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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1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마태오 10,7-13
교회가 다시 사람이 넘치게 할 유일한 길
현재 수치상이나 느끼는 바로는 교회가 점점 비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축일을 맞는 성 바르나바 사도가 그 변하지 않는 해법을 제공하고 있다고 봅니다. 바르나바 이름의 뜻은 ‘위로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성 바르나바의 성품과 그 열매가 잘 드러납니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는 선교의 두 기둥처럼 함께 다니며 큰일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씨를 뿌리는 역할이었다면 바르나바 사도는 키우는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착하고 신심 깊은 인물이었고 그 덕분에 많은 이들이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의 성품은 오늘 복음의 이 말씀과 같겠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대전의 명물 ‘성심당’의 임영진 대표가 성 바르나바를 닮은 분 같습니다.
어쩌면 그분의 아버님인 고 임길순 창업주는 성 바오로를 닮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대로 흥남 철수 때 수많은 사람이 배를 타려고 하고 있었는데 오직 메러디스 빅토리아호만 남아 있었습니다.
임길순 씨는 묵주를 들고 “만약 이번에 살게 된다면 그건 하느님이 살려주신 것일 테니, 남은 평생은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살아가겠습니다.” 라고 약속을 드렸습니다.
그때 묵주를 들고 있는 모습을 미군이 보았고 선장에게 알렸습니다.
선장은 ‘레너드 라루’로 후에 수도원에 들어가 현재는 시복 추진 중인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선장은 어째서인지 무기와 차량 등 무게가 나가는 것들을 바다에 버리라고 하고 사람을 태울 수 있는
만큼 태우라고 명령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다 아는 바대로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임길순 창업주는 대전에서 성당에서 받은 밀가루 두 포대로 찐빵을 만들어 팔며 그날 안 팔린 것은
다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보내기로 합니다.
먹고살 것도 없는 형편에서 아내는 “너희 아버지만 천당에 가고 나는 지옥에 갈 거다!”라며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신앙을 위해 가게를 성당 가까운 곳으로 옮겼고 매일 새벽 미사를 다녔습니다.
그때 자녀들은 종교가 싫었지만, 지금은 손주들까지 모두 할아버지의 신앙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임길순 창업주는 아들 임영진 대표가 빵집을 잘 운영하는 것을 보고는 당신은 연령회와 같은
봉사만 하며 노년을 보냈습니다.
임영진 대표가 “주면 반드시 받게 된다.”라는 아버지의 신념이 열매를 본 것은 철거반이 왔을
때입니다.
당시 성심당은 위반건축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철거반장은 왔다가 그냥 돌아가 버렸습니다.
임 대표가 말합니다.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철거반장이 어렸을 적에 그분 아버지가 돌아가셨나 봐요.
그때 저희 아버지가 그분 염부터 입관까지 장례를 치러주는 봉사를 했다는 사실을요.
철거반장이 그런 우리 아버지를 기억해내고는 그냥 돌아간 거죠.”
임 대표는 지금도 매달 3,000만 원어치의 빵을 기부하고, 회사 수익의 15%는 무조건 인센티브로
직원들에게 돌려주는 정책을 폅니다.
그러다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2005년에 빵 공장에 불이 난 것입니다.
이미 동생의 사업 실패로 집안은 빚더미에 앉아있었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 임 대표의 아내 김미진 이사는 어차피 불을 끄러 가봐야 너무 늦은 상태기 때문에 그냥 성당에 돌아와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동안 빵을 많이 팔게 해 준 것에 감사하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족회의를 하는데 큰딸 임선은 피식 웃으며 “전, 학교 휴학할래요.”라고 했고 아들은 “전 어차피 입대하려고 했잖아요. 날짜를 앞당겨볼게요.” 라고 했습니다.
다들 착한 가족입니다.
임 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동안 최선을 다했고 열심히 살았으니 다들 그런 큰일을 겪고도 그렇게 침착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안타깝지만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이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임 대표는 가게를 부동산에 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불만이 많던 직원들은 다 나가버렸고 착한 직원들이 모여 “잿더미 속 우리 회사 우리가 일으켜 세우자.”라고 하며 공장을 1월 추운 날씨 속에서 6일 만에 어느 정도 정상화한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로 일궈낸 성심당에서 나오는 빵은 왠지 더 맛있었습니다.
임 대표는 말합니다.
“우리는 화재를 겪으면서 삶에서 가장 중요한 답이 무엇인지 한 번 봤어요.
답안지를 본 사람은 고민할 필요가 없죠.
위기가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르죠.
그렇지만 우리는 적어도 똑같은 방황을 되풀이하진 않을 거예요.”
이 회사는 인사고과에 사랑에 대한 평가가 40%입니다.
둘이 싸우다가 서로 화해했다면 진급 대상자가 됩니다.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직원들은 이렇게 선서한다고 합니다.
“하나,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
하나, 우리는 사랑의 문화를 이룬다.
하나, 우리는 가치 있는 기업이 된다.”
이들은 포콜라레 정신에 의거하여 수입의 3분의 1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3분의 1은 재투자로, 3분의 1은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보다 수천 배나 매장이 많은 커다란 프렌차이즈 빵집들보다 수익이 많이 납니다.
저도 본당에 와서 재정의 10%를 가난한 사람에게 내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올 가을부터는 소공동체 시스템 변화를 통해 최대한 가난한 이들에게 자동으로 재정이
흘러가게 할 예정입니다.
그러면 돈도 사람도 부족해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것이 창업주의 정신입니다.
“주어라, 받을 것이다!”
“우리 곁에 불행한 사람을 둔 채로 혼자서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11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복음: 마태 10,7-13
저는 정말이지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 것도 하는 게 없습니다!
주말마다 저희 피정 센터에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오십니다.
한두 분이 아니라 70명, 80명입니다.
식사도 하시고 주무시고 가시니 할 일이 태산입니다.
이리 저리 뛰어다니다보면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도착하신지가 조금 전 같은데. 어느새 작별 인사를 할 시간입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떠나실 때는 대절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마을 입구까지 마중을 나갑니다.
“피정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 집이다 생각하시고, 다음에 꼭 오세요!” 하고 인사드립니다.
별것 아닌 노력이지만 형제자매들이 받은 감동이 큰 것 같습니다.
다들 하시는 말씀, “살다 살다 이렇게까지 환대받고 배웅까지 받은 적은 없습니다.
촌각의 순간이었지만 작은 천국 체험을 하고 갑니다.
신부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하는게 없습니다. 저희 훌륭한 형제들이 각자 자리에서 잘 도와주셔서 잘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는 화장실 청소를, 어떤 형제는 침구 세탁소에서, 어떤 형제는 강의로, 다들 기여를 하고 계십니다.
피정이 잘 되었다면 그 이유는 바로 우리 형제들 덕분입니다.”
큰 족적을 남긴 걸출한 인물은 홀로 탄생하는 것이 절대 아니더군요.
무대의 뒤에서 묵묵히 도와준 조력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대 교회를 이끌었던 위대한 선교사 바오로 사도 뒤에도 위대한 조력자가 한명 계셨으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바르나바 사도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단에 포함되지 않았으면서도 사도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부여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바오로 사도를 도와 초세기 교회 건설에 엄청난 기여를 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축으로 건설되는 것처럼 보이던 초세기 교회가 탄력을 받고 예루살렘 밖으로 퍼져나가게 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르나바 사도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의롭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바르나바 사도를 적임자로 선택하셨습니다.
바르나바 사도가 행한 일 가운데,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 탁월한 일 한 가지가 있었는데,
흙속의 진주를 찾아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오로 사도를 찾아간 것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비범하고도 탁월한 능력을 눈여겨 본것입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바르나바는 애칭이자 별명입니다.
바르나바란 이름이 지닌 의미는 ‘위로’ ‘격려’ ‘용기를 복돋는 전문가’입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계 사제였습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서울 강남격인 예루살렘 시내에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던 금수저 출신에
수려한 외모까지 겸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름에 걸맞게 바르나바 사도는 바오로 사도를 크게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그리스도교로 개종은 했었지만, 아직도 낯설기만한 그리스도교 공동체 신자들과의 관계 안에서 무척이나 위축되어 있고 의기소침해있던 바오로 사도를 찾아갑니다.
따뜻하게 위로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용기를 북돋아주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자극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신들을 박해하던데 앞장서던 바오로 사도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회개를 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찾아왔을 때, 무척이나 당혹스럽고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그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저러다가 또 언제 마음이 바뀌어서 우리를 위협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입장에서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은 그리스도교 신자들 앞에서 꽤나 괴로웠을 것입니다.
이런 난감한 상황 속에서 성령과 지혜로 가득했던 바르나바 사도가 두팔을 걷어붙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루살렘에 왔을 때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지만, 바르나바 사도는 그를 따뜻히 환대합니다.
다른 사도들에게 그를 소개해줍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배려와 협력에 힘입어 바오로 사도는 용기백배해서 그 위대한 선교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선교 여행 초기에 ‘바르나바와 바오로’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올 때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로 표현합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때로 바오로 사도의 스승처럼 그를 지도했습니다.
때로 친구처럼 그를 동반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제자처럼 처신하며 그를 섬겼습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그리스도 교회를 이방인들에게 개방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 앞에서 바오로 사도의 편에 섰습니다.
적극적으로 그를 지지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회의는 이방인들에게 교회 문호를 활짝 여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강론>
(2024. 6. 11. 화)(마태 10,7-13)
<‘부르심’과 ‘응답’ - “저도 원하는 일입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7-13).”
1)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했을 때, 성모님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응답하셨습니다(루카 1,38).
이 말씀에서 ‘바랍니다.’(‘저는 원합니다.’) 라는 말은, 성모님 자신이 원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순종하셨고 응답하셨음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의 뜻이니까 어쩔 수 없이 복종한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천사는 성모님께, “지금까지 말한 것은 모두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다.
자, 너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 실현되기를 원하느냐?” 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원하지 않는 일인데도 거부할 수 없어서 복종한 것이라면, 그것은 순종도 응답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일, 아무 가치도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부르실 때에도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서에는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라는 말씀만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나는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기를 원한다.
너희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느냐?
원한다면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표현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사도들을 부르셨을 것입니다.
원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따라오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하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은, 그렇게 하기를 그들 자신들이 원했기 때문이고,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주님의 희망에 나의 희망을 일치시키는 일, 즉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나도 원하는 것입니다.
<사제 서품식 때의 ‘서약’도 그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교구장이 “......을 하기를 원합니까?” 라고 물으면,
서품 대상자들은 “예, 원합니다.” 라고 답변합니다.
자신의 입으로 “나는 ......을 하겠다고 서약(맹세)합니다.” 라고 말하지 않고, “원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맹세한다.’, 또는 ‘서약한다.’ 라는 말보다 ‘나는 원한다.’ 라는 말이 더 강력한 ‘서원(誓願)’이 됩니다.>
2)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에도, 일방적으로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사도들에게 물으셨을 것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기를 원한다.
너희도 원하느냐? 원한다면 가라.”
<역시 실제 표현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파견하셨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그 일을 그들 자신들도 원했기 때문에, 파견 명령에 기꺼이 응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기 싫은데도 억지로 간 것이 아니라, 가고 싶어서, 정말로 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갔다는 것입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선교사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은, ‘내가 원해서’ 하는 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쁨에 넘쳐서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하기 싫은데도, 하라고 하니까 억지로 한다면, 그 소식은 ‘기쁨을 주는 소식’이 될 수 없고, ‘전해 주기 싫은 소식’으로 변질되어버립니다.>
3) 그런 점들을 생각하면서 예수님 말씀을 다시 읽으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는 말씀은, “너희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 무슨 대가를 바라지 말고 오직 ‘기쁨으로’ 하여라.”가 됩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가라는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만일에 하기 싫은 일이지만 수당을 많이 준다니까 한다면, 그것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이 아니라
‘돈 소식’을 전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금, 은, 구리돈, 여행 보따리, 여벌옷, 신발, 지팡이를 지니지 않고 갈 수 있는 것은, ‘내가 원해서’,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는 그런 것들이 필요 없기도 하지만, 사실 그런 것들이 없어도 불편한 줄도 모르게 됩니다.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고, 내가 좋아해서 하는 일이니까.>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들을 당연히 먹이신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먼저’ 아시는 분이고(마태 6,32), 그것을, 즉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마태 6,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3-34).”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