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창제, 그 위대한 여정
훈민정음, 지금의 한글.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세종이 만들었나? 싱크탱크 집현전
학사들이 만들었나? 왕조실록의 훈민정음 기록은 의외로 간단하고 소략하다.
우리민족 최대의 문화적 업적인 '훈민정음' 치고는 왜 기록이 없을까? 실록을 볼까?
세종 25년(1443년) 12월 30일 기사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于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 訓民正音
이를 번역하문.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는 옛 전자를 모방하고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속된
말)에 관한 것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가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나 전환하는 것이 무궁
하니 이를 훈민정음이라 일렀다."세종 28년(1446년) 9월 29일 훈민정음이 이루어졌다.
御製에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 하므로 우매한 백성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28자를 맹글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여 날마다 쓰는데 편하게 할
뿐이다. "
정인지 서문에,"훈민정음은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
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바람소리, 학의 울음소리, 닭 울음소리나
개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 있게 되었다."
이상이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에 대한 기록의 전부다.
창제하고 공식 반포까지는 2년 9개월의 시간이 있었는데 그 기간에 무엇을 했을까?
실제 적용하는데 문제가 없도록 준비를 하고 해설서를 만들도록 했다.이를 해례라고
하는데, 세종이 친히 집현전의 젊은 학사 7명을 선발한다.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최항, 이개, 이선로, 강희안 등이 이들이다.
돈령부 주부 강희안을 제외하고는 모두 집현전의 실무를 담당하는 학사들이다.이들
을 親揀名儒라 한다.임금이 직접 선택했다는 의미는 세종이 이들의 능력을 미리 파
악해서 요긴하게 썼다는 의미다.이 7명의 신하는 일종의 훈민정음 반포 준비 태스크
포스 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운회번역, 해례서 발간, 훈민정음을 이용해 한자
음을 정리한 '동국정운' 편찬 작업에도 참여한다.
이들을 지휘하여 해설서를 만든 사람은 예조판서 겸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다.
이 해례본은 전해오지 않다가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되어 간송 전형필이 구입 현재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요즘 또다른 해례본인 상주본 문제로 많이 시끄럽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든지 두달도 되지 않은 세종 26년(1444년) 2월 16일 위의 7명
에게 운회 번역일을 지시 한다. 이것이 훈민정음 창제를 공식적으로 신하들에게 처
음으로 알린 것이다.집현전에서 난리가 났다.
4일 뒤 집현전의 중견 간부인 부제학 최만리, 직제학 신석조 등 7명이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를 올린다.이 중대한 문자 창제에 집현전이 제외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
타내는 예이기도 하다. 집현전은 제학 이상은 겸직이라 실질적으로 집현전 전임 중
최고 직책은 부제학과 직제학인데,부제학 최만리와 직제학 신석조가 반대했다는 것
은 집현전이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했다고 할 수 있다.
최만리의 반대이유는 이렇다.
'중국의 한자가 모든 문자의 표준이고 그것은 표의문자인데 표의문자가 아닌 음을 쓰
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옛것에 반대된다.만약 중국에서 이를 알고 비난한다면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데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라는 논지.
세종은 훈민정음이 얼마나 실용적이고 백성들의 생활을 편하게 하는지 설명하면서
설득한다. 최만리의 반대는 집요했다.세종은 최만리의 상소를 보고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훈민정음의 제자와 사용에 대한 보다 정밀한 해설이 필요함을 통
감하고 운회 번역 작업을 하고 있는 7명의 신하들에게 다시 해설서를 만들도록 지시
한다. 그것이 해례다.해례는 최만리의 반대에 대한 일종의 답변서인 셈.
그리하여 세종 28년 (1446년) 9월 상한에 완성된 해설서는 훈민정음 해례라 하여 세
종의 서문과 예의, 집현전 학사 7인이 쓴 해례,이를 총괄한 정인지의 후서를 붙여 간
행하게 된다.훈민정음은 실록에서나 반포 준비작업에 참여했던 집현전 학사들의 개
인문집 에서나 한결같이 세종이 직접 만든 것으로 나온다.
중국의 한자를 수천년 사용해온 나라에서 이와 다른 문자를 만든다는 발상 자체가 조
선에서는 임금이 아니면 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세종의 아이디어로 시작되었고
세종의 생각이 주로 개입되었다는 것은 사실로 판단된다.
다만 그 엄청난 작업을 집현전 같은 자신의 싱크탱크 에게까지 비밀로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자를 쓰는 사대부 양반들 반대를 의식했기 때문이었 을까? 아님 사
대를 기본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으로서 중국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기 때문 이었
을까? 아마 둘 다 이유일 수도 있다.
문자를 가진다는 것은 중국과는 또다른 문명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중국
한자문화권에 수천년 젖어온 이들에겐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창제작
업을 비밀리에 추진했다는 말이 되겠다.실제로 실록에는 세종 25년 창제 기사 이전
에는 일체 훈민정음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비밀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왕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이 되겠다조선은 임금이 신하를 만날 때는 반드
시 사관이나 승지가 입시해서 기록하게 되어 있다. 사관 입시 없이 임금을 만날 수 있
는 사람은 바로 가족들이다. 일설에는 세종의 둘째 따님인 정의 공주가 창제에 참여
했다고 한다. 이는 죽산안씨 족보에 나오는 얘기인데.아마 발음을 내는 연습을 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와 수양대군 이유, 안평대군 이용 등은 세종의 아들로 영명한
인재들이니 창제에 협력했을 수 있다. 이쯤되면 민족의 위대한 프로젝트인 훈민정음
은 세종의 가족들이 만든 것이 된다. 그랬을까?또 임금을 비공식적으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승려다..당시 신미대사가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다는 설이 있다.
속리산 복천암에 전해지는 전설이다. 신미는 세종과 세조의 신임이 두터웠던 고승이
다.훈민정음 창제 후 실험을 위한 서적 편찬 작업으로 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 월인
석보 같은 불교서적들이 발간되는데 이런 것도 훈민정음 창제가 불교와 관련이 있는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현재 명백한 사실은 훈민정음은 세종이 직접 기획하여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는 세종 본인도 그렇게 인정하고 있고 정인지 서문 에서도"임금이 혼자 만들었다."
고 언급하고 있으며 후속작업에 참여했던 7인의 태스크 포스 팀들의 문집에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다만, 자녀들과 일부 비공식 라인에서 협력은 했을 것이다. 발음기관을
본떠서 만든 표음문자의 특성상 발음을 내고 연습하고 조언을 한 그룹은 분명 있었을
터.자녀들이건 승려이건.그러나 그들은 조력자일 뿐이지 세종이 기획하고 주도 했다
는 점은 변동이 없다.
집현전 학사 7인은 창제 후 반포 전에 적용과 해설서를 만들었는데 그것도 세종의 지
시와 검토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세종은 자신이 만든 훈민정음을 어떻게 만들었는
지 예를 들어 설명했는데 그것이 例義 다.
이 예의를 기초로 집현전 학사 7인이 자세한 설명을 덧붙힌 것이 解例다.
그래서 명칭도 해례라 한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해례도 세종과 7인의 공동작업이라 할
수 있다.세종은 군주이기 전에 뛰어난 음운학자요, 언어학자였다. 문자 자주권 확보를
통해 백성의 새로운 하늘을 연 킹 세종. 한글날 즈음하야 위대하신 대왕의 헌신과 열
정에 존경을 표한다. (펌글)
첫댓글 세종대왕의 한글에 대한 열의와 헌신은 모든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웃사랑 정신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아닐까요? 우리가 함께 살았던 이승만, 박정희대통령도 수백 년에 한번 나올지 말지 한 영웅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