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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9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루카 13,18-21
하느님 나라: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 (시 46,1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습니다. 잘 자라서 새들이 깃들이게 하고 잘 부풀게 해서
부드러운 빵이 되게 합니다.
이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말씀, 혹은 성체라 한다면 그 씨와 누룩이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작용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람은 휴식 같은 친구, 군고구마처럼 맛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행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 모습을 닮아 이웃을 행복하게 해 주며 자신도 행복하게 되어있습니다.
며칠 전에 20년 전 제가 보좌를 할 때 중고등부 교감 선생님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에게 왔을 때 병자성사도 주고 기도도 해 주었지만, 그 이후엔 연락을 못 했습니다.
마지막 때도 바빠서 임종 직전에도 볼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나니 그동안 전화도 한 통화 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되었습니다.
정말 한 가지 확실한 건 나 때문에 누군가 고통스러워지면 나도 고통스럽고 나 때문에
누군가 행복해지면 나도 행복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려면 그게 될까요? 만약 그렇다면 겨자씨가 뿌려질 필요가 없고 누룩이 넣어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34회에는 공부하기 싫은 11살 아이에게 계속 공부를 강요하며 아이를 못살게 구는 엄마가 나옵니다.
엄마는 아이를 위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4살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엄마의 뜻이 살아있다면 자녀를 쉬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면 자기 뜻을 누군가에게 강요하면서 그것이 상대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대신해 누군가에게 휴식이 되고 양식이 되게 해 드려야 합니다.
바쁘다, 바쁘다만 하고 살다가 아플 때 연락도 못 하고 그냥 떠나보낸 나에게 다시 해 주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 46,11: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이희윤 마리 스텔라 수녀님의 서울대교구 주보에 게재한 글을 그대로 올립니다.
어느 날 저에게 예비자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던 자매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반갑게 전화를 받았는데…. 자매는 남편과 한 달 전에 이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황스러워 “이혼을 결정하기 전에 나와 좀 만나서 이야기 좀 하지…” 하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때 그 자매의 대답이 “수녀님 늘 바쁘시잖아요. 안 그래도 바쁘신데 저희 일로 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머리를 한 대 쾅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바빠도 난 너희가 더 중요하고, 너희가 원하면 언제든지 시간을 낼 수 있었는데…”
하고 대답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던 것입니다.
“바빠… 바빠서…” 하면서 늘 동동거리는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신호등의 초록 불빛이 멀리서 보이면 숨이 차도록 뛰어가서 건너고, 전철이 출발할까 봐 계단을 허둥지둥 오르내리고, 빠른 환승 게이트가 어디인가 찾아보고.
사실은 그렇게 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처럼 ‘바쁘게 사는 일’에 길들어있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바빠 보이는 저의 모습이 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을 주저하게 하고야 말았으니 이 바쁜 마음과 몸 또한 죄악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했던 연피정이 생각납니다.
지도 신부님께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수녀원 밖으로 나가서 모르는 사람들도 만나보고
사람들 사는 모습도 보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7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저는 천천히 걸으면서 하늘도 바라보고, 하늘 위에 흐르는 구름도 가만히 보았습니다.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아주머니를 따라가서 짐을 함께 들어주기도 하였습니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오는 작은 꽃을 보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추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 곁을 스쳐 가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멈춰 서서 그분들에게 관심을 보여주면 그분들은 고마워도 하고 행복해하기도
하였습니다.
평상시와 같았다면 무심코 지나갔을 많은 것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어루만지는 저 자신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내가 멈춘 그 자리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느꼈습니다.
어떤 분이 “수녀님 바쁘지 않으세요?”라고 질문했을 때 제 대답은 “저요… 있는 거라고는 시간밖에 없습니다”였습니다.
시간과 바쁨으로부터의 해방!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대림 시기를 지내면서 제게 가만히 속삭이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4년의 일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 날, 독일군과 영국군이 서부 전선의 참호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독일군은 '고요한 밤'(Stille Nacht)을 부르기 시작했고, 곧 영국군도 자신들만의 캐롤을 부르며 참호에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에는 양측 군인들이 참호에서 나와 '무인의 땅'에 모여 음식, 담배, 기념품 등 작은 선물을 교환했습니다.
그들은 전사한 군인들을 위한 합동 장례식까지 거행했으며, 인류애를 공유하는 이 순간에 양측은 서로를 존중했습니다.
1914년의 크리스마스 휴전은 희망과 선의의 강력한 상징이 되었으며, 가장 암울한 시기에도
공유된 인간의 가치와 연결이 갈등을 초월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수많은 책, 영화, 노래를 통해 기념되며 지금, 이 순간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제목의 책을 쓴 스님도 있습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게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휴식도 되어주고 빵도 되어줍니다.
저는 심지어 기도 시간에도 머리로는 강론 준비로 분주합니다.
그러나 잠시 멈추고 하느님께서 모든 일을 하심을 알아들읍시다.
그제야 비로소 휴식 같은 생명의 빵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만히 있을 때 저절로 자라나고 저절로 부풀게 하시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29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나이를 점점 먹어갈수록 세례를 받았다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 하느님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 곡선을 한번 보십시오.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리다가 마침내 정상에 오릅니다.
인생의 절정기인 그 순간, 삶은 철저하게도 호의적입니다.
만사가 OK입니다.
무얼 하든 다 잘 풀리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다 내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빛나는 순간은 너무도 잠시입니다.
요즘 우리 눈을 즐겁게 하는 아름다운 단풍잎처럼 찬란하던 인생은 순식간에 퇴색됩니다.
어느새 급격한 내리막길에 접어듭니다.
더 이상 사람들의 환호도 박수갈채도 없습니다.
남아있는 것이라곤 단맛이 다 빠져나가버린 인생의 쓴맛, 그리고 주어진 모진 목숨 다하는 순간까지 견뎌내는 일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은 철저하게도 다릅니다.
물론 생로병사의 사슬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누구나 거쳐야 할 육체적 쇠락 과정에서 예외는 없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쇠락이 곧 영혼과 정신의 쇠락에 직결되지 않습니다.
육체는 시들고 약해지지만 영혼과 정신은 더 맑아지고, 더 순수해지고, 더 찬란하게 빛날 수 있습니다.
은혜롭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이 들수록 더 행복하고, 더 충만하고, 더 열렬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더 기쁘고, 더 희망하며, 더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눈에 보이는 것에 목숨을 걸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에 모든 것을 걸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에만 모든 것을 거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진정한> 희망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건너가고 있는 ‘인생’이란 이 강, 때로 거센 물살, 큰 암초에 힘겹기도 하겠지만 꾸준히 노를 저어 건너가다 보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피안의 언덕에 가닿을 것입니다.
그때 맞이하게 될 영광, 기쁨, 행복을 생각한다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하는 일입니다.
우리 안에, 우리 인생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뿌려진 겨자씨 한 알, 소중히 여기며 열심히 가꾸어나갈 때 언젠가 큰 나무로 성장할 것이라는 진리를 확신하는 일입니다.
비록 오늘 우리 사랑과 정성이 너무나 부족하고 보잘 것 없다할지라도 하느님의 크신 자비, 하느님 나라의 가능성을 믿는 일입니다.
여기가 세상의 끝이 아니라는 것, 이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것,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요.
이 세상 너머에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하느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얼마나 큰 은총인지 모릅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견디는 일입니다.
인생의 쓴맛도 견디고, 때로 참혹함도 견디고...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희망하는 일입니다.
고통 앞에서도 희망하고, 슬픔 앞에서도 희망하고, 나 자신의 나약함과 무력함 앞에서도 희망하고...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강론>
(2024. 10. 29. 화)(루카 13,18-21)
<바로 ‘내가’ 겨자씨이고 누룩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루카 13,18-21)”
1) ‘겨자씨의 비유’에서 연상되는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1-3)”
인간의 눈으로 보면, 아브라함은 보잘것없는 떠돌이 유목민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를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또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아브라함은 모든 신앙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작은 겨자씨 하나가 ‘큰 나무’로 자란 것입니다.
2) 신약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연상됩니다.
“주님께서 그에게(‘하나니아스’에게) 이르셨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사도 9,15-16)”
이 말씀에서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를 “내가 선택한 겨자씨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열두 사도에 속한 제자도 아니고,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박해자였던 바오로 사도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꾼이 된 일은, 글자 그대로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란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 자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갈라 1,15-16ㄱ).”
이 말을 표현되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하느님께서는 바오로 사도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를 뽑으셨고, 그의 영혼 안에 하느님 나라의 겨자씨를 심으셨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씨에서 싹이 자라기 시작한 때는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예수님을 만났을 때인데, 그때까지 바오로 사도 자신도 자기 안에 무슨 씨가 심어져서 자라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지만,
하느님에 대한 그의 열성을 생각하면, 그는 이미 사도로 일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신앙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부르시기 전에 이미 그 안에 겨자씨를 심어 놓으셨고, 아브라함은 아직 하느님을 모르던 때에도 하느님을 찾으면서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3) 사실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한 겨자씨로 뽑으신 사람들입니다.
겨자씨로 뽑힌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신앙인은 아브라함과 바오로 사도처럼 세례를 받기 전에 이미 하느님께서 각자의 영혼에 하느님 나라의 겨자씨를 심으신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종교와 신앙을 갖고 싶다고 소망할 때,
또는 신앙인이 되기를 희망할 때, 그때가 바로
숨어 있던 겨자씨에서 싹이 자라기 시작할 때입니다.
우리는 “내가 바로 겨자씨다.”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중에 어떤 나무로 자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 ‘큰 나무’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앙여정의 끝은 인간의 눈으로 판단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으로 판단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자신 안에 심어진 겨자씨를 잘 가꾸는 일이고, 자신이 받은 겨자씨라는 사명을 잘 수행하는 일입니다.
4) ‘누룩의 비유’에서는 초대교회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6-47).”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라는 말은,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크게 감화시켰고, 변화시켰음을 나타냅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선한 누룩’의 영향력입니다.
<우리는 ‘악한 누룩’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태 16,6).”
만일에 교회가, 또는 신앙인이 세상을 복음화 하기는커녕 세속화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선한 누룩’의 힘을 버리고,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따라가는 일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버리고 멸망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