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은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의 날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 6,33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왜 내가 사는가? 종종 사는 이유와 길, 고 그 방향을 생각합니다. 과거 명망이 있고 사회와 교회에. 그리고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존경받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생각하면서 그분들의 자리. 길이 되고 희망이 되었던 그 머뭄과 삶을 생각합니다.
어릴 때 큰 바위를 보며 그 큰 바위의 얼굴을 생각하던 어린이가, 후에 많은 사람이 그글 큰 바위의 얼굴이라고 칭송했던 것도 생각이 납니다.
요즘 시대에 어렵고 힘들면서, 사회와 교회, 세계의 혼돈과 혼란함에서 곧 스승이 없거나, 지도자가 없다고 여겨지는 이 시기와 환경에 그들이 그립습니다. 그러나 그리워할 수만없고, 나부터 나의 일과 나의 나아감에서 선과 진리, 정의와 공정을 선의와 참됨을 위해서 걸어가야 함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공생활 이전부터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고 그 길을 묵상하였습니다. 공생활에서는 구체적으로 하느님 나라. 그 기쁜 소식을 위해서 그 길에 줄곧 매진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쁨의 그 길 외에는 가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을 선발하고, 치유하고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고, 참 사랑의 법이 아닌 율법, 그 규정을 넘어서 사랑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율법학자 바리사이와 상대하고 그들의 음모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헤로데, 빌라도 권세가들을 만나야 했고, 이들의 연합으로 종국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어떤 기능이나 일부 가치나 단순한 종교와 법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는 하느님의 보편적인 나라의 가치이라는 것. 더불어 이 가치는 모두에게 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법임을 알게 됩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권리와 존엄성을 잃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회복하고 되돌려 주는 것과 함께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의 생명의 길을 전달하는 구원의 열쇠라는 것임을 알려 줍니다.
우리가 신자 생활을 하면서 신앙의 길을 갈 때, 이 하느님 나라와 그 보편적 구원과 생명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단지 나만의 위한 신심이나 종교 생활, 규범과 준수의 차원을 넘어서 선인이나 악인, 의로운 이나 불의한 사람까지도 구원을 받고 생명을 얻어야 하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심판은 하느님의 것이고 그 심판은 하느님께서 판결하심을 믿은 믿음. 우리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살고, 정의와 공정을 선포하면서, 상대 죄인을 하느님의 심판의 이름으로 판단하는 것을 유보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의 궁극적 구원과 생명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느님 나라과 그 의로움의 길을 잊지 않습니다. 나 자신에게도 그 나라를 희망하고 걸어가도록 성찰과 함께 기도합니다. 다른 이들과의 만남과 대화에서도, 그 하느님 나라의 기쁨의 밭에서 이야기하고 그들을 인도합니다. 말과 만남과 관계가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면, 그 나라는 지극히 인간의 나라. 인간의 영예와 소유과 힘의 나라. 그 나라는 유한하고 결국은 사라지고 소멸되는 나라입니다.
토요일은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의 날. 그 복음의 기쁨을 '말씀'으로 전합니다. 오늘 새로운 마음을 갖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의 하느님의 나라의 길. 그 길을 위해서 회개와 회심으로 맞이하게 하소서. 하느님 나라의 길을 잊지 않게 하소서. 그 나라의 일을 위해서 구체적인 방향과 뜻과 방법을 마련하게 하소서.
이재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