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복하지 못한 지역에 대한 명령
수 13:1-7
1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
2 이 남은 땅은 이러하니 블레셋 사람의 모든 지역과 그술 족속의 모든 지역
3 곧 애굽 앞 시홀 시내에서부터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북쪽 에그론 경계까지와 블레셋 사람의 다섯 통치자들의 땅 곧 가사 족속과 아스돗 족속과 아스글론 족속과 가드 족속과 에그론 족속과 또 남쪽 아위 족속의 땅과
4 또 가나안 족속의 모든 땅과 시돈 사람에게 속한 므아라와 아모리 족속의 경계 아벡까지와
5 또 그발 족속의 땅과 해 뜨는 곳의 온 레바논 곧 헤르몬 산 아래 바알갓에서부터 하맛에 들어가는 곳까지와
6 또 레바논에서부터 미스르봇마임까지 산지의 모든 주민 곧 모든 시돈 사람의 땅이라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리니 너는 내가 명령한 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되
7 너는 이 땅을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라 하셨더라
수 13:1-7 / [아직도 정복하지 못한 땅]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자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호수아야! 네가 이제 나이가 많이 먹었구나. 이제 너도 어쩔 수 없이 늙었구나. 그런데도 아직도 점령하지 못한 땅이 무척 많이 남아 있구나. 2) 점령하지 못하고 아직 남아 있는 땅은 블레셋 사람들이 살고 있는 전지역과 그술 사람들이 살고 있는 전지역 아니냐? 3) 뿐만 아니라 애굽 땅에 맞닿아 있는 시홀 시내에서 북쪽으로는 에그론 경계에 이르는 땅, 역시 가나안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이 아니냐? 또한 가사 사람과 아스돗 사람과 아스글론 사람과 가드 사람과 에그론 사람이 모여 사는 땅에는 아직도 블레셋의 다섯 왕이 버젓이 살아서 그 지역을 다스리고 있지 않느냐? 또 아위 사람의 땅도 4) 여전히 정복하지 못한 남쪽 땅이 아니냐?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 전지역도 마찬가지이다. 시돈 사람들의 소유인 므아라에서 아모리 사람의 땅과 맞닿아 있는 아벡까지 5) 그리고 그발 사람들이 사는 땅과 해가 떠오르는 동쪽 레바논 전지역과 다시 말해서 헤르몬산 남쪽에 있는 바알갓에서 하맛 입구까지의 땅이 아직 더 남아 있지 않느냐? 6) 또한 레바논에서 미스르봇마임까지 전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모든 주민들이 바로 시돈 사람이 아니냐? 그 땅에서 그들은 아직까지 살고 있다. 하지만 내가 그들 모두를 그 땅에서 몰아내겠다. 너희 이스라엘 군인들이 쳐들어갈 때 저들이 무서워서 쓰러지게 하리라. 그러니 너는 내가 명한 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적절히 나누어 주어라. 이스라엘이 그 처지대로 그들의 몫으로 차지할 수 있도록 분배해 주어라. 7) 지금까지 내가 열거하였던 땅을 점령하고 나서 이스라엘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도록 하여라. 그들이 분배받은 그 땅을 그들의 영원한 몫으로 차지하게 하여라'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가나안의 정복되지 않은 땅을 지파별로 분배하고, 그 땅을 각 지파별로 정복하도록 명령하십니다.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1)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시내 산에서 계수된 사람들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없습니다. 오랫동안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이 있었지만, 이 과업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직면하고 있는 두 가지 현실적인 사실을 지적하십니다. 가나안에는 아직도 정복해야 할 땅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과 연로한 여호수아는 더 이상 이 과업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당시 여호수아의 정확한 나이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가나안 땅 정복을 위해 힘썼던 여호수아의 현재의 형편을 고려하시고 마지막 역할을 주십니다.
내가 그들을 쫓아내리니(2-7) 이스라엘이 상징적으로는 가나안의 모든 땅을 차지했지만, 여전히 많은 지역이 정복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아직 정복되지 않은 지역을 말씀해 주시고, 이 땅을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누어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십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지파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기업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것이고, 기업으로 받은 자는 그 땅을 거룩하게 보존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새롭게 땅을 분배받게 되는 세대들은 그 땅을 자신들의 힘으로 정복해야 하는 역할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역할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6). 하나님의 약속 말씀은 정복에 나서야 하는 지파들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전쟁을 지도했던 여호수아는 역할이 끝났지만, 하나님의 역할은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과정이 어떤 성격을 갖는지 가르쳐 줍니다.
적용: 하나님의 약속은 유효하고, 그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당신에게 어떤 격려를 줍니까?
우리가 살다보면 전후좌우 아무리 살펴보아도 뾰족한 해결 방법이 없는 문제에 봉착할 때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역부족일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역부족인 것을 느낄 때, 낙심하며 절망합니다. 가만히 보면 그렇게 복잡한 문제가 아닌데, 싸워보지도 않고 일찍부터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가? 분석해 보면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정해 놓은 생각과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정해 놓은 한계점에 이르면 더 이상 도전해 보려 하지 않습니다.
< 설 교 >
정복해야 할 땅은 아직도 많다
여호수아 13:1-7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세 번에 걸친 큰 전쟁으로 가나안 땅에서의 전쟁은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정착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였습니다. 그래서 11장 23절은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전쟁은 정말 끝났는가? 아닙니다.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지금까지는 가나안 주력군들을 물리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가나안의 주력군들은 격파되었습니다. 이제는 각 지파들이 자신의 땅을 찾아 가야 합니다. 이제부터가 진정한 시작입니다. 오늘 읽은 13장부터 시작해서 21장까지는 각 지파가 그 땅을 분배받고 차지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성경은 1절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로 시작합니다.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성경은 ‘여호수아는 늙었다’라는 무능력함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 이미 익숙합니다. 여호수아 1장 1절을 성경은 이렇게 시작 했습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하나님의 역사는 철저히 사람을 의지하지 못하게 합니다.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가 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지팡이와 손짓만 바라보며 살았는데 하나님은 그 모세를 사라지게 만듭니다. 이제는 가나안 땅 분배라는 중요한 과업을 앞두고 여호수아가 늙었다라고 선언합니다. 그것도 너는 ‘나이 많다’ ‘늙었다’라는 말을 겹쳐서 연거푸 사용합니다. 철저한 무능력입니다. 이제 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듭니다. 모든 사역이 다 그렇듯이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무능력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바라보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그때서야 일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지금 형편은 모세가 죽고 첫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했던 때보다는 낫습니다. 이미 가나안 땅의 주력이 격파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잔당을 소탕하는 작업입니다. 모든 적들을 다 섬멸한 후 우리에게 땅을 주시면 좋겠는데 하나님의 역사는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각 지파가 따로 감당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승리하는 인생을 살려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혼자서 처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1절의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몫으로 남겨놓으신 땅이 있습니다. 우리 힘과 노력으로 그 땅을 차지해야 합니다. 사실 아무 수고 없이 땅을 얻으면 부끄럽습니다. 그 소중함을 모릅니다. 자기 힘으로 개척하고 정복해야 그 땅이 자기 것이 됩니다. 바로 여기에 각 지파로 하여금 자기 땅을 정복하라는 주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애정은 땀방울에 비례합니다. 많이 수고하고 많이 아파한 만큼 자기 것이 됩니다.
그래서 행여 자기 스스로 일어서려는 독립심을 잃게 될까 13장 서두를 여호수아가 나이 늙었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수아를 의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홀로 서는 일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홀로 서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강해집니다. 그래야 자기가 차지한 땅에 대한 감사가 있고 소중함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사업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이 떠주는 밥만 먹고 살면 그 일에 대한 소중함이 없습니다. 봉사하고 헌신한 만큼 자기 몫입니다. 교회를 가장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많은 시간을 내어 봉사하고 헌신한 사람입니다. 기도의 기름을 짜내고 눈물로 성전을 적신 사람들입니다. 이런 헌신과 노력이 없다면 우리는 영원한 손님에 불과할 것입니다.
내가 그들을 쫓아내리니
그렇지만 이 싸움을 앞두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사단의 머리를 쳐서 무력화 시켰기 때문입니다. 전쟁에는 D-데이와 V-데이가 있습니다. D-데이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하기로 한 날로 유명합니다. 이 날 상륙작전의 승리로 연합군은 독일과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게 됩니다. 실상 이때를 기점으로 승리는 연합군 측으로 넘어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날이 V-데이, 곧 승리의 날은 아닙니다. 독일군이 항복하는 순간이 V-데이이지만 그 결정적 전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이미 판가름 났습니다. 그 이후 베를린까지 입성하는 과정은 단지 잔당 소탕 작업에 불과했습니다.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남겨진 전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가나안 주력은 괴멸되었습니다. 자기에게 분배된 땅에 가서 그 땅에 있는 나머지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내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셨던 일과 제자들이 이룬 위대한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팔레스틴이라는 좁은 땅에서만 활동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는 결정적인 일을 하셨습니다. 그 일을 통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주님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제자들은 이미 이기시고 모든 권세를 취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온천하와 모든 족속에게로 나아갔습니다. 복음서의 역사가 끝나고 사도행전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심장부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했지만 그 일은 주님께서 이미 이루신 승리를 확인하고 확실히 하는 과정에 불과했습니다. 마치 적의 수도가 함락되고 주력군이 괴멸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아직 지방과 시골 깊숙이까지는 이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그 땅마저 접수하여 주님의 통치를 현실화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제자들의 사역이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단과 어둠의 세력에 대항하여 승리하셨습니다. 적들은 우리를 해할 수 있는 권세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싸움은 이미 이긴 싸움입니다. 물론 우리 앞에 있는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고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패배하게는 못합니다. 잠시의 패배는 있을 수 있지만 이는 마치 예방주사와 같습니다. 예방주사는 죽은 균을 우리 몸에 집어넣어 인체에 면역력을 높입니다. 일시적 패배는 오히려 우리를 강하게 하는 수단이 됩니다. 그것이 우리를 결정적으로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어둠의 권세는 이미 힘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크리스찬의 실존에 대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핍박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일도, 장래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 8:35-39)
우리가 담대함으로 나가면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물맷돌 다섯 개를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나갔을 때 골리앗은 단 한 방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면 승리하는 데 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레 겁을 먹고 싸우러 나가지 않습니다. 골리앗이 으르렁대니까 발발 떨고 있습니다. 마치 야성을 잃어버린 애완견과 같고 동물원에 갇힌 사자와 같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보면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사를 죽였다는 단 한 구절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 골리앗의 시위에 다들 쥐 죽은 듯 숨죽이고 두려워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❶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승리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두려움 없이 승리를 거두었던 대표적인 사람으로 갈렙을 들 수 있습니다. 갈렙은 가데스바네아에서 열두 정탐꾼중 한 명으로 파송되었던 사람입니다. 다른 열 명의 정탐꾼들은 그들은 거인이요 우리는 메뚜기같다고 보고할 때,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민14:9)고 담대한 믿음을 보였던 사람입니다. 이어지는 14장 12절에서도 갈렙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개역개정판) 아낙 자손은 바로 골리앗이 속해 있던 족속입니다. 그때 갈렙의 나이는 85세였습니다. 갈렙은 나이가 들었고 또 가장 험한 곳을 택했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나아갈 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❷ 게으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부지런한 자가 얻게 되어 있습니다. 각 지파들의 모습을 보면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므낫세 지파는 부지런히 자신의 땅을 개척하여 좋은 땅 광활한 땅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고 게을럿던 나머지 일곱 지파는 미적미적합니다. 이런 일곱 지파를 향하여 여호수아가 이렇게 책망합니다. 18장 3절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이렇게 미적미적하니까 다른 좋은 땅들을 다 빼앗기고 맙니다.
예로부터 성공하는 사람들은 부지런한 사람들입니다. 대표적으로 여호수아 자신이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지난 전투를 보면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즉각 순종하고, 또 항상 새벽 일찍이 일어나 행동했던 사람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전투는 항상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그가 하나님 말씀에 재빨리 순종한 결과입니다. 여리고성 전투를 보면 “제 칠 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수 6;15)라고 성경은 보도하고 있습니다. 아이 성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8장 10절입니다.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백성을 점고하고” 남방 연합군과의 싸움에서도 역시 동일합니다. 10장 9절입니다. “여호수아가 길갈에서 밤새도록 올라가서 그들에게 갑자기 이르니” 지난 시간에 묵상했던 11장의 북부지역 전투에서 바로 그러했습니다. 11장 7절 말씀입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함께 메롬 물가로 가서 졸지에 습격할 때에” 졸지에 곧 갑작스럽게, 신속하게 기습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해변의 수다한 모래와 같은 군사들과 말과 병거가 있을지라도 꼼짝 없이 당합니다.
말씀을 순종하되 부지런히 순종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적들보다 한 발 앞서가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감동주실 때 즉각 순종하십시오. 즉각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의 죄성과 욕망이 어느새 그 감동을 저 어둠 깊숙한 곳으로 밀어내고 맙니다. 하루를 허송세월 하지 말고 열심히 사십시오. 역사를 보면 부지런한 자가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지 게으른 자가 쓰임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부지런한 새벽의 사람이었기에 승리자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것은 땅 문서가 아니라 비전이었습니다. 13장 2절부터 7절까지는 아직 정복되지 않은 땅들입니다. 그 땅의 크기는 애굽 바로 위로부터 시작하여 블레셋이 있는 남쪽 평야지대를 거쳐 가나안 최북단 시돈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역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시려고 의도했던 땅입니다. 이것이 바로 비전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주시는데 그냥 적당히 주시지 않습니다. 정복할 땅이 아주 많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요 기대이기에 믿음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성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기대했던 만큼의 땅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대표적으로 17장 12절에 므낫세 지파의 예를 들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이는 므낫세 자손만의 경우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지파가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동거를 하고 맙니다. 사사기 1장의 기록을 보면 모든 지파들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고 가나안 족속과 함께 거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은 하나님의 헛된 소망에 불과했나?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땅을 차지했던 때가 있습니다. 바로 다윗과 솔로몬 왕 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대하셨던 그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습니다. 열왕기 상 4장 24-25절에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하수 이편을 딥사에서부터 가사까지 모두 다스리므로 하수 이편의 모든 왕이 다 관할한 바 되매 저가 사방에 둘린 민족과 평화가 있었으니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 여기 언급되고 있는 가사는 블레셋의 근거지입니다. 최북단 단에서 최남단 브엘세바까지 원래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던 계획된 땅을 다윗, 솔로몬 시대에 차지하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 비전을 성취합니다.
저는 이 1절의 정복해야 될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는 말씀이 너무 좋습니다. 우리 윗대에서 모든 땅을 차지해버렸다면 우리는 할 일 없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도 정복해야 될 땅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땅을 찾고 그 땅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대시대마다 우리가 정복해야 할 땅들을 보여주십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청년 시절을 보냈던 80년대 90년대는 정말 혁명적인 시기였습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등장하여 새시대를 열어가던 때였습니다. 처음 제가 대했던 컴퓨터는 286컴퓨터였습니다. 아마 1989년도쯤 나왔던 것 같습니다. 요즘처럼 윈도우 체제가 아니라 글자로 일일이 명령어를 입력해야 하던 컴퓨터였습니다. 아주 까만 바탕에 일일이 명령어를 치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합니다. 그 전까지는 논문이나 글을 쓸 때도 손으로 쓰거나 타자기로 쳐야 했습니다. 두꺼운 영어 사전을 들고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생각하기를 석유왕 록펠러, 강철왕 카네기, 한국에서는 정주영, 이병철 같은 사람들이 다시는 나오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태어나던 시대는 산업화가 진행되던 시기로 때를 잘 맞추어 태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환경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나 구글의 창업자 페이지(Larry Page)나 브린(Sergey Brin)을 만들어내었고 글의 이찬진, 바이러스 백신의 대명사 안철수와 같은 새로운 거물들을 탄생시켰습니다. 구글(Google)은 전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검색엔진인데 그 게 언제 시작된 지 아십니까? 1998년 9월 7일 허름한 창고에서 창업을 했습니다. 불과 10년도 안 되어 구글 창시자 페이지와 브린은 포춘지 선정 40대 미만 갑부중 4,5위에 랭크되었고 그 재산은 8조원에 달합니다. 그때 일찍부터 컴퓨터와 인터넷의 위력을 알았던 사람들은 다 성공의 정상에 설 수 있었습니다. 기회는 언제든지 주어집니다. 어느 시대든 어느 환경이든 정복할 땅은 많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 눈이 어둡고 과거에 것에 고정되어 있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 시대 이 땅의 젊은이들이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60,70년대는 부흥회와 순복음의 은사운동이 교회성장을 가져왔습니다. 80년대는 강남권을 중심으로 제자훈련을 비롯한 체계적 훈련과 문화적 양식을 가진 새로운 신흥 교회의 출현이 있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의 주류를 장악하고 있는 사랑의 교회, 남서울 교회, 지구촌 교회, 온누리 교회 등이 바로 그런 교회들입니다. 저는 그 태동부터 이렇게 고도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어떤 분들은 이런 사태를 보면서 이제 교회성장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말합니다. 이미 새로운 노하우들과 프로그램들은 다 공개되었고, 앞서갔던 교회들이 다 이용했기에 후발 교회들은 더 이상 성장하기가 어렵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정복할 땅은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은 하나님께서 우리 눈을 열어서 그 비전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비전이란 것은 처음에는 마치 겨자씨처럼 작고 보잘것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장한 후에는 새들도 그 가지에 깃들이는 큰 아름드리나무를 이룹니다. 사람들은 그때서야 여기에 길이 있구나 하고 뛰어들지만 그때는 늦습니다.
경영에서도 블루오션(Blue ocean)과 레드오션(Red ocean)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블루오션은 경쟁자가 없는 푸른 바다에서 먹이를 찾는 것, 달리 말하면 틈새시장을 뜻합니다. 반면에 레드오션은 경쟁이 치열해 서로 물고 뜯는 바다에서 먹이를 찾는 피튀기는 시장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주로 레드오션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이곳이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확실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만큼 경쟁이 치열해 이곳에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면에 블루오션은 경쟁자가 없어서 수월한 곳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아직 보이지 않는 곳이며, 자기가 처음 개척해야 하는 곳이며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곳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광활한 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믿음의 눈을 떠 이곳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비전중 하나는 북한선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이 땅에 통일을 주실 것입니다. 북한 땅은 정복되지 않는 유일한 곳입니다. 이곳에는 주님의 복음을 들어야 될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우리의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는 많은 분야들이 있습니다. 이 땅을 비전으로 삼고 기도하며 준비하는 자가 이 땅을 차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낙담하지 아니하고 부지런히 준비하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놀라운 일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주님은 우리를 땅끝까지 이르는 인생으로 부르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우리의 시선이 항상 땅 끝을 향하는 비전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복할 땅이 아직도 많이 있다는 이 말씀에 아멘으로 순종하며 그 땅을 향해 담대하게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늙으매
수 13:1-7
인간이 낙심을 하고 교만해지고 시기하고 미워하게 되는 이유는 자기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소망을 가지고 겸손해 질 수 있는 것은 자기가 아닌 하나님을 생각할 때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이란 자기를 바라보지 않고 그리스도만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신앙이 있는 사람입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이란 그리스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인간 스스로 계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신앙이 좋다 나쁘다'는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신앙이 좋다 나쁘다는 것은 결국 '신앙이 많다 적다'라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 신앙이 우리들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신앙을 100을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50을 줬겠습니까? 만약 그리스도께서 신앙을 적게 줘서 신앙이 나쁘다면 신앙이 나쁘다고 해서 그 사람을 탓할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신앙을 주실 때 누구는 많이 누구는 적게 차별되게 주신다는 말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앙이 나쁜 책임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게 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신앙은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 신앙을 어떻게 관리하고 계발했느냐에 따라서 차이가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성경은 흔히 말하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그러나 달란트 비유를 보면 각각 주인으로부터 받은 것이 동일하지 않습니다. 많이 남긴 사람은 많이 받은 자였고 적게 남긴 사람은 적게 받은 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예 받은 것을 땅에 파묻어 버린 종에 대해서만 언급합니다. 받은 것을 땅에 파묻고 남기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현재의 신앙을 그냥 파묻어 버리는, 즉 신앙이 좋아지도록 하기 위해서 열심을 내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교훈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한 달란트 받은 사람도 그것을 묻어 버리지 않고 열심히 그것으로 장사했다면 과연 얼마를 남겼을까요?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다섯 달란트를 남겼고,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두 달란트를 남겼다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한 달란트를 남겼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많이 남겼느냐를 따진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애초부터 주인으로부터 받은 것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인에게 누가 충성했느냐는 것은 누가 많이 남겼느냐를 비교해서 결정할 수 없습니다. 단지 주인이 오실 것을 생각하고 주어진 것으로 열심히 장사했다는 것만 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공평입니다. 따라서 신앙이 좋다 나쁘다는 말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 나쁘다는 것은 신앙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있기는 하지만 그 질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앙에 질 나쁜 신앙 질 좋은 신앙이 있다는 것입니까? 신앙은 있다 없다로 판단되는 것이지 좋다 나쁘다로 판단되는 것이 아닙니다. 적게 남겼기 때문에 좋은 신앙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따질 문제입니다. 처음부터 소위 좋은 신앙을 보여줄 여건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상에 차이도 없습니다. 만약 남긴 다섯 달란트를 상으로 받은 것과 달란트를 받은 것을 상의 차이라고 말한다면 이것 역시 공평하지 못한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만약 상에 차이가 없다면 신앙에도 역시 차이가 없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즉 좋은 신앙 나쁜 신앙이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그리스도를 아는 신앙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구별될 뿐입니다. 때문에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발 신앙이 좋은 사람되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되려고 할 때 나오는 것은 종교행위입니다. 종교행위가 많을수록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앞에서는 단지 신앙이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신앙이 있는 좋은 사람으로 사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이지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살려고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 생활일 뿐입니다.
제 말이 쉽게 이해가 안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신앙을 다만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사는 것으로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신앙의 흔적을 찾으려고 하지말고,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느냐를 통해서 신앙의 흔적을 찾자는 것입니다. 행위에서 신앙의 흔적을 찾으려고 할 때 꼭 나타나는 것은 신앙생활 하려고 행동하게 됩니다. 즉 주님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의식한 행동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게 되고 자기와 같은 행위가 없는 자나 자신에게 미치지 못한 자는 신앙이 좋지 못한 신자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신앙이란 자기를 바라보지 않고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에게 물을 것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사느냐 아니면 나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고 사느냐이지 내 신앙이 좋으냐 나쁘냐가 아닌 것입니다. 만약 우리식대로 신앙을 판단한다면 결국 신앙이 좋아서 받게 되는 상은 건강 있고 돈 있고 시간 많은 사람들이 차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날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거나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은 신앙이 좋은 사람되고 싶어도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공평의 하나님이라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앙이 좋으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있느냐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즉 봉사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했느냐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 생각하고 사느냐를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 생각하고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사는 것에 돈이 있어야 합니까? 건강이 있어야 하고 시간이 있어야 합니까? 숨만 쉬고 있고 의식만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평이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이러한 신앙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는 얘기가 본문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지난 시간에 12장에서 모세의 전투와 여호수아를 전투를 같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전투에서 승리가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 것임을 가르치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즉 여호수아로 하여금 내가 전쟁을 잘해서 승리했다는 생각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모세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같이 함으로서 승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3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라는 말로 시작을 합니다. 가나안 정복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닙니다. 2절부터 보면 남은 땅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정복해야 할 땅이 많이 남아 있는 시점에 모세의 후계자로 세움 받은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이 많아 늙었다는 것은 기력이 떨어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에 앞장서서 가나안과 싸우며 정복할 힘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다시 여호수아의 후계자를 내정한 것도 아닙니다. 여호수아를 대신 할 사람을 내정하지도 않은 상태인데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었고 또 정복해야 할 가나안 땅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근심거리가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인데 이제 누가 앞장서서 그 명령대로 가나안을 정복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의 근심일 수 있고 이스라엘의 근심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근심으로 살 때가 많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인간은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자신의 여건과 힘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신에게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는 여건이 주어져 있다면 근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아마 막막한 심정일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라는 근심이 그 마음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근심이란 인간이 자기를 바라볼 때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해결책이 자신에게 전혀 없을 때 근심하고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 있는 여호수아에 하나님은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6절에 보면 "또 레바논에서부터 미스르봇마임까지의 산지 모든 거민 곧 모든 시돈 사람의 땅이라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리니 너는 나의 명한 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이 많아 늙은 여호수아에게 아직까지 정복해야 할 많은 땅이 남아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그것이 2-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시는 말씀은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리니 너는 나의 명한 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어서 싸울 기력이 없는 상태에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라는 것은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호수아가 가나안과 전투한 것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가나안을 정복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 명령대로 전투한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신자가 잘못 오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에게 명령하시고 인간은 그 명령을 이행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점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서 일하신다면, 인간에게 명령하시고 인간이 그 명령에 순종함으로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오늘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는 여건이 되었을 때 명령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의 상식대로라면 나이 많은 여호수아 대신 다른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시겠다고 말씀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명령이 계속 이어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교를 명령하셨고 그 명령대로 선교하기 위해서 떠났다면 언젠가는 나이 많아 늙어서 모든 것을 중지해야 할 때가 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다른 사람을 세우셔서 계속 이어가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내가 그들을 쫓아내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이 말씀 한마디는 '너 자신을 보지말고 나를 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늙고 병든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모든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자신이 늙었다는 것이 근심거리로 남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늙은 것과 상관없이 내가 힘이 없다는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이루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싸우시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지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여호수아가 그 명령에 순종해서 자신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싸우시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아서 나눌 뿐입니다. 6절 말씀대로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라'고 하시지만 분배할 땅은 여호수아가 싸워서 얻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땅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자신의 여건을 바라보며 근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나이 들어 늙은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싸우시고 하나님이 약속의 땅을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여호수아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들은 여호수아에 상관없이 든든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자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여건과 힘을 생각하고 근심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생각하고 든든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가 신앙이 있는 신자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를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역시 앞으로의 일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이유로 앞으로 일에 대해서 염려한다면 그것은 지금까지의 승리를 자신의 힘으로 얻은 승리로 생각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모세도 아니고 여호수아도 아니고 하나님이었습니다. 모세도 죽고 여호수아도 죽지만 하나님은 죽지 않습니다. 영원히 지도자로 이스라엘과 함께 할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그는 절대로 인간을 의지하거나 인간을 지도자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의지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의지할 만한 여건과 힘과 조건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재주가 있다든지 아니면 돈이 있다든지 그것도 아니면 권력이 있다든지 어느 것 하나라도 내게 없는 것을 누군가가 가지고 있을 때 그 사람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의지하는 자가 힘을 잃어버렸을 때 낙심하게 됩니다. 의지할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에 염려가 되고 근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언젠가는 늙고 병들고 힘이 없어질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인간은 결코 의지할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흔히 교회가 소위 능력이 있다는 목사를 의지하기가 쉽습니다. '우리 교회는 목사님이 없으면 안돼'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기도 합니다. 목사가 잘해서 교회가 이만큼 되었는데 저 목사가 없다면 교회 꼴이 뭐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안중에도 두고 있지 않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해도 우리 목사님을 더 능력 있게 하고 우리 교회를 더 부흥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함께 하신다는 것으로 이해해버립니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자는 목사가 아니라 주님입니다. 목사는 교회를 지도하라고 세워진 것이 아니라 '주님이 교회를 지도하십니다'라는 말을 하라고 세워진 자입니다. 세상이 교회의 지도자라고 인정하는 목사를 세워서 '내가 지도자가 아니라 주님이 지도자입니다'라는 말을 하게 함으로서 목사라는 사람을 보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는 신자, 순수하게 하나님이 주신 신앙으로 살아가는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은 축복의 땅입니다. 그런데 그 축복의 땅은 인간의 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여호수아의 늙음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여호수아가 늙어서 전투를 더 이상 못하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약속대로 가나안 땅 모두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집니다. 결국 가나안 땅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고, 그래서 그 땅을 축복의 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의 힘에 의해서 얻어지는 땅이라면 축복의 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얻어지는 땅이기 때문에 축복의 땅인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살기가 좋은 땅이고 곡식이 잘 열리는 비옥한 땅이기 때문에 축복의 땅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들어가게 하시고, 하나님이 주신 땅이기 때문에 축복의 땅입니다. 그리고 이 축복의 땅에서 사는 자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성도에게 축복의 땅은 무엇입니까?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어주실 땅입니다. 우린 단지 받아 누리는 자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기둥 같은 일꾼이 많아야 한다는 것은 교회를 바라보는 것이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잘되기 위해서는 분명 일 잘하고 많이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특별히 일 잘하고 많이 하는 사람이 필요치 않습니다. 일은 하나님이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병든 자라면 나를 병들게 해서 하나님이 병든 나를 이용하고자 하시는 것이고, 돈이 없다면 돈 없는 가난한 자 되게 해서 가난한 나를 이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진심으로 주님을 지도자로 여기고 모인다면,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고 모이는 교회라면 일꾼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일꾼이고 주님의 일을 하는 봉사자로 모여질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는 돈있고 힘있는 자가 오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 바라보는 신앙이 있는 자가 오는 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늙고 기력이 떨어진 것과 상관없이 가나안 정복은 약속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신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일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돈도 없으면서 '예배당을 짓자'고 하면서 '우리는 못하지만 하나님은 하신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의 근거를 자신에게 두게 되면 젊고 건강할 때 교만하게 되고 늙고 기력이 떨어지면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젊을 때는 내가 힘이 있고 건강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게 하셨다는 것을 믿고, 늙어지면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으며 하나님만 신뢰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고전 3:6-7절을 보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심는 이 물 주는 이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심고 물 주는 인간의 행위에 상관없이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신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며 사십시오. 그럴 때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여건을 바라보면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든든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앙, 이 신앙으로 사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현재를 살라
수13:1-7
수12장까지는 가나안땅 정복전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제 13장 이후에는 여호수아의 마지막 생애와 가나안땅 분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가나안땅이 아직 완전히 정복이 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는 땅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아직 완전히 정복이 되지 않은 가나안땅을 정복이 되었다고 말씀하시고, 또 동시에 아직 정복할 땅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이것에 대해서 성경학자들은 몇 가지 이야기를 합니다.
1) 첫 번째는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여호수아의 나이가 많아 늙으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정복전쟁을 할 때 나이가 대략 95세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7년 동안의 가나안정복전쟁을 하니 여호수아의 나이가 100살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이 많은 여호수아를 생각하셔서 이제 1차적인 정복전쟁을 그치게 하셨다는 견해입니다.
2) 두 번째는, 7년 동안의 정복전쟁에서 피곤할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쉬게하기 위해서 가나안의 정복전쟁을 그치게 하셨다는 견해입니다.
모두가 일리가 있는 견해들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하나님 나라의 입장에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학시대에도 하나님나라는 이미 왔다고 말할 수 있고, 또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신분적으로는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있어서는 아직 너희가 구원을 이루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사역적인 측면에서도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었었다 함도 아니고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고 합니다. 그리고 나는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표대를 향하여,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달려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1차적으로 정복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가나안땅을 분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전이 너희가 정복해야할 땅은 아직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과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여태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항상 감사해야합니다.
그런데 절대 아직 모든 일이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항상 앞으로 달려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과거에 성공한 일에만 머무른다면 우리는 100프로 교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반대로 우리가 과거에 실패한 일에만 머무른다면 우리는 100프로 좌절하여 불신앙과 낙담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과거에 네가 무언가 이루었다고 생각하느냐, 그것에 대해서는 철저히 하나님께 감사해라. 그러나 절대 그 어느 것 하나도 네가 이 땅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반대로 네가 과거에 실패하였다 생각하느냐 그래도 절대 낙심하지 마라. 네가 실수하여 실패한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다시 시작해라 네가 부족하여 실패한 일에 대해서는 더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다시 시작해라 중요한 것은 과거에 무언가 이루었다 또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네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지나간 과거의 일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현재를 열심히 달려가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과 인생의 시제는 현재밖에 없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이미 이루었다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저 영원한 천국에 가기까지 이 땅에서는 무엇이든지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과거 성공과 실패에 메이지 마시고, 마지막 날 우리에게 주실 그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인 오늘과 현재를 최선을 대해서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남겨진 땅을 점령하려면
수 13:1~7
우리들은 저마다의 꿈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소박한 꿈일 수도 있고, 원대한 꿈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을 바라보면 꿈이 공허해보이기도 하고, 뜬구름 잡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 아직도 남겨진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다면, 그래서 그 꿈을 이루길 진심으로 원한다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믿음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믿음에 집중해야 하는 것일까요?
40년의 광야생황을 끝내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와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후로 아이성과의 전투에 이어 가나안 남부와 북부 동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서른 한 개의 성읍과 왕들을 물리치면서 7년 동안의 전쟁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7년간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정복되지 못한 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수13:1). 그리고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 남겨진 땅을 각 지파에게 나누어 주어 기업으로 삼게 하고, 그 땅들을 이제부터는 각 지파별로 점령하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 가나안의 각 성읍들을 점령했었지만, 이제부터는 각 지파별로 알아서 각각의 가나안 족속들과 싸워야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와는 달리 각각의 지파별로 적은 군사력을 가지고 여전히 맹렬한 기세로 싸움에 임하며 결심하고 쫓겨냐지 않으려고 하는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에 나선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
그렇다면 지금까지 애쓰고, 힘쓰며 가나안을 정복해 왔던 이 수고를 헛되지 않게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이제부터 이스라엘의 각 지파들은 어떻게 해야 했던 것일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라”(수13:6~7)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나할라, נַחֲלָה)는 “물려받은 것”이라는 의미의 “상속, 유산”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정복해야 할 남겨진 가나안 땅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속시켜 주시고, 유산으로 물려주시겠다는 겁입니다.
그렇다면 땅을 물려주려면 누구의 것을 물려줘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것을 상속으로 물려주어야지, 남의 것으로 유산을 상속시켜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나안의 남은 땅들은 누구의 것이라는 이야기입니까? 모두가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 땅을 유산으로 상속시켜 주시고, 기업으로 삼아 살아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현실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이미 7년 동안 전쟁을 해왔기 때문에 지쳐있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싸워야 했지만, 이전보다 싸울 수 있는 사람도, 무기도 너무나 적어졌습니다. 이제는 홀로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남겨진 땅들을 “기업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상황을 모르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 알고 계십니다. 가나안의 상황도, 각 지파의 상황도 모두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남겨진 땅을 점령하여 기업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기업을 상속받고, 기업을 누리며, 기업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요?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절망의 상황에서 눈물을 흘리며 슬픈 애가(哀歌)를 부르며, 깨닫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진정한 기업은 땅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을 잃거나, 땅을 얻지 못하는 것보다 더 커다란 문제는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33:12)
하나님만이 나의 진정한 기업이심을 믿을 때, 그때가 바로 가장 놀라운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임을 다윗은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이 믿음으로 남겨진 땅을 정복하며,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백성들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상황이 어떠하든 하나님의 강한 팔과 능력만을 믿고 그 무엇도 아닌 오직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는 믿음을 갖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업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소유를 하나님의 자녀들이 풍성하게 누리길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떻습니까? 지금 내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까? 환경과 상황입니까?
우리의 삶에는 저마다 남겨져 있는 삶의 무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꿈과 소망과 비전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변화되기를 갈망하는 내 자신의 삶일 수도 있고, 가족에 대한 간절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남겨진 그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남겨진 그 땅이 무엇이든, 그것은 하나님이 소유하신 하나님의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을 나의 기업으로 삼는 믿음으로 오직 주님에게만 집중할 때 남겨진 그 땅은 머지않아 반드시 점령되어 하나님의 기업으로 세워지게 되는 축복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끝까지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수 13:1-7 찬송 216장 / 박현덕 목사
이스라엘은 40여 년간의 광야생활 끝에 드디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그 땅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던 시기에 가나안은 상당부분 애굽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가나안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은 불안했습니다. 당시 가나안을 지배했던 왕들은 애굽의 통치하에 허용된 범위 내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지나치게 남용함으로써, 일반백성들을 착취하고 억압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이런 혼란기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들어오게 되었고 전쟁을 치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광야의 삶을 끝내고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의 정세를 상당부분 약화시킨 후였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족속들이 비록 강력한 철기문명을 가지고 있었어도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데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가나안 땅 백성들의 마음을 완전히 얼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여리고성에 살았던 기생 라합의 증언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홍해를 마르게 하셨고, 아모리 사람인 두 왕 시혼과 옥을 전멸시킨 일로 이 땅 주민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선봉에 서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여리고성과 아이성을 차례로 무너뜨릴 수 있었고, 남방 연합군과 북방 연합군도 굴복시킬 수 있었던 겁니다. 특히 남방 연합군과의 전투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박을 내리셨고, 여호수아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하시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상황들, 즉 당시 가나안 땅이 처해있었던 불안한 정세와 가나안 백성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마음, 그리고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시는 정복전쟁으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정복해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 12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정복한 성읍과 그 성읍을 다스렸던 왕의 명단이 차례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여기에는 요단동편에서 이스라엘을 정복한 땅과 왕에 대한 기록이 등장합니다. 특히 여기서 등장하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인 시혼과 옥은 이스라엘이 처음으로 무찌른 자들이었기에 더욱 감회가 새로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 전쟁의 소문이 가나안 지역에 퍼지면서 가나안 백성들이 이스라엘에 대해 큰 두려움을 품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여호수아 12장 7절 이하부터는 요단서편에서 이스라엘이 정복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기록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하셨고 드디어 여호수아 때에 그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알게 된 우리에게,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아주 구체적으로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출애굽기 12장은 단순한 역사의 기록을 넘어 전쟁에서 승리하신 하나님을 향한 승리의 찬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가나안 지역 왕들이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의 것이 된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출애굽기 13장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가 많이 늙었고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 여호수아가 누구입니까?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데 선봉에 섰던 지도자가 아닙니까? 그 여호수아가 이제 늙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인생의 무상함을 보여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너는 나이가 많아 늙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치 듣기에 따라서는 이제 은퇴할 시기가 왔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아직 가나안 땅이 완전히 정복된 시점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정복해야 할 땅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호수아는 이미 노인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전쟁의 선봉에 설 수 있는 나이를 지나버린 것입니다. 이제 그는 이스라엘의 최고 사령관의 지위를 내려놓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여호수아에게 또다시 엄청난 일을 맡기십니다. 그것은 이미 이스라엘이 정복한 땅을 골고루 공평하게 분배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이 분배를 잘 해내지 못한다면 엄청난 불만들이 이스라엘 내에서 터져 나오게 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내부분열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적들에게 공격 당할 빌미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아주 민감한 사항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일은 여호수아와 같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위임받은 사람이 아니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 사명을 그의 인생 말년에 맡기셨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누구입니까? 그는 젊은 시절부터 애굽에서 광야로 나오게 되었을 때 처음 맞이한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실제적으로 전투를 이끄는 지도자로 맹활약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인간 적을 보면 여호수아의 입장에서 아쉬운 점이 많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는 아직 가나안 땅의 정복을 완수한 상태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까지 그가 감당했던 일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그러니 그 서운함이 오죽했겠습니까?
하지만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즉각적인 순종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제사장 엘르아살의 뒤에 섰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이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지위와 명예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온전히 헌신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땅 분배가 안정적으로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잡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땅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불평이 있었고, 유다지파의 기업에서 일부를 떼어서 시므온 지파에게 줘야하기도 했습니다. 또 아론과 레위 지파를 위한 성읍의 할당문제와 도피성의 할당문제 역시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게으름을 지적하며 책망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더군다나 여호수아는 모든 지파들이 자신들의 기업을 차지하게 한 후에 비로소 자신의 몫을 차지합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자신권리를 주장한다고 해서 이를 반대할 이스라엘 백성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이것조차 다 내려놓습니다. 바로 이런 리더십이 있었기에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여호수아를 통해서 정말 배워야 할 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은퇴란 없습니다. 단지 맡겨진 일이 달라질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늙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전쟁과 같은 일을 맡기는 게 어렵다는 것을 여호수아가 받아들이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여호수아의 입장에는 적잖은 충격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새로운 일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습니다. 이때 그는 이제까지 자신이 이루어 놓은 업적을 자랑하거나 그걸 통해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야 말로 누구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가능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어떤 업적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오직 자신이 무엇을 이루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게 무엇인지만 중요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겠다는 믿음과 순종의 결단이 이처럼 그의 인생의 후반기를 보석처럼 빛나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우리의 숨을 거두어 가시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에 헌신할 수 있기 바랍니다.
얻을 땅이 많이 남아 있도다
여호수아13:1-7 / 323장(통355)
사람은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돌(화목)이 되기도 하고 보석(대들보)이 되기도 한다. 특히 인간이해에 있어 진화론과 창조론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은 긴 시간에 걸쳐 우연히 만들어졌기에 생존 자체가 목적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창조론에 의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주와 나를 특별한 목적을 갖고 만들었음을 알게 되어 내 자신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이며 왜 살아야 하는가를 알게 된다(고전10:31, 행20:24). 인간은 생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지나치는 미물도 나름 존재의 목적이 있는데, 하물며 천하 만물을 다스리는 인간은 어떻겠는가? 성경은 인간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었다고 말한다(시8:5). 만물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우리는 보통 존재가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이유가 담긴 존재다. 이런 존재가 단순히 생존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겠는가? 왜 많은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가?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실패해서... 나름 이유가 된다. 또 다른 이유는 생존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질문에 궁극적인 답을 주지 못하면 생존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성경은 이 질문에 답을 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계획(소원)이 있다고 말한다. 인생은 하나님의 소원에 따라 살 때 진정한 삶의 행복과 기쁨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소원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에 담겨있다(마6:9-13). ①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다. ②주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다. ③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끝없이 반복되는 역사의 한 부분에 우연히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을 갖고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시고 위하여 죽으시고 성령으로 이끌어주시는 존재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 오늘 이곳에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주님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뜻이다. 리빙스턴은 “사람은 자기 사명이 끝나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해야 할 일을 주셨다. ①세상에 하나님의 복이 되게 하려고 택한 이스라엘이 거주할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일이다(수1:2-4). ②하나님을 대적하는 가나안을 심판하는 일이다. ③그 땅을 분배하는 일이다. 여호수아는 이 사명을 완수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대로 그 온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의 지파의 구분에 따라 기업으로 주매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수11:23) 여호수아는 110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수24;29), 오늘까지 그의 삶은 우리의 믿음의 모델이 되고 있다. 여호수아를 통해 내 생의 존재 이유와 방법을 찾아보고자 한다.
1. 여호수아는 사명을 위해 오랜 세월 모세의 시종으로 훈련받았다.
여호수아는 처음부터 가나안 땅 정복이 자신이 감당할 사명인줄 몰랐다. 여호수아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모두 출애굽 뿐만 아니라 가나안 정복까지 모세가 지도자가 되어 할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모세를 포함해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 다 광야 연단이 40년씩이나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모세도 여호수아도 이스라엘 백성도 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뜻은 가나안 정복 사명을 모세에게 두지 않았다. 심지어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밟을 수 있는 기회도 주지 않고 단지 바라볼 수 있는 기회만 주었다(신32:52). 그리고 모세에게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라고 명하였다(민27:18-20). 가나안 정복 사명은 여호수아의 몫이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고 가나안 정복이라는 무거운 사명을 생각할 때 얼마나 마음이 두려웠겠는가? 이런 여호수아의 마음을 헤아리면 여호수아 1장이 새롭게 들려질 것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모세의 시종으로 최선을 다했다.모세의 시종으로 모세에게 충성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자신에게 막중한 사명이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감당했다.
여러분!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드리려고 한다. 총론에서는 다들 큰 차이가 없다.그러나 오늘 나는 이 일을 위해 무슨 준비를 하고 있는가를 물으면 잘 대답하지 못한다.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여호수아도 자신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가나안 땅을 정복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모세의 시종으로 하루하루 충성하다 보니까 어느날 엄청난 사명이 주어진 것이다. 오늘 내가 머문 장소, 감당하는 일, 함께하는 사람 가운데 내가 이루어야 할 사명을 위한 준비가 있다. 여호수아처럼 하루하루를 하나님을 의지하며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이다.
2.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대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는 7년여 동안의 목숨을 건 가나안 정복전쟁을 통해 가나안의 주도권을 차지했다(수1:23). 여호수아12장은 모세가 정복한 요단 동편의 2명의 왕과 여호수아가 정복한 요단 서편의 31명의 왕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수12:24). 여호수아는 가나안 남부 지역에서 16명의 왕들을 물리쳤고, 북부 지역에서는 15명의 왕들을 물리쳤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 아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정상에 선 훌륭한 지도자라고 해서 화려한 주단을 깔고 휘파람을 부르며 쉽게 그곳까지 이른 것은 아니다. 뼈를 깎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어떤 일도 쉬운 일은 없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온 힘을 기울여 도전하고 인내함으로 사명을 끝내 완수했다. 그 기쁨이 컸을 것이다.나에게도 이런 사명 완수의 기쁨과 감격이 있는가? 사명 감당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 발을 앞으로 내딛어 미지의 땅을 밟아야 한다(수1:3).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에서 앞으로 발을 내딛는 것은 임마누엘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믿고 의지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을 버리는 결단이 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다. 주어진 사명을 위해 집중하지 않고서는 감당할 수 없다. 오늘 나는 내게 주어진 사명을 위해 어떤 자세를 갖는가? 어떤 희생을 하는가? 얼마나 오래 견디었는가? 인생의 진정한 기쁨은 사명완수의 기쁨이다(딤후4:6-8).
3. 여호수아는 후대에 해야 할 일을 남겼다.
여호수아는 땅을 정복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도 많이 남았다(수13:1). 정복한 것을 오래 유지하는 것이 더 힘들고 어렵다. 여호수아는 정복으로 끝나지 않고 그 땅을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게 분배했다. 아직까지 정복하지 못한 땅도 포함해서 분배했다. 가나안 땅 분배의 이야기가 13장에서 22장까지 이어진다. 하나님의 일은 시대(時代)와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한 시대에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룰 수 없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계속 진행 중이다.
여러분!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그날을 바라보며 시공의 한계를 지닌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이 계속해서 진행 될 수 있도록 주위 사람과 후대에게 여호수아처럼 사명감을 갖게 하고 사명을 전수해주어야 한다. 자녀 사랑과 기도로 잘 길러야 한다. 그냥 잘 기르면 안되고 일생을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는 자녀로 길러야 한다. 우리 잠시 이 땅위에 있다가 하나님 앞에 가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룬 자에게는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딤후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