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사도 19,1-8; 요한 16,29-33/ 부활 제7주간 월요일; 2024.5.13
승천 대축일을 지내고 성령강림 대축일을 앞둔 주간 첫 날에, 우리는 두 가지 세례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세상에서 겪는 고난을 이겨낼 용기를 주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두 가지 세례 중 하나인 요한의 세례란 유다 광야에서 거칠고 소박한 생활양식으로 살면서 세상의 죄에 물든 유다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요르단 강물로 베풀었던 세례입니다. 요한은 세상에 만연한 죄악으로 파국이 임박했음을 일깨워주면서 물로 죄를 씻음으로써 의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솔선수범했던 예언자였고, 그래서 그가 베푼 물의 세례는 죄악을 결별하는 정의라는 가치를 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르단 강가로 요한을 찾아가 고개를 숙이고 그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분께 씻어야 할 죄가 있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그분을 믿고 따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요한처럼 물로 세례를 베풀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이 요한을 흉내 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기도 했는데, 예수님께서 별다른 기적을 베푸시기 전인데도 무언가 기대를 해서인지 사람들이 요한에게서보다 더 몰려들자 마치 요한과 예수님 사이에 경합하는 듯한 모양새가 생겨나고 양쪽 제자들 사이에서도 경쟁심이 생겨나자 곧 그만 두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에 요한이 헤로데 영주를 비판하다가 참수를 당하기도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헤로데의 권력이 미치는 갈릴래아를 피해서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당신의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활약상은 요한이 촉구했던 의로움을 전제로 하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서, 질병으로 고통받는 그들의 아픔을 낫게 해 주고 마귀 들려 속박당한 그들의 자유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러한 치유와 구마의 활동이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보여주신 사랑이었습니다. 세상에서는 병이 낫고 마귀가 쫓겨나가게 만든 행위를 두고 기적이라며 놀라워하면서도 그분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을 믿게 된 일부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그분의 제자로 부름받고 가르침도 배워 그분처럼 살고자 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는 이것이야말로 기적이었습니다.
믿는 이들이 정의를 바탕으로 사랑을 행할 때에 세상이 박해를 가하기 때문에 고난을 겪지만 하느님께서는 이 고난을 발판으로 세상을 이기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이것이 행위로서가 아니라 현상으로 일어나는 본연의 기적입니다. 이 본연의 기적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님의 삶을 계승하는 그분의 세례입니다. 예수의 세례를 받으면 그분처럼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양식을 배우게 됩니다. 당신의 세례를 받은 이들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고,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죄악과 결별하는 물의 세례를 넘어 사랑의 가치를 드러내는 불의 세례요, 성령의 세례입니다.
갈릴래아 등지에서 3년 동안 이스라엘의 군중을 상대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이 공생활을 마무리하시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셔서는 최후의 대결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그간의 가르침과 복음선포활동을 집약해서 정리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13장에서 17장에 걸쳐 소개되는 예수님의 고별사입니다. 이를 들은 제자들이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이제는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시고 비유는 말씀하지 않으시는군요. 저희는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누가 스승님께 물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요한 16,30)
우리도 부활 대축일을 지내고나서 부활시기를 지내는 동안 40일이 넘도록 연중시기와 사순시기에 들었던 복음과는 또 다른 각도에서 총정리된 가르침을 복음을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성령강림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예수님을 따라서 하느님과 함께 살기 위한 기운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가 고단하고 믿음살이도 피곤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기운을 충전해야 하느님이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이 보여야 예수님도 보입니다. 보이지 않으면 들어도 들어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소리가 들려도 의미가 전달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예수님이 보여야 비로소 세상도 달리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힘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때부터입니다.
오늘 독서의 상황에서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런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받았지만 성령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했던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바오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며 안수를 하자, 비로소 그들에게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고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물의 세례를 받아 세상의 죄악을 멀리하고자 하며 성령이 있다는 말도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아직 우리의 언어는 신령하지 않으며 예언적인 생각이나 행위도 낯선 듯합니다. 성령강림 대축일을 맞이할 준비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 즉 사언행위(思言行爲)가 거룩해지고 예언자들이 그러했듯이 하느님과 함께 살면서 하느님을 드러낼 수 있는 거룩한 기운도 받게 되는 것이 지금,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이해야 할 우리의 준비 사항입니다.
우리의 준비사항으로서 두 가지를 상기시켜 드립니다. 예수님의 치유 활동을 계승할 준비사항은 사회적 공동선의 혜택을 받지 못하여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일입니다. 그 다음 그분의 구마 활동을 계승할 준비사항은 사회악을 식별하여 맞서면서 그 피해자들을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성령의 세례를 통해 이루어져야 할 대속적인 행동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가톨릭 사회교리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와 구마 활동을 오늘날 우리가 계승하자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의식이 공동선과 이를 지켜줄 제도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입니다. 현대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경고한 바 있습니다.
“지금 많은 나라에서 과장과 극단주의와 양극화가 정치의 도구로 이용됩니다. … 정치적 삶은 더 이상 모든 이들의 삶을 증진하며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건강한 토론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파괴하면서 말만 번드레한 마케팅 기법이 될 뿐입니다. … 상충하는 갈등 사이의 싸움에서, 반대자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승리하면, 우리가 어떻게 고개를 들어 이웃을 알아 보거나 길에 쓰러진 이를 도울 수 있겠습니까? 인류 전체를 위한 발전이라는 큰 목표를 지닌 계획은 지금 미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사리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더 정의롭고 하나 되는 세상을 향한 길고 험난한 여정은 이제 비극적인 퇴보를 걷고 있습니다.”(모든 형제들, 15-16항)
치유와 구마를 통한 대속적인 세례의 행동은 결국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신 형제애의 길입니다. “인간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진심으로 내어주지’ 않고는(사목헌장, 24항) 살아갈 수도 없고 발전하거나 성취할 수도 없도록 창조되었습니다. …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고는, 사랑하는 진짜 얼굴을 지니지 않고는 아무도 삶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참된 인간 존재의 신비입니다.”(87항) 이것이, 교황이 일러주는 세상을 이기는 길이요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도전입니다.
교우 여러분!
세상을 이기는 기적, 이것이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