초(馬超), 한수(韓遂), 장로(張魯) 등의 군벌이 여전히 활약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조가 손권을 치기 위해 남하한 것은 참으로 경솔한 행위였다.
둘째, 말을 버리고 배를 사용하자는 것은 장점을 버리고 단점을 취하는 일이다.(放棄鞍馬, 使用艦船, 舍長就短.) 남선북마(南船北馬)라는 말이 있다. 물길이 많은 남쪽의 주요 교통수단은 배고, 산야가 많은 북쪽의 주요 교통수단은 말이라는 뜻이다. 자연히 북방에는 보병과 기병이 우세하고 남방에는 수군이 우세하다. 수전 경험이 없는 조조의 군사들이 물귀신인 남방의 수군을 어떻게 당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주유가 주전론을 펼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셋째, 날씨는 춥고 땅은 얼어붙어 말을 먹일 양초가 없고, 군량도 부족하다.(天寒地凍, 馬無草料, 給養不足.) 적벽대전이 일어난 것은 건안 13년(208)의 한겨울인 12월이다. 조조는 시기를 잘못 선택한 것이다.
넷째, 피로한 군사를 이끌고 원정을 했으며, 풍토가 맞지 않아 반드시 질병에 걸리게 된다.(勞師遠征, 水土不服, 必生疾病.) 북쪽의 군벌들을 친 지 얼마 되지 않아 군사들이 지쳐 있었으며, 물과 땅이 낯선 남방의 땅에서 풍토가 맞지 않아 쉽게 질병에 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갈량도 조조가 필패할 수밖에 없는 3가지 이유를 제시했는데 역시 주유의 주장과 대동소이하다.
첫째, 피곤한 군사를 이끌고 원정을 했다.(勞師遠征.)
둘째, 장점을 버리고 단점을 취했다.(舍長就短.)
셋째, 민심이 불복한다.(人心不服.)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주유의 주장과 동일하다. 세 번째의 뜻은, 조조가 비록 투항한 형주의 군대를 흡수하긴 했지만 군사들이 조조에게 충성을 다 바쳐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유는 마지막으로 손권에게 조조의 군사를 비교적 정확하게 계산해 주었다. 당시 조조는 자신의 군사가 80만 대군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건 겁을 주기 위한 허풍이었다. 실제로는 북방에서 이끌고 온 군사 15, 16만에, 형주의 유종에게서 흡수한 7, 8만을 합해 약 20만 정도였다.
주유의 주장과 분석을 들은 손권은 승리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공식적으로 조조와의 전쟁을 공포했다. 조조와 결전을 벌이기로 방침이 정해지자, 손권은 주유를 대도독으로 임명하고 3만의 군사를 주어 유비의 수상 부대와 공동 작전을 펴 조조의 군대와 대전하도록 했다. 유비의 군사 1만, 그리고 유기의 군사 1만을 더해도 5만밖에 안 되는 병력이었다. 5만의 병력으로 호왈 80만의 병사와 맞붙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실제는 20여 만이었지만.
한편, 적벽(호북성 적벽시(赤壁市) 장강 연안)에 포진하고 있던 조조의 군사들은 모두 북방 출신으로 남방의 풍토에 적응하지 못해 병이 든 데다가 대부분 배를 타 본 일이 없어 배멀미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한겨울인 12월의 찬바람은 바다같이 넓은 장강에 드높은 파도를 일게 했으며, 이 파도에 배가 심하게 요동했기 때문이었다. 조조는 이의 해결책으로 배를 모두 쇠고리로 연결한 후,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한덩어리로 만들어 배가 파도에 요동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조조로 하여금 이렇게 배를 묶도록 만든 계책을 연환계(連環計)라고 하는데, 배를 한덩어리로 묶으면 화공에 취약하다는 것을 조조가 모를 리 없었지만, 당시는 서북풍이 부는 계절이었고, 조조는 북쪽에 포진해 있었으므로 화공을 당할 염려는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겨울철 초입에 서북풍이 강하게 이삼 일 분 다음 최소 하루나 이틀 이에 대한 역풍이 불고, 이것이 다시 약해진 다음 이삼 일쯤 있다가 서북풍이 강해진다는 기상관측 통계가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역풍이 바로 《삼국연의》에서 제갈량이 도술을 부려 일으켰다는 동남풍이다. 당시 장강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들도 다 알았을 법했던 이 기상 현상을 북방 출신인 조조와 그의 군사들이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물어보지도 않는 일을 어부들이 스스로 찾아와 알려 줄 리도 만무할 것이고 말이다. ‘천시불여지리(天時不如地利)’라고 하지 않던가? 아무리 때가 좋아도 현지의 지리적 여건을 모르면 당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렇게 보면 총명한 사람도 전혀 생소한 남의 동네에 가면 자칫 바보가 될 수도 있는 법이란 말이 우스갯소리만은 아닌가 보다.
주유와 유비의 연합군은 화공으로 나왔다. 먼저 황개(黃蓋)를 거짓으로 항복하도록 하여 몽충(蒙衝, 폭이 좁고 긴 배로 적선과 충돌하여 침몰시키는 배)과 투함(鬪艦, 전함)을 조조의 선단에 접근시킨 후, 화공을 퍼부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동남풍에 조조의 선단은 불길에 휩싸였고, 적벽 일대는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하고 말았다. 불에 타 죽고, 불을 피해 강으로 뛰어든 사람은 물에 빠져 죽었다. 조조는 대패하여 자신의 근거지인 허창으로 되돌아갔다.
그동안 힘이 조조로 기울어 있었는데, 적벽의 싸움 이후 힘의 균형이 어느 정도 잡혔다. 후에 유비는 우여곡절 끝에 제갈량의 계책에 따라 형주와 익주를 차지하여 발판을 굳혔고, 손권은 강동을 굳게 지켜 동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로써 삼국의 정립(鼎立) 형세가 틀을 잡게 된 것이다. 적벽의 싸움이 있은 지 8년 후인 216년에 조조가 위왕(魏王)에 올랐으며, 219년에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을 칭했고, 222년에 손권이 오나라를 건국하고 건업(建業, 강소성 남경)에 도읍을 정했다.
《삼국연의》에 흥미진진하게 그려진 적벽대전의 이야기들 중, 제갈량이 주유를 자극하기 위해 그의 부인 자매인 이교(二喬, 대교(大喬)와 소교(小喬))를 판 이야기(▶ 하필성문(下筆成文) 참조), 제갈량이 손권의 대신들과 설전을 벌여 대신들을 꼼짝 못 하게 만든 이야기, 방통이 조조로 하여금 배를 묶도록 연환계를 쓴 이야기, 주유가 장간(蔣干)을 이용해 반간계를 쓴 이야기, 주유가 병이 들자 제갈량이 ‘동남풍’이라는 약을 처방하여 낫게 한 이야기, 주유가 제갈량을 곤경에 몰아넣기 위해 열흘 안에 화살 10만 개를 만들라고 하자 안개가 가득한 밤에 제갈량이 배를 띄워 적군의 화살 10만 개를 벌어 온 이야기, 그리고 적벽대전의 하이라이트인 제갈량이 도술을 부려 동남풍을 일으킨 이야기, 그리고 대단원에 해당하는, 싸움에 패한 조조가 본국으로 도주하며 화용도를 통과하다가 매복하고 있던 관우를 만나 목숨을 구걸한 이야기 등등은 정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거나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로, 《삼국연의》를 통해 마치 역사적 사실인 양 우리에게 알려진 내용들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제갈량을 적벽대전의 기획과 연출, 주연까지 맡은 지모와 책략을 겸비한 불세출의 군사(軍師)로 그렸지만, 실제 적벽대전의 주인공은 주유와 조조이다. 제갈량은 당시 막 출사(出仕)한 27세의 백면서생으로, 단지 손권과 유비의 동맹 과정에서 일정 역할만 했을 뿐이다.(당시 손권과 제갈량은 27세, 주유는 34세, 노숙은 37세, 유비는 47세, 그리고 조조는 54세였다.)
김성일(金聖日)은 문학박사. 전라북도 도청에서 국제정책전문위원으로서 중국과의 국제교류 업무를 담당하는 한편, 단국대학교, 전남대학교,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백석대학교 등에서 중국어문학을 가르쳤다..펼쳐보기
[출처]
선인의 경험이 깃들어 있고, 지혜와 지식의 보고인 고사성어. 우리 생활과 밀접한 일상의 언어이기도 하다. 고사성어에 얽힌 역사적 사실과 문화적 배경을 철저한 조사와 고..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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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샬롬 !!
화사한 화요일 멋과 맛 향기로 보람 되시고...
늘 웃는 삶 행복 하시고 편안 하시며 항상 건강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