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에서 용지호수를 보다/
글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은 제목이지요.
나는 <월든>을 지리적으로 찾아보기로 했어요.
미국 동북부 메샤추세스 주에 위치하며 뉴욕, 보스톤, 하버드 대학교와 멀지 않은 거리예요.
이 도시들은 농업보다는 금융과 무역이 앞선 도시예요.
지금 월든에는 소로우의 명성으로 자연의 소중함으로 많은 관광객이 드나들고 있어요.
제1부 똘기를 가져라
소로우는 똘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기존 사회가 가진 삶의 형태나 양식을 말하는 소유의 삶(having mode)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삶(being mode)을 살다 간 사람이지요.
햄릿의 명대사 중 존재를 묻는 말이 생각나네요. to be or not to be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는 말일거예요. 자신의 존재를 어디에 놓을 지에 대해 절규하고 울부짖는 모습 말이에요
구체적으로 들어가 이야기 해 볼까 해요. 인간답게 혹은 생명답게 산다는 것은 아래의 세 가지로 이야기해도 되겠지요
그 답은 삶에 대한 진지함, 인간에 대한 측은함, 똘기를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진지함은 진실에 대한 지향일 테고 측은함은 윤리적 책임감일 테고 똘기는 예술적인 측면을 말하는 장난기일 테지요. 똘기는 삶에 대한 모험으로 이 세상과 바로 직면하는 것이지요.
소로우처럼 자연 속으로 싸돌아다녀 자연을 잘 알고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을 말하지요. 사회의 틀에 대해서 한번 어깃장을 내는 것이라고, 장난기를 부리는 거라고 말 할 수 있지요. 여기서 보들레르의 시가 생각나요.
취하라/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사랑으로 구름으로 덕으로
네가 원하는 어떤 것이든 좋다
다만 끊임없이 취하라
취하라,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항상 취해있으라
술이건 시건 미덕이건 당신 뜻대로
항상 취하라
그것보다 우리에게 더 절실한 것은 없다
시간이 네 어깨를 짓누르고
네가 이 지상에 꼬꾸라지는 것을 느끼지
않으려거든
끊임없이 취하라
술이건, 시이건, 그대가 좋아하는 것에
보들레르가 말하고자 하는 뜻이 전해져 오는지요.
이렇게 말해도 될 것 같군요. 끊임없이 대자연에 취하라. 시간을 잊어버리고 취하라. 당신 뜻에 취하라.
취하면 고독하지 않아요.
제 2부 용지호수
소로우가 살았던 시대는 농업과 수공업에서 벗어나 공업 기계를 사용하여 생산의 양에 주목하는 시대였어요.
여러분,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영화 아시지요. 그 영화의 첫 장면이 톱니바퀴 기계와 시계가 걸려있는 장면이예요.
시계는 곧 생산성을 재촉하는 것이며 톱니바퀴는 농업과 수공업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지요. 이런 시대에 소로우가 자연으로 더 달려나갔다는 것이 한 편 자연스럽게 여겨져요.
여기서 소로우가 거닐었던 호수를 소로우의 글로써 한 번 보기로 해요.
시 한 줄을 장식하는 것이
나의 꿈은 아니다.
내가 월든 호수에 사는 것보다
신과 천국에 더 가까이 갈 수는 없다.
나는 나의 호수의 돌 깔린 기슭이며
그 위를 스쳐가는 산들바람이다.
내 손바닥에는
호수의 물과 모래가 담겨 있으며,
호수의 가장 깊은 곳은
내 생각 드높은 곳에 떠 있다.
자연이 소로우를 구제하고 있군요. 아름다움이 사람을 구제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갈등 없이 자기 안의 조화와 함께 있는 소로우가 눈에 보여요.
자연에서 소로우는 자기 본래의 모습을 발견해요. 심지어 소로우는 우주를 창조하신 분과 함께 거닐어보고 싶다고 말하고 있군요.
대단해요.
제가 사는 동네에는 용지호수가 있어요
용지호수는 경상남도 도청 창원에 있어요.
호수 옆에는 작은 숲도 있지요. 호수에는 늘 사람들이 걷고 있어요. 소주병과 낡은 큰 가방을 앞에 놓고 세상에 욕을 하며 소리를 내는 아저씨, 벤취에서 하룻밤을 잤을 뚱뚱한 늙은 여자, 온몸을 여러 겹 감싸 입은 아저씨, 짧은 치마와 칼 주름 남자의 예의바른 걸음걸이, 무슨 바가지 선물이라도 선착순으로 끊어놓은 듯한 어머니들의 걸음걸이, 아주 느리게 걷는 나이든 사람, 탄력이 통통 튀는 앳된 총각과 복숭아 빛 아가씨들 사이로 나도 용지호수를 걸어요. 호수에는 주름 잡힌 사람들과 빤짝이는 아이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걷지만 정작 호수는 늘 주름 없이 수평을 유지하며 이 모든 사람들을 다 받아주고 있지요 .어제 있었던 주름진 이야기를 받아주는 것은 호수인지 곁의 사람인지 자신 스스로인지 궁금해지기도 해요. 어떻든 많은 사람들은 호수에서 자신의 주름을 펼쳐가며 걷고 있지요.
사람들이 호수를 찾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어요. 여러분은 무어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그 이유가 바로 물이라고 생각해요. 물의 특성을 말하지요. 물에서 생명이 나오지요. 생명이 시작되는 근원적인 조건 말이예요. 물은 생명 유지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나의 근원을 물에서 묻고 인생의 답을 물에서 찾을 수 있지요. 또 물은 이 편과 저 편을 이어주면서 동시에 이 쪽과 저 쪽의 경계를 지으며 갈라놓기도 해요. 물론 갈라놓는 주체는 둑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물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해 가며 거기서 조차도 수평을 이루려는 물의 특성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보다 더 위대한 정신을 어디서 찾겠어요.
지금 용지호수의 넓은 수면 위로 바람이 지나가고 도시의 불빛이 수면 위에 흔들리고 있어요. 저 높은 빌딩의 높은 층에서는 째즈 리듬에 젖은 자주색 와인 잔을 든 남녀가 밀밀히 이 밤을 나누고 있겠지요
월든 호수에서는 호수의 얼음이 우는 소리, 봄이 새록새록 떨며 대지 바깥으로 나오는 소리, 올빼미의 외로우면서도 구성진 울음소리, 기러기 한 마리의 커다란 울음소리, 붉은 다람쥐들의 까부는 소리, 달 밝은 밤 여우들의 악마처럼 흉하게 짖는 소리들이 있어요.
호수에도 밤은 찾아오지요. 월든 호수의 밤과 용지호수의 밤을 한 번 상상해보기로 해요.
월든 호수의 밤을 자연이 만든 밤이라 한다면 용지호수는 도시가 만든 밤이겠지요.
용지호수는 밤에 더 화려한 모습으로 변하지요. 그 곳에는 오래 된 아비뉴 호텔이 있고 요즘 생긴 딘 호텔이 있고, 주유소 자리는 스타벅스의 커피 가게로 변신했어요. 파리바게트 빵집에 이어 또 빵집과 커피숍, 전통 중국집, 노래방, 석쇠에 구운 돼지고기 식당 그리고 가로수 길에 줄지어 선 커피 파는 가게들이 우리들 마음을 알아차린 듯 실내 공간을 자주 바꾸기도 해요.
어느 날 호수 주변에 있는 주점 가야집에서 막걸리 한 잔을 마셨어요. 나의 20대를 다시 불러들인 것이지요. 나는 술은 전혀 마시지 못하지만 그 가야집에서는 딱 막걸리 한 두잔을 마셨어요. 얼굴과 온 몸이 붉은색으로 변해야 막걸리 흥이 나지요. 그 날 가야집 막걸리 주점의 시멘트 울타리가 앞으로 나왔다 뒤로 나갔다 흥흥거리며 시끄러웠지요. 사람들의 얼굴이 예뻐 보여요. 불쌍해 보이기도 하구요. 다시 나에 대한 연민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소로우는 뭐라고 할까요. 이런 도시 속의 호수를 거니는 나를 보며 뭐라고 말할까요. 아마 이렇게 말할 것 같아요. 그래도 호수가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야. 자네 마음 속의 자연만은 잃지 말게.
용지호수는 진정한 자연물인가. 여러분도 잘 모르겠지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호수에는 바람이 흐르고 사람들이 흐르며 건너편은 희미하여 잘 보이지 않지만 호수를 걸으면서 나는 나를 지지하기도 하고 내일을 향한 더 선한 가치를 찾기도 하지요.
본포 마을 깊은 곳에 사는 창숙님이 생각나요.
그 곳에 있는 감나무는 잎과 열매를 다 내어주고 이 계절을 견뎌내야 할 시간들이 남아 있겠지요.
오늘 밤 용지호수 잔디밭에서 하늘에 박힌 별을 보았지요. 저 빛나는 별들을 누가 보았을까요. 밤하늘의 저 별을 함께 보았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 마음이 흥건하게 따뜻해져요. 사람들이 사랑스러워요
제 3부 당신 스스로 걸어라
이제 월든이라는 기차를 내릴 때가 되었어요. 월든에서 만난 소로우를 카프카의
<인디언이 되려는 소망>으로 대신해보려 해요.
인디언이 되었으면! 질주하는 말 잔등에 잽싸게 올라타, 비스듬히 공기를 가르며, 진동하는 대지 위에서 거듭거듭 짧게 전율해 봤으면, 마침내 박차를 내던질 때까지, 실은 박차가 없었으니까, 마침내 고삐를 집어던질 때까지, 실은 고삐가 없었으니까, 그리하여 눈앞에 보이는 땅이라곤 매끈하게 풀이 깍인 광야뿐일 때까지, 이미 말모가지도 말대가리도 없이.
읽어보면 굉장히 호흡이 빨라져요. 대지를 달리는 기쁨을 노래한 것이지요. 그 대지를 달리는 데 필요한 것은 나의 의지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예요. 박차도 고삐도 필요 없어요. 결코 말(馬)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요.
얼마 전 어떤 사람이 열여섯 가지의 질문으로 논문을 대신한 경우가 있어요
매우 인상적이고 형식을 파괴한 논문이라 주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어요. 좋은 평가가 따르기도 했구요.
저도 여기서 질문을 몇 가지 던짐으로써 이 글을 마무리 하려고 해요.
제 자신의 단선적인 의견보다는 여러분 스스로의 생각을 끄집어 내는 게 목적이예요
모든 이야기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이지요.
여기서는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어요
1. 내가 사는 삶은 몇 인칭인가요. 일인칭이라고 생각할 수 있나요
2. 우리가 사는 삶은 과거의 방식대로 살면 되는 것일까요
3. 자신에게 가장 위대한 탐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4. 나는 무엇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진정 나일 수 있을까요
5. 소로우는 전적으로 자기 안의 자신과 만나면서 살았지요. 당신에게도 가능한가요
* <월든>을 읽고 나서 용지호수에 대해 쓴 부분만 올려봅니다
첫댓글 잘 머물다 갑니다!
새해에는 건강과 함께
좋은 글 많이 올려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