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 시민에게 전면 개방된 연산군 묘역. 왼쪽이 연산군이고 오른쪽이 거창신씨 묘이지요
왕릉이 아니기에 정자각이 없고 향로석만 있어요
◑ 연산군과 궁주(宮主) ◑
연산군(燕山君,1476~1506)은 조선의 제10대 왕이었지요
성은 이(李), 휘는 융(㦕), 본관은 전주이씨 조선 성종의 장자로
폐비 윤씨의 소생이며 비는 영의정 신승선의 딸이었어요
중종 반정으로 폐위되었으며 강화군 교동도로 유배되었다가
의문의 병사로 사망한 연산은 사망 7년후 서울 방학동으로 이장(移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지요
도봉산 자락 방학동 골짜기 잡초에 묻혀있던 연산군 묘는
봉분(封墳)은 훼손되고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文人石)은 쓰러져 있었으며
비석의 글씨는 뭉개져 있었지요
이러한 연산군 묘가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62호로 지정되면서
문화재청이 비공개로 관리해 왔으나 지금은 전면 개방되어 있지요
연산군 묘역에는 연산군과 부인 거창 신씨, 의정궁주 조씨
그리고 딸과 사위가 묻혀 있는데 여기에는 연산군 묘와 함께
"의정궁주 조씨(義貞宮主 趙氏)" 라는 말이 묘비에 쓰여 있어요
그럼 과연 궁주(宮主)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혹시 공주(公主)라는 말을 잘못 오기(誤記)한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데
궁주(宮主)가 맞아요
틀림없는 궁주(宮主)이지요
비석에도 궁주라 새겨져 있고 안내 책자에도 궁주라 인쇄되어 있어요
따라서 연산군 묘역에 있는 의정궁주는 연산군의 부인을 이르는 말이지요
궁주, 공주, 옹주 모두 여자에게 주어지는 작호이지만
공주와 옹주는 슬하의 여자이고 궁주는 살을 섞은 여자이지요
궁주는 '왕의 남자'가 아니라 왕의 여자를 말하며 '왕의 여자'에게 내리는 작호이지요
왕의 여자에게도 계급이 있었지요
왕비는 왕과 동격이므로 무품(無品)이지만
빈(嬪)은 왕의 1위 부실(副室)로 정1품의 품계를 받았으며
빈이 왕비로 책봉되면 자동으로 품계는 없어지지요
종1품 귀인, 정2품 소의, 종2품 숙의, 정3품 소용, 종3품 숙용, 정4품 소원, 종4품 숙원까지
모두 왕의 후궁들이지요
그러나 이 모든것은 경국대전에 나와 있지만 궁주에 대한 언급은 없어요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 조선은 초기에 고려의 제도를 따랐지요
내명부(內命婦)는 고려조의 영향을 받아 궁주(宮主). 옹주(翁主) 등으로 봉해졌어요
이렇게 시행하다보니 왕의 딸도 궁주
왕과 잠자리를 같이한 왕의 여자도 궁주라는 혼란이 왔어요
실례로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세종의 누이가
정선궁주, 경선궁주, 경안궁주, 정선궁주라 실록에 기록되어 있지요
세종의 여자도 의정궁주라 불리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어요
조선이 어떠한 국가였나요?
예(禮)를 중시하는 유교의 나라가 아닌가요?
세종 4년 2월 16일 이조(吏曹)에서 계가 올라왔어요
왕녀를 공주라 칭하여 내직과 구별하자는 안이었지요
이를 세종이 가납하여 대대적인 제도정비에 들어갔는데
예(禮)에 어긋나고 혼란스러웠던 작호를 국가이념과 유교에 맞게 정비하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게 왠일 일까요?
세종시대 정비한 제도로 인하여 단종 이후에 나타나지 않은 궁주라는
작호가 연산군 묘역에 나타난 것이지요
연산군 제2부인 조씨 묘비 석에 궁주(宮主)라 새겨져 있고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안내책자에도 의정궁주라 기록되어 있어요
왕의 딸로서 궁주라는 작호는 조선 초기, 특히 세종 조에 많이 등장하지만
왕의 여자로서 궁주라는 작호는 <연산군일기>에도 기록이 없어요
역사책에는 등장하지 않은 생경한 호칭이었지요
역사에서 사라진 작호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세종조 이후 연산군 부인에게 궁주라는 작호가 붙어있으니 이해하기 어렵지요
실록에는 없는데 비석에 있고 공식 책자에도 있으니
이것이 실제와 역사의 괴리현상일까요?
이점은 문화재청에서 설명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무튼 궁주(宮主)라는 호칭은 신라시대의 미실궁주(美室宮主) 처럼
왕과 살을 섞은 여자중 왕비 다음으로 품격이 높은 품계의 호칭으로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걸쳐 조선시대 초기에는 사용되었으나
세종 후반기에는 모두 사라진 작호였는데
연산군때 이르러 사용된점은 의문이 아닐수 없어요
연산군에게는 2명의 부인이 있었지요
슬하에 각각 2남 1녀씩 총 4남 2녀를 두었어요
정부인 거창 신씨에서 큰아들 이황(폐세자)과 둘째아들 창녕대군을 두었으며
둘째부인 의정궁주에게서 양평군 이인과 돈수를 낳았지요
이들이 연산군 폐위 후 유배 가던 날(중종1년 9월 5일).
나이 어린 조카들이 안타까워 중종이 말하기를
"나이가 어리니 가마에 태워 보내면 어떨까?"라고 신하들에게 물었으나
반정군 세력의 신하들은 "죄인은 가마를 탈 수 없습니다.
가마를 타고 가지 못한다면 들것으로 들고 가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여
중종은 아무말도 못하고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지요
아들 네명 모두 연산군 폐위 후 중종1년(1506년) 9월 24일 사사(賜死)되었어요
이 또한 중종의 뜻이 아니었지요
반정세력으로서는 차후에 있을수도 있는 싹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들의 처단을 강하게 요구하였어요
"황 등은 나이가 모두 어리고 연약하니 차마 처단하지 못하겠다"라고
중종이 버티었으나 반정세력에 의해 옹립된 왕으로서는 역부족이었지요
연산군 슬하의 딸이 "능성 구씨" 집안으로 시집갔는데 사위가 구문경(具文璟)이지요
따라서 연산군이 누워있는 묘역은 능성 구씨 선영인데
연산은 사돈네 선영에 묻혀있는 셈이지요
묘역에는 연산군과 부인 거창 신씨 그리고 둘째부인 의정궁주
그리고 딸과 사위 구문경(具文璟)의 묘가 있어요
-* 언제나 변함없는 녹림처사 *-
▲ 연산군 묘역에 있는 문인석.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한 표정이지요
▲ 창덕궁 옥류천의 비경. 흐르는 물에 왕이 술잔을 띄워 보내면
잔이 닿은 신하는 시를 읊어야했던 ‘유상곡수연’이 펼쳐졌던 곳이며
장희빈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배어있는 곳이지요
바위에는 ‘옥류천‘이라는 숙종의 시가 새겨져 있어요
▲ 세종실록에 나와 있는 세종의 형제와 누이들의 기록
▲ 경운궁(덕수궁)에 세워져있는 세종대왕 동상
▲ 세종실록에 나와 있는 궁주에 대한 기록
▲ 연산군 묘역에 있는 의정궁주 묘.
비석에는 궁주라는 글자가 뚜렷이 새겨져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