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과 실라의 기도, 찬송과 함께 아래 본문에서와 같이 빌립보 성에서의 감옥 터가 뒤흔들리게 되고 감옥 문이 열리게 되는 등의 실제적 사건에 있어..
대체로 그와 같은 역사와 이적들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하기 쉬우며, 그로 인해 믿음의 도전을 받는 이들도 있지만 비현실적이라고 의혹을 가지는 경우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그러한 시선과 묵상과 분별 등도 필요한 것이겠지만 그러한 현실과 믿음과 사건과 실제가 오늘날 우리들과 결코 별개일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러한 본문을 통해 반드시 이 시간 우리들에게 하실 말씀과 보이시는 뜻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러한 면들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이며,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고 오늘날 우리들에 있어서야 말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은 그러한 역사와 이적들의 시작과 과정들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당시의 바울과 실라는 결코 쉽지 않은 상황에 처한 것으로 난생 처음 가본 땅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게다가 직접적으로는 나쁜 짓이나 죄의 차원이 아닌 오히려 그와 반대의 차원이라 할 수 있는 것인 점치는 여종의 귀신을 쫓아내었을 뿐인데..
난데없이 그 여종의 주인들에 의해 그 자리에서 잡히고, 집단적인 모함과 선동들로 아무런 법적인 절차나 변호의 기회들도 없이 억울하게 고발당하고 봉변을 당했으며, 심지어는 순식간에 옷이 찢기고 벗기며 매까지 많이 맞은 후에 깊은 옥에 갇히는 것과 같은 수모와 치욕들, 고통과 시련들 등에 갑작스럽게 빠지게 된 것이며, 게다가 추후로도 어찌될지 모르고, 무엇보다 안전을 조금이라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며, 더 나아가 목숨까지 위험하지 않다는 보장이 없는 실상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인간인 이상 가장 보편적이며 쉽게 행할 수 있는 것이 불평이고 원망이라 할 수 있는 것이고, 그와 유사한 경우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간적인 힘이나 세상적인 방법에 몰두하게 되곤 하는 것인데..
한편으로는 심히 불안하고 두려울 수 있고, 그와 함께 염려하게 되거나 여러 모양의 불신앙들에 빠지면서 갈수록 더 상황들이 악화되며, 다른 무엇보다 낙심과 절망들에 빠지기가 가장 익숙하고 자연스러우며 일반적일 수밖에 없는 현실 한가운데 바로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인 바울과 실라가 처해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래 본문에서 잘 확인할 수 있듯이 바울과 실라는 전혀, 조금도 그렇지 않았고 일반적인 사례들과는 완전히 달랐던 것을 볼 수 있는 것이고,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인간적인 원망이나 세상적인 방법을 찾기는커녕 깊은 감옥 속에서 한 밤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미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인데..
그러면서 그와 함께 실제로 얼마나 놀랍고 엄청난 역사와 이적들이 어느 정도로 생생하고 강렬하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실상 바울과 실라가 그 정도로 심각한 상황과 현실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는지가 중요하고 어떤 면에서는 참 신기하며 무엇보다 모든 핵심과 초점이 될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
그에 있어서는 고린도 전서 1장 24절에서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또한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리고 빌립보서 3장 7~8절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증거되어 있는 등에서도 잘 알 수 있는 것이듯이 모든 시작과 결단과 능력과 역사는 바로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과 실라는 인간적, 세상적인 가장 큰 억울과 고통과 원망과 두려움 등의 때에 결코 불평이나 원망들이 아닌, 또한 인간적인 힘과 의, 세상적인 방법과 능력들이 아닌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순간순간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은혜를 덧입어 인간적인 연약과 불신앙의 상황들을 물리치고 극복하며, 사실상 가장 죄악들을 범하기 쉽고 심각한 위기들과 함께 최고로 낙심하기 쉬운 때임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다른 그 무엇보다 다시 한 번 더 말씀의 신앙으로, 오히려 더욱 치열한 말씀의 열정으로 결단하고 몸부림치며 나아가고 또 나아갈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고, 사실 그 외에는 설명 자체가 쉽지 않아 보이거나 아예 불가능으로 보인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유추와 실상들 속에서 특히 그 당시 그가 붙잡았던 말씀들에 있어서는 구체적으로 소개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자신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역의 현장들에서의 생생하고 기이했던 응답과 역사와 예비들, 게다가 율법에 정통했던 바울이었음을 감안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러한 억울함과 고난들보다도, 그러한 위기와 심각들보다, 그러한 불안과 두려움들, 심지어는 감옥과 절망들보다도, 더 나아가 불가능과 사망보다도 더 크신 분으로 하늘의 빛으로 예수님과 복음에 있어 가장 대적자였던 자신을 한 순간에 오히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게 변화시키신 분이고,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시어 루스드라의 나면서부터 못 걸었던 자도 일으키신 분이며, 자신을 통해 수많은 영혼과 가정과 지역과 나라와 대륙들을 변화시키신 분이고, 게다가 바로 직전에만 하더라도 구주 예수님의 이름과 함께 점치는 여종의 귀신을 실제로 쫓아낼 수 있게 하신 분인 것이며, 뿐만 아니라 열 가지 이적들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실제로 출애굽할 수 있게 하신 분이고, 필요하면 홍해 바다까지 가르신 분인 것이며, 심지어는 무에서 유로 천지만물이 창조될 수 있게 하신 분인 것이고, 더 나아가 구주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으신지 사흘 째 되는 날 부활케 하신 분인 것일 뿐 아니라 그 자신도 세상 끝 날에 부활케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말씀 그대로 믿고 의지하며..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곧 온 세상과 전 인류,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 더 크신 성자 하나님이시자 구원자이시며 중보자이시고 특히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인생들 사이의 길과 통로와 접점 등의 위치와 역할이신 구주로서 십자가에서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모든 구원을 다 이루신, 말 그대로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송하면서 더욱 더 말씀의 신앙, 말씀대로의 믿음으로 치열해 질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와 함께, 진정 그렇게까지의 어려움과 위기와 심각의 상황들 속에서도 그 정도로까지 말씀대로 믿고 의지하며 기도하고 찬송하며 더더욱 뜨겁게 말씀으로 몸부림쳤던 바울과 실라에게 직접적, 현실적, 경험적인 면에 있어서는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말씀의 영, 곧 좀 더 확대하면 말씀과 기도와 찬미와 경배와 경건과 사랑과 섬김과 헌신과 은사와 믿음 등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게 하는 등과 같이 그렇게까지 생생하고 충만하며 강렬하게 역사하셨던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고, 근원적으로는 말씀으로 하나되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기뻐 역사하심으로 인해 그렇게 감옥 터가 뒤흔들리게 되는 등의 사건 뿐 아니라 계속해서 간수와 그 가족들이 구원에 참예케 되고 세례까지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며, 더 나아가 그 빌립보 땅에 교회가 세워질 수 있게 된 것이고, 심지어는 오늘 이 시간 우리들에 이르기까지 선한 감동과 은혜들, 도전과 영향력들이 될 수 있게 된 것이고..
무엇보다 바로 그러한 사실은 본질적으로 오늘날 우리들에 있어서도 그 어떠한 상황과 현실들, 위기와 절망들 속에서도, 게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빌립보 성 감옥 터가 뒤흔들리는 것과 같은 응답과 이적들, 더 나아가 간수와 가족들까지 구원에 참예케 되는 은혜와 역전들 등의 실제와 누림들에 있어 다른 그 무엇보다 얼마나 십자가를 붙잡으며 어느 정도로까지 말씀의 신앙이 될 수 있는지, 다시 말해 어느 정도로까지 말씀과 기도와 찬송으로 무기 삼는 신앙이 될 수 있는지가 원론적으로는 모든 기준과 관건인 것이며, 전적으로 직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임을 의미하고 증거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사도행전16:18~26)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3년 12월 19일(화)1/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