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 자체의 애티튜드적인 면으로 정의되는 장르가 있다. 느와르라는 장르 자체가 그 기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 필름느와르라는 용어자체는 그 단어 자체가 내포하는 컬러적인 느낌만큼이나 음울한 공멸성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장르이다.
장르의 표방으로 영화를 기획하기란 쉽지 않다. 주로 소재를 얻고 대강의 시놉시스를 통해 완성된 플롯이 어떤 장르를 취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연결되는 경우가 정석적이다. 그럼으로써 비평가나 관객이 영화를 접한 후에 그 영화의 장르를 규정짓는 경우는 흔하지만 장르 그 자체에 대한 목적으로 영화의 시나리오가 작성되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영화의 기획단계 자체에서 영화의 컨셉에 따라 장르 자체가 적당하게 짐정되는 경우는 허다하지만 기획 이전의 모의 그 자체에서부터 장르를 염두에 두는 것은 제작 자체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그 장르에 대한 집착으로 발전되는 위험성으로 작용될 수도 있기 때문에 영화의 제작은 장르의 설정으로 출발되는 일은 거의 없다.-물론 여기서 말하는 장르자체는 외관적인 이미지로 쪼개지는 경우, 즉 멜로나 호러, 액션 등의 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 영화의 기획을 위한 제작진의 취재과정에 대한 여담을 예전에 들었을 때 거의 TV에서 방영되는 시사고발프로그램의 추적취재만큼이나 흥미진진함이 느껴졌다. 부산 뽕시장의 은밀한 이야기에 대한 접근과정과 그로부터 발췌된 스토리. 그 과정과 과정으로부터 추출된 결과물에 대한 소식은 흥미로웠으며 우리가 접근하지 못하는 사회의 이면적인 어두운 비밀들이 은밀하게 드러남에 대한 궁금증. 그것이 귀뜸으로 듣게 된 이 영화의 제작과정을 통한 기대감이었다. 또한 국내 영화사상 마약밀매에 관련된 작품이 전무후무하다 싶은 실정에 이런 소식은 영화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이영화는 외환위기가 닥쳤던 IMF시절의 재회로 관객에게 리얼리즘을 각인시키며 출발한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신문지면의 활용은 활자로부터 상징적으로 부각되는 리얼픽션에 대한 어필적 의도라고 여겨지며 그러한 의도는 나름대로 맞아떨어지는 측면이 있다.
어쨌든 외환위기의 혼란적인 상황에서 뽕의 밀매가 극성을 부리던 부산에서 영화는 운을 띄운다. 물론 이 영화가 기생충처럼 사회를 좀먹으며 자기 뱃속을 채우는 마약브로커들을 일망타진하는 바람직한 범죄영화라고 생각하며 이 영화를 찾는 이들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무엇보다도 이영화를 짊어지고 가는 두 배우를 봐도 그런 이미지 자체는 상상이 갈 수가 없는 것.
황정민과 류승범. 와이키키 브라더스 이후 5년여만에 만난 두 배우는 5년이란 시간동안 가능성을 능력으로 키운 뒤 다시 재회했다. 5년전만 해도 관객에게 낯설음으로 적용되던 이 두 배우의 이름 석자는 5년뒤 지금 충분한 기대감으로 작용되며 이 두 배우의 이름만으로도 이 영화의 흥행성이 어느정도 보장될 것만 같다. 그러나 일단 뚜껑은 열어봐야 한다. 한껏 만취된 기대감으로 열게 되는 이 영화가 판도라의 상자로 되돌아올 수 있음은 알 수 없는 것이니까.
일단 한마디로 이영화를 논한다면 재미있다. 재미라는 단어자체의 모호함에 부연설명을 가세시킨다면 두 배우의 능력치가 최고조에 달하는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이 영화는 두 남자배우가 만들어가는 두명의 캐릭터가 화려한 외관을 수놓고 중심축을 지탱한다. 두 배우의 힘이 전반적인 영화의 시퀀스를 책임진다는 것이다.
사실 황정민이란 배우는 상당히 다채로운 빛깔을 지녔다. 그의 연기폭은 '달콤한 인생' 백사장의 천연덕스러운 악랄함과 '너는 내 운명' 석중의 선천적 순박함을 가로지른다. 그는 영화에 따라서 캐릭터의 낯빛을 바꾸며 준비된 연기를 안정적으로 펼쳐보인다. 이 영화에서 그는 백사장에 가깝다. 하지만 그는 공직적인 부도덕함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희망적 이기심을 표출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악랄함을 보여주던 백사장과는 또한 다르다. 그는 그렇게 도진광 경장이라는 캐릭터가 지닌 비정한 루저의 모습을 왁자지껄하지만 굵직하게 토해냈다.
류승범처럼 양아치에 어울리는 배우가 있을까. 데뷔작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건달을 꿈꾸다 칼에 난자당한 채 꿈틀거리던 그는 그 후로 많은 필모그래피를 쌓았지만 그의 필모그래피는 하류인생과 가장 어울린다. 물론 그는 코믹하다. 하지만 웃기는 배우보다는 껄렁한 배우라는 이미지가 더욱 어필된다. 껄렁함. 그것보다 그를 쉽게 말할 수 있는 형용사가 있을까.-물론 스크린 속 그의 연기를 비추었을 때를 말하는 것이지 류승범이라는 인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실없이 껄렁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외관적인 가벼움에 인간적인 고민을 한움큼씩 쥔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소외된 아웃사이더적 반항심을 비소로 일관하듯 그의 연기는 그렇게 천박한 진지함을 보여준다.
캐릭터의 완성은 이 영화의 시작이자 끝이다. 영화의 이야기구조도 훌륭하지만 그 스토리텔링을 확실하게 서포트해주는 두 배우의 연기력은 이 영화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다. 또한 두배우외에도 상도의 아버지이자 마약제조사범을 연기하는 김희라는 중년의 관록을 되새기며 영화의 고전적인 감정선에 불을 지피며 지영 역을 맡은 추자현은 여배우로써 고민할만한 전라연기를 펼치며 약물중독자의 비참한 말로를 실감나게 연기한다. 그밖에도 비중은 약하지만 온주완의 연기도 눈에 띈다.
또한 영화의 이야기 자체에 주목해보자면 어두운 뒷골목을 배경으로 하는 암담함이 전반적으로 흐르지만 배우들의 입담과 속도감있는 전개로 인해 명랑함을 부여받는다. 마약과 폭력으로 점철되는 이야기의 음지적 성향은 반짝이는 네온사인 불빛같은 배우들의 입담에 의해 조명빨을 얻는다. 느와르적 비장감이 은연중에 흐르지만 그 비장감이 지니는 부담스러움을 세련된 연출력으로 극복해낸다. 이것은 장르가 지니는 전형성을 탈피한 것임에 동시에 발전적인 장르성향의 구축이라고 여겨질만한 성과이다.
악어와 악어새의 공생관계. 경찰과 마약브로커의 은밀한 공생관계가 이 영화를 통해서 보여진다. 재미있는 건 신뢰로 의리도 없는 도 경장과 이상도의 공생관계다.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서로를 믿지 않는다. 둘은 서로 악어가 되려하지 악어새가 되려하지 않는다. 악어가 되어서 언젠가 악어새가 쓸모없어지면 가차없이 입을 닫아버리기 위해서 둘은 서로 악어의 위치를 선점하려한다. 그리고 그 위치선점을 위한 처절한 대립과 공존과정이 스크린 너머로 장황하면서도 응집력있게 펼쳐진다.
사실 이 영화는 '야수'와도 비교선상에 설 수 있다. 느와르적 감성을 고려한다면 '달콤한 인생'이나 '야수' 정도의 영화와 비슷한 면모를 갖추겠지만 와일드한 측면의 강화는 '달콤한 인생'의 세련미와 개인적 감성과 오히려 대비적이며 야수와는 동질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야수'가 선악 대립을 극명하게 드러낸 반면 본작은 선과 악의 대비가 극명하지 않으며 오히려 뭉뚱그려진 선악위를 넘나드는 주인공들의 모양새에서 인간적인 향취를 맡는다. '야수'가 현실의 비정의성을 선의 몰락에서 찾았다면 '사생결단'은 선의 타락에서 찾았다. 전자가 명분론을 추구했다면 후자는 현실론을 차용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소재의 무거움에서 탈피한 현실적인 설득력이 갖춰져 있다.
또한 이 영화가 갖추고 있는 미덕은 이야기의 속도조절능력인데 군더더기없는 플롯의 흐름에서 느껴지는 것은 한순간도 헛점이 보이지 않는 스토리의 실함이다. 방대한 이야기를 개인적인 감성을 통해 분출하면서 단지 사건의 모양새를 전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감정적인 공감대를 형성한다. 도 경장의 비열함이 이해되는 것은 그가 밑바닥 인생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개인적 욕망의 발현이기 때문이며 상도의 범법행위자체에 대한 관객의 불쾌감이 양산되지 않는것은 그의 상처입은 과거담에서 출발되는 삶에 대한 불만 욕구 해소 때문이라는 것을 관객에게 이해시킴과 동시에 감정적 동조를 부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개인적 욕망의 굴레에 덧 씌워진 마약이라는 굴절된 욕망의 생산품이 그럴듯한 상징적 뉘앙스로 다가온다.
마약은 천국과 지옥을 왕래하게 만드는 열차와도 같다. 약에 취해 쾌락의 문을 넘나드는 그 순간은 천국과 같을지 몰라도 현실로 돌아와 끔찍한 금단현상과 마주하면 지옥과 다를바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천국 그 자체도 지옥으로 가기 위한 신기루와 같다. 복용기가 길어질수록 쾌락보다는 고통과 대면되는 시간이 더욱 길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옥이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그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지옥과 대면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속적으로 약을 해야 하는 벗어날 수 없는 악순환의 오류를 실행하는 것이다. 이는 벗어나지 못하는 하류인생의 굴레와도 같다. 마치 약에 도취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중독자처럼 루저들의 굴레는 그 둘레안에서 쳇바퀴 돌듯 헤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패배자적 감성은 비속한 대범함을 지닌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을 통해 삶이란 문제를 죽음과 결박시키며 단순하지만 명료하게 정의했다. 산다는 것은 항상 그 삶의 지속성을 유지하느냐의 선택의 문제다. 물론 즉흥적으로 매번 그 선택을 강요받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은 분명 삶의 지속성에 대한 자발적 의심을 취한다는 것이다. 사생결단(死生決斷). 말그대로 죽음이든 삶이든 끝장을 보기 위한 한판승부를 뜻하는 이 사자성어는 명료하면서도 본질적인 처절함을 내포한다. 이 영화의 제로섬게임은 그런 처절함과 직접적으로 대면하면서도 이야기상의 뒤끝없는 명료함을 취한다. 결국 개인도 사회도 구원받지 못하고 정화되지 못한 채 영화는 다시 시작될 암울한 악순환을 암시한다. 이전투구(泥田鬪狗)의 비열한 공생이 제로섬게임으로 종식되었음은 그런 처절함의 진폭을 확대시키면서 이야기상의 뒤끝없는 명료함을 취한다. 허탈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그것이 이 영화가 취하는 결말의 진부하지 않은 현실이자 우리가 느끼게 될 이 사회의 담담한 자화상이다.
-written by kharismania-
첫댓글 "탁월한 속도조절과 한순간도 헛점이 보이지 않는 스토리의 실함" 이말에 공감 합니다 ㅋ 너무 타이트 한것도 너무 루즈 한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이야기가 딴길로 새지 않아서 너무 좋았어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