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한국불교 심는
파리 사자후선원 우봉 선사
“날마다 행복하세요.”
“행복도 슬픔도 없습니다.”
“깨달아 성불 하십시오.”
“깨달음도 성불도 잊었습니다.”
방문자인 한국의 여연스님과 파리 사자후 선원의 우봉 젠 마스터(선사)가 헤어지며 나눈 인사치레는 이러했다. 당최 걸려들지 않자 장난끼 많은 여연스님(총무원 기획실장)이 파안의 웃음을 터뜨렸다, 우봉 선사의 파란 눈동자도 밝게 빛났다.
사자후 선원은 파리 1구역 리옹 거리의 주택가에 있다. 아파트를 개조해 만든 법당과 요사채 등이 함께 붙어 있다. 법당 앞에는 과꽃 등이 피어있는 작은 뜨락이 있고, 철제 대문에는 관음선종 협회라는 명판이 있다.
법당 안은 유럽의 티벳 타이 스리랑카 미얀마 사찰과는 사뭇 다르다. 정면엔 남방불교의 바싹 마른 부처님 상이 아니라, 근육과 살집이 적당히 붙은 한국식 불상이 자리잡고 있고, 좌우로 협시보살이 서 있다. 왼쪽 벽면엔 달마도가 걸려 있고, 불상과 마주하고 있는 입구 위엔 경허 만공 선사와 화계사 조실 숭산 스님의 스승 고암 스님의 초상화가 있다. 그 왼쪽에 숭산스님의 사진이 걸려 있다. 영낙없는 한국 사찰이다.
숭산 스님의 외국인 제자들 가운데 우봉 선사(본명 야콥 펄)와 그의 부인 그라지나 펄 지도법사가 이끄는 사자후 선원이다. 유럽 땅에 한국불교의 씨앗을 퍼뜨리고 있는 근거지다. 선원을 개설한 지 불과 9년 남짓 만에 동서유럽 10여개국에 관음선종 지회를 둘 정도로 포교에 열심이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은 물론 러시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체코 슬로베이아 등 동유럽 국가들도 포함돼 있다. 우봉 선사는 사자후 선원을 지키며 벽안의 수행 희망자들을 지도하고, 포교활동은 그라지나 지도법사가 주로 맡는다. 지난 19일 선원에는 우봉 선사만 있었고, 그라지나 법사는 스페인의 관음선종 센터를 방문하고 있었던 터였다.
|
△ 떠나가는 일행을 합장으로 배웅하는 우봉 선사. 뒤편으로 작은 정원과 법당의 작은 문이 보인다.
|
대학시절 승산 스님께 감화
첫 외국인 제자로‥
개설 9년만에 10여 나라 지회
예불·독경 우리말·우리식대로
“간화선, 간명하면서 깊이있어”
‘이뭣꼬’ 화두삼아 용맹정진
선원에서는 새벽 6시면 쇠종 소리가 낮게 깔린다. 깊은 침묵이 잠시 뒤따르고 이어 낭랑한 예불문 낭송 소리가 들려온다.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 견향...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서가모니불...’로 이어지는 예불문은 우리 말이다. 끝날 때 독경하는 반야심경 역시 우리 말이다. 예불의 내용과 차례는 우리의 절집과 다를 게 없다. 예불문을 우리 말과 불어로 두번 독경하는 게 다를 뿐이다. 예불이 끝나면 입정(참선)에 들어간다. 이렇게 참선을 겸한 예불은 하루 두 번씩 진행된다. 아침엔 보통 7명의 수행자가 참석한다.
선원은 이밖에 매달 1번씩 법회를 열며, 초심자를 위한 경전 강의 및 참선 지도도 한달에 한번씩 열린다. 매달 1박2일로 참선정진을 하며 7월초와 11월말 두 차례 1주일씩 결제를 한다. 이 기간 동안 참석자는 용맹정진을 한다. 결제 때는 프랑스의 관음선종 수행자와 유럽 각국의 지도법사들도 참석하기 때문에 1박2일 수행 때보다 참석자가 더 많아, 30여 명에 이르기도 한다고 한다.
우봉 선사는 지난 1972년 버클리 대학생 시절 버클리의 프로비덴스에서 포교를 하던 숭산 스님을 처음 만났다. 그는 이미 일본의 젠과 티벳불교를 공부하던 터였다. 숭산스님은 영어가 서툴렀다. 그러나 그 서투른 영어로도 명료하고도 간단하게 부처의 길을 제시했다. 말이 막히면 온 몸으로 그 뜻을 전했다. 그는 그런 스님의 열정과 명료함에 매료됐다. 그의 가르침은 수행의 단계를 복잡하게 설정한 티벳불교나, 엄숙주의로 흐르는 일본 불교와도 달랐다.
스님은 찾아오는 이에게 이렇게 묻는다. “어디서 왔는가.” “버클리에서 왔습니다.” “버클리 이전에는?” “…고향에서 왔습니다.” “그 전에는?” “부모님에게서 왔습니다.” “부모가 태어나기 전에는?” “…”. 여기서 대개의 방문자는 답을 잃는다. 우리의 선방 수좌들이 가장 많이 드는 화두 가운데 하나인 시심마(是심磨, 이뭣꼬) 화두다.
통상 달마도에는 글귀가 없다. 그러나 사자후선원 법당에 걸려있는 달마도에는 ’시심마’ 세 글자가 선명하다. 스님이 그에게 준 화두도 이뭣꼬이다. 그가 수행자들에게 내리는 화두 역시 이뭣꼬이다. 부모가 태어나기 전 너는 무엇이었는가?
그는 떠나면서 이렇게 인사했다. “돌아가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러자 숭산스님은 환하게 웃으며 ’어디로 가는가’라고 되물었다. 수많은 답이 떠올랐지만 그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숭산 스님의 회상에서 물러나온 그는 바로 다음 날 다시 스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숭산 스님의 첫 외국인 제자가 되었다.
“한국의 참선 수행(간화선)은 직선적이고 단순 명료합니다. 교학도 단순하지만 깊이가 있습니다. 번잡한 단계를 설정하거나 지나치게 교조적인 다른 불교 수행법과 달리, 배웠건 못 배웠건 가졌건 못 가졌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깨칠 수 있다는 점에서 수승합니다.” 우봉 선사의 간화선에 대한 평이다.
“그러나 이들 수행법은 방법만 다르지 방향은 같습니다. 수행은 사람을 변화시켜 줍니다. 참된 삶을 살게 하는 힘을 줍니다. 깨닫고 못 깨닫고는 다음 문제입니다.”
그는 1989년 결혼했다. 부인은 폴란드계 미국인으로 보스톤 대학 출신이며, 역시 숭산 스님의 제자다. 숭산 스님은 이들의 결혼을 선선히 허락했다. 주례까지 맡았다. 재가불자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서구의 현실과 이들의 신심을 충분히 감안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결혼 뒤 이들은 1995년 파리로 건너와 관음선종 센터를 열고, 2년 뒤 사자후선원을 개원했다.
”이제라도 출가자로 살아갈 생각은 없습니까?“ 슬며시 발을 걸었다.
“이젠 스님이 될 자격도 없는데요.” 조계종에서 출가 연령에 상한선을 둔 것을 아는가 보다. 아이처럼 웃던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같이 살아도 혼자 사는 거랑 다를 게 없어요. 모든 게 한 몸인데요.” 법당 한 켠에는 붓글씨 ‘세계일화(世界一花)’ 액자가 걸려있다.
우봉 선사는 홍콩에서 발행부수가 가장 많은 불교 주간지 <온난인간> 최근호의 표지이야기로 실렸다.
첫댓글 올리신 글 감사드립니다 .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