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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2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마태오 5,17-19
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기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작은 계명들이라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해주십니다.
하늘 나라도 높고 낮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우리 가톨릭교회가 십일조와 같은 계명들을 소홀히 하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을 하지 않아도 천국에 가는 데 특별한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실 실제로 십일조가 구원의 핵심 요소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기며 구원되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목적지만 닿으려고 해서는 작은 계명들에 충실할 수 없습니다.
우주 왕복선 챌린저 참사(1986)를 생각해봅시다. 고체 로켓 부스터의 O-링 씰 때문에 비행 73초 만에 부서져 탑승한 우주비행사 7명이 모두 사망했습니다.
이 비극은 저온에서의 O-링 성능에 대한 공학자들의 경고를 간과한 결과였습니다.
그냥 목적지에 닿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작은 것은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처럼 여기게 됩니다.
음주운전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적지에만 도착하면 된다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음주운전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다가 결국 집에 못 가고 남에게도 피해를 주게 될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에만 들어가면 된다고 여기는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이타닉 침몰(1912)도 그렇습니다.
선박은 여러 차례 빙산 경고를 받았지만 고속으로 계속 주행했습니다.
또한 선박 건조에 사용된 강철 리벳의 품질이 표준 이하여서 충돌 시 선체가 더 쉽게 파손되었습니다.
이러한 방치로 인해 ‘가라앉을 수 없는’ 선박이 처녀 항해에서 침몰했고 이에 따라 1,500명 이상의 승객과 승무원이 사망했습니다.
목적지가 하늘나라여서는 안 됩니다.
작은 계명들을 무시하다가 결국 목적지에도 도달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목적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거부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들이 무언가 이루어 낼 것임을 직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대한 부자들이 해 놓은 말에
귀 기울입니다.
영국에 “펜스를 관리하면 파운드가 스스로 알아서 관리할 것이다.”
(Take care of the pence, and the pounds will take care of themselves)란 속담이 있습니다.
작은 동전을 잘 관리하면 큰 돈은 저절로 관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김승호 회장도 “자식(동전)에게 잘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부모(지폐)가 잘해줄 리 없다.”라고 말합니다.
김승호 회장이 자신의 회사 앞의 노숙자에게 지폐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놀라서 지폐와 큰 동전들만 가지고 작은 동전들은 바닥에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김승호 회장은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아무 가치도 없는 동전들을 주워서 회사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작은 돈에 충실한 자신을 보며 큰돈들이 들어올 것을 직감한 것입니다.
이들이 작은 것에 충실할 수 있는 이유는 그냥 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커다란 부를 이루어내겠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같이 작은 것을 소홀히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계명을 지키게 되는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화 데레사는 어렸을 때부터 성녀가 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찼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잔 다르크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되려고 순교의 길을 선택했던 이들입니다.
이런 이들은 대부분이 ‘세심증’을 겪습니다. 아주 작은 계명이라도 어기면 성인이 되지 못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소화 데레사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내 안에서 사제의 소명을 느낍니다! 나는 사도의 소명을 느낍니다! 나는 전사, 사제, 순교자가 될 것입니다.
나의 작은 존재여, 나는 선지자들과 박사들처럼 영혼들을 깨우치고 싶습니다.
나는 사도의 소명이 있습니다.
나는 온 땅을 여행하여 당신의 이름을 전파하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십자가를 모든 땅의 땅에 심기를 원합니다.”
소화 데레사는 작은 고통을 참아 받으며 자신의 소명에 바쳤습니다.
그렇게 수도원에서만 살았음에도 위대한 성녀가 되었습니다.
선교의 주보 성인이 되었습니다.
좋은 뜻만 있으면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하늘 나라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 아닌 더 하늘 나라에 확실히 들어가는 목적, 곧 위대한 성인·성녀가 되는 사명으로 살아갑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12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5,17-19
매일의 꾸준한 작은 봉헌과 헌신은 신앙생활의 기본이자 근간입니다!
시골에서 살다 보니 은혜로운 일이 참 많습니다.
도시에서 사무직에 종사할 때는 조금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종이나 씨앗을 뿌리면서, 잡초를 뽑거나 예초기를 돌리면서,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니, 그 안에 얼마나 ‘작은 것들’ ‘소중한 생명’들이 숨어있던지 깜짝 놀랐습니다.
물웅덩이에는 벌써 뭔지 모를 작은 알들이 우글우글 거립니다.
적당히 부드러워진 땅속에는 새끼 지렁이들이 꿈틀꿈틀 댑니다.
이웃 밭과의 경계선으로 심어놓은 나무 가지 마다에는 수많은 작은 꽃들이 보송보송 매달립니다.
바닥에는 아주 작은 노란 풀꽃들이 지천으로 피어오릅니다.
그야말로 여기저기 ‘작은 것’들의 큰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자동차만 타고 다닐 때는, 흙을 손에 묻히지 않고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보지 못할 눈부신 광경입니다.
그동안 너무나 오랫동안 경제개발 논리, 속도전에 젖어 살아와서 그런지 너무 큰 것, 빠른 것,
대단한 것, 뛰어난 것, 앞서 가는 것만 선호합니다.
그러다보니 작은 것, 평범한 것, 소박한 것, 가족적인 것, 일상적인 것들의 소중함과 가치는
어느새 뒷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신앙생활 안에도 많이 따라 들어왔습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 안에서도 뭔가 대단한 것을 찾아다닙니다.
특별한 분위기만 선호합니다.
말씀 좋고 ‘기도빨’ 세다는 곳만 순례합니다.
본당이나 단체들 강의를 다니면서 절실히 느끼는 바가 하나 있습니다.
특강은 한 번씩 분위기를 바꿔주는 외식이나 간식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명강사라 할지라도 반짝 한번 왔다 가는 것입니다.
특강 한번 듣는다고 뭐가 특별히 달라지지도 않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 간식이나 외식이 아닌 주식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매일의 미사입니다.
매일의 아침 저녁기도, 이것 역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매일 하루 세 번 바치는 삼종기도, 습관처럼 드리는 묵주기도, 수시로 바치는 화살기도,
매일의 꾸준한 작은 봉헌, 일상적인 십가가의 수용, 이런 것들이 사실 신앙의 기본이자 근간입니다.
여기저기 특별한 곳, 대단한 곳, 신기한 곳, 줄기차게 찾아 다녀봐야 그 끝은 언제나 허탈함이며 공허함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작은 것, 일상적인 것들을 중요시 여기고 소홀히 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큰 것, 대단한 것도 중요시 여기지만 지극히 일상적인 것, 반복적인 것, 구체적인 것, 작은 것들에 대해서도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충실하게 해나가야겠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 큰 사람, 대단한 사람들도 잘 대우하고 환대하지만 내 가장 가까운 가족, 형제,
이웃, 직장 동료들, 그리고 그들과 나누는 작고 소소한 일상들에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강론>
(2024. 6. 12. 수)(마태 5,17-19)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7-19).”
1)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이 안식일 문제로 충돌한 일이 많았는데, 그런 일들 때문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을 감히 폐지하려고 하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계명들과 율법들이 미완성 상태라는 뜻이 아니고, 사람들의 실천이 불완전하고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에 완전한 실천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려고 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율법의 완성’은 ‘율법 실천의 완성’입니다.>
실천이 불완전하고 부족했던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에 나오는 어떤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예수님께 물었고(마르 10,17),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잘 지키면 된다고 대답하셨습니다(마르 10,19).
그런데 그는 십계명만으로는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예수님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0,20-22).”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기 때문에, 그는 분명히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아니었고, 또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 같은 ‘율법주의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올바른 지향으로 계명 실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긴 했는데, 그에게 걸림돌로 작용한 것은 바로 ‘재물에 대한 애착심’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기는 하지만 재물에 대한 애착심에 막혀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부족해지고 불완전해진 것입니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그에게 부족한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경우에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데, 율법 실천을 완성하는 방법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는 것”입니다.>
2)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은,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를 해설한 것과 같은 말입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8-10).”
계명들과 율법들을 잘 지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으로’(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만일에 사랑 없이 계명들과 율법들을 지키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산상설교’ 전체가 ‘율법 실천의 완성’에 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산상설교에서 가장 강조되는 말은, 또는 산상설교의 핵심 주제는 바로 ‘사랑’입니다.>
3)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입니다.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는, “계명들과 율법들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은
변함이 없다.”입니다.
<한 자 한 획도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면 계명들과 율법들은 없어지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명들과 율법들의 역할이 완성됩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서는 아무도 계명들과 율법들을 의식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어떻든 계명들과 율법들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는 “자기 마음대로 계명들을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분류해서, 작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시하거나 안 지키고”입니다.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는 자”입니다.
<계명들과 율법들은 전부 다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안식일 문제로 바리사이들과 충돌한 일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바리사이들은 ‘사랑 없이’ 안식일을 지키기만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은 사랑을 실천하는 날이다.” 라고 가르치셨고, 그렇게 실행하셨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 주신 예수님이
안식일을 원래의 정신대로 지키신 것이고,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자들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