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태종•이방원:⤵
태종•이방원 제187편: 조선 최고의 성군, 경복궁에서 즉위하다 (통치력은 수업 연한이 전부가 아니다)
세자가 오장(烏杖)과 청양산(靑陽傘)으로 창덕궁에 오는 것을 목격한 태종은 화를 벌컥 냈다. 전위했는데 세자의 전유물 오장과 청양산은 마땅하지 않다는 것이다.
“명을 따르지 않으려거든 오지 말라.”
세자가 마지못하여 주장(朱杖)과 홍양산(紅陽傘)으로 앞을 인도하게 하였다. 붉은 양산이 있는 곳에 임금이 있다. 홍양산은 임금의 존재를 상징한다. 세자가 소매에서 전문을 꺼내어 친히 부왕에게 바쳤다.
“신의 성품과 자질이 어리석고 노둔(魯鈍)하며 학문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위정(爲政)하는 방도를 몽연(懜然)히 깨닫지 못하고 저부(儲副)의 지위에 외람되이 거(居)하니 그 자리에 합당하지 못할까 항상 두려웠습니다. 어찌 오늘이 있으리라 상상이나 하였겠습니까? 너무 뜻밖이라 정신이 없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주상 전하께서는 춘추가 한창이시고 성덕이 융성하신데 갑자기 종묘·사직의 중책을 어리석은 이 몸에 맡기고자 하시니 조종의 영(靈)이 경동할까 두렵습니다. 또 나라를 서로 전하는 일은 국가의 대사인데 이와 같이 한다면 중외의 신하와 백성들이 놀라지 않을까 염려되옵니다. 거듭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신(臣)을 후사로 삼을 때에도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천자(天子)에게 아뢰었는데 더구나 군국(軍國)의 중함을 신에게 마음대로 주시니 신이 사대
(事大)의 예를 잃을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어리석은 신의 지극한 정을 살피시고 국가의 대계를 생각하여서 종사와 신민(臣民)들의 소망을 위로하소서.”
세자가 태종 앞에 엎드려 있는 사이 밖에서는 소동이 벌어졌다. 정부 육조 삼군도총제부 문무백관과 2품 이상의 전함(前銜)이 편전 문 앞에 몰려와 문을 지키는 갑사(甲士)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임금이 좌대언(左代言) 하연, 도진무(都鎭撫) 이춘생에게 명하여 갑사로 하여금 중문(中門)을 굳게 지키게 하여 대소신료가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였기 때문이다.
예정된 순서대로 착착 진행되는 선위.
유정현이 수문장을 꾸짖고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문지기가 굳게 막아서며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마침내 유정현이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대소신료들이 유정현의 뒤를 따라 들어가 복위하기를 청하면서 호곡(呼哭)했다. 태종은 신하들의 복위 주청을 단호히 물리쳤다. 오히려 영의정 한상경, 좌의정 박은 우의정 이원과 육조판서(六曹判書)를 불러 새 임금이 즉위하는 일을 의논하여 차질 없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전하께서 군신(群臣)의 청을 굳이 거절하니 어쩔 것인가? 어찌할 것인가?”
현실을 인식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좌의정 박은이었다. 복위의 청을 얻지 못하면 육조(六曹)와 더불어 즉위(卽位)할 여러 일을 의논하여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조정의 원로 성석린, 유정현 그리고 여러 군신(群臣)들이 또 중문을 헤치고 내정으로 들어가 호곡(呼哭)했다. 그 소리가 어좌(御座)에까지 들렸다.
“내가 이성(異姓)의 임금에게 전위한다면 경들의 청이 옳겠지만 내가 아들에게 전위하는데 어찌 이와 같이 하는가? 다시 청하지 말라.” “전위는 전하와 세자에게 있어서 다 같이 실덕(失德)함이 있습니다. 원민생이 세자를 세우는 청을 가지고 아직도 명나라에서 돌아오지 않았는데 전하께서 하루 아침에 왕위를 물러나시고 세자가 즉위한다면 황제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청컨대 원민생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게 하소서.”
김점이 명나라와의 외교문제를 들어 반대했다.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삼는다는 주본을 가지고 명나라로 떠난 사신 원민생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태종은 치밀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 2개월 전에 떠난 원민생이 아직 한양에 돌아오지 않았으나 황제의 고명을 받아 이미 연경을 떠났다는 계산이었다.
태종은 대소신료들의 만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위를 늦출 수 없다는 것이다. 태종은 친히 세자의 머리 위에 충천각모(衝天角帽)를 씌워주며 등을 떠밀었다. 세자로 하여금 국왕의 의장(儀仗)을 갖추어 경복궁에 가서 즉위하게 하였다. 왕세자가 내문(內門)을 열고 나와서 말했다.
“내가 어리고 어리석어 큰일을 감당하기가 어려우므로 지성으로 사양하기를 청하였으나 마침내 윤허를 받지 못하고 부득이하여 경복궁으로 돌아간다.”
지는 해를 바라보지 말고 뜨는 해를 맞이하라.
군신(群臣)들이 세자가 충천모(衝天帽-익선관)를 쓴 것을 보고 곡성(哭聲)을 멈추었다. 익선관은 임금의 상징이다. 새로운 왕이 탄생했으니 경하해야 한다. 곡성과 경하의 변경점에 선 것이다. 꿇어앉고 땅에 엎드려 있던 신료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 황망했다. 울던 얼굴로 웃어야 하는 난감한 순간이다.
“세자는 우리 임금의 아들이다. 굳이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이미 상위(上位)의 모자를 쓰셨으니 우리가 굳이 다소 청할 이유가 없다.” 박은이 큰소리로 외쳤다. 대소신료들도 박은의 의견을 따랐다. 전위를 현실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태종이 양녕을 폐위하기 전 유정현과 박은을 비밀리에 불러들여 밀담을 나누었던 순서에서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된 결과였다.
태종은 내관 최한에게 양 정승을 들라 일렀다. 좌의정 박은과 우의정 이원이 급히 입시했다. “주상이 장년이 되기 전까지는 내가 군사(軍事)를 친히 청단할 것이다. 또한, 나라에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은 의정부·육조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여 각각 가부를 진달(陳達)하게 하여 시행하고 나도 가부에 마땅히 한 사람으로 참여할 것이다.” 태종이 전위 후의 정국 운영에 대한 구상을 밝혔다.
“성상의 전위는 한가롭게 일락(逸樂)하시고자 하는 것으로 신등이 생각하였는데 이제 성상의 대계(大計)를 알겠습니다. 청컨대 교서(敎書)를 지어 왕위를 사양하시는 뜻을 유시(兪示)하시어 신민의 소망을 너그럽게 하소서.” 이제야 임금의 뜻을 알았다는 듯이 박은과 이원이 머리를 조아렸다. 태종은 예조판서 변계량에게 전위 교서(敎書)를 짓게 하는 한편 여러 대언들에게 전지(傳旨)했다.
“병조 당상은 모두 나에게 시종(侍從)하고 그 밖의 대언은 속히 경복궁으로 가라.”
“신 등도 반으로 나누어시위(侍衛)하겠습니다.”
“비록 병조는 겸(兼)할 수 있으나 어찌 승선(承宣)을 나누어 두겠는가? 예로부터 승선은 인주(人主)를 따르는 것이다. 따로 행(行)할 이치가 없으니 모름지기 속히 경복궁으로 가라.”
하연으로 하여금 급히 사금(司禁)을 거느리고 주장(朱杖)과 임금의 의장(儀仗)을 가지고 경복궁으로 가도록 명했다. 변계량이 전위교서를 지어 부리나케 달려왔다.
“오늘 조하를 받으려면 일이 심히 번극하니 속히 반교(頒敎)하라.” 대소신료들이 조복을 갖추고 창덕궁 뜰에 도열했다.
“왕(王)은 말하노라. 내가 부덕한 몸으로 태조의 홍업(洪業)을 이어받아 이미 18년이 되었다. 은택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여 여러 번 재변(災變)이 일어났고 근일에 숙질(宿疾)심하여 청정(聽政)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세자가 영명공검 하고 효제관인 하여 대위에 오르기에 합당하므로 영락 16년 8월 초8일에 친히 대보를 주어 기무(機務)를 맡아보게 하였다.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은 내가 친히 청단(聽斷)하겠다. 중외의 대소신료들은 모두 나의 지극한 마음을 몸 받아 한마음으로 협력하고 도와서 유신(維新)의 경사를 맞이하게 하라.” -<태종실록>
창덕궁에 머물고 있던 백관들에게 경복궁에 가서 새 임금을 진하 하게 했다. 창덕궁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지 말고 경복궁에 가서 뜨는 해를 맞이하라는 것이다. 문무백관이 조복(朝服)을 갖추고 경복궁 근정전에 반서(班序)했다. 익선관을 쓴 세자가 홍양산(紅陽傘)을 앞세우고 경복궁 근정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왕세자 충녕이 세종대왕으로 탄생하는 순간이다. 세자 양녕이 폐위된 지 2개월 만이다. 14년간 세자 수업한 양녕은 축출되었고 충녕은 2개월 남짓 세자 수업을 받았다.
태종•이방원^다음 제188편~
첫댓글 바쁘신데 187편 올려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잘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