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4-08 오전 9:56:01 [스포홀릭]
395개의 안타와 23개의 홈런 84개의 도루 그리고 0.244의 타율, 전성기 시절 이종범이 한 시즌 반만에 넘어설 수 있는 기록을 박준태는 프로 통산 성적으로 남겼다. 그것도 10년에 걸쳐서...
어느 팀이나 한 명씩은 반드시 있었을 것 같은 이런 선수가 뭐가 남달리 특별하다고 글을 쓰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건 단지 안타까움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은 없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시계의 바늘을 20여년 전으로 되돌려야 한다.
광주일고의 야구천재 박준태
1983년 고교야구의 최강의 팀은 광주일고였다. 지금도 야구 팬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강철,문희수가 있었으며 정회열과 이호성 그리고 박준태가 당시 광주일고의 멤버였다. 박준태는 강한 어깨를 가지고 있었으며 뛰어난 수비, 정확한 타격, 빠른발 그리고 무시못할 장타력까지 겸비한 이른바 '5툴 플레이어'였다.
그해 거의 모든 전국대회를 휩쓸다시피 했던 광주일고에서 박준태는 외야수와 내야수는 물론이거니와 때로는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으며 어느날은 포수로 안방을 지켰던 만능 '유틸리티맨'이었다.
프로입단 그리고 트레이드
고교시절 이미 다재다능한 재능을 인정 받았던 박준태는 대학을 졸업한 뒤 태평양 돌핀스의 지명을 받고 외야수로 프로야구에 첫 발을 디디게 된다. 박준태가 태평양에서의 3시즌 동안 109경기에 출장을 하면서 프로적응을 마쳐갈 즈음이던 92년 시즌 중반, 태평양과 LG 트윈스간의 전격적인 트레이드가 이루어진다. 바로 박준태, 전일수를 윤덕규와 맞바꾸는 2:1 트레이드가 성사된 것이다.
눈감고도 3할을 때린다는 강타자 윤덕규와 장래가 촉망되는 창창한 유망주 박준태를 바꾼 이 트레이드는 당시 양 팀 팬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트레이드 바로 다음날 스포츠 신문 1면을 장식했던 LG팬들의 속을 뒤집어 놓은 자극적인 문구...
[윤덕규 끝내기 안타!, 친정팀 LG에 복수!]
윤덕규가 유니폼을 갈아입은 다음날 바로 어제까지 자신의 소속팀이었던 LG를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때린후 헬맷을 벗어 LG 덕아웃으로 던져버린 것이다.
비록 당시 양 팀 팬들은 납득하지 못했지만 이 트레이드는 확실한 강타자가 필요했던 태평양과 젊고 빠른 외야수를 원했던 LG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윈윈 트레이드였다. 그리고 박준태에게는 야구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이기도 했다.
1993년 '4월의 전설'
93년 그해 4월 프로야구판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좀 과장된 표현을 하자면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젊은 선수 한명이 타석에 나왔다 하면 안타를 치고 루상에 나가면 무조건 도루를 하며 어깨가 강해서 외야에서 홈까지 거침없이 공을 뿌려대기 때문에 그가 외야에 있을땐 주자들이 홈으로 들어오길 꺼린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이 믿지못할 이야기는 4월 한달 내내 계속됐다. 그러다 말겠지 했던 사람들도 이제 원년 이후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4할 타자가 드디어 탄생할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기 시작했다. 그렇게 4월 한달 동안 프로야구판을 흔들어 놓았던 주인공은 바로 LG 트윈스의 젊은 외야수 박준태였다.
4월 한달 동안 박준태는 4할을 훌쩍 넘는 높은 타율을 기록하고 있었고 빠른발을 이용한 주루 플레이와 신기에 가까운 외야 수비까지 보여주며 팬들을 흥분 시켰다. 언론들은 박준태의 플레이를 주목했고 스포츠 신문 1면은 박준태의 할약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박준태에 대한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박준태가 어린시절 너무나 가난해서 밥보다 물만 먹고 학교를 다닌 날이 더 많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프로가 된 지금도 홀어머니를 모시며 여전히 힘들게 살고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사람들은 박준태를 애틋하게 바라보게 됐다. 이상훈 당시 한국야구위원회 총재까지 박준태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며 그를 격려했을 정도로 박준태는 모두가 주목하는 선수가 되었다.
그렇게 광란의 4월을 보내고 비록 그만큼은 아니었지만 5월... 6월 뜨거운 여름이 찾아오기 전까지 박준태는 열심히 달려줬다.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영광까지 누리게 된다. 박준태 야구인생 최고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약골' 박준태
그러나 올스타전이 끝나고 후기리그가 시작되면서 박준태는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했다. 마치 마라톤에서 반환점 까지만 선수들을 이끌고 전속력으로 달려 주겠노라 약속한 '페이스 메이커' 처럼 박준태는 LG를 반환점 까지만 이끌어준 뒤 서서히 멈춰갔다. 전반기에 4할을 넘나들며 8개의 홈런을 때려내는 멈추지 않을 것만 같은 질주를 했던 박준태에게 리그가 끝났을 때 남은 건 0.267라는 타율과 8개의 홈런이었다. 박준태에게는 풀시즌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체력이 없었다.
어린시절 지독한 가난은 박준태를 '약골'로 만들었다. 박준태는 100게임을 뛰어야하는 프로야구에 적응하지 못했고 결국 1998년 28경기만을 뛰고 그 힘들었던 레이스를 마치게 된다. 불과 31살의 나이에...
조금만 더 튼튼했더라면... 진한 아쉬움이 베어나는 은퇴였지만 누구보다 화려했던 '박준태의 4월'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해마다 4월이 되면 박준태를 떠올린다. 숨이 막혀버릴 듯 힘차게 힘차게 달려가던 그해 4월의 박준태를...
< 지난해 박준태 선수가 배명고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이들에게 혹독하게 체력 훈련을 시키는 박준태 감독의 얼굴이 떠올라 살며시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 글에는 '아마야구사랑' 시삽 최형석님이 쓰신 '선수 이력서 - 박준태'편과 제가 예전에 썼던 '박준태 이야기'의 내용이 인용돼 있습니다. >
이정래
첫댓글 강한 어깨와 성실한 플레이로 제가 좋아했던 선수지요. 17번을 달고 있었는데..많이 아쉽네요.
조은글 잘읽었습니다. 그립네요 박준태선수
펜스를 맞춘 상대타자들이 2루까지 못가는경우도 있었습니다 박준태선수가 잡아 2루에 던지니 순식간이더군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