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권이냐, 왕권이냐-그레고리우스 7세와 하인리히 4세
"신은 종교문제를 교황에게 맡겼고,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황제에게 맡기셨다. 성직
자(영주)를 임명하는 권리는 예전부터 황제에게 있었는데 그것을 금지하다니 그레고리우스
를 교황의 자리에서 추방해 버리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권위가 높아지자 불만을 토로하면서 교황에
게 도전했다. 자신이 가진 영주임명권을 교황이 간섭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마 교황
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감히 신성한 로마 교황에게 도전하다니, 그 따위 황제는 교회에서 파면시키겠다."
당시 교황의 권위는 하늘의 신과 비견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대노
하여 하인리히 4세를 교회에서 파면시켰다. 교회에서 파면 당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당시 사회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거 큰일났군. 교황과 황제가 맞붙었으니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게 말야. 황제는 교황을 나가라고 하고 교황은 황제를 파면시켰으니..."
지방을 지배하는 제후들은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1075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자가 아닌 사람이 성직자를 임명하는 행위를 금지했다. 하지
만 성직자를 임명하는 권리는 프랑크왕국 시대부터 국왕에게 있다고 규정되어 왔기에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도 그 권리를 주장하여 성직자 임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마 교황은 이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성직자가 아내를 거느리는 것이나 성직을 매매하는 것을 금지한다. 그리고 사교, 수도원
장 등 상급 성직자의 임명권은 교황에게 있다. 앞으로 황제들은 이 사항들을 지켜야 한다."
상급 성직자는 넓은 토지를 지배하는 종교 제후(영주)였기 때문에 이는 단순한 교회 내부
의 문제가 아니라 교황과 황제, 국왕 사이에 치열한 대립을 부르게 된 복잡하고도 미묘한
문제였다. 1976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이 자신의 권리를 빼앗으려 하
자 이에 강력히 반발했으며, 교황을 몰아내자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교황을 폐위시켜야 한다. 그는 교황으로서의 임무보다 황제의 권리를 가지려고 한다!"
"하인리히 4세의 의견에 동참하는 모든 황제와 국왕은 파문시키고 말겠다."
교황과 황제가 대립하자 제후들은 모여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띤 토론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파면당한 황제 따위는 황제로 인정할 수 없다.
"무슨 말인가? 황제의 권위를 어떻게 그렇게 쉽게 무시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교황의 권위에 도전할 수는 없잖는가?"
의견이 분분하여 좀처럼 결말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시간을 두고 이 일을 처리하도록 합시다."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1년 이내에 황제의 파면이 풀리지 않으면 황제로 인정하지 않기로 합시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모든 제후들은 이 의견을 제안한 제후에게 천성의 뜻을 전달하였다. 이제 남은 하인리히
4세가 교황으로부터 다시 황제로서 승인을 받는 일 뿐이었다.
"폐하, 황제께서 1년 안에 교황으로부터 재임명을 받지 않는다면 제후들이 황제로서 인정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했다고 합니다."
"뭣이라고, 제후들이...!"
보고를 받은 하인리히 4세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교황의 권위에 도전할
줄 알았던 제후들이 자신을 배신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폐하, 아직은 교황의 권위에 눌려 어떤 국왕이나 제후도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잘못 하다가는 폐하는 해하려는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곤란하게 되었군. 국내 제후들까지 나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 사태를 극복하는 길은 폐하께서 교황에게 잘못을 빌고 용서를 받는 길뿐이라고 생각
됩니다."
신하의 간곡한 진언에 하인리히 4세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교황을 모
욕했는데 이제 와서 용서를 빈다는 것은 황제로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무력을 사용하기에는 군사력을 제후들에게 너무 많이
의존하고 있었다.
"별 수 없군. 창피하지만 교황에게 빌어서라도 파면을 풀어달라고 조르는 수밖에..."
하인리히 4세는 창피를 무릅쓰고 이탈리아 북부의 카놋사로 교황을 찾아갔다. 하지만 교
황은 그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감히 교황에게 도전한 자를 만난다는 것은 나의 수치다. 그러니 돌아가라고 해라!"
하인리히 4세는 난감했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물러설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교황의 용서를 받아내야 한다. 그렇다면..."
"폐하, 이러시면 큰일납니다. 지금은 겨울입니다."
하인리히 4세는 성문 앞에 무릎을 꿇고 교황이 용서할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신하들의 가슴은 메어지는 것만 같았다.
황제는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에 금방이라도 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지만 황제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였기에 아무런 동요도 없이 용서를 빌었다.
"교황님, 노여움을 푸시고 저를 용서해 주십시요. 잠시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하지만 교황의 노여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하인리히 4세가 저렇게 용서를 비니 이제 파문을 거두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내가 그를 용서할 수 있는가. 신에게 도전한 황제는 어떤 꼴을 당하는지 천하게
보여주고 말겠다."
교황은 두 번 다시 자신에게 도전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못을 박아두고 싶었다. 하인리히
4세는 눈이 내리는 성밖에서 눈을 맞으며 용서를 빌었다.
"용서하실 때까지 이렇게 무릎을 꿇고..."
식음을 전폐한 황제가 3일 동안이나 이렇게 용서를 빌자, 교황의 마음도 누그러들기 시작
했다.
"눈 내리는 성 밖에서 3일동안이나 뉘우쳤으니 용서해 주겠다. 하인리히 4세의 파문을 오
늘로서 거두어들인다."
"고맙습니다. 교황님!"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의 파문을 취소하자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감사의 뜻을 표했다.
교황이 황제를 용서했다는 소식이 퍼지자 각 제후들도 다시 황제를 인정했으며, 하인리히 4
세는 다시 자신의 권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1077년에 발생한 '
카놋사의 굴욕'이다. 교황의 권력이 황제의 권력 위에 있다는 것을 세상에 과시한 사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인리히 4세는 본국으로 돌아와 제
후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교황의 권위에 더 이상 굴복한다면 우리가 앞으로 어떤 불평등한 요구를 받게 될지 모르
오. 그리고 우리가 교황에게 도전하여 승리한다면 교황의 승인 없이도 자유롭게 성직자들을
임명할 수 있게 되오."
상황은 다시 하인리히 4세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황제는 1080년
국내의 제후들을 규합하여 이탈리아를 침공하기에 이르렀다.
"교황의 절대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 자 모든 병사들아 이탈리아로 쳐들어가자!"
"와아아아!"
하인리히 4세가 이끄는 병사들은 파도처럼 이탈리아를 점령했다. 어디에도 이들을 막을
군대는 없었다.
"교황님 어서 피하십시오. 하인리히 4세가 목숨을 노리고 군대를 일으켰습니다."
"괘씸한 놈. 그때 용서를 해주는 것이 아니었는데..."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카놋사에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교황의 일행은 하인리히 4
세가 도착하기 전에 살레르노로 도망쳤다.
"그새 도망쳤군."
카놋사에 도착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을 잡지 못해 안타까웠지만 다시 황제의 권위를 회
복하게 되자 기뻐 어쩔 줄 몰라했다. 이제 더 이상 황제에게 교황이 대항한다는 것은 생각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살레르노로 도망친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85년 그 곳에서 죽음을 맞
이함으로써 끊임없이 이어진 두 사람의 대결은 하인리히 4세의 승리로 끝이 났다. 하지만
황제와 교황의 싸움은 이 후로도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교황이 정치에 관여해야 하는지 아
니면 종교적 입장에 서야 하는지의 문제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대결은 마지막에 무력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었다.
그 후 십자군 원정으로 약해진 교황의 권위에 헨리 8세가 도전하여 심하게 의견대립을 보
이자 로마 교황과의 관계를 끊고 영국 국교회를 성립시킴으로써 교황권은 일대 타격을 받게
되었다. 각국의 정치에 간섭하는 교황의 행동에 불만을 느낀 많은 제후들을 중심으로, 새로
운 종교형태를 주장하는 루터와 칼뱅의 의견을 받아들여 교황과의 단절을 시도하게 된 것이
다. 근대에 이르러 교황은 정치적 문제에서 벗어나 종교의 전파나 세계평화를 위해서 활동
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평화와 종교적 신앙심을 강조하는 교황을 존경하게
되기까지 교황은 많은 노력을 하였다. 반면에 황제는 이후 시민사회를 거쳐 민주주의가 확
립되면서 서서히 몰락해 갔으며, 그의 절대적 권리는 다수의 국민들이 가지게 되었다. 오늘
날 일부 국가에서 명목상의 국왕이라는 상징적인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