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리히 본회퍼, '종교개혁자 루터가 발견한 값비싼 은혜가 후대에 와서 순종이 불필요한 값싼 은혜로 전락했다'
값비싼 은혜의 인식은 기독교의 확장과 교회의 점진적 세속화로 점차 사라졌다.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했고, 은혜는 기독교 세계의 공공 자산이 되었다. 그것은 헐값으로 얻을 수 있는 은혜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도 로마 가톨릭교회는 처음부터 알고 있던 값비싼 은혜에 대한 생각을 유산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수도원 제도는 교회와 결별하지 않았고, 신중한 교회는 수도원 제도를 참아 주었다.
그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은혜는 값비싼 것이어서 이 은혜에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포함된다는 인식이 바로 여기에, 곧 교회의 언저리에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들이 가진 모든 것을 버렸고, 일상의 훈련 속에서 예수의 엄중한 명령들을 따르려고 애썼다. 이처럼 수도원 제도는 기독교의 세속화에 맞서고, 은혜를 값싼 것으로 만드는 것에 맞서는 생생한 저항이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이 저항을 참아 줌으로써 이 저항이 결정적으로 폭발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그것을 상대화했다. 실로 교회는 이로부터 자신의 세속화된 생활을 정당화할 길을 얻었다. 왜냐하면, 수도원 생활은 이제 소수의 사람이 수행하는 별난 행위, 곧 대다수 교인이 의무로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행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내리신 명령의 유효성을 위험천만하게도 특별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의 특정한 집단에 국한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에게 부과된 복종의 행위를 가장 높은 수준과 가장 낮은 수준으로 구분하는 일이 빚어졌다.
이는 로마 가톨릭이 자신의 세속화에 대한 공격을 받을 때마다 자기 교회 안에서 수도의 길을 걸을 수도 있음을 지적함과 동시에 더 쉬운 길의 가능성도 철두철미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수도원 제도를 통해 초기 기독교가 가졌던 값비싼 은혜에 대한 이해를 유지한 것 같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이는 교회의 세속화를 다시 최종적으로 정당화해준 셈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수도원 제도가 – 예수의 말뜻을 내용상 오해하여 – 예수를 엄격히 따르는 은혜의 길을 걸어간 것은 결정적인 실책은 아니었다. 수도원 제도가 참된 기독교로부터 멀어진 것은, 그 제도가 자신의 길을 소수의 사람이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특별 행위가 되게 하고, 이것을 자기의 특별 공로로 주장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종교개혁 시대에 자기의 종 마르틴 루터를 통해 순수하고 값비싼 은혜를 다시 일깨우실 때 수도원을 통해 그를 인도하셨다. 루터는 수도사였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완전한 복종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했다. 그는 세상을 버리고 기독교도의 일을 시작했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대한 복종을 배웠다. 복종하는 사람만이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수도사가 되라는 부름을 받자마자 자기의 인생 전부를 걸었다. 하지만 루터와 그의 길은 하나님 자신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하나님은 성서를 통해 그에게 다음의 사실을 알려주셨다. 이를테면 예수를 따르는 것은 몇몇 사람의 칭찬할 만한 특별한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내리신 명령이라는 것이다. 수도원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겸손한 행위가 성인(聖人)들의 칭찬할 만한 행위로 변질하였고, 따르는 자의 자기 부정은 경건한 자들의 최종적이고 영적인 자기 주장으로 둔갑했다.
그 때문에 세상이 수도사의 생활 한가운데로 들어와, 가장 위험한 방식으로 다시 활동하고 있었다. 루터는 수도사의 세상 도피가 가장 정교한 세상 사랑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는 경건한 삶의 마지막 가능성이 물거품이 되자 은혜를 붙잡았다. 붕괴한 수도사 세계 속에서 그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손을 내미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는 “아무리 최선의 삶을 살아도 우리의 행위는 헛되다”고 여기며 그 손을 붙잡았다.
그것은 그에게 선사된 값비싼 은혜였다. 그 은혜가 그의 전 존재를 압도했고, 그는 또 한 번 자기의 그물을 버리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수도원에 들어갈 때는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되, 자기 자신 곧 자기의 경건한 자아만은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자아마저 버렸다. 그는 자기의 공로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갔다.
“너는 죄를 지었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이 용서를 받았으니, 네가 있는 곳에 계속 머무르면서, 용서받은 것으로 만족하라!”는 말씀이 그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루터는 수도원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는 세상 자체가 선하고 거룩해서가 아니라, 수도원도 세상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수도원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고 나서 보인 루터의 행보는, 초기 기독교 이래로 세상에 가해진 공격 중에서 가장 맹렬한 공격이었다. 수도사가 세상에 건넨 절교 선언은, 세상이 자기에게로 돌아온 사람을 통해 들은 절교 선언에 비하면 아이들의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공격은 전면전이 되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이 이제는 세상 한복판에서 삶으로 실행되어야 했다.
수도원 생활의 특수 환경과 여러 편익 속에서 특별 행위로 실행되던 것이, 이제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꼭 필요한 것이자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되었다. 예수의 명령에 대한 전적인 복종은 일상의 직업 활동 속에서 실행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세상 사람들의 생활 사이에서 충돌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심화되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을 공격했다. 그것은 근접전(近接戰)이었다.
‘루터는 순수한 은혜의 복음을 발견함으로써 세상에서 예수의 명령에 대한 복종 의무 면제를 선언했다’거나, ‘종교개혁자가 발견한 것은 용서하는 은혜를 통한 세상의 거룩함 선언, 세상의 칭의(稱義)였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루터의 업적을 치명적으로 오해하는 것도 없지 싶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세속 직업은 세상에 대한 맹렬한 저항을 표명함으로써만 그 정당성을 얻고, 예수를 따르는 가운데 수행되는 직업활동만이 복음으로부터 새로운 권리를 얻는다고 여겼다.
루터가 수도원을 뒤로하고 세상으로 귀환한 것은 죄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루터가 선물로 받은 것은 값비싼 은혜였다. 그 은혜는 메마른 땅 위에 흐르는 물, 불안을 해소하는 위로, 스스로 택한 종살이로부터 해방됨, 모든 죄의 용서였기 때문이다. 그 은혜가 값비쌌던 까닭은, 그것이 행위를 면제해주기는커녕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을 끝없이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 은혜는 값비싸서 은혜였고, 은혜여서 값비쌌다. 이것이 종교개혁자가 찾아낸 복음의 비밀이었고, 죄인의 칭의가 간직한 비밀이었다.
그런데도 순수하고 값비싼 은혜에 대한 루터의 인식이 아니라, 은혜를 가장 싼 값에 얻을 수 있는 곳을 찾아내는 인간의 용의주도한 종교적 본능이 종교개혁사의 승리자 행세를 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데는 남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강조점을 살짝 옮기기만 하면 되었다. 그 결과, 가장 위험하고 가장 해로운 일이 빚어지고 말았다.
루터는 아무리 경건한 길을 걷고 아무리 경건한 일을 해도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며, 이는 인간은 항상 자신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쳤다. 루터는 이 궁지 속에서 은혜를 붙잡았다. 믿음 안에서 모든 죄를 값없이, 그리고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하는 은혜였다. 그러면서 루터는 이 은혜가 그의 생명을 요구하고, 그것도 날마다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에게서 예수 따르기를 면제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예수 따르기 속으로 밀어 넣는 은혜였기 때문이다.
루터는 은혜에 관해 말했는데, 이는 그 자신의 삶이 은혜를 통해서 비로소 그리스도께 완전히 복종하게 되었음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었다. 그는 은혜에 관해 그런 식으로밖에는 달리 말할 수 없었다. 루터는 오직 은혜만이 그렇게 한다고 말했다. 그의 제자들도 그 말을 똑같이 되풀이했지만, 다른 점은 그들이 루터가 늘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을 아주 빨리 생략한 채, 그것을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루터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은 예수를 따르는 것이었다. 그가 예수 따르기를 딱히 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은, 그가 자신을 일컬어, 은혜로 말미암아 가장 중대한 예수 따르기에 들어선 사람이라고 늘 말했기 때문이다. 루터의 제자들이 세운 교리가 루터의 가르침에서 왔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의 교리는, 하나님이 지상에 내려주신 값비싼 은혜의 계시인 종교개혁을 끝장내고 무효화시키고 말았다. 세상 안에 있는 죄인의 칭의가 죄의 칭의와 세상의 칭의로, 이를테면 값비싼 은혜가 예수를 따르지 않는 값싼 은혜로 바뀌고 만 것이다.
루터는 우리가 아무리 최선의 삶을 살아도 우리의 행위는 헛되며, “죄를 용서하는 은혜와 은총이 아니면” 하나님께는 그 어떤 것도 가치가 없다고 말했는데, 이는 그가 그 순간까지, 그리고 이미 그 순간에 예수를 다시금 새롭게 따르라는 부름을 받고 있음을 의식하고,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린 한 사람으로서 한 말이었다.
그에게 은혜의 인식은 자기 삶의 죄와 최종적으로 철저히 단절하는 것이었지, 결코 죄의 칭의가 아니었다. 은혜를 안다는 것은 용서를 붙잡되, 제멋대로 살기를 최종적으로 철저히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 속에서만 은혜는 “나를 따르라”는 진지한 부르심이 될 수 있었다.
그에게 은혜는 그때그때의 ‘결과’였다. 물론 그것은 인간이 일으키는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결과였다. 그런데도 루터의 후예들은 이 결과를 추정의 원칙적인 전제로 삼고 말았다. 바로 여기서 모든 재앙이 시작되었다. 은혜가 그리스도께서 직접 선사하시는 기독교적인 삶의 ‘결과’라면, 이 삶은 한 순간도 예수를 따르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은혜가 나의 기독교적인 삶의 원칙적인 전제라면, 이는 내가 세상에 살면서 짓는 죄가 이미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셈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이 은혜를 믿고 죄를 지어도 될 것이고, 세상 또한 원칙적으로 이 은혜를 통해 의롭다고 인정받게 될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종래와 같이 나의 속물적이고 세속적인 생활을 계속하게 될 것이고, 모든 것이 옛날 그대로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감싸줄 것이라고 믿어도 될 것이다. 온 세상이 은혜 아래서 ‘기독교화’될 것이고, 기독교는 이 은혜 아래서 전례 없는 방식으로 세상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의 직업 활동과 시민의 세속 직업 활동 사이에 일던 갈등이 중지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세상 속에서 세상과 똑같이 살고, 실로 – 은혜로 말미암아! - 세상과 전혀 구별되지 않아도 되며, 그러면서도 적당한 시간에 세상의 구역에서 교회의 구역으로 찾아가 자기 죄의 용서를 확인받고, 예수 따르기의 숙적, 곧 예수를 진정으로 따르는 것을 증오하고 모욕하는 값싼 은혜를 통해 예수 따르기를 면제받는 것이다.
전제인 은혜는 가장 값싼 은혜이고, 결과인 은혜는 값비싼 은혜다. 무엇이 문제의 핵심인지, 복음의 진리가 어떻게 표현되고 사용되는지를 아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오직 은혜로만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말씀은 동일한 말씀이다. 하지만 동일한 문장을 잘못 사용하면 그 문장의 본뜻을 완전히 파괴하게 된다.
-디트리히 본회퍼, <나를 따르라>(복있는사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