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얼마나 자주 분노를 하는지 물으면
흔히 “전 분노 잘 안 해요!”라고 답을 합니다.
집착하고 있는 기준을 건든다고
처음부터 강렬한 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먼저 반감을 가지게 되는데
이는 스스로의 기준을 건든 것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죠
이 반감이 해결되지 않은 채 더욱 거세지면 짜증으로 이어지고
점점 더 강렬해지면 분노가 일어나는 것이죠
즉, 반감과 짜증도 사실은 분노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강도에 따른 분노의 구분을 적용하여
인과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탐욕 -> 불만(반감->짜증) -> 분노
화가 나지 않는 것과 화를 참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하지만 화를 밖으로 표출하는 것과
화를 억누르는 것 역시 차이가 분명하죠
일단 분노까지 발전했다면
분명 그 분노는 어디로든 흐르게 되어 있는데
분노가 흐르는 방향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내면으로 향하는 경우와 바깥으로 향하는 경우입니다.
이 둘은 이름이 달라지는데 분노가
내면으로 향하는 경우 수치심으로 변화합니다.
밖으로 분노를 표현하지 못하고
억누르는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는 심리죠
분노가 바깥으로 향하는 경우 언어와 행동으로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대상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기에 해악이라고 부릅니다.
분노의 적색경보는 바로 흔들리는 마음입니다.
불안은 불만이 쉽게 일어나는 환경이고
이것이 분노로까지 발전하여
그 해결안 된 독극물이 안으로든 밖으로든 향하면
스스로와 주변을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분노조절장애라고 부르는 것은
불안, 반감, 짜증, 분노가 아니라 남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조차 조절이 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분노의 수위가 최고로 치솟아 있는 것으로써
일단 이 수위를 낮추지 않는 한 분노, 짜증
반감의 낮은 수위의 감정들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분노조절장애라는 단어가
한국 사회에 만연하기 이전에는
화병이라는 한민족 고유의 질병이 있었습니다.
화병은 분노가 내면으로 흐르는 것이 만연했을 때
나타나는 육체적 질병으로 일종의 심혈관계 질환입니다.
분노조절장애는 자신과 주변을 함께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분노가 불러오는 불이익
우리는 분노가 만들어내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이미 경험해 봤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잠깐 후회할 뿐 시간이 지나면
불이익도 분노를 다스리고자 하는 마음도 모두 망각해 버리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는 합니다.
이런 어리석음을 반복하기 싫다면
우리는 목마르기 전 미리
우물을 파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목마른 후 우물을 파기 시작하면 이미 많이 늦은 것이고
화가 나 이미 손해를 본 뒤에
분노를 다스리는 것도 참 어리석은 일이죠.
마음속에 분노의 화살이 꽂혀 있으면
우리는 마음의 평정을 잃게 되고
기쁨이나 행복을 얻지 못하며
불안하여 잠도 자지 못합니다.
분노의 첫 번째 불이익으로 불안을 언급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할 때 계속 곱씹는 습관이 있는데
이 과정은 우리 마음을 들뜨게 하고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리도록 만듭니다.
분노가 만드는 마음의 지옥에 갇혀 버린 것이죠
용서의 올바른 정의는 바로 이 분노의 감옥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겠다는 허락입니다.
용서는 결코 원한이 있는 상대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상대방은 용서를 받든
받지 못하든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이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것은 오직 자신 뿐입니다.
가해자는 그 순간을 금방 잊고
일상을 즐기며 살아갑니다.
또한 밤에 잠도 잘 자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지만 피해자는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 채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밤에 두 다리를 뻗고 자지 못합니다.
피해를 본 것도 모자라 스스로를 점점 더
고통으로 몰고 간다면 정말 큰 손해입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이니
이 얼마나 불안정한 상태입니까?
곁에 있는 것만으로 점점 더 스스로의 마음에
분노를 품도록 만드는 이들을 과연 누가 좋아할까요?
그들은 그저 주변 사람들에게 지옥의 간수와 다름없습니다.
피해자라는 망상에서 벗어나 분노로부터
자유롭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점점 더 강렬한
분노의 감옥으로 밀어 넣는 이들이 간수가 아니면 무엇일까요?
우리는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분노로부터의 자유를 선물해줘야 할까요?
아니면 분노의 감옥을 선물해줘야 할까요?”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한 우리는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
동료들을 계속해서 피해자로 만들게 됩니다.
내가 그들에게 가해자가 되어 미움받는 것에 대한
슬픔보다도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아마도 그들이
지옥 같은 분노의 감옥에 갇혀 두 다리 뻗고 잠자지 못하며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힘이 줄어든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또다시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분노 바이러스를 전달하는 숙주가 된다는 것 아닐까요?
분노는 바이러스입니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첫째 내면적으로는 불안의 감옥에 갇힙니다.
둘째 외부적으로는 수많은 이들에게
바이러스를 감염시키며 그들을 피해자로 만듭니다.
그리고 다수의 피해자들은 다시
스스로의 감옥을 더욱 강화시키고
그들은 외부적으로 또 다른 피해자를 양성하죠.
이 비극적 시한폭탄 놀이는
오직 용서를 통해서만 치료가 됩니다.
가해자의 죄를 사하는 그런 허무맹랑한 용서가 아니라
오직 스스로를 이 분노의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이 치료제를 복용할 때
시한폭탄의 심지를 잘라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화가 났을 때
누군가에게는 불 같이 해악을 가하고
누군가에게는 억지로 참으며
누군가에게는 분노까지 번지지 않은 채 마음을 조절합니다.
이 차이는 분노한 대상과의 관계 속에 걸린
이익에 대한 탐욕과 분노의 저울질로 결정됩니다.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상황에서
얼마나 수위 높은 분노를 선보일 것인가는
이처럼 상대의 조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 저울질의 기준은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자신보다 강한지 약한지의 여부입니다.
인간은 역시 동물이기 때문에
약육강식의 본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죠
강한 존재 앞에서는 두려움이
분노를 앞서기에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것이고
약한 존재 앞에서는 그 반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과 친한 정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람들은 자신과 친한 이는 내편
친하지 않은 이는 네 편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듯이
평범한 이들 대부분은 내편에게는 관대하지만
네 편에게는 냉철한 편입니다.
우리들은 자기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고통을 주거나 경멸하거나 거친 말을 하거나
불쾌하게 하는 것을 바라지 않지만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도리어 그 반대로 대합니다.
분노가 대상에 따라 이렇게 차별적이듯
용서 또한 그 가부가 차별적입니다.
용서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남을 용서하는 것과 나를 용서하는 것
그리고 세상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용서는
첫 번째인 남을 향한 용서입니다.
용서의 가부가 대상에 따라
차별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친한 사람과 나보다 강한 사람을
쉽게 용서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남을 향한 용서는 분노를 다스림으로써 가능해지고
나를 향한 용서는 탐욕을 다스림으로써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한 용서는
근본적인 어리석음인 우치를 다스림으로써 이루어집니다.
파멸의 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는 남을 용서해야 하고
천상의 길에서 도약하고자 하는 이는 나를 용서해야 합니다.
결국 어떤 수준에서 어떠한 행복을 원하든
분명한 진실은 용서는 나를 구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첫댓글 남을 향한 용서는 분노를 다스림으로써 가능하다
나를 향한 용서는 탐욕을 다스림으로써 가능하다
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