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6조 석옥 청공(石屋淸珙, 1272~1352) 선사
스님의 법명은 청공(淸珙)이요, 자는 석옥(石屋)이니 소주 상숙(常熟)의 사람으로서 속성은 온씨(溫氏)이고 모(母)는 유씨(劉氏)이다.
스님이 탄생하던 날 저녁에 신이한 광명이 있었으니 때는 송(宋)나라 함순(咸淳) 8년(壬申)이었다.
스님께서 장성함에 소주의 흥교(興敎) 숭복사(崇福寺)의 영유 스님을 의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어느날 장(杖)과 입(笠)을 갖춘 스님이 문 앞을 지나가기에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그 승이 대답하기를, "내가 지금 천목산(天目山)에 올라가 고봉 화상(高峰和尙)을 뵈오려 합니다. 그대도 같이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하였다.
스님은 기쁘게 여겨 같이 천목산으로 가서 고봉 화상을 뵈었다.
고봉 화상이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여기에 왔느냐?"
"큰 법을 구하고자 왔습니다."
"큰 법을 어찌 쉽게 구하려 하느냐? 향(香)이나 피움이 어떻겠는가?"
"제가 오늘 화상을 직접 뵈었습니다. 큰 법을 어찌 숨겨두십니까?"
고봉 화상은 그를 은근히 법기로 여겨 "만법귀일"의 화두를 주었다.
고봉화상 회상에서 복근(服勤)하기 3년 동안에 큰 일을 밝게 알지 못하였기에 문득 고봉 화상의 처소를 하직하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자 고봉 화상이 말하였다.
"온(溫)에는 활로가 있다. 회주(淮州)에 급암(及菴)이 있으니 한 번 찾아가 봄이 좋겠다." 하기에, 건양(建陽)의 서봉(西峰)에 이르러 급암 스님을 만나 봤다.
급암 스님이 물었다.
"어느 곳에서 왔는가?"
"천목산의 고봉 화상 처소에서 왔습니다."
"고봉 화상이 무엇을 가리켜 보였는가?"
"만법귀일의 화두였습니다."
"그것을 그대는 무엇이라고 알았는가?"
스님은 대답을 못하였다.
급암 스님이 말하였다.
"이것은 죽은 글귀이다. 어찌하여 해로운 열병(熱病)을 그대에게 주었던가."
이에 절을 올리고 다시 가르침을 구하였다.
"부처가 있는 곳에도 머무르지 말고, 부처가 없는 곳에서도 급히 달려 지나가라는 뜻을 그대는 어떻게 보는가?"
대답을 하였으나 맞지 않았다.
급암 스님이 말하기를, "이 말도 역시 죽은 글귀이다."
이에 땀을 비오듯 흘렸다.
그 뒤에 급암 스님의 장실(丈室)에 들어갔을 적에 급암 스님이 다시 앞전의 화두를 물으니 대답하였다.
"말에 오르니 길이 보입니다."
"그대가 이 회상(會上)에 6년 동안 있었으면서도 아직 그 따위 견해 뿐인가."
이에 분(憤)한 마음이 나서 급암 회상을 떠나가다가 길 가던 중에 문득 머리를 들어 풍정(風亭)을 보고서 활연히 깨달음이 있어서 다시 급암 회상에 돌아와서 말하였다.
"부처가 있는 곳에 주하지 말라는 것이 죽은 글귀이고, 부처가 없는 곳을 급히 달려 지나가라는 것도 죽은 글귀였습니다. 저는 오늘에야 활구(活句)를 알았습니다."
"그대는 이를 어떻게 알았는가?"
"청명(淸明)의 시절(時節)에 비가 처음 개였을제 누런 꾀꼬리가 가지 위에서 이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소."
급암 스님이 이를 인정하였다.
급암스님 회상(會上)에 오래 있다가 하직하고 갈 적에 급암 스님이 산문까지 나와 전송하면서 부촉하였다.
"이 다음에 너는 나와 감실(龕室)을 함께 할 것이니라."
얼마 아니되어 급암 스님이 호주의 도량으로 옮겨 살 적에 스님이 재차 참석하여 고장(庫藏)의 열쇠를 맡게 되었다.
급암 스님이 일찍이 대중에게 말하기를, "이 자는 법해(法海) 가운데서 그물을 뚫고 나오는 금린(金鱗)"이라 하니 모든 대중들이 경탄하면서 대하였다.
그 뒤에 스님은 영은(靈隱)의 열당(悅堂) 은공(誾公)의 회상(會上)에서 제 2좌에 있다가 드디어 회의 참석을 마치고는 하무산에 올라가서 암자를 지어 살며 천호암(天湖菴)이라고 이름하니,
도덕(道德)이 세간과 출세간계에 퍼져서 문 앞에는 신이 가득 찼고 복일(伏日)이나 납일(臘日)의 필수(必須)하는 물건을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졌지만 무릇 땔나무하는 일과 채소 가꾸는 일은 몸소 스스로 하여서,
옛적 큰스님들의 풍도(風度)가 있었으며 참선하는 틈틈이 산거(山居)의 시(詩) 짓기를 좋아하여서 전하여 소장하는 자가 많았다.
스님은 하무산(霞霧山)에서 종신토록 살려는 뜻이 있었는데 조금 있다가 가화(嘉禾) 호수(湖水)에 당하여 새로 복원선사(福源禪寺)를 짓고서 살았다.
스님의 명성이 광교부(廣敎府)에 널리 들렸기 때문에 격문(檄文)을 보내 간절하게 청하여서 제 2대의 주지를 삼으려 하였으나 스님은 굳게 사양하여 일어나 가지 아니하니,
어떤 자가 권하기를, "사문인 자는 마땅히 법(法)을 널리 펴는 것으로 중임을 삼아야 하는데 스님은 한가롭게 살아 자기만을 편히 지내려 하니 무엇을 더 말하겠소."
스님은 이에 번연히 일어나서 복원선찰의 주지가 돼 크게 로비를 열어 공부하는 분들을 단련시켰다.
그러기에 말하는 자들이 스님을 일러 "참으로 급암 스님의 가풍을 일으킨 분이라"고 하였다.
복원선찰에 있기 7년만에 늙었음을 이유로 은퇴하여 다시 천호암으로 돌아왔다.
지정 연간(至正年間)에 조정에서 스님의 명성을 듣고 향과 폐백(幣帛)을 사여(賜與)하여 신이(神異)를 정표(旌表)하였으며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말하지만 스님께서는 담연하였다.
지정(至正) 임진년(壬辰年) 가을 7월 21일에 미질(微疾)을 보였으며 이틀을 지난 밤중에 대중에게 영결을 하게 되었다.
그때 문도가 청하였다.
"화상의 후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스님은 붓을 들어 게송을 썼다.
푸른 산이 썩은 시체를
착(着)하지 아니하니
죽은 뒤에 어찌 땅을 파서
매장하겠는가
돌아보건대 나는
삼매(三昧)의 불이 없으니
앞을 비우고 뒤를 끊는 것은
한 무더기의 땔나무뿐이지
하고 붓을 놓고서 서거(逝去)하였다.
화장을 하니 사리가 오색(五色)이 찬연한 것이 그 수를 셀 수 없었다.
그 문도들이 그의 영골사리를 거두어 모아서 천호암의 언덕에 탑을 세우고 급암 스님의 탑과 배치(配置)하였으니, "감실을 같이 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음을 보인 스님의 뜻이었다.
세수 81세이고, 법랍 54세였다.
#승보전
🍀
석옥 청공스님은 도량사 급암스님을 친견하고 뒤에 오흥 하포산에 은거하였는데, 청빈한 생활로 시주를 바라지 않았으며 궁하면 밥을 먹지 않고 물만 마셨다.
인품이 자애롭고 자상하여 중생을 아껴주었고 게송을 짓고 일깨워주는 말도 많이 하였으니, 그는 참으로 말세의 선지식이었다.
#산암잡록
🍀
전법게
지극히 큰 것은 이 마음이니
지극히 성스러움도 이 법이로다
불빛마다 그 빛에 다름이 없듯
이 마음을 스스로 요달해 마치라
임종게
푸른 뫼가 썩은 몸을 탐내지 않으니
죽은 뒤 어찌 땅을 파 묻겠는가
살피건데 삼매의 불이 내겐 없으니
앞을 비추고 뒤를 끊을 건 한 무더기의 땔감 뿐

첫댓글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모 땃서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붇닷서! 존귀하신분, 공양받아 마땅하신분, 바르게 깨달으신 그분께 귀의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