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송가 금지곡 제1호 * 오늘은 민족운동가이셨던 남궁 억 장로님을 살펴봅니다. 그는 고향에 내려와 일하면서 할 일은 태산 같은데 일꾼이 부족함을 탄식하여 1922년 그 유명한 찬송가 371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라는 찬송가를 지었는데 일본 제국주의가 애국성이 농후하다고 해서 부르지 못하게 하여 이른바 찬송가 금지곡 제1호가 된 것입니다. 그는 무궁화 동산에서 무궁화와 더불어 살다가 가신 분이었고 지금도 우리들 가슴 속에 무궁화와 함께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그는 1863년에 서울의 정동에서 외아들로 출생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일찍 잃고 고생스럽게 자랐으나 재질이 남보다 뛰어나 어깨 너머로 사서와 삼경을 통달하였고 1883년에 관립 영어학원에서 공부한 후 1886년부터 벼슬을 시작하여 내부 주사로 어전 통역관, 외국사절단의 서기관, 궁내부 별군직, 경상도 칠곡부사로 있다가 1895년 내부 토목국장으로 들어와 오늘날의 종로통과 정동의 거리를 확장하였고 탑골공원도 건설하였습니다. 의병들을 무마하기 위한 선무사로도 활약했으나 갈팡질팡 하는 나라를 구출하기 위해 그는 벼슬길을 떠나 독립협회의 수석 총무로서 다른 차원에서 나라를 위해 일하게 되었습니다. 1897년에는 황성신문도 창간했으며 을사보호조약 후 큰 충격을 받고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인재 육성에 있다고 믿어 현산학원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하였습니다. 1908년에는 최초로 교육월보를 창간하였고 한일합방이 되자 1911년 배화학교 선생으로 들어가 기독교 여성교육에 전적으로 몸 담게 되었습니다. 그는 영어를 가르치다가 틈만 나면 한국역사를 가르쳤고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무궁화꽃을 가지고 삼천리 금수강산을 수를 놓게 하고 태극기도 그렇게 수놓게 하였습니다. 그는 독립협회 시절 윤치호를 통해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1918년 휴양을 위해서 낙향할 때 종교교회의 본처 전도사(장로)였다는 것을 보면, 1910년대는 교회에서 인정하리 만큼의 신앙인이었습니다. 1918년 그는 극도의 건강 악화로 서울에 머물러 일할 수 없게 되자 영원한 고향이 될 강원도 홍천군의 모국으로 낙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먼저 교회를 세웠고 평일에는 교회에서 학원을 열었습니다. 이 때 찬송가 371장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이라는 찬송가를 지은 것입니다. 그는 동사략 이라는 역사책 5권과 동화체로서 조선 이야기 5권을 저술하였고 조선어보충, 조선어문법 등을 저술하였습니다. 이 모든 책들이 애국충성에서 저술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밭 수천 평에다 무궁화 묘목 밭을 만들고, 학생들로 가꾸게 하고 해마다 수십 만 주씩 길러, 전국 기독교 학교와 교회 및 기독교단체 또는 가정에 분배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궁화는 우리나라의 국화로서 계속 피어나는 것처럼 역사가 바로 그와 같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일제는 1933년 11월 그를 체포하였고 그는 5번이나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수많은 애국자들이 변절하고 소리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으나 그는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아니하였습니다. 1936년 74세의 노쇠한 몸으로 옥중에서 병들어 보석된 후, 1939년 4월 5일 77세 때 주님품에 안겼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참으로 많은 일을 한 장로였습니다. 할 일 많은 이 세상 일꾼이 부족한 때에 교회와 나라를 위해 정말 일을 많이 하였습니다.
오늘은 민족운동가이셨던 남궁 억 장로님을 살펴봅니다. 그는 고향에 내려와 일하면서 할 일은 태산 같은데 일꾼이 부족함을 탄식하여 1922년 그 유명한 찬송가 371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라는 찬송가를 지었는데 일본 제국주의가 애국성이 농후하다고 해서 부르지 못하게 하여 이른바 찬송가 금지곡 제1호가 된 것입니다. 그는 무궁화 동산에서 무궁화와 더불어 살다가 가신 분이었고 지금도 우리들 가슴 속에 무궁화와 함께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그는 1863년에 서울의 정동에서 외아들로 출생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일찍 잃고 고생스럽게 자랐으나 재질이 남보다 뛰어나 어깨 너머로 사서와 삼경을 통달하였고 1883년에 관립 영어학원에서 공부한 후 1886년부터 벼슬을 시작하여 내부 주사로 어전 통역관, 외국사절단의 서기관, 궁내부 별군직, 경상도 칠곡부사로 있다가 1895년 내부 토목국장으로 들어와 오늘날의 종로통과 정동의 거리를 확장하였고 탑골공원도 건설하였습니다. 의병들을 무마하기 위한 선무사로도 활약했으나 갈팡질팡 하는 나라를 구출하기 위해 그는 벼슬길을 떠나 독립협회의 수석 총무로서 다른 차원에서 나라를 위해 일하게 되었습니다. 1897년에는 황성신문도 창간했으며 을사보호조약 후 큰 충격을 받고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인재 육성에 있다고 믿어 현산학원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하였습니다. 1908년에는 최초로 교육월보를 창간하였고 한일합방이 되자 1911년 배화학교 선생으로 들어가 기독교 여성교육에 전적으로 몸 담게 되었습니다. 그는 영어를 가르치다가 틈만 나면 한국역사를 가르쳤고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무궁화꽃을 가지고 삼천리 금수강산을 수를 놓게 하고 태극기도 그렇게 수놓게 하였습니다. 그는 독립협회 시절 윤치호를 통해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1918년 휴양을 위해서 낙향할 때 종교교회의 본처 전도사(장로)였다는 것을 보면, 1910년대는 교회에서 인정하리 만큼의 신앙인이었습니다. 1918년 그는 극도의 건강 악화로 서울에 머물러 일할 수 없게 되자 영원한 고향이 될 강원도 홍천군의 모국으로 낙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먼저 교회를 세웠고 평일에는 교회에서 학원을 열었습니다. 이 때 찬송가 371장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이라는 찬송가를 지은 것입니다. 그는 동사략 이라는 역사책 5권과 동화체로서 조선 이야기 5권을 저술하였고 조선어보충, 조선어문법 등을 저술하였습니다. 이 모든 책들이 애국충성에서 저술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밭 수천 평에다 무궁화 묘목 밭을 만들고, 학생들로 가꾸게 하고 해마다 수십 만 주씩 길러, 전국 기독교 학교와 교회 및 기독교단체 또는 가정에 분배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궁화는 우리나라의 국화로서 계속 피어나는 것처럼 역사가 바로 그와 같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일제는 1933년 11월 그를 체포하였고 그는 5번이나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수많은 애국자들이 변절하고 소리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으나 그는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아니하였습니다. 1936년 74세의 노쇠한 몸으로 옥중에서 병들어 보석된 후, 1939년 4월 5일 77세 때 주님품에 안겼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참으로 많은 일을 한 장로였습니다. 할 일 많은 이 세상 일꾼이 부족한 때에 교회와 나라를 위해 정말 일을 많이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