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4시기상을 해서 8시에 집을 나설 때까지도 인 서울을 할까 말까 결정을
못하고 ‘죽주산성‘으로 말머리를 잡았습니다. 죽주산성은 두원 공대에서 10분,
일죽 IC에서도 10분이면 갑니다. 저는 시내에서 출발했으니 17분이 걸렸습니다.
방초 리 쪽으로 좌회전, 육교 밑으로 우회전 하자마자 좌회전하면 죽주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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푯말이 보입니다. 내장산처럼 차가 턱밑까지 들어갈 수 있어서 안내표지판 아래
적토마를 세워놓고 한 고개만 올라가면 성문이 바로 나옵니다.
공사 중이라서 그런지 새소리밖에 들리지 않고 조용합니다. "주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러닝 화를 신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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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했다고 중얼거리며 언덕을 올라갈 때까지 누구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누구처럼“성문을 열어라!”고 말도 안했는데 패스입니다. 입구에 멈춰 사진을 한
장 찍고 우측으로 길머리를 잡았어요. 운동장에서 벤치를 오르는 느낌으로
나무계단을 한 계단씩 올라갔습니다. 죽주는 고려시대 죽 산의 지명이라고 합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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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영남 길 교통의요지입니다. 성 이름을 ‘죽주 성’
혹은 ‘매성’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매형이 아니고 매성입니다. 삼국시대에 처음
쌓았고 고려 때 몽고와, 임진왜란 때는 왜놈과 전투를 한 모양입니다.
원래 성은 내성 중성 외성의 3중 구조를 갖춰야 하지만 외벽 만 형태가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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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고 내벽은 소실이 됐는지 지금은 공사 중입니다. 그래도 내부의 바닥 터가
상당부분 삼국시대의 형태 그대로 남아있었고 제가 본 우리나라의 산성 중에
가장 보존이 잘 된 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려 고종23년에 몽고군이 거칠게
공격해왔을 때 안성의 양 만춘 송 문주 장군이 성을 사수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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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보니 죽산 입구에 서있는 동상은 이 순신 장군이 아니라 송 문주 장군이었네요.
암 쏠이, 제가 좀 무식해서. 송장군은 일찍이 구 주성 싸움에서 몽고군의 전술을
알고 지피지기 병법으로 승리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때 ‘신명’이라는 별명이
붙었고요. 한번은 몽고군이 죽주산성을 포위한 채 군량미가 떨어지기를 기다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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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있었는데“멀리서 왔으니 어찌 배고프지 않겠는가! 삼가 이 생선으로 군량을
삼으라. “ 며 연못의 잉어를 잡아 적진에 보내자 몽고군이 질색 팔 색을 했다고 합니다.
천재의 지략은 늘 위트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성 마루에서 내려다보이는 동서
남북이 과연 요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쪽은 아직도 가파른 절벽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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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 대를 대지 않고는 성을 넘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성을 빙 둘러서 보았는데
나무 굵기가 오래돼봐야 1-2백년정도보입니다. 아마도 전쟁 때 소실되지 않았을까?
공사하다가 성내부에서 신라시대 집수시설 6기와 조선시대 시설2기가 발견되었대요.
이것은 이 동네 죽주가 물이 풍성했다는 증거로 해석할 수 입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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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둘러보는데 30분정도가 걸렸습니다. 죽주산성의 둘레는 1.688M이고 높이는
2.5M이니까 비교적 아담한 사이즈입니다. 성벽의 동쪽 끝에 포루가 있었고 남쪽
성벽의 양 끝에는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쌓은 치성으로 만들어져, 그 돌인지 저 돌인지
모를 일이나 아직까지 남아있었습니다. 보는 사람이 없어서 담배를 한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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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우고 영역 표시도 했습니다. 이럴 때 제 수준은 지성에서 한참 모자란 건성입니다.
내려오는 길에 만난 팽나무가 많이 쳐주면 한500년 정도 되어보였습니다.
임진왜란정도에 송 장군 관계자들이 심었을 것 같네요. 공사하는 사람이 있어서
공사가 언제 끝나 냐 고 물었더니 한 달이면 된답니다. 물어본 내가 미친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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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반아, 딸랑 도져 하나로 무슨 놈의 공사를 한 달 만에 끝내 냐 고.
인 서울을 하는데 딱 1시간 걸렸습니다. 주말인데 내 마음을 아는지 88고속도로를
타고 반포대교를 건너 용 산까지 1시간에 주파를 했다고요. 경리 단 길도, 해방촌도
핫 플래스답게 외국 놈도 보이고 연예인처럼 생긴 피플들이 내 안테나를 바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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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용 산에서는 홍석천이가 방귀 꽤나 뀔 것이고, 산척하고 있는 이회장이
있는 한 미8군이 철수를 한다해도 여전히 재벌들이 탐내는 지역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 우리 집이 이 회장 집 바로 아랫집이었다는 것을 아실 여나 몰라.
제가 재벌이나 대사관급만 산다는 하얏트 호텔 뒷골목에서 목에 힘을 주고 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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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안방에서 작은방에 있는 딸을 부르면 안 들려요. 오우, 그레이.
그러고 보면 제가 돈을 벌진 못했지만 이것저것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룹이 아닙니까?
지금도 명품만 입고 다니잖아요. 아님 말고. 안성에서 공수해온 거봉2박스를 들고
학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참, 밤도 한 대박 있구나. 화실 분위기가 삼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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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명이 지금 모의시험을 보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예주랑 진한 허그를 하고 30분
쯤 서성거렸습니다. 오매불망하던 만남인데 식사도 안 되고, 포도도 선생님의 허락을
맡아야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먹을 것을 두고도 못 먹는다는 것도 슬펐으나, 말을
할 수가 없으니 환장할 노릇입니다. 에스더 시험 때는 아빠가 히딩크이었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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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님이 돌아오는 동안 9월, 10월, 11월 다이어리를 스캔하다가 그 습작을 보았습니다.
무려 5장이 똑같습니다. 한 장에 5시간이면 25시간을 숨도 안 쉬고 작업을 한 것입니다.
눈물이 핑 돌았어요. 언니원장이 도착하자 학원 분위기가 한층 살벌해졌습니다. 숏 컷을
해서 그런지 Japanese Woman같습니다. “혹시 힘드나요?” 완전 포스작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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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감히 범접 할 수 없는 아우라가 화실 안을 더 살얼음판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둘이는 나란히 용산 고등학교 앞을 걸어갔습니다. 딸래미와 나란히 걷는 이 기분을
물론 아는 사람만 알 것입니다. 눈꽃 빙수 값을 에스더가 결재했으니 제가 28년 만에
처음 딸내미에게 얻어먹은 역사적인 날입니다. 어머니, 저 딸내미가 사 주는 빙수 먹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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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님에게 단도직입 적으로 물어보았을 때 학원에서 두 명 정도 09학번이나올 것 같고
예주는 재수를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충격입니다. 아니 왜? 1년 6개월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아빠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당위와 본성이
갈등을 했지만 표시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는데 에스더가 눈치를 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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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는 15년 경력에 한예종 시험을 무려 9번 치르고 합격을 했는데 그것도 나이 25세에.
입시의 중압감을 예주가 견뎌낼지 조심스럽다고 했습니다. 아, 자식 키우기가 이리도 힘이
드는지 정말 몰랐습니다. 제가 에스더 한예종 7번 떨어지고 이번에 또 불합격시키면 폭파
시켜버리겠다고 했는데 지금 그 아이가 냉정하게 예주에 대한 입시전망을 하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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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이 많습니다. 겹칠 줄 알았던 서울 대 전형이 10.3일로 정해지긴 했지만 원장 왈,
무대미술과는 포기고, 서울 대 서양학과는 운 빨, 멀영과에 올인 하는 것 같은 눈치입니다.
3수는 기본이니까 지금까지 버텨준 것 만으로도 대단하다며 최종적으로 예주에게 필요한
것은 깡이라고 했습니다. 후, 물을 한컵 마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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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왈, 예주가 처음6개월은 굉장히 자존심 상해하면서 자기에게 대들었는데 요새는
걸핏하면 우니 무엇보다 아빠의 기도가 필요하다고 합디다. 아, 미치겠습니다. 울 어머니도
저를 이렇게 키웠을까요? 주희 때문에 밥맛을 잃었다는 제수씨 생각도 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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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딸 때문에 근심걱정이 바람 잘날 없다는 둘째 누나도 떠올랐습니다.
아무래도 인 서울을 하지 말 걸 그랬습니다.“희 변 그대는 아는가?
저절로 눈물이 흐르는 오라비의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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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내게 말한다.
그만하면 되었다고
넌 충분히 노력했다고
지치는 게 당연하다고
외로운 게 당연하다고
그렇게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일이 분명 있다고
그러니 아프지 말라고
마음이 무너지면 안 된다고
네가 가진 용기 있는 마음을 꼭 붙들고 있으라고
그렇게 삶이 내게 말한다.
내 삶이 나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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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제목입니다.
1. 시험 당일 고사장에 잘 도착하게 교통편을 원활히 해주세요.
2. 수험생인 예주가 떨지 말고 실력만큼만 시험을 치르게 도와주세요.
3.에스더가 학업과 학원을 감당하는데 몸과 마음을 강건하게 해주세요.
4. 좀 더 넓은 학원 장소를 구합니다.
2018.9.30.su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