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러시아의 고려인 출신 작가인 아나똘리 김의 자전적 에세이인 <초원, 내 푸른 영혼>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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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이곳 깜차뜨까에 있는 고려인 아이들을 위한 초등학교에 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현지에 도착해 보니, 학교는 아예 있지도 않았다. 학교가 들어갈 만한 공간도 없었다. 현지 행정부서는 대륙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의 거주 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고려인 학교를 위한 건물을 제공할 수 없다고 잡아떼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모스크바의 크렘린으로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냈다. 아버지는 전보에 문제의 요점을 상세히 적었다. 따라서 전보문은 아주 길어졌고, 아버지는 엄청난 액수의 요금을 지불해야만 했다.
그러자 곧바로 다음날 아침에 답장이 왔다. 아버지의 전보와는 달리 답장은 아주 간결했다.
"학업은 반드시 제 시기에 시작되어야 할 것임, 스탈린."
이게 전보 내용의 전부였다.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 황제가 즐겨 사용하던 그 유명한 간결체 문장이었다.
행정우편 양식에 기록된 전보가 우리가 살고 있는 막사에 배달된 것은 아침 6시 경이었다. 그리고 7시 쯤이 되자, 어업 콤비나트, 마을 소비에트 의장, 당조직위원장 등 현지 지방 관청의 고위 인사들이 모두 달려왔다. 잔뜩 겁을 먹은 그들은 굽실거리며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는 콤비나트는 고려인 학교 몫으로 몇 가구가 함께 쓰고 있는 통나무집 두 채를 제공하려는데 아버지의 생각은 어떠냐고 물었다.
이 두 채의 집에는 마을에서 이른바 '힘깨나 쓰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행정부서와 모든 권력기관의 직원들이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 두 채의 집을 선택했고 바로 그 날 우리 가족은 새 거처로 이사를 했다.
새로 문을 열게 된 고려인 학교 교장의 자격으로 아버지는 이 집을 받았다. 그리고 스탈린이 명령했던 대로 학업은 정말 '제 시기'에 시작되었다.
당시 스탈린은 러시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의 신, 그것도 무시무시한 벌을 내리는 신이었다. 그가 통치하던 기간 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소련 전체 인구의 25%가 사망했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신이었다. 보통사람들은 그런 신 가까이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데 감히 나의 아버지가 스탈린에게 직접 전보를 보내 아주 호의적인 답신을 받았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수많은 민족에게 불행과 재난을 안겨준 이 잔인한 독재자가 아버지의 청원 같은 하찮은 일에 갑자기 관심을 갖고 직접 나서서 호의적인 조치를 취했던 것일까? 나에겐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1937년에 여러 소수 민족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면서, 그 최초의 희생자가 고려인이었다는 사실을 스탈린은 갑자기 생각했던 것이까? 글쎄, 양심이 발동했던 것일까?
그러던 어느 날 수업 시작 후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청년동맹 서기직을 맡고 있던 사샤 고르쉬꼬프가 교실로 들어왔다. 교실 문턱에서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 없이 오랫동안 서 있던 그는 갑자기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얼굴을 벽에 대고 얼마 동안 울더니 흐느끼는 목소리로 감히 상상할 수도 없던 말을 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이 돌아가셨대."
1953년 봄에 스탈린이 사망했을 때, 우리 모두는 우리의 태양이 졌다고 생각했다. 그 태양을 대신할 다른 어떤 것을 상상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우리가 늘 외치던 "스탈린 만세!"라는 구호에 다른 어떤 이름을 바꾸어 넣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울어다. 나의 아버지도 책상 옆에 서서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울었다. 그때 수백만 명의 가슴은 슬픔으로 찢어지는 듯 했다.
스탈린은 수천만의 인명을 앗아간 다음, 권력을 장악하는 외형상의 전쟁에서 뿐만 아니라 소련인들의 영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또 다른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소련인들은 얼굴에 마마 자국이 가득한 이 그루지야 태생의 음침한 인물을 자신들의 신처럼 열렬히 사랑했던 것이다.
어린 우리들은 스탈린에 대한 진실을 알 수 없었다. 여자 아이들은 교실 안에 몇 명씩 모여 코를 훌쩍이며 큰 소리로 울었다. 사내 아이들도 고개를 떨구고 비탄에 빠져 주먹으로 눈물을 닦았다. 나도 눈물을 참으려고 무던히 애썼다. 그때 내가 눈물을 흘렸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문제는 스탈린의 권력에 강제이주라는 고통을 당한 자의 아들인 내가 그 고통을 겪은 당사자인 아버지와 함께 이 그루지야 태생의 러시아 폭군이 죽자, 슬픈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는 사실이다. 수백만 명의 러시아인들과 비러시아계 사람들도 스탈린이 사망한 직후, 슬픔을 가누지 못했고 "이제 그 분이 없이 어떻게 될까?"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리가 평소에 엄숙한 마음으로 외치던 구호인 "스탈린 동지 만세!" 대신에 어쩌면 이제는 "말렌코프 동지 만세!" 또는 "베리야 동지 만세!"를 부르짖어야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진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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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만한 카리스마도 드물죠 ㄷㄷ 그 자신의 정치력이 매우 뛰어나기도 하고...
독재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 전제정이 왜 유지될 수 있는지의 편린을 본 기분입니다.
밑에놈들 딴짓 못하게 고발자들을 늘리려고 했을듯..
그래서 오늘날 박통교가 흥하고 있죠,
박정희가 죽었을때 저런 분위기였답니다. 뭐 하는짓이 별로 다르지 않았으니... 1천만명의 추모객이 방문했다는데 그게 전부 동원일수는 없죠. 일종의 스톡홀름 신드롬...
말렌코프...베리야...
윗세대 분들께 들어보니 박통때도 저랬다고 하더군요.
그냥 박정희가 죽었다는게 이유없이 슬픈 분위기 였다고.
왕정이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보여주는듯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