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달음이란, 본체, 우주만물을 낸 본체, 존재, 궁극적 실체를 보는 거
앞으로 내가 시간이 허락되면〈깨달음에서 붓다까지〉라고 하는 제목으로
‘어디가 깨달음이고, 어디쯤 가면 아라한이고, 어디쯤 가면 무루대아라한이고,
어디쯤 가면 보살이고, 어디쯤 가면 붓다이다’ 하는 것을 정리해주고 싶습니다.
지금 이것을 아무도 모릅니다.
부파불교 당시 대중부인가요.
아라한 보살 붓다, 이렇게 위계를 잘 알았어요.
그런데 그 후로 그렇게 설명을 하는 종파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현지사에서는 깨달음-소위 모든 만물을 내는 근본바탕,
이것을 본체(本體)라고 해. 존재(存在)라고도 해.
서양철학에서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독일. 철학자. 1889~1976.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이라는 저술이 있음)가 ‘자인(Sein)’이라고 한 거예요.
‘자인’, 존재, 실재, 궁극적 실재. 이런 말을 하거든.
이제 이것을 본 것을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이 깨달음은 이제 붓다를 이루기 위한 머나먼 도정의 시작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정각(正覺)이라고 해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等正覺)라고 그래요.
그런데 선불교(禪佛敎)에서는 그냥 화두타파한 것이나
부처님의 깨달음을 똑같이 봐버리거든요. 아주 큰 오류를 범하고 있지요.
자, 깨달음은 그럽니다.
본체, 우주만물을 낸 본체, 존재, 궁극적 실체를 보는 거예요.
확!~드러나면서 경계가 뒤집힙니다. 뒤집혀요. 견성한 분들은 그것을 알아요.
경계가 뒤집혀버려요. 그래서 아무것도 없어요. 허공뿐이어요.
밝은 영지 ․ 빛만 있어요. 이게 본체입니다. 거기가 본체입니다. 그것을 봤다는 거야.
그게 이제 견성이어요.
성품자리, 마음의 근본 성품자리, 본성자리, 본체의 자리를 본 것을 견성이라고 그래요.
견성해가지고는 이제 시작이라니까요.
‘견성은 공부의 시작이다’ 하고 내가 약 10년 전에 신문에다가 때린 거예요.
선불교에서는 죽을 일이지요. 견성이 다인데 말입니다.
알고 보니까 이것은 시작이어요.
그래서 보림을 잘해서 탐진치를 녹이고 업장을 녹이고,
소위 번뇌장 소지장을 다 녹이고 해야 아라한이어요.
거기가 탐진치와 공포에서 자유스러운 자리예요. 거기가 아라한이거든요.
개인 자력으로는 아라한까지 갑니다.
아라한까지는 가지만 그것도 어려워요. 아라한까지 가기 어려워요.
아라한에서 보살 가기는 절대로 부처님 가피 없이는 안 됩니다.
내가 그동안 많은 말을 했습니다.
다른 불교권에서 들어보면 참~처음 듣는 이야기이니까 이해를 못할 거예요.
아라한에서 보살 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인 거예요.
왜냐? 여러분 알 거예요. 우리 신도분들은 아주 많이 법문을 들어서 알아요.
오늘 처음 오신 분들한테는
이거 그냥 처음부터 어려운 이야기만 막 하니까 미안하기는 합니다.
그래도 잘 들어주세요. 감은 올 거예요. 큰 뜻은 이해가 될 거란 말입니다.
출처:2013년 자재 만현 큰스님 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