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녁에 잠자리에 누웠는데 12시까지 뒤척이다가 4시에 일어나버렸습니다.
컨셉을 후드로 정한 것은 언젠가 예주가 자기는 후드 입은 남자가 좋다고 해서
입었으니 너무 욕하지 마시라. 동이 트지도 않은 경부고속도로를 아무 생각 없이
달려서 인 서울한 시간이 5시 반, 출발부터 2시간 반 동안 뭘 할까를 생각하던
-
터라, 한남 대교부터 이태원로까지 천천히 두리번거리다가 하얏트 쪽으로 방향을
잡았어요. 소방서 모퉁이에 있던 버거킹 간판이 바뀌었고 지금도 해밀턴이 매인입니다.
되는대로 가다보니 경리 단 길 끝자락에 럭키 부동산, 뒷길 옷가게는 딸랑 레드옥스
하나만 남아있었고 주택가를 빙빙 돌면서 10년의 추억 찾기를 했습니다.
-
이태원2동으로 에스더 2학년 무렵에 이사를 왔으니 건20년 동안 네 번 이사를 했네요.
먼저는 ‘올 댓 재즈‘를 지나 외환은행과 ‘페다’ 뒤편에 살았고, 개척교회 준비하느라고
거실 큰 집에서 예주를 낳았을 것입니다. 양 원창 형제가 준 원목 침대를 예주 방에 놓고서
엄청 좋아했어요. 은영, 요셉 사모님은 잘지내시겠지요? 아버지가 이집에서 2년 동안
-
계신 일은 불효막심한 제게 체면치례하게 한 유일한 일이며, 아내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집은 예배당 처소 제공 외에 생각나는 것이 없어요. 두 번째 집은 2층 단독 주택이었는데
집도, 추억도 찾지 못했고, 세 번째 ‘이태원 어린이집’ 앞은 카페로 바꿔져있어서 한 참을
헤매다가 겨우 찾았습니다. 예주가 이곳 ‘예쁜 소리 피아노’에서 살다싶이 했고 아마도
-
바이엘부터 체르니 40번까지 쳤을 것입니다. 4살 때 음악 이론을 마스터시켜준 이향미
집사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예주에게 이태원은 음악의 성지 같은 곳입니다.
어린이 집에서 학예 외를 리사이틀로 만들어 버린 오진 일이 생각이 났고 저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계단아래 틈새 마당에서 구원 먹던 삼겹살 냄새가 솔솔 나는 것 같습니다.
-
숯불 담당이었던 지성이 아빠는 미국이민에 잘 정착했을 것입니다.
이태원 초등학교 다니던 에스더가 아마도 4학년 때부터 전성기를 구가했을 것입니다.
네 번째 집을 찾기 위해 백(Backward)까지 하면서 둘러보았는데 결국 찾지 못한 것은
집터 자체가 바뀌어서 그런 걸 것입니다. 이 건희 회장 네 집 국기 게양대도 없고,
-
20m아래 담쟁이 넝쿨도 보이지 않았어요. 이태원 교회 구멍가게 앞에서 에스더가
남자 친구랑 대낮에 나란히 걸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뒤따라간 기억도 생각이 납니다.
그때는 그것이 무슨 큰 일이라고 설레발을 쳤습니다. 우리 아이가 설익은 연애질을 해서
그런지 몰라도 정작 28살이 돼서는 도대체 연애는 담을 쌓고 사는 것 같아 적잖이 속을
-
끓고 있습니다. 아빠 생각에 결혼은 9살 아래인 우리 예주가 먼저 갈 것 같습니다.
이 집에 살 때 에스더가 한강 중학교에서 서울예고 플래카드를 올렸을 것입니다.
저는 맹부삼천지교부터 바자회, 환경정리, 축제, 등등 완전 원조 바지바람을 일으키며
재미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강남 아줌마들과 묘한 동변상련이 있습니다.
-
개인적으로 치맛바람이나 바지바람을 욕하고 싶지는 않아요. 강남아줌마 그래이.
후암동 시장에 차를 대고 김밥 집을 찾은 것은 노스텔지아가 발동한 것입니다.
종근당 깁밥 보다야 못하지만 먹을만 합니다. 김밥 한 개에 3500원입니다.
하루 평균 100개면 매출이35만, 월수입 1500입니다. 남의 집 매출 두둘기는 것도
-
습관입니다. 떡집에 들려 점심대용 약밥, 과일 떡, 물. 소보로 빵,커피를 사서 선탑
홀더에 놓고 예주를 픽업한 시간은 Am8시45분입니다. 얼굴이 좋아보여서 다행입니다.
내비가 시끄럽다며 재잘대는 예주는 지금 수험생이 맞는지 모를 만큼 쉬지 않고
떠들어댔지만 저 나름대로 긴장을 덮어보려는 술책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
‘킨 텍스 제2주차장’ 간판이 보이면서 차가 막히기 시작했고 시간이 충분해서 조급증은
발동하지 않았습니다. 지상으로 나오면서 수험번호를 확인하려는 학생들로 붐볐는데 개의치
않고 고사장까지 릴렉스하게 걸어갔습니다. 11시험, 9시50분부터 입실을 하더이다.
-
와우, 살아있네. 이런 분위기 오랜만입니다. 저는 한 2000명 정도 예상했고 만
공예1000명, 디자인1000명, 조소,서양화1000명 학부형2000명 적게 잡아도 한
4,000명쯤 모인 것 같았어요. 마지막 준비물 체크 하고 모퉁이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
주여, 침착하게 준비한 만큼만 시험을 치르게 해주시고 예주가 시험을 통해서도
믿음을 배우게 해달라고 약간 세게 순복음스타일로 말입니다. 아-싸. 에스더 때는,
매번 현장에 가면 떨었던 것 같은데 예주는 막상 와보니 아무렇지도 않은 이유를
혹시 아시나요? 어쩌면 큰 아이가 오래했고, 잘해서, 더 떨렸을 것입니다.
-
오래했고, 잘하는데 왜 떨릴까? 이 역시 아는 사람만 알 것입니다.
서울대 서양학과는 수능 미달 자를 가만해 1차에 7배수를 뽑기 때문에 한예종에
비해 덜 긴장해도 되지만 수험생들 입장에서는 안 떨리는 시험이 없을 것입니다.
6시간 후에 CU앞 픽업을 약속하고 입실하는 딸내미 뒤 모습은 프레리 우먼입니다.
-
어쨌거나 바라보는 부모 심정을 예체능 시험을 치러본 분들만 알 것입니다.
10시 반쯤 에스더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기집 애가 계속 불안하게 말을
하는 것은 추후에 충격을 완화해보겠다는 뜻이겠지요. 재수를 할 때 하더라도
떨지 않고 준비한대로 시험을 치르는 것도 능력이니 그 일만 잘하기를 응원한다고.
-
작은 아이를 고사장에 들여놓고 아빠는 pc방에서 시험을 치렀고 1시간 반쯤해서
다시 킨텍스 제8고사장을 찾아갔습니다. 지독한 양반들이 여지껏 기다린 모양입니다.
5시가 까워지면서 500명, 다시1000명쯤 제2킨텍스8고사장을 에워싸기 시작했어요.
다 제 나이 또래거나 저보다 나이가 적은 40-50대 부모님들입니다.
-
찬찬히 표정 스캔을 해 보니 대체적으로 컨트리 스타일이고 올드해보였는데 왜
홀앗이인 제가 주제파악을 못하고 어깨가 으쓱해지는지 아시나요? 정답, '속없는 놈'
신발은 여전히 나이키가 대세가 아닙니까? 큰딸도 저도 나이키마니아입니다.
5시15분쯤 아이들이 포토라인을 들어서자 누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다들 월드컵
-
박수를 쳤어요. 뭐야, 박수칠때 떠나라는 거야? 헐. 우리 공주가 내 아이 포커스에
잡힌 것은 거의 모든 학생들이 다 빠져나온 시간입니다. 어깨는 축 쳐졌고 물통도
가방도 버거워보입니다. 제가 이러다 명대로 못 살 것 같습니다. 아이 데리고
석관동 한예종을 가는 길입니다. 스피커 폰을 켰습니다. "언니 나야" "끝났어?"
-
"지문이 뭐였니?" "몰라, 망했어" "수채화는 괜찮은데 소묘가 완전구렸어"
"니가 뭘 알아" 예주말을 종합해보면 총 6시간 중에 수채화는 2시간을 하고 나머지
4시간을 소묘에 공을 들였는데 자기 생각에 소묘가 전체적으로 톤이 약해서
포커스가 없다는 말같았습니다. 예주가 알려준 2019년 서양화과 지문입니다.
-
1.소묘
-주어진 이미지의 조형적 특징이 드러나는 건축물을 그리시오.
-건축물의 내부와 외부가 함께 보이도록그리시오.
-배경을 포함하여 그리되 건축물과 배경 모두 사실적으로 그리시오.
-인물은 그리지 마시오.
2.수채화
-주어진 이미지의 조형적 특징을 손의 형태와 동작에 적용하여 그리시오.
-손의 개수와 배경을 자유롭게 그리시오.
-손의 형태와 비례를 과장 외곡 변향하지 마시오.
(제시물)
-
예주가 어떻게 소묘배치를 했는지, 수채화 주제구에 파란색 컬러를 사용했는지
30분 정도의 질의응답이 계속 되는 동안 저는 숨을 죽이고 경청을 했습니다.
원장 언니가 소묘는 '문제 해석 능력과 공간 표현 능력'을 보는 것이고, 수채화는
'색채 표현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결론적으로 서울대미대는 외워서
-
그리는 입시 미술학생을 거르려 할 것이고, 농촌학생의 입학을 지향하니까
드로잉처럼 나온 게 더 났다는 말입니다. 원장 언니의 말을 듣고서야 저도 예주도
기분이 살아나는, 아니, 업되고 있었습니다. 어느 학원? 뉘집 여식인지 똑소리가 납니다.
내 일찍이 이런 인사이트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면 어쩔 것이여? 연병, 뭣이 중헌디.
-
설민석이 뺨맞고 가겠어요. 수랩미술학원 그레이. 에스더 리스펙트.
두 딸내미를 좌청용우백호로 대동하고 동대문 종합상가 '대전집'을 찾아갔습니다.
약채곱창4인분, 맥주1병, 사이다1병, 공기밥1개 56.000원이 나왔습니다.
큰 딸내미가 계산을 하겠다는 걸 스톱시키고 제가 현금 결제를 했습니다.
-
남자들이 만나면 군대 이야기 하는 것처럼 큰딸내미랑 하는 날라리 이바구는
시간가는 줄 모를만큼 재미가 있습니다. 민정이, 유순혜, 아름이, 주애 그리고
카페 서빙하는 녀석이 에스더보다 어린 녀석이라는 것까지 소재가 끝이 없네요.
"아빠 1만시간의 법칙이 맞는 것 같아요.""싸움, 운전,성경의 공통점이 뭘까?"
-
"확장성 아닐까요?" "나는 인문학으로 봐"
확실히 아비는 자식새끼가 웃어야 살맛이 나는 것 같습니다.
큰아이는 더 이상 가르칠게 없어 제가 겸손히 배우고 있습니다.
상대를 객관적으로 보고 목표를 인-풋 하는 능력은 가이 수준급입니다.
-
1년 상간인데 헬퍼를 대하는 느낌입니다. 이제 에스더는 든든한 제 동역자입니다.
제가 소망하는 가장 좋은 플랜은 예주가 수랩학원을 물려받고 학원을 밑천으로
두 딸내미 모두 교수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 뽀바이가 시금치 한 통을
-
들여 마시는 기분이 아닙니까? 아, 아름다운 밤입니다. 애들아, 이병헌, 마동석,
방탄소년단의 공통점이 뭔줄 아니?
We have to speak English(우리는 영어를 해야 돼).We can speak English.
2018.10.3.wed.사랑하는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