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위트너(Franz Jüttner), <백설공주(Schneewittchen)>마법의 거울에 질문을 하는 왕비.
왕비의 유일한 즐거움은 자기 방에 혼자 틀어박혀 시집 올 때 가져온 마법의 거울을 꺼내어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니?” “그건 왕비님 당신이에요.”……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왕비의 미모에도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왕은 그런 왕비에게 조금씩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왕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어느 방 앞에 멈추었다……. 왕비는 열쇠 구멍을 통해 실내를 들여다보았다……. 침대 옆에 서 있던 왕이 소녀의 몸을 끌어안더니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남편이 바람피우는 모습을 본 아내의 슬픔……. 그러나 더 비극적인 것은 남편의 바람 상대가 두 사람 사이의 친딸이라는 점이었다.
- 키류 마사오(桐生 操),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중
이렇게 아름다운 백설공주와 왕자가 원래는 잔인하고 외설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니. 그림 형제의 최초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출처: 네이버 영화>
이 이야기, 왠지 익숙하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당신은 전체적으로 매우 다르다고 느낄 것이고 심지어는 읽기가 불편했을 수도 있다. 위의 내용은 키류 미사오(桐生 操)의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本當は恐ろしいグリム童話)]의 <백설공주> 편이다. 이 책에서 백설공주는 아버지인 왕과 근친상간을 일삼고, 숲 속에 버려진 뒤에는 일곱 난장이들과도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또한 공주를 괴롭히고 죽이려는 왕비는 친어머니로, 백설공주가 잠든 유리관을 가지고 가는 왕자는 병적인 시체 애호가로 나온다. 대체 백설공주 이야기는 왜 이렇게까지 망가진 것일까?
이런 황당한 내용은 상당 부분 과장된 것이지만, 사실 키류 미사오가 복원한 백설공주 이야기는 그림 형제(Brüder Grimm)의 본래 동화를 살린 것이다. 저자는 그림 형제 이야기에서 사라져버린 본래의 내용을 복원하려고 했다. 그림 형제의 최초 이야기에 따르면, 백설공주를 쫓아낸 것은 생모가 맞고 백설공주의 시체(실은 잠든 것이지만) 옆에 24시간 붙어있는 왕자의 모습은 시체 애호가로 호도될 정도다. “왕자는 관을 성으로 옮겨 방에 가져다 두고는 하루 종일 그 옆에 앉아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관이 자기 옆에 없으면 한 입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백설공주]뿐만 아니라, [개구리 왕 또는 충직한 하인리히], [라푼첼], [빨강모자 소녀], [헨젤과 그레텔], [오누이] 등 그림 형제의 유명한 이야기들은 원래 매우 외설적이고 잔인했다. 표현이 상당 부분 완화된 지금에도 그림동화 속에서 잔인한 면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영유아 유기, 살해, 식인 풍습, 남녀의 동침 등의 이야기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몇 가지 궁금증이 생기지 않는가. 그림 형제는 이토록 잔혹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만들었으며, 키류 미사오의 언급처럼 사라져버린 원래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이런 의문들과 함께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림 형제의 잔혹한 동화들이(2판부터 개작되었지만) 원래 ‘민담’에 뿌리를 둔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두 번째는 그 원류가 되는 민담들의 잔인한 면모, 즉 그림동화에 남아 있는 아이 학대 및 유기, 살해, 남녀 간의 동침 등이 18세기 말,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유럽의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했던 사실이라는 점이다.
이미지 목록 야콥 그림과 빌헬름 그림 형제. 독일의 작가이자 언어학자인 두 사람은 당시 구전되던 민담이나 전설, 설화를 수집하여 그림동화를 출판하였다. | 1812년 발행된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메르헨] 초판 표지. 잔인하고 외설적인 내용으로 신랄한 비판을 받은 이 책은 결국 여섯 차례에 걸쳐 대대적 수정이 이루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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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콥 그림(Jacob Ludwig Karl Grimm, 1785~1863)과 그의 동생 빌헬름 그림(Wilhelm Karl Grimm, 1786~1859)은 원래 동화를 쓰는 작가가 아니라, 언어학과 문헌학을 연구하는 학자였다. 그림 형제는 언어학 자료로 사용하기 위해 민요를 모으면서 민담에도 관심을 갖게 됐는데, 차후 민담을 후세에 제대로 전하고자 민담집을 편찬하기로 했다. 특히 야콥 그림은 “어떤 경우라도 고대의 민족적 자산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수집된 민담은 거의 날것 그대로 출판되었다. 두 형제는 “민담의 전달과 수용은 가정에서 우선시 되어야 하며 그 대상은 어린이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책의 제목에 민담을 의미하는 ‘메르헨(Märchen)’을 붙였다.
1812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드디어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메르헨(Kinder-und Hausmärhen, 이하 메르헨)]이 출판되었다.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민담을 읽어줄 요량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기쁨에 들떴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곧 신랄한 비판을 불러왔다. 제기된 비판은 너무 많았지만, 요약을 하자면 이렇다. 아이들이 읽기에는 너무 심심하고 재미가 없으며, 차마 아이에게 읽어줄 수도 없이 잔인한데다 외설적인 내용까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어찌 어머니가 어린 자식들에게 태연하게 읽어줄 수 있겠는가!”
따라서 1819년의 2판부터는 문제가 되는 내용들이 여섯 차례에 걸쳐 대대적으로 수정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림 형제의 이야기들은 수정판, 그 중에서도 최종판인 7판(1857년)에 실린 것들이다.
메르헨, 어린이의 교육적 측면을 위해 수정을 거치다
학자로서의 원칙을 고수한 야콥과 여기저기를 뜯어고치고 문학적 상상력까지 동원한 빌헬름 사이에는 개정에 대해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초판의 개정 작업은 동생인 빌헬름이 거의 도맡게 되었다. 그는 원본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보다 아이들에게 재밌고 쉽게 읽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초판과 개정판을 비교하는 자료들은 한국에도 나와있는데, 이것들을 참고해서 과연 초판의 어떤 내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라푼첼]과 [헨젤과 그레텔], 그리고 [아이들이 어떻게 백정놀이를 했는지]를 통해 살펴보자.
[라푼첼]
[라푼첼] 동화의 표지 <출처: (cc) Katalin Szegedi at en.wikipedia.org>
이렇게 그들(라푼첼과 왕자)은 한동안 쾌락과 희열 속에 살았다. 요정은 까마득하게 몰랐는데, 어느 날 라푼첼이 이렇게 말해버렸다.
“있잖아요 고텔 부인, 제 옷이 점점 꽉 끼어서 더 이상 안 맞는데요.”
“아니, 이 발칙한 것”, 요정이 말했다.
- 1812년 초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남자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처음에 라푼첼은 무척 놀랐습니다……. 그러자 라푼첼은 불안이 사라졌습니다. 왕자가 자기를 라푼첼의 남편으로 맞아달라고 청하자, 그녀는 젊고 아름다운그의 모습을 보고…… “네”하고 대답하고는 왕자에게 손을 맡겼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왕자님을 따라가겠어요.”……
어느 날 라푼첼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텔 부인, 젊은 왕자님보다 당신을 끌어올리는 게 더 힘들어요. 왜 그렇죠? 왕자님은 눈 깜짝할 사이에 올라오는데 말예요.”
- 1857년 최종판
[헨젤과 그레텔]
[헨젤과 그레텔]의 삽화
어느 큰 숲 앞에 가난한 나무꾼이 살고 있었다. 나무꾼에게는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아내와 두 아이 헨젤과 그레텔에게 줄 빵도 거의 없었다……. 어느 날 저녁 아내가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내일 아침 일찍 아이들에게 빵 한 개씩 들려 숲으로 데리고 가세요……. 우리는 아이들을 더 이상 먹여 살릴 수가 없어요.” “그렇게는 못하오. 차마 못할 짓이오…….”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 굶어 죽는단 말이에요.”…… 다음날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엄마는 두 아이를 깨웠다.…… 아이들은 주머니에 보석과 진주를 가득 채우고 마녀의 집을 나와 집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버린 날부터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이제 그는 부자가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죽고 없었다.
- 1812년 초판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 굶어죽는단 말이에요”…… “오, 바보 같은 사람!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네 사람은 꼼짝없이 굶어 죽을 거예요. 당신은 그럼 관에 쓸 나무나 대패질하고 있구려!”…… 다음날이 되었습니다. 아직 태양이 뜨지도 않았는데 계모는 벌써 두 아이를 깨웠습니다.…… 아버지는 헨젤과 그레텔을 숲 속에 버려두고 온 날부터 한시도 행복한 적이 없었어요. 계모는 이미 죽고 없었습니다.
- 1857년 최종판
[아이들이 어떻게 백정놀이를 했는지]
어느 도시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었습니다. 5, 6살의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었습니다. 그 중 한 남자아이는 고기간 주인이 되고 또 한 남자아이는 요리사가 되고, 다른 남자아이는 돼지가 되는 그런 결정을 했습니다. 한 여자아이는 요리사가 되고, 또 다른 여자아이는 요리사 보조역을 하도록 결정했습니다. 이 보조요리사는 소시지를 만들기 위해 작은 접시에 돼지의 피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백정(고기간 주인 역을 맡은 남자아이)은 약속대로 돼지역을 맡은 소년을 때려 눕히고 작은 칼로 그 소년의 목을 땄습니다. 그리고 보조요리사(여자아이)는 피를 접시에 받았습니다…….”
- 1812년 초판
초판을 보니 놀랍지 않은가? 탑 속에 갇힌 예쁜 라푼첼은 탑으로 올라온 왕자와 점잖치 못한 행동을 일삼아 임신까지 했고, 귀여운 헨젤과 그레텔을 유기할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계모가 아니라 친어머니였다. 그리고 놀이를 하는 아이들은 역할극에 매우 충실하다 못해 친구의 목을 따고 말았다. [개구리 왕, 혹은 충직한 하인리히]도 적나라하기로는 이에 지지 않는다. 황금 공을 주워 준 개구리가 감히 공주에게 당당히 자신과 동침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제 피곤하군요. 자고 싶으니 저를 그대의 방에 데려다 주고 그대의 이부자리를 펴 주세요. 그리고 당신과 동침하고 싶소.” 그리고 초판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묘사가 이어진다. “그래서 그들은 흡족해하며 동침했다.”
이러한 내용들은 2판부터 바뀐다. 왕자는 라푼첼과 잠자리를 하기에 앞서 그녀에게 프로포즈부터 하고, 헨젤과 그레텔의 친어머니는 계모로 바뀌었다. 백정놀이 이야기는 아예 삭제되었다. 개구리의 적나라한 요구 또한 “벗삼아 놀아주고 함께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이 열거되면서 아이들의 소꿉놀이 같은 뉘앙스로 바뀌었다. 아무리 대범한 부모라 할지라도, 대여섯 살 되는 아이들에게 젊은 처녀가 외간 남자와 쾌락과 희열 속에 지냈다는 내용이나, 개구리와 동침하는 소녀 이야기, 친엄마와 아빠가 먹을 게 없을 때는 자식을 숲 속에 버린다는 내용을 아무렇지 않게 읽어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민담은 왜 이렇게 잔인하고 외설적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일부의 역사학자들은 민담과 그림 형제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민담의 주요 구연자이자 전승자였던 농민들의 삶 자체가 실제로 잔인하고 외설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을 반영한 민담 역시 잔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지역의 민담을 연구한 로버트 단턴(Robert Danton)은 구전되어 온 민담이 농민들의 사고방식과 생활 등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텍스트라고 주장한다. 민담은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및 듣고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실제의 상황을 상당히 반영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들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 통로라는 것이다.
그림 형제의 이야기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본 유진 웨버(Eugen Weber)는 그림 형제의 수집본을 면밀히 읽으면 [헨젤과 그레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수많은 주제들이 반복된다고 밝혔다. 즉, 그림 형제 이야기의 곳곳에 배고픔, 가난, 죽음, 위험, 두려움, 고아, 친부모의 자식 유기, 영유아 살해, 사악한 계모와 이복누이들, 일거리를 찾아 터전을 떠나야 했던 가난한 아이들, 무서운 야생동물들이 살고 있는 무시무시한 숲 등의 소재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17, 18세기 중후반까지도 대다수 농민들은 빈자이거나 극빈자였다. 농사를 지어 얻은 이익은 영주에게 내는 공물, 십일조, 토지 임대료, 각종 세금 등을 내면 남는 게 얼마 없었기에 보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빚을 지는 일이 허다했고, 이 때문에 빚에 의한 노역이 빈번했다. 그나마 이런 경우는 수확이 좋을 때의 이야기다. 기근이라도 들면 식량을 사야 하는 가난한 농민들은 가파르게 오른 식량비를 감당할 수가 없어 다른 궂은 일을 병행하거나 일거리를 찾아 터전을 떠나야 했다. “이러한 사람들은 1780년대에 프랑스 지역에서만 수백만에 달했는데 이들 대다수가 성공하지 못했다. 이들은 밀수업자, 노상강도, 소매치기, 창녀로 전락했고 결국 비참하게 죽어갔다.”
이런 비참한 실정은 같은 시기 독일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1525년에 일어난 농민전쟁의 피해가 복구되기도 전에 30년 전쟁으로 독일은 초토화됐다. 17세기 초 독일에서 가장 강력하고 근대적인 국가였던 바바리아조차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인구가 반으로 줄었고, 900여 개의 도시와 촌락이 황폐화되었다. 1760년이 되어도 농민들의 토지는 결코 1616년 수준으로 회복되지 못했으며, 이런 상황 속에서 인구의 대다수를 이루는 농민들의 생활은 가난과 극빈, 생존과 아사의 경계를 오가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장 밥티스트 그뢰즈(Jean-Baptiste Greuze), 가난한 가족(La pauvre famille) 18세기, 소묘, 45.8 x 35.6 cm, 콩데 미술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가난 속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먹이고 돌볼 수 있는 부모는 많지 않았다. 농민들의 경우 가족 전체가 한 두 개의 침대에 끼어서 가축들과 같이 잤는데, 때때로 영아들은 피곤에 지쳐 곯아떨어진 부모에 깔려 죽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성행위를 구경하면서 컸고, 그런 아이들에게 남녀의 동침은 어른이 되어서나 들을 수 있는 19금 이야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아이들은 걸을 수 있게 되면서 부모를 도와 할 수 있는 일을 했으며, 십대가 되면 농사를 짓거나 보다 부유한 집의 하인이 되거나 아니면 다른 일자리를 찾아 떠나거나 하는 등, 어쨌든 한 사람분의 몫을 해야 했다.”
물론 모든 아이들이 이런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서양사에서 ‘아동’의 개념이 언제 탄생했고, 아동이 어떤 시기에 어떤 식으로 이해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상류 계층을 연구했던 학자들은, 18세기에는 부유한 도시민과 귀족들을 중심으로 아이를 유모에게 맡기는 관행이 유행했고 아이는 특별한 교육과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지금의 사고와 유사한-라는 생각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있는 자들의 이야기였다. 같은 시기 농촌의 가난한 사람들은 폭력, 학대, 위험, 성행위 장면 등으로부터 아이들이 특별히 보호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얼마나 했을까? 단턴이 썼듯 “어느 누구도 아이가 순진한 피조물이라거나 어린 시절이 삶의 특별한 단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무려 30년에 걸쳐 수차례 개작되고 수정되었지만, 그림 형제의 [메르헨]에는 이렇게 슬프고 비참하며 잔인한 삶을 살아야 했던 대다수 사람들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는 [헨젤과 그레텔]을 과자로 만든 집과 우스꽝스런 마녀 이야기로 기억한다. 하지만 [헨젤과 그레텔]은 어디까지나 남매가 친부모에게 버려지고, 가난한 아버지는 이 때문에 끊임없이 괴로워하는 이야기다. 그림 형제의 또 다른 단편 [오누이]에 등장하는 남매 또한 헨젤과 그레텔보다 결코 나은 상황이 아니다. 남매는 매일 계모에게 얻어맞고 발로 차이며 겨우 딱딱한 빵 조각 몇 점을 먹고 살 뿐이다. 심지어 오빠는 이렇게 먹으며 양치는 일까지 해야 하는 지경이다. 결국 오빠는 집을 박차고 더 나은 상황을 꿈꾸며 세상으로 나간다.
[헨젤과 그레텔], [오누이] 외에도, 그림 형제의 이야기 중 상당수가 버려진 아이들, 혹은 일하는 소년이나 일거리를 찾아 집을 떠나는 소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는 잘 먹고 잘 살고 싶다는 소년들의 소망이 현실에서 이루어지기 요원한 것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유진 웨버는 이런 소년들의 이야기에 공주나 돈 있는 여성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분석했다. “가난한 남성에게 이상적인 선물은 공주”였다는 것이다. 이렇듯 그림 형제의 이야기, 그리고 민담은 “간혹 보이는 환상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실재의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우리는 그림 형제 이야기가 그 시대 민담에서 출발했으며, 이 민담이 농민들의 실제 생활을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음을 살펴봤다. 그림 형제의 초판본이 잔인하고 외설적이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고, 두 형제는 [메르헨]의 내용에 대한 비판에 시달렸다. 차후 그림 형제가 민담의 폭력적이고 외설적인 내용을 상당히 억제하고 어린이와 부모를 겨냥해 교육적 차원에서 개작한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그림동화다. 하지만 이제 환상과 마법, 명랑함으로 포장된 겉의 이야기를 살짝 걷어보자. 그 속에는 하루하루의 생존에 매달려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외설적인 세계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살아야 했던 아이들과 어른들의 이야기가 있다. 단턴이 말했듯, 이것이 민담을, 민담에서 비롯된 이야기들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