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
루카 6,12-19
왜 위대한 성인들은 책이 아니라 제자를 남기려 했을까?
오늘은 성 유다 타대오와 성 시몬 사도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12명의 사도를 뽑으시고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시는 내용입니다.
중요한 점은 사도를 뽑으시고 복음 전파를 시작하셨다는 점입니다.
제자들이 살다 보니 생긴 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제자들을 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셨던 것입니다.
복음을 더 많이 전파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유럽이나 아시아처럼 더 넓은 곳으로 가셨어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가 중요한 이유를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마리나 채프먼은 딸 바네사 제임스(Vanessa James)와 ‘이름 없는 소녀’(The Girl with No Name)라는 책을 공동 집필하였습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 유괴범들에게 버림받은 후 콜롬비아 정글에서 꼬리감는원숭이 무리에서 살았습니다.
그녀는 원숭이 그 자체였습니다.
사냥꾼들에게 발견되고는 사창가에서 살았습니다.
나중엔 탈출하여 결혼하고 정상적인 가정을 꾸렸습니다.
누구나 성장은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냐에 따라 그 사람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가톨릭교회 공동체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 우리가 구원에 이르도록 처음부터 교회를 만들 생각으로 열두 사도를
뽑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소크라테스, 공자, 부처가 된 싯다르타도 모두 책을 한 권도 쓰지 않고 제자 공동체를 만드는 데 생을 바쳤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이 알았던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깨달음을 책으로 전달하는 것보다 제자 공동체를 통해 전달하는 게 더 유익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제자 공동체를 세우려 했던 더 큰 이유는 그들 자신의 이익 때문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2015년에 방송된 KBS 인생극장 ‘뇌 병변 장애 부모가 삼 형제를 키우는 방법:
그렇게 부모가 된다’라는 내용은 많은 시청자에게 큰 감동을 안겼습니다.
자기 한 몸조차 가누기 힘든 두 장애인이 결혼하고 아기를 낳겠다는 꿈을 가졌을 때
가족들도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삼 형제를 낳았고 누구보다 자녀들을 잘 키우고 있습니다.
이들은 나라에서 나오는 돈으로 살아도 어느 정도는 살림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부는 함께 일합니다.
아버지는 말합니다.
“나중에 아이들이 ‘우리 아버지는 백수였어!’라는 소리를 하지 않기를 바라요.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열심히 일하시는 훌륭한 분이셨어.’라는 소리를 듣기를 원해요.”
어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내가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키우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천덕꾸러기로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아이들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어요.”
공동체를 낳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나 여자로 태어나면 둘이 사랑을 해봐야 그렇게 남자와 여자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녀를 낳아도 그렇습니다.
자녀를 낳지 않으면 사람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꼭 결혼해야만 자녀를 낳는 게 아닙니다.
제자들도 자녀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아이들아!”라고 부르기도 하셨습니다.
자녀를 낳음, 곧 제자들의 공동체를 세움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성 베네딕토는 세상에 사는 의미가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라는 것을 3년 동안 굴에서
기도한 끝에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그 이전부터 그러한 공동체를 낳으려는 이유로 자신을 갈고닦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첫 정식적인 수도회가 탄생합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는 결혼하기 전부터 자녀를 정신적으로 잉태하고 자녀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려고 준비합니다.
그런 부모와 그냥 살다가 우연히 결혼해서 아기를 낳아 어찌할 바를 모르는 부모는 다릅니다. 낳으려는 목적으로 살아야 나도 성장하고 완성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어떤 공동체를 낳고 기르고 파견해야 할지를 생각하며 살아갑시다.
나의 성장과 완성이 굉장히 빠르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루카 6,12-19
간절한 기도와 그 기도에 걸맞은 과감한 결정, 그리고 단 한 치 오차도 없는 실행!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을 지속해나갈 직제자 선발이라는 큰일을 앞두시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큰 영감과 교훈을 선물합니다.
혹시 지금 인생의 중차대한 일을 앞두고 계십니까? 결혼이나 새로운 출발, 중요한 결단이나 큰 수술 앞두고 계십니까?
아니면 견딜 수 없는 큰 고통이나 시련 앞에서 서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잘 따라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는 중요한 일을 목전에 두셨을 때는 어김없이 외딴 곳으로 가셔서 홀로 밤새워 기도하셨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기 위해 피땀까지 흘려 가시며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입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기로에 서 있을 때, 사방이 적군으로 둘러쌓여 있다고 느껴질 때, 아무리 생각해도 빠져나갈 탈출구가 없다고 여겨질 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집중적으로, 간절히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과정은 과감하고도 용기있는 결단과 실행입니다.
간절한 기도와 신중한 식별 작업 끝에 이루어진 결정이라면 흔들리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뒤를 돌아보지 말고 결정한대로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밤새워 기도하신 후 발표한 사도들의 명단을 들은 군중은 아연실색했습니다. 다들 예상했겠지요.
예수님께서는 기본 교육을 잘 받은 엘리트 중에 제자들을 선발하리라는 것을. 적어도 당대 ‘인싸’ 그룹이었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을 중심으로 제자단을 구성하시리라 추측했습니다.
그런데 선발된 이름 하나 하나가 호명될 때 마다 다들 뒤로 넘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의 어부들, 열혈당원, 세리, 죄인....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번 선택하신 결정을 뒤엎지 않으셨습니다.
그 누가 뭐래도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선발된 열두 사도들과 함께 평지에 내려서시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장엄하고 멋진 장면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갖가지 질병과 악령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말끔히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떨어지셔서 간절히 기도하신 다음, 그 기도에 걸맞은 과감하고도 단호한 결정, 그리고 단 한 치 오차도 없는 실행, 바로 예수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시몬과 성 유다 타대오 사도 축일 강론>
(2024. 10. 28. 월)(루카 6,12-19)
<열정>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루카 6,12-19).”
1) ‘열혈당’은 로마제국을 상대로 독립투쟁을 했던 단체인데, 우리나라의 의열단과 비슷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열혈당원으로 기록되어 있는 시몬 사도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열성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다가 그 열성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으로, 또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변화된 사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의 공통점은 바로 그 ‘열정’(뜨거움)입니다.>
열정은,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는 ‘일편단심’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오로지 예수님의 뒤만 따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래서 실제 삶에서 그대로 실행하면서 살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신앙인의 열정입니다.
열정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헌신’입니다.
모든 것을 다 바친다는 말에서 ‘동전 두 닢을 봉헌한 가난한 과부’가 연상됩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3-4).”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내는 것은 ‘미지근한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바치는 것은 ‘뜨거운 것’입니다.
열정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인내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이 말씀에서 ‘끝까지’는 ‘죽을 때까지’입니다.>
미지근한 신앙인은 가다가 힘들면 중단하지만,
진짜로 뜨거운(열정적인) 신앙인은 힘들어도 끝까지 갑니다.
2) 사도들이 처음부터 완벽했던 것은 아닙니다.
미숙한 점도 있었고, 부족한 점도 많았고, 흔들리기도 했고, 흩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계속 단련되었고, 강해졌고, 결국 신앙과 충성심과 열정과 사랑에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배반자 유다는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 차갑게
식어버렸는데, 그 모습은 오히려 다른 사도들의 신앙과 충성심과 열정을 부각시키는 일이 되었습니다.
<등불 빛을 더욱 밝게 보이게 하는 그림자 같은 일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사도들의 명단 뒤에 기록되어 있는 군중의 모습을 보면, 병을 고치려고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쓰는데, 그 ‘간절함’도 겉으로는 열정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병을 고친 다음에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신앙인이 된 사람도 분명히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병의 치유에만 만족하고서 그냥 떠나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간절함’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열정이 아니라, 병고에서 해방되기만을 바라는,
단순한 소원일 뿐입니다.
<물론 그 ‘간절함’ 자체를 무시하거나 폄하할 수는 없습니다.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희망이고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신앙인은 거기서 멈추지 말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완성이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입니다.>
4) 주님께서 에페소 신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버리겠다(묵시 2,3-5).”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겉으로는 여전히 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는 한데, 생동감도 없고, 활기도 없고, 기쁨도 없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의 사랑도 식고 열정도 식었기 때문입니다.
습관적으로, 또는 의무감으로, 그 동안 하던 대로 하면 잘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그것을 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기쁨이 없다는 것은 억지로 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모두 ‘순교’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은, 주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끝까지 식지 않았음을 증명합니다.
<식어버린 사랑과 열정을 다시 뜨겁게 하는 방법은 ‘회개’, 그리고 ‘다시 뜨거워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