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 정지 / 민명자
“고객의 전원이 꺼져 있습니다.”
통화가 안 된다. 이번엔 집으로 전화를 해본다. 신호는 가는데 응답이 없다. 처음엔 바쁜 일이 있나 보다 했다. 그러나 며칠 후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내 전화를 일부러 거부할 리는 없을 텐데,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든다. 여든이 넘은 연치, 게다가 지병이 있으니 마음을 놓을 처지가 아니다. L 여사의 안부를 누구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까.
평소 L 여사가 전해준 말이 생각났다. 평생 독신으로 산 여사는 오래 다니던 성당에 자신이 사는 집을 사후기증하겠노라 마음먹고 이미 공적 절차도 마친 터였다. 서울 도심, 평수가 꽤 넓은 단독주택이다. 나는 인터넷으로 그 집 근처에 있을 만한 성당을 검색했다. 마침 전화를 받은 분은 사무장이라 했다. 여사의 이름을 대며 근황을 알 수 있느냐 했더니 관계를 묻는다. “수필 쓰면서 만난 분”이라는 내 말을 신뢰했는지 소식을 알려준다.
“그분…, 돌아가셨어요.”
울컥 솟는 눈물, 가슴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른 후, 자초지종을 들었다.
“통화를 하던 중에 갑자기 호흡이 가쁘신 것 같았어요. 심장 판막 수술을 받으신 적이 있잖아요. 힘드시면 나중에 통화하시자고 했는데 전화가 끊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거예요. 심상치가 않아서 바로 집으로 달려갔더니 방안에 쓰러져 계셨어요. 119에 연락해서 서울대 병원 응급실로 모셨는데 그만….”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어찌 이리 허망하단 말인가. 알고 보니 여사가 돌아가셨다는 그날, 바로 전날 여사와 통화를 했더랬다. 그것이 마지막 통화가 되리라고 짐작이나 했겠는가. 진즉에 한 번이라도 더 만날걸. 코로나19에 갇혀 차일피일 미루며 전화만 하던 처지였다.
여사와 내가 처음 만난 건 몇 해 안 되지만 몇 십 년 지기처럼 속을 터놓고 지냈다. 인간관계의 심도는 꼭 긴 세월이 결정하는 것만은 아니다. 나는 여사의 의연한 자존과 가식 없는 진솔함이 좋았다. 여사는 내가 말벗이 되어주어 든든하고 위로가 된다고 했다. 진실과 신뢰가 서로를 잇는 든든한 끈이었다.
여사의 집 대문에서 몇 발짝만 나서면 큰 호텔 뒤 정원과 통했다. 우린 그곳 벤치에 앉아서 계절 따라 꽃향기를 즐겼다. 봄의 연두 이파리와 가을 단풍을 감상하며 문학과 인생을 이야기했고, 세상사나 가정사 혹은 허물이 될 만한 일마저도 스스럼없이 두루 나누었다. 여사는 이른 아침 뜨락에 서서 나뭇잎에 영롱하게 맺힌 이슬방울을 볼 수 있음이, 높고 청청한 하늘을 볼 수 있음이, 살아있음이 행복하다고 했다. 나이 들면서 신체가 불편해지고 분홍빛 꿈이 사라지는 게 슬프다고도 했다. 어느 날은 하얀 철쭉이 줄지어 핀 길목에서 내가 가는 뒷모습을 한참 서서 지켜보기도 했다. 나는 여사에게 어서 들어가시라고, 여사는 내게 조심해서가라고, 마치 긴 이별이라도 하듯, 서로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서일까. 생시에도 여사의 모습은 내게 늘 흰 철쭉의 영상과 함께 왔다. 그런데 이제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없다니….
여사의 지인들에게 작고 소식을 알려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여사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사가 회원으로 활동했던 수필잡지사에 먼저 전화를 했다. 예상대로 여사의 소식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주변에 부음을 알릴만한 부모 형제나 자손이 없고 조카 몇 명과도 왕래가 뜸했으니 당연히 그럴 만하다. 독거노인 고독사가 따로 있겠는가. 그것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다. 여사는 다행히 성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기에 나중에나마 나도 소식을 알 수 있었던 게다. 그렇지 않았다면 홀로 숨진 채 빈방에서 언제까지 시간을 보냈을지 모를 일이다. 한 사람의 비중은 그가 떠난 후에야 더욱 실감케 된다. 여사의 빈자리가 그리 클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한동안 우울에서 헤어나기 힘들었다.
그러던 중, 여사가 아끼던 인연들의 안위에 퍼뜩 생각이 스쳤다. 반려묘 ‘나비’와 비둘기 ‘삐삐노’와 반려견 ‘에스더’이다. 나비는 이웃이 이사할 때 놓고 간 유기묘이고, 삐삐노는 날지 못하는 새다. 어느 날 아침, 대문 앞엘 나갔는데 비둘기 한 마리가 날갯죽지에 피를 흘리며 빈사지경에 있더란다. 얼른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 치료를 해주고 보살피면서 삐삐노라고 이름도 지었다. 제힘으로 날기를 바라며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연습을 시키고, 방에서 “비삐노야, 한라산 가~~자.” “지리산 가~~자.” “백두산 가~~자.”하면서 겅중겅중 보폭을 달리하면 그 박자에 맞춰 뒤뚱뒤뚱 따라 걷는다 했다. 여사는 내게 삐삐노 얘기를 자주 했고 수필로도 썼다. 특히 반려견에 대해선 애정이 남달랐다. 심장질환 때문에 혹시라도 길에서 변고를 당하면 에스더를 어쩌냐며 걱정했다. 유사시엔 에스더를 잘 돌봐달라는 쪽지와 함께 현금을 꼭꼭 싸서 지갑에 넣고 다닌다며 내게 보여주었다. 현금은 에스더를 길러줄 새 주인에게 드리는 감사의 표시라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뜨락의 꽃과 나무, 버려진 고양이, 상처 입은 비둘기, 오랜 친구로 지낸 강아지, 그들 생명 있는 존재들과 한 공간에서 함께 살아감을 여사는 “아름다운 동거”라 했다. 주인을 잃은 그들은 어찌 되었을까.
성당 측에 알아보니 여사가 남긴 집은 고인의 뜻에 가장 합당하게 활용할 방안을 논의 중이고, 반려견은 조카가 예방접종을 해서 지인에게 보냈다 한다. 나비와 삐삐노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다. 나비는 또다시 길거리를 떠돌더라도 어떻게든 제 목숨은 부지하겠지만, 날지 못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삐삐노는 어디서 어떻게 연명을 할까.
마음이 허전할 때면 가끔 그 집 앞에 선다. 인기척이 없다. 아직 새 주인을 맞지 않은 빈집이다. 녹색 대문에는 우편물 수령 통지문과 수도 검침 안내문이 붙어 있다. 여사가 쓰던 2층 침실 창문엔 낡은 커튼이 그대로 드리워져 있고, 창 앞엔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휘어지고 꺾인 채 주인 없는 집을 지키고 서 있다. 대문 사이로 보이는 뜨락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있다. 여사 생전에 들렀을 때 보았던 모란과 라일락은 웃자란 풀에 가려져 있고, 담장 밖으로는 흐드러지게 핀 능소화가 붉은빛을 토해내며 넝쿨을 벋고 있다.
저녁 어스름이 깊어진다. 불빛이 새어 나오지 않는 집은 깊은 어둠에 싸여 있다. 전원 꺼짐은 관계의 단절이며 빛이 사라진 집과도 같다. 휴대전화의 전원 꺼짐은 생명이 스러짐과 인연이 스러짐을 알리는 신호였다. 겉으로는 강했지만, 안으로는 따듯하고 고독했던 한 여인은 ‘인연에 대하여, 인간 삶의 양태에 대하여, 불투명하게 다가오는 노년의 시간에 대하여’ 긴 물음을 남긴 채 조명 꺼진 무대 뒤로 퇴장했다. 여사와 함께 앉았던 벤치에 혼자 앉아 차마 삭제하지 못한 전화번호를 눌러본다. 생경한 안내음성이 들린다.
“지금 거신 전화는 당분간 수신이 정지되어 있습니다.”
수신 정지, 내가 누른 숫자들이 허공을 맴돌다 수신인 없는 메아리로 돌아온다. 나의 발신은 이승에선 닿지 않는다. 당분간, ‘영원히’가 아닌 당분간, 여사의 부재가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영혼의 등불 하나를 켜 들고 여사에게 안부를 전한다.
‘여사님, 천상에선 외롭지 않게, 그토록 그리워하셨던 어머님 곁에서 안식을 누리소서.’ *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0.11.01 1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