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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회민주주의센터 원문보기 글쓴이: 조율
대처리즘의 한국적 수용 양상과 박근혜 정부
글 조원희 /국민대 경제학과 교수, 사회민주주의센터 연구위원)
본 글은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한국판 2013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1. 개인적 인연, 혹은 악연
한국인 경제학자 가운데 나만큼 영국의 대처 전 수상의 정치철학과 정책에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은 없지 않을까라고 종종 생각해보곤 한다. 물론 오로지 부정적인 영향이라는 뜻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1984년에 영국으로 유학 가서 그곳에 살기 시작하여 1989년에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그 체류 기간 동안 요즘 사람들이 책이나 보도로만 알고 있는 이른바 대처리즘의 주요한 신자유주의 정책들의 집행 과정에서 불거진 격렬한 논쟁과 반발, 전국적인 노동자 파업 역시 직접 목격했다. 영국 땅에 도착하니 광산업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하는 마가렛 대처 총리가 연일 TV와 신문지상에서 강경한 발언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 반발해 아서 스카길이 이끄는 탄광 노조가 사활을 건 파업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대처 총리는 1982년 포클랜드를 점령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승리했고, 그 여세를 몰아 1983년 재선에 성공했다. 1985년에는 전투적인 노조까지 백기투항하게 만들었다. 재선 이후 가스·전기·수도 등 국영기업의 대규모 민영화가 시행되었다. 당시 ‘민영화’라는 말은 생소했고, 그야말로 마가렛 대처만의 ‘독창적인’ 정책이었다. 박사 과정이 있는 대학원 연구실의 영국 친구들에게서 대처 정부가 20-30% 할인가로 매각한 공기업 주식을 사서 곧 바로 되팔아 돈을 번 ‘무용담’을 들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1986년에는 대처표 신자유주의의 정책 메뉴의 또 다른 핵심인 규제 완화, 그 가운데도 그녀가 특별히 강조하는 금융규제 완화의 결정판인 금융 빅뱅이 시행되었다. 귀국 적전에는 나 같은 가난한 유학생들에게까지 공공임대 주택을 30% 정도 할인된 가격에 매입하도록 권유했는데, 은행에서 집값의 90%까지 대출해주므로 자기 돈이 얼마 없어도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다. 실제로 주위의 한국 유학생 중에는 그렇게 분양된 공공임대주택을 샀다 되팔아 돈을 번 사람도 있었다.
시대정신이 된 대처리즘
지금 와서 고백하건데 당시 나는 이 모든 사태의 진정한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진보적 경제학자들도 대처리즘이 장차 세계 역사에 어떤 장기적인 영향을 줄지 간파하지 못했다. 다들 대처의 정치철학과 경제정책은 하나의 일탈에 머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알다시피 대처리즘은 미국에서는 1980년에 집권한 레이건 대통령의 신보수주의의 형태로 나타났다. 1980년대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외채위기로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1990년대 동구권 몰락 이후 위세를 떨친,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 중심의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에서도 나타났다. 그리고 1997년 말 발발한 동아시아 금융위기를 계기로 한국 등에 강요된 이른바 구조개혁 프로그램에서서도 대처리즘은 위세를 떨쳤다. 더구나 유럽의 사회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에 타협하여 채택한 ‘제3의 길’ 노선에도 역시 대처리즘은 영향을 미쳤다. 결국 대처리즘은 2008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 이전까지 거대한 전 지구적 보수 반동이라는 새로운 물결의 씨앗이 되었다. 신자유주의는 시장 자율로 굴러가는 경제체제를 구축하려 했으나 2008년 위기를 낳고, 그 결과 경제가 그들이 그토록 비판한 국가 개입에 의존해 겨우 붕괴를 모면함으로써 자기 부정의 종착역에 도달했다.
대처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를 찬양했는데, 그녀는 물리적인 의미에서 ‘해가 지지 않은 대영 제국’을 재건하는 영광을 누리지는 못했을지라도, 정치사상의 측면에서 보면 영국이 다시 한 번 세계를 호령하는 제국의 영광을 재현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대처리즘과의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1997년 말에 발생한 외환금융위기를 계기로 한국 경제에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상륙하자 나는 2001년 이에 반대하는 ‘대안연대회의’라는 시민단체 결성에 앞장섰으며, 그 이후 약 9년간 이 조직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는 결국 한국인의 모습을 취한 영국의 대처리즘과 싸우는 꼴이었다.
2008년 가을에 발생한 미국발 금융위기와 금융파탄을 계기로 이제 대처리즘은 확실히 무덤 속으로 들어간 줄 알았다. 전 세계적으로도 그렇고,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최근 ‘청와대 비서관들, 마가렛 대처 리더쉽 열공 중’, ‘박 대통령은 한국의 대처가 되라’는 등의 언론 보도를 보니, 마가렛 대처와의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10여 년 전 한 선배 교수에게 ‘당신의 인생은 한마디로 무엇이었습니까?’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내 인생은 박정희와의 싸움으로 시작해서 이제 그 끝을 확실히 보는 것으로 마무리하려고 하네”라고 답했다. 누군가 내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마가렛 대처와의 (이론적) 싸움으로 연구 인생을 시작하여, 이제 어쩔 수 없이 그 끝을 확실히 보려한다”고 답할 것이다.
1984년에 유학하던 영국의 길거리에는 마가렛 대처를 비판하는 포스터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미국의 레이건이 대처를 안고 있는 사진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제목의 포스트였다. 현실은 어떻게 흘러갔는가? 그 두 사람의 유령은 포스터의 바람대로 곧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 후 30년 동안이나 세계를 지배했다. 하물며 2008년의 미국과 영국에서 거의 동시에 발생한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지금 우리나라 땅에서 부활하려고 틈을 노리고 것 같다. 다만 젊고 확신에 찬 대처가 아니라 죽기 전 치매에 걸려 혼미한 모습을 한 대처의 환생 말이다. 이 망령을 좇아내는 일이 나의 사회봉사 활동의 남은 과제가 될 것 같다.
2. 급진 우파 시장근본주의로서의 대처리즘의 승리 이전에 좌파의 실패를 자성해야 하는 이유
대처리즘을 신자유주의의 원형으로 이해하려면 당시 영국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비롯된 몇 가지 전형적인 경제 정책을 넘어, 그런 정책의 배후에 있는 근본적인 정신과 철학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대처는 경제 정책은 수단일 뿐이며 자신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의 정신을 개조하는 것이라고 자주 말했다. 그리고 그 목적이 우파적 관점에서 볼 때 나름대로 보편성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오랜 기간 전 세계적으로 위세를 떨친 것이다.
노조 활동을 제한하고 이어서 노동시장을 유연화한다. 기업에 대한 정부 보조를 거부하고 채산성 없는 기업은 가차 없이 구조조정을 한다. 국영 기업을 사유화한다. 통화증발을 억제해 인플레이션을 통한 비용의 사회화를 막는다. 이런 일련의 조치 위에서 (금융)자본이 자유롭게 오로지 수익성에만 기초해 투자하고, 필요하면 제약 없이 구조조정을 상시적으로 구사하도록 만든다. 노동자와 중산층도 주식과 부동산을 소유해 이른바 자산가로서 금융시장에 참여하게 유도한다. 그리하여 모든 이들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성공에 대한 야망을 가지고 매진하게 한다. 국가와 노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개인적 노력(자립과 자조)으로 인생을 꾸려나가는 태도를 갖게 한다. 세금(특히 고소득에 대한 한계세율)을 감면해 개인적 성취 의욕과 부의 축적을 촉진한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모든 이들이 자본주의 경제의 번영에 자발적으로 협조하게 만들고, 심지어 그녀가 자주 말했듯이 보수당 뿐 만 아니라 진보정당도 자신들과 비슷한 정책을 내세우도록 개조한다는 것이 그녀의 궁극적 목표이자 정신이었다.
이것은 명백히 19세기적인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이며, 대처가 대학 시절 읽고 감명 받은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의 저서, 《예속에의 길》에서 표명된 사상이다. 따라서 이미 노동자의 조직화와 노동의 권리, 국가 개입이 경제 체제의 주요한 요소가 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수정자본주의 체제에서, 그리고 이 체제 위에서 기득권 수호를 위해 진보세력과 <타협 정치>를 구사해오던 당시 보수당 노선의 관점에서 볼 때 결코 평상시에는 먹혀들 수 없는, 비상시에만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급진적 사상이자 정책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1970년대 말이 그런 비상시국이었다. 1970년대 말은 선진국 자본주의에서 기존의 경제성장 시스템이 그 한계에 직면하고, 사양 산업을 정리하고 새로운 산업으로 이동해야 했다. 기존 산업에서는 대규모의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했던 시점, 그리하여 기존의 경제 시스템이 무력화된 시점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는 우파뿐 아니라 좌파도 기존의 정치·경제 노선으로는 탈출구가 없었다. 영국 노동당 역시 새로운 노선의 채택이 불가피했다. 예를 들어 영국 노동당 역시 북유럽 사회민주당들처럼 적극적 노동시장정책과 연대적 임금정책(산업별로 임금을 기업 수익성과 상관없이 동일하게 가져가는 것)을 보편적 복지와 연결해, 산업의 상시적 구조조정을 촉진하면서 동시에 노동자의 저항을 최소화하고, 노동자 재교육을 통해 필요한 인력을 공급하는 정책 노선으로 전환하는 게 필요했다. 그래야만 경제 성장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실업을 억제하고 생산성 향상을 성취할 수 있었다. 우파든 좌파든 더욱 선명한 새로운 입장으로 전환해야 했고, 그래야만 현실적 실효성이 발휘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당시의 영국 노동당은 그러한 노선 전환을 하지 못해 지지자들의 신망을 잃었다.
대처식의 구조조정은 당연히 시장의 몰인간적인 경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고 따라서 개개인의 엄청난 고통과 불안, 양극화를 야기하며 불필요한 희생을 강요하는 전략이다. 영국의 경우 구조조정은 상대적으로 비교우위에 있던 금융업 및 서비스산업의 번영과 제조업의 몰락을 가져왔다. 특정 제조업에 기초하여 살아가고 있던 수많은 지역 사회의 붕괴와 가정의 파괴를 초래했다.
이러한 비극을 피하려면 영국의 진보 진영 역시 신속하게 정책노선을 선회해야 했다. 그렇지만 영국 노동당으로 대표되는 영국의 진보 진영은 그러한 노선 전환에 실패했다. 따라서 우리는 대처리즘 같은 급진적 우파의 폭력적 대안을 비난하기 이전에, 대중의 신뢰를 받는 새로운 노선으로의 과감한 변신을 통해 대처리즘의 공세를 막지 못한 영국의 진보진영, 진보정당의 뼈아픈 실패도 지적해야 한다.
더구나 대처 자신이 천명한 목표와 정신은 그녀가 총리직을 사임하고 나서 사라지기는커녕 반대 당에 의해 수용 계승되었다. 즉 영국과 미국에서 집권한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 빌 클린턴의 민주당, 그리고 역시 제3의 길을 천명한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권에도 계승되었고 마침내 실현되었다. 진보정당을 자본주의 정당으로 탈바꿈시키려고 했던 대처의 정치적 목표를 그 ‘반대파’들이 실현한 것이다. 이 정당들은 모두 신자유주의를 겉으로는 비판했고, 대처리즘의 노동정책과 공기업 사유화 정책 등을 일부 완화했다. 그렇지만 이들 진보 정당들 역시 노동시장 유연화와 규제 완화(특히 금융부문)는 지속적으로 시행했다. 2000년 영국 노동당은 ‘금융서비스 및 시장법’을 제정하여 마가렛 대처가 시작한 금융 빅뱅을 완성했는데, 그 조치는 결국 금융과잉과 부동산 버블을 낳아 영국경제를 파국으로 이끈 주원인이 되었다.
3. 외환위기와 DJ,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수용, 실수? 아니면 필연?
책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서 장하준•정승일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노선은 좌파 신자유주의인데 반해 747공약의 이명박 정부와 2007년 경선 당시 ‘줄푸세 공약’을 내건 박근혜 후보는 우파 신자유주의자라고 규정했는데, 이는 정확한 판단이다. 타국과 비교하자면 김대중/노무현의 노선은 미국 클린턴 정부의 민주당 노선과 대체로 맥을 같이 하며, 이명박 정권과 2007년까지 박근혜의 노선은 미국 공화당의 원조신자유주의와 대체로 일치한다.
우리나라의 비극은 민주 정권의 시작인 김대중 정부가, 그리고 그것을 계승한 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를 관철시키는 일에 ‘솔선수범’해 앞장섬으로써 ‘진보란 무엇인가’에 대한 국민들의 관념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린 점이다.
물론 언제나 극단의 순간에는 정치적 역량이 선택을 좌우한다. 과연 1997년 말의 외환금융위기라는 초유의 사태 앞에 김대중 정부에게 다른 선택이 가능했을까? 다른 선택을 할 만한 정치적 역량이 김대중 정부와 집권세력에게 있었을까?
돌이켜보면 1997년 말 미국과 IMF 등 신자유주의 세력의 위세는 세계적으로 정점에 달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사정을 보면 외환보유고는 바닥이 났고 돈 줄을 쥔 국외의 신자유주의 세력은 그들이 원하는 구조조정을 하지 않는 한 달러자금을 줄 수 없다고 버티고 있었다.
이런 객관적 정세 아래 당시 권력을 획득한 집권 세력의 주체적인 여건을 살펴보면, 이른바 386세대(이하 386)을 위시한 민주화 세력은 민주•민족주의자들이었고 박정희 반민주-친재벌 정책에 시종일관 반대해왔다. 그들은 특히 국가권력-금융-재벌의 결탁구조를 줄곧 비판해왔다. 이러한 성격의 국내의 민주-민족 집권세력이 국외의 시장 세력과 화학적 결합을 하자, ‘신자유주의 좌파’라는 괴물이 탄생했다.
386은 재벌은 매판 세력이라고 생각해왔으니, 재벌 집단을 공격하는 것은 은근히 386의 민족주의 정서를 만족시킨다. 그래서 외국계 주식 자본이 대규모로 우리나라 상장사 주식을 보유하고, 그들의 요구대로 사유재산 원칙에 따라 1주1표(1원1표)원칙을 구현해 재벌 총수의 전횡을 막을 수만 있다면, 그것 역시 선이 된다.
우리나라 시중은행의 경영권을 외국인 투자자들이 가져가든, 외국인 주식지분이 압도적 다수가 되든, 지긋지긋한 재벌총수들의 정경유착 경영에서 ‘해방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민주-민족주의를 심화시킨 선한 정책이 된다.
국영기업은 퇴역 관료와 퇴역 군인들이 ‘낙하산 인사’로 점령하는 곳이었으니, 정치가 경제를 지배하는 비효율의 온상이었다. 따라서 386에게는 국영기업 민영화가 답이었다.
또한 386들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마저도 한국 재벌기업들 특유의 전근대적인 온정주의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근대적인 노사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았다.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이름으로 주주권을 강화하면서 자본시장 개방, 외환거래 자유화를 단행하자 외국자본이 물밀 듯 몰려왔다. 그 결과 외국인 주주들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국민경제의 이익에 소홀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386 민족주의자들이 그토록 중시하는 민족 이익 중시는 크게 훼손되었다. 사실 박정희•전두환 정권은 외국자본에 채무는 장려했지만, 외국자본이 우리 기업을 소유하는 것은 극도로 제한한다. 기업의 국적성이 개발도상국 가운데 한국만큼 강하게 유지된 나라가 없었다. 민족민주를 내건 386이 친일 매판 세력이라고 비난한 박정희 정권이 오히려 민족민주 세력보다 경제적으로는 민족주의적이었고, 대외적으로 자립적존재가 되는 웃지 못 할 사태가 전개된 것이다.
1997년 말의 경제위기로 경제가 위축된 가운데 김대중 정부와 IMF가 의도적으로 긴축재정, 긴축금융을 통해 금융시장을 죄어버려 기업의 채산성은 악화되었고, 그 결과 멀쩡한 기업, 특히 장기적 미래를 위해 다소 과도한 투자와 인력을 보유한 기업들마저 졸지에 가차 없는 구조조정을 강요당했다. 그런 과도한 투자와 인력 보유라는 ‘잘못’을 재벌의 기업 지배 구조 탓으로 돌렸으니, 재벌개혁은 되는지 모르겠으나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리는’ 꼴이 돼버렸다.
시장 원칙의 활성화는 필연적으로 고용의 불안정화를 야기한다. 따라서 영국이든 미국이든, 어디에서도 말로는 시장주의 정권들이 복지 축소를 주장하지만 실제는 그 규모를 축소시키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따라서 복지안전망이 전무한 한국에서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을 거치면서 4대 보험과 함께 기초생활보장제도 등 최소한의 복지제도를 강화한 것은 신자유주의와는 노선이 다른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 정확하게 그 노선이 일치하는 정책이다.
그리고 시장 원리가 강화되어 시장 경쟁 일변도의 환경이 조성되면 언제나 강한 것만 살아남는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시장 개혁 이후, 한국 경제에서 재벌 대기업은 정리해고와 함께 사업구조조정과 분사, 외국진출, 거래선 변경, 비정규직 활용, 이익이 남는 중소기업 업종으로의 활발한 진출 등등을 통해 어떻게든 자기 살길을 찾아 나섰고, 결국 살아남았다. 그리고 전체 국민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장기간 지속된 고환율은 국민 경제를 희생해가면서 엄청난 규모의 은폐된 보조금을 수출 기업에 준 꼴이 되었고, 수출 기업은 경제위기 속에서 독보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외국 주주의 요구 즉 고배당과 단기 수익성 위주의 경영 요구에 대해서 수출대기업들은 적절하게 순응했다. 과거에는 수출대기업들이 정경유착을 통해 정치인 및 관료들과 타협했다면, 이제는 수출대기업들이 외국인 금융자본과의 적당히 타협하면서 서로 이익을 나눠먹고 있다. 즉 이런 거래를 통해 재벌총수들은 경영권을 보장받고, 국내외 투자자들은 높은 주가와 고배당으로 보상받는 멋진 동맹이 형성되었다. 그렇지만 그 결과, 과거와 같은 모험적이고 10년 이상 기다릴 수도 있는 미래지향적인 모험투자는 극도로 약화되었다.
과거 금융기관으로 불린 은행이 이제 주주 이익을 우선시하는 금융회사로 변신했고, 과거처럼 수익이 당장 나지 않아도 기업에 묵묵히 산업자금을 대주던 관행을 벗어던지고 1-2년을 기준으로 단기수익을 극대화하는 새로운 방향으로 경영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은행들은 과거에 방치했던 ‘블루오션’인 가계금융에 몰두했는데, 오늘날 가계 부채와 ‘하우스푸어’ 양산은 은행을 위시한 금융회사가 자기 배 불리기 위해 일반 국민을 고의적으로 부채의 늪에 허덕이게 한 결과이다.
대기업이 자사의 수익성을 위해 더욱 하청 단가를 압박 하니, 중소기업은 살기 위해서 임금단가가 낮은 중국 등으로 대거 빠져나가거나 비정규직을 대규모로 쓰는 것이 필연적으로 되었다.
정리해고를 당하고 기업 투자 위축되고, 결국 좋은 일자리는 한정되니 너도나도 창업하게 되고, 설상가상 유통을 위시한 대기업들의 영세 자영업종 진출로 시장은 더욱 좁아져서 자영업은 과당경쟁의 대명사가 되었다. 결국 폐업과 사업 실패의 급증으로 안한 가산 탕진이 다반사가 되었다. 퇴직자를 위한 사회안전망이 취약하니 살길이 막막한 이들의 무리한 창업 추진이 너무 많고, 이들이 망하게 되면 살 길이 더욱 막막해지니 생활의 불안정은 극도로 높아지는 실정이다. 게다가 젊은이들은 좋은 일자리가 부족하다보니-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내가 보기에도 회사 업무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경쟁을 위한 ‘스펙’ 쌓기 열풍으로 국부와 젊음이 허비되는 정도가 도를 넘고 있다.
4.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과연 이 모든 사태에 대해, 신자유주의의 씨앗을 뿌리고 진보에 대한 왜곡된 관념을 갖게 만든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비난의 화살을 돌려야 하는가? 이것이 참으로 심각하고 난감한 질문이다. 이들 민주정권에 대한 불만을 이용하여 원조 신자유주의를 끌고 나와 ‘이것이 진정한 우파’라고 주장하며 집권한 이명박 정권, 그리고 그 정권에도 결국은 실망해 어디 번지수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안철수 후보에게서 희망을 찾아보려는 지경까지 간 우리 국민들의 애처로운 심정을 무엇으로 위로해야 하는가?
진보의 미래를 논하기 전에 잠깐 박근혜 정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박근혜 정부는 좌우파 신자유주의가 20년간 망가뜨린 사회•경제 구조를 고치고, 고용률 70% 달성과 이를 위한 창조경제, 그리고 필요한 곳에 복지가 있는 맞춤형 복지와 중소기업 육성, 그리고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을 말하고 있다. 또한 그간의 신자유주의의 유산인 개인 채무 문제의 해결과 하우스푸어 문제의 해결을 천명하고 있다.
그런데 2007년 말까지만 해도 박근혜는 마치 원조 마가렛 대처가 환생한 듯한 줄푸세주의자였다. 그런 박근혜 대통령이 과거의 입장에 대한 어떤 뼈저린 반성을 했다는 말을 들은 적 없다. 과거의 입장을 바꾸었다는 말 역시 들어보지 못했다. 더구나 박근혜 대통령 주위에 있는 신임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과 현오석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 그리고 강석훈(새 누리당 의원, 성신여대 교수), 안종범(새 누리당 의원, 성균관대 교수)같은 경제 멘토들은 사실 몇 년 전까지 신자유주의 경제사상의 전도사들이었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조금 진보적인 김종인 박사는 요즘 보이지도 않는다. 이런 가운데 일부 보수 언론에서 ‘박근혜는 한국의 마가렛 대처가 되어야 한다’는 나팔소리가 들린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은 이미 지난 20년간 과도할 정도로 구현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다시 마가렛 대처 타령이란 말인가? 박근혜 대통령이 줄푸세의 박근혜로 돌아가라는 것인가? 보수라고 우리나라가 직면한 여러 문제들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지만, 적어도 마가렛 대처는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과연 보수 언론의 유혹을 벗어날 비전과 역량이 있는가?
문제는 박근혜 정권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혹시 일정한 좋은 성과를 낼 것인지가 아니다. 과연 진정한 진보 정치 세력이 등장해 과거의 잘못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이면서 확실한 정치경제 사상과 정책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이는 마가렛 대처의 등장과 장기집권을 비판하기 이전에 영국 노동당의 대안 부재를 더 엄중히 문책해야 하는 것과 같다. 과거 우리나라 민주세력은 시장이 무엇인지,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 그 파괴적 작용은 어떠한 것인지 등등에 대하여 이해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민주화를 완성하는데 기여한 성과는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과거의 오류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다면 다시 실패할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남긴 엄청난 후유증을 이해하지 못하고, 경제시스템 전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진보는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그런 진보는 집권할 수도 없겠지만 집권해서도 안된다. 그것은 진보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다.
정치가 문제이다
그동안 우리나라가 경험한 신자유주의는 달리 보면 좋은 경험일 수도 있다. 어차피 박정희식 개발독재와 신중상주의 경제정책은 어느 나라나 자유주의의 세례를 받기 마련이다. 역사의 보편 법칙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20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자유 시장이 무엇인지, 그것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 어떻게 시장만능 자본주의제가 가족을 해체했는지, 따라서 가족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연대하고 연대정신을 구현한 보편적 복지국가를 만들지 않으면 가족들은 아이를 낳을 수도, 기를 수도 없으며, 개인들의 노후도 보장받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모험정신과 활발한 기업 구조 조정을 위해서라도 복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국민은 서서히 깨달아 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우리 국민들이 알게 된 것은 강도 높은 신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 덕택이다. 역사의 발전은 비약이 없다. 다른 나라 국민이 1세기에 걸쳐 알게 되는 것을 우리 국민은 아주 짧은 기간 내에 깨닫게 되었는데, 이는 그간의 고통에 대한 큰 보상이다.
우리 국민은 이미 1997년의 금융위기를 겪은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그런대로 넘길 수 있는 능력과 자신감을 키웠다. 더구나 다행히도, 이명박 정권이 출범해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행하기 전에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해 원조 신자유주의 정책의 집행을 무력화하게 했다는 것 등은 하늘이 우리나라에 내린 일종의 은총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다시금 한국적 민첩함으로 신자유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모든 조건이 바야흐로 무르익어가고 있다. 이제는 오로지 그것을 추진할 정치 세력의 등장만이 문제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