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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3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마태오 5,20ㄴ-26
기도하고 예물을 바쳐도 정말 아무 쓸모 없는 경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의로움’입니다.
의로움은 타인 앞에 나타날 수 있는 자격입니다.
빚이 없다란 뜻입니다.
내가 부모 때문에 의롭게 되었는데, 형제를 괴롭히고 부모에게 찾아와서 예물을 바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타인에게 원망을 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책 [앵무새 죽이기]는 1930년대 미국 남부의 작은 마을 메이콤을 배경으로, 인종차별과 사회적 불의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주인공은 어린 소녀 스카웃 핀치와 그녀의 오빠 젬 핀치이며, 그들의 아버지 아티커스 핀치는 마을의 변호사입니다.
스카웃과 젬은 동네에서 이상하다고 소문난 부 래들리의 집 앞에서 노는 걸 좋아합니다.
부 래들리는 일체 마을 사람들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것에 고마워 그들이 노는 나무 앞에 간식을 놓아두곤 하였습니다.
그들의 아버지 아티커스는 도덕적 용기와 정의를 중요시하는 인물로, 아이들에게 항상 올바른 길을
가르치고자 노력합니다.
아티커스는 흑인 남성 톰 로빈슨의 변호를 맡으면서 인종차별이 심한 메이콤 마을에서 용기를 보여줍니다.
톰은 백인 여자 메엘라를 강간하려고 했다는 것으로 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메일라가 톰을 끌어들인 것이고 그녀의 아버지 밥이 그것을 보고는 메엘라를 구타하고 톰을 강간범으로 몰아버린 것입니다.
아티커스는 스카웃과 젬에게 항상 타인을 이해하고, 편견을 갖지 말며,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주변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로부터 아버지가 톰 로빈슨을 변호한다는 이유로 놀림과 비난을 받습니다.
젬은 이러한 상황에서 화가 나고, 때로는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티커스는 그들에게 인내와 용서를 가르치며, 타인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 법을 알려줍니다.
아티커스는 젬에게 총을 선물해 주면서 다른 새는 다 잡아도 되지만, 앵무새는 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앵무새는 아티커스가 변호하는 죄 없는 톰과 같은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줄 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무엇을 따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지.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
사실 밥이 못된 인간이고 자기 딸의 잘못을 톰에게 뒤집어씌운 것을 밝혀내기는 했지만, 배심원들이 다 백인이었기 때문에 톰은 유죄 판결을 받습니다.
그런데도 밥은 여전히 판사의 집을 습격하고 애티커스의 자녀들을 위협합니다.
짐도 밥에게 팔이 부러지는 공격을 당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집 밖으로 안 나오던 부 래들리가 나와 밥과 싸워주었고 밥은 칼에 찔려 사망합니다.
다행히 보안관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그냥 자기 혼자 넘어져 그렇게 된 것으로 목격 증언해 주겠다고 하고 마무리됩니다.
[앵무새 죽이기]는 아버지 아티커스 핀치의 도덕적 가르침과 용기를 통해 스카웃과 젬이 세상의 편견과 불의를 극복하고, 타인과 화해하며 조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역할은 이 책에서 형제간의 관계 회복과 성장을 끌어내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정말 주님 앞에 예물을 들고나와도 소용없는 사람은 타인에게 원망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앵무새를 죽인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비유가 나옵니다.
그런데 [하.사.시.]에는 이것이 조금 더 자세하게 나옵니다.
바리사이는 돈을 받아내기 위해 가난한 이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 존재였고, 세리는 죄인이기는 하였지만 가난한 이들을 위해 바리사이에게 자기가 할 수 있는 대로 돈을 대신 갚아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사이는 많은 돈을 바쳤고 세리는 감히 나서지도 못했지만, 누가 의롭게 되어 돌아갔는지는 우리가 잘 압니다.
우리가 기도나 미사를 하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양심 성찰이 이것입니다.
‘나 때문에 마음이 상한 사람은 없는가?’ 앵무새를 살리려고 목숨을 거는 아버지에게 앵무새를 죽이고 와서 죽은 앵무새 고기를 바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13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복음: 마태 5,20-26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한지고!
원선오 신부님께서는 한때 한국 살레시오회의 전설이셨는데, 이제는 아프리카의 살레시안들의
존경받는 큰 스승으로 자리매김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 한국에서 사목하실 때, 한국인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많은 성가들을 직접 작사작곡하셨습니다.
그중에 한 곡이 ‘좋기도 좋을시고’입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한지고, 형제들이 오순도순 한데 모여 사는 것. 지금도 형제들이나 가족 구성원들이 오랜만에 만나는 친교의 날이나 명절에 자주 부르곤 합니다.
한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당시 그 공동체에는 이런저런 불미스러운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해 분위기가 무척 썰렁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성가 선창을 담당하는 형제가 공동체 미사 마침 성가로 ‘좋기도 좋을시고’를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찹찹하고 심각한데, 공동체 분위기가 전혀 전혀 아기자기하거나 오순도순하지 않은데, 그래서 얼굴이 다들 심각한 표정인데, 입으로는 좋기도 좋을시고, 하고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너무나 어색하고 웃겼습니다.
외국 생활을 할 때 한동안 한 작은 수도 공동체 새벽 미사를 다녔습니다.
미사를 마치면 작은 방에 제 식사를 차려주셔서 식사를 하곤 했습니다.
제가 빵을 먹는 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식당에서는 미사를 마친 수도자들이 식사를 했는데, 뭐가 그리 꼬였는지, 매일같이 언성을 높여 다투는 것이었습니다.
매일 같은 광경이 반복되니, 여기 매일 오다가는 나까지 전염되겠다는 생각에 미사 나가는 것을 그만 두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거룩한 얼굴로 미사를 봉헌하던 사람들이 그렇게 목숨 걸고 다투니, 속으로 웃기도 많이 했습니다.
우리가 매일 하느님께 올리는 제사와 일상생활 속의 형제애는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형제적 사랑과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드리는 예물은 하느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거금의 봉헌금을 하느님 대전에 바친다 할지라도 이웃과 불목하고 다투고 있다면 그 예물 봉헌 역시 합당하지 않습니다.
다투고, 수시로 불목하고, 끊임없이 서로를 헐뜯는데 혈안이 된 공동체는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데 합당한 공동체가 절대 아닙니다.
그들이 하느님께 올리는 제사는 울리는 징처럼 공허하고 무의미한 예식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느님을 향해 바치는 예배와 봉헌이 보다 가치 있고 합당한 것이 되기를 원한다면 필요한 노력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너무나 간단한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화해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 순간 마음을 비우는 일입니다.
또 다시 서로에게 기회를 주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백번이고 천 번이고 언제나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밥 먹듯이 이웃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6월13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복음: 마태 5,20-26: 살인하지 말라
예수님의 말씀은 살인뿐 아니라 이웃에게 분노하는 것까지 금하신다. 즉 다른 사람에 대하여 적대시하거나 분노를 품어서도 안 된다고 하신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분노는 살인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을 해하는 것은 분노에서 생긴다. 이유 없이 성내는 사람은 누구든지 생각으로 사람을 해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22절) 하셨다.
자기 형제에게 “바보”, “멍청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혀를 잘 길들여야 한다. 사람의 혀를 아무도 길들일 수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길들여 주실 하느님께로 피신해야 한다. 말이나 소, 낙타, 코끼리, 사자를 길들이려면 사람이 필요하다. 이처럼 인간이 길들려면 하느님이 필요하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모든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분노를 버리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형제들 사이의 사랑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알려준다. 그러기에 예물을 바치려 할 때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그와 화해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의 예물을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이유는 그가 아벨을 사랑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미워했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할 때”(23절) 라는 말은 주님께서 마땅히 당신이 받으셔야 할 영광은 제쳐 놓으시고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이것은 형제와 화해와 사랑이 가장 좋은 예물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너를 고소한 자와 타협하여라.”(25절) 우리를 고소하는 자는 육체의 욕망과 악덕에 맞서시는 성령이시다. 바오로 사도는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갈라 5,17) 그러므로 우리의 현세의 삶이라는 여행에서 그분과 함께 늘 살아가고 모든 일에서 그분을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분과의 영원한 친교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언제나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며,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웃과의 불목은 그 이웃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 때문에 그를 창조하신 하느님과도 불목한 것이기 때문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강론>
(2024. 6. 13. 목)(마태 5,20ㄴ-26)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0-24).”
1) 앞의 17절에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마태 5,17).
‘율법의 완성’은 ‘율법 실천의 완성’을 뜻합니다.
그리고 율법 실천을 완성한다는 말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살인을 하지 않더라도 형제에게 화를 내거나 형제를 모독하는 일도 십계명 제5계명을 위반하는 일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을 죽이지 마라.” 라는 계명을 폐지하신 일이 아니라, 그 계명을 완전하게 지키라는, 즉 계명 실천을
완성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살인’은 분명히 ‘큰 죄’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더라도 마음속으로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만큼이나 ‘큰 죄’ 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그 미움을 없애는 것까지 해야
계명 실천이 완성됩니다.
만일에 자기 마음속에 있는 분노와 증오심을 감추고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나는 십계명 제5계명을 잘 지킨다.” 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자의 위선’입니다.
<마음속에 분노와 증오심을 품고 있는 것도 죄이고, ‘위선’도 죄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사실 그 마음 자체가 죄입니다.
‘죄의 뿌리’가 아니라, 그냥 죄입니다.>
뒤의 6장에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마태 6,4.6.18).
‘숨은 일’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 모르게 한 일을
뜻하기도 하고, ‘마음속’을 뜻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동도 보시지만, 우리의 마음속을 먼저 보십니다.
그러니 제대로 회개하려면 우선 먼저 마음속부터 깨끗이 청소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행복 선언’에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5,8).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마음이 깨끗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느님을 볼 수 없다,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경고 말씀이 됩니다.
2) 20절의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살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기준으로 삼아서 그들보다 더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처럼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들 같은 위선자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거룩하고 경건하고 깨끗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셨고, 그래서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7-28).” 라고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3) 23절의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이라는 말씀은, 형제가 나에게 화가 나 있고, 나를 미워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말씀입니다.
<내가 형제에게 화를 내는 것도 죄이고, 그 형제가 분노와 증오심을 품게 만드는 것도 죄입니다.>
(1) 내가 뭔가 잘못한 일이 있어서 그 형제가 몹시 화가 나 있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남을 용서하는 일만 생각할 때가 많은데, 살다보면 남에게 ‘용서를 청해야 할’ 일도 생깁니다.
그런 경우에, 형제와 화해하려면 내가 먼저 가서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형제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2) 내가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그 형제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오해를 풀어 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도, 또 화해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도 ‘내가 먼저’ 해야 합니다.
그렇게 노력해도 형제가 화해하기를 거부한다면,
역시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2베드 3,9).>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라는 말씀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언제나 항상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