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는 날이면 외출하기 전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비의 양을 잰다. 이슬비 정도라면 우산을 챙기지 않고 흰 지팡이만 들고 나간다. 우산을 든 채 보행하는 것은 매우 성가신 일이다. 많은 강수량이 예보된 날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외출을 삼가고 피치 못한 경우에는 주로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해 이동한다. 매주 화요일은 플라멩코 레슨이 있는 날이다. 비가 온다고 해서 내 맘대로 미룰 수 없는 약속이다. 학원은 집에서 지하철로 세 정거장 떨어진 거리에 있다. 평소에는 활동지원사가 학원까지 동행해준다. 혼자서는 학원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건물 입구에 있는 전자 도어록은 터치식이다.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넘을 수 없는 유리벽이다. 터치식 보안 패드는 학원 현관문에도 있다. 스스로 나올 수는 있지만 혼자 들어설 수는 없는 구조다.
그날은 아침부터 시작된 비가 하루 종일 추적추적 내렸다. 장애인 콜택시를 불러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차에 다행히 비가 점점 잦아들었다. 활동지원사가 이 정도면 우산을 쓰고 걸어가도 될 것 같다고 조언했다. 두 사람이 쓸 수 있는 장우산을 꺼내 들고 집을 나섰다. 가랑비가 내 한쪽 어깨를 적셨다. 물웅덩이를피해 조심히 걸었다. 하지만 어느새 운동화 속으로 물기가 스며들어 축축이 젖어 버렸다. 지하철 역사 바닥도 물기로 미끄러워 평소보다 천천히 걸어 전동차에 올랐다. 누군가의 젖은 우산이 내 옷을 적셨다. 강한 실내 냉방 때문에 소름이 돋았다. 손끝도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하차해서 지하철 역사 밖으로 나가자 후텁지근한 바람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학원까지는 조금 더 걸어가야 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활동지원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산 아래로 몸을 구겨 넣었다. 평소보다 천천히 발을 뗐다. 그러다 호객 나온 커피 향기에 발목을 붙잡혀 걸음을 세웠다. 뜨거운 커피 한 잔이 간절했다. 나를 붙잡은 커피 향기가 무척이나 매혹적이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로스팅 커피 향기가 쏟아졌다. 생두를 직접 볶아 쓰는 로스터리 카페임이 분명했다. 실내 테이블은 세 개가 전부인 테이크아웃 전문점이었다. 테이블은 이미 만석이었고 좁은 실내 공간은 커피를 기다리는 이들로 옹색했다. 바 안에서 두 명의 젊은이가 정신없이 에스프레소를 추출해 주문받은 커피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바 안에서의 움직임을 소리로 관찰했다. 그라인더 돌아가는 소리와 도징 작업, 30mℓ의 에스프레소가 내려오는 소리, 포터 필터를 분리해 쿠키를 털어내는 작업. 바 안에서의 움직임이 눈앞에 생생히 그려졌다.
10년 전 나는 바리스타에 도전해 자격증을 취득했다. 교육은 4개월 과정이었고 한 달 정도 더 연습해 자격증 시험을 치렀다. 함께 교육받은 이들은 모두가 저시력이었고 전맹은 나 혼자였다. 교육을 담당한 마스터는 40대 남성이었는데 말투는 딱딱해도 손길은 다정한 사내였다. 나는 수업마다 사고를 쳤다. 스팀으로 우유 거품을 내다가 거품이 폭발해 머신 주변을 온통 우유 범벅으로 만들어 놓는가 하면 카푸치노 잔을 예열하다 바닥에 떨어뜨려 깨는 일도 여러 번이었다. 사고를 치고 멋쩍게 웃으면 그도 피식 웃고는 난장판이 된 테이블을 말없이 치웠다.
바리스타 학원은 원래 커피용품 도매를 주업으로 하는 가게였다. 무엇보다 내가 그곳을 좋아한 이유는 로스팅 마스터가 매일 주문 받은 원두를 볶기 때문이었다. 내가 구경하고 있으면 그녀는 오늘은 어떤 품종을 얼마만큼의 불 세기로 배전하고 있는지 설명해주었다. 그러고는 열기가 채 식지 않은 원두를 한 줌 집어 내 코에 대주었다. 품종에 따라 새콤한 과일 향기나 쌉싸름한 초콜릿 냄새가 풍겨 신기했다. 간혹 쿨링 작업이 끝난 갓 볶은 원두로 커피를 내려주었는데 그 한 잔의 신선한 커피 향은 하루 종일 내 입과 코에 맴돌며 숨 쉴 적마다 향긋한 기분에 젖게 했다.
바리스타 시험은 매우 엄격했다. 장애인이라고 시간을 더 주거나 가산점을 주지 않았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20분이었다. 20분 동안 그라인더와 머신을 점검하고 내가 준비한 커피를 소개해야 했으며 에스프레소 네 잔, 카푸치노 네 잔을 만든 뒤에 머신 정리까지 끝내야 했다. 마스터와 난 수십 번 반복 연습하며 최상의 시간 배분을 했다. 포터 필터를 그라인더에 대고 원두 가루를 받는 시간은 15초, 포터 필터를 머신에 장착해 에스프레소를 추출할 때는 30초, 스팀 픽처에 우유를 담아 거품을 내는 건 22초.
이제 남은 건 내 숙련도였다. 수십 잔씩 에스프레소를 추출하고 우유 거품을 만들었다. 시험 날짜가 다가올수록 마스터는 나보다 더 긴장하고 초조해했다. 마지막 수업이 있던 날은 시험과 똑같이 시현하고 마스터가 평가했다. 내가 걱정스러웠는지 로스팅 마스터도 시현에 참관했다. 첫 번째 도전은 제한 시간을 넘겨서 실격이었다. 두 번째 시현은 데미타스 잔에 크레마 얼룩을 만들어 감점을 받았고, 카푸치노 거품도 모자랐다. 보이지 않아도 두 마스터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음을 알았다. "죽고 사는 일도 아니고 재수하면 되는데 뭔 걱정이에요" 하고 되레 내가 그들을 위로했다.
드디어 시험 당일이 되었다. 감독관은 세 명이었다. 첫 번째 순서는 서빙이었다. 트레이에 물잔을 올려 감독관에게 다가갔다. 감독관은 테이블을 톡톡 두드려 물 잔이 놓일 위치를 알려주었다. 나는 물을 서빙하고 오늘 내가 준비한 커피를 소개했다. 그러고 나서 머신 앞으로 이동해 커피잔에 뜨거운 물을 채워 예열했다. 잔이 데워지는 동안 첫 번째 커피를 추출했다. 포터 필터를 빼내 마른 행주로 안을 닦고 그라인더에 장착해 커피 가루를 받았다.
나는 소복이 담기는 커피 가루를 상상하며 속으로 숫자를 셌다. 카운트를 끝내고 테이블 모서리에 포터 필터를 고정한 다음 템퍼를 집었다. 체중을 실어 꼼꼼히 도징한 뒤 템퍼를 제자리에 놓고 포터 필터를 머신에 장착했다. 추출 버튼을 누르고 다시 한번 숫자를 셌다. 1초, 2초, 3초….손은 멈춰선 안 됐다. 두 개의 데미타스 잔에 담긴 물을 버리고 포터 필터 아래 내려놓았다. 잔으로 에스프레소가 떨어졌다. 용량은 정확히 30mℓ여야 했다. 머릿속으로 숫자 세기가 끝나자 재빨리 추출 버튼을 다시 눌러 머신을 정지시켰다.
추출된 커피를 감독관이 시음하는 사이 카푸치노 잔에 에스프레소를 추출하고 우유 거품을 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리를 확인하며 픽처를 비스듬히 세워 테이블 바닥을 두들겨 거품을 쪼갰다. 그러고는 에스프레소 위에 거품을 풍성히 올렸다. 작업은 다시 한번 반복됐다. 포터 필터에 낀 쿠키를 털어내고 젖은 행주로 닦고 다시 마른 행주질을 했다. 사용했던 도구를 정리하고 테이블 바닥에 커피 가루가 남아있지 않도록 깔끔히 닦아냈다.
시음이 끝난 커피잔과 픽처를 트레이에 옮겨 개수대로 가져갔다. 마지막으로 설거지를 끝내고 내가 시험 종료를 선언하는 것으로 시현이 마무리됐다. 타이머를 멈춘 두 명의 감독관이 머신과 주변 정리 상태를 평가하는 것으로 바리스타 시험은 종료됐다. 나는 내게 커피가 전달될 때까지의 과정을 바 앞에서 함께했다. 내 주문 번호가 불렸다. 커피를 받아 든 나는 그리움의 향기를 맡고 추억 한 모금을 입안에 머금었다.(글 조승리, 시각장애인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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