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투자, ESG에 대한 관심 증가
‘불경기에는 죄악주(罪惡株)를 사라.’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주식시장의 속설입니다. 경기가 나빠지면 술, 담배, 도박 등 사회 통념상 인간의 신체와 정신에 해악을 끼칠 수 있는 기업의 매출과 이익이 좋아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금년에는 코로나19 불황에도 불구하고 이 속설이 빗나가고 있습니다. 미국 다우지수는 최근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거의 회복했고, 나스닥지수는 심지어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으나 세계적 담배회사인 필립모리스의 주가는 -5% 내외로 여전히 부진하고 대표적 카지노 주식인 MGM Resort International은 -30% 내외로 회복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겁니다(물론 모든 죄악주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죄악주들의 부진과 달리 소위 ‘착한 투자’라 할 수 있는 ESG 투자는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ESG 투자는 환경(Environmental),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 등 세 가지 기준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기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것으로 몇 년 전부터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아 가고 있습니다.
ESG 투자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외부경제(external economy) 효과가 큰 투자입니다.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투자이나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남이 할 경우 그 투자의 이익을 함께 누릴 수 있으므로 결과적으로 아무도 하지 않는 투자가 될 가능성이 큰 분야이죠. 이를 해결하기 위해 ESG 투자를 장려하는 국제적인 노력이 있어 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회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노력이 지속되었는데 최근 국제금융시장 투자자들의 관심이 증가한 것도 이런 노력의 결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SG 투자의 시작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코피 아난은 전세계 주요 기관투자자의 최고경영자 50여명에게 서한을 보내 유엔이 후원하고 국제투자공사(IFC) 및 스위스 정부가 지원하는 사회적책임투자 관련 공동 이니셔티브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 공동 이니셔티브는 그 유명한 “Who Cares Wins” 보고서를 발간하여 자본시장에 환경·사회·지배구조 요인을 가미하면 기업의 입장에서 의미 있는 비즈니스가 되는 동시에 보다 지속가능한 시장을 만들고 사회적으로도 더 나은 결과를 이끌어낸다는 점을 설파하였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2006년 4월 27일 유엔은 세계적인 기관투자자들과 함께 뉴욕증권거래소에서 ‘사회적책임투자원칙(Principles for Responsible Investment : PRI)을 발표했습니다. 책임투자란 투자 의사 결정에 있어서 대상 기업의 재무적 리스크 뿐만 아니라 비재무적 리스크까지도 고려하는 개념으로 유엔과 주요 기관투자자들은 환경(E), 사회(S), 지배구조(G), 즉 ESG를 PRI의 핵심으로 제시했습니다. 이로써 ESG는 투자 대상 기업이 직원, 고객, 주주, 환경에 얼마나 기여하는 지와 얼마나 투명한 기업지배구조를 가지고 있는 지를 평가하는 척도로서 기관투자자들의 투자 의사 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ESG 투자는 책임투자의 지평을 넓힌 것으로도 평가됩니다. 과거 책임투자가 종교적·윤리적 성격이 강했다면 이제는 투자자가 직접 개입하여 기업의 긍정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행동주의까지 포함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수익 극대화를 위해 기관투자자의 수탁자 책무(fiduciary duty)를 강조했다는 점도 전통적인 책임투자와는 차별화됩니다.
투자 규모 빠르게 증가, 수익률도 양호
전세계적으로 ESG 투자 규모는 유엔 PRI 서명 기관 수와 글로벌 지속가능 투자연합(Global Sustainable Investment Alliance, GSIA)이 발표하는 글로벌 지속가능 투자자산 규모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유엔 PRI 서명 기관은 2006년 100여 곳에서 금년 4월 3천 곳을 넘었습니다. 매해 평균적으로 200개 기관이 새롭게 서명한 셈인데요, 특히 2017년부터 증가세가 가팔라지고 있습니다. (※ PRI는 일종의 네트워크로, PRI의 책임투자 원칙에 동의하고 이행을 약속하면 어떤 기관도 특별한 조건 없이 자유롭게 서명할 수 있습니다. 다만 서명한 기관은 매년 정기적으로 원칙 이행에 대한 현황을 PRI에 보고해야 하며, 보고가 불성실하거나 원칙 이행이 충분치 않을 경우 퇴출됩니다.)
GSIA의 글로벌 지속가능 투자자산 규모는 2018년 초 $30.7조로 2016년보다 34% 증가했습니다. 지역별로 보면, 유럽과 미국의 투자 규모가 $26.1조로 압도적으로 많으며, 일본은 $2.2조에 불과하나 2016년에 비해 4.5배 증가하며 급성장세를 나타냈습니다. (※ GSIA는 격년으로 투자자산 규모를 발표하고 있습니다. 2020년 자료는 2021년 4월에 발간될 예정입니다.)
한편 ESG 채권시장만 놓고 보면 금년 발행규모는 7월말까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5% 늘어나는데 그쳐 다소 부진한 모습입니다. 지난해 큰 폭(63%) 증가에 따른 기저효과 등의 영향으로 보이는데요, 다만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기업들의 소셜본드 발행이 전년동기 보다 400% 가까이 증가해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 소셜본드는 기본인프라 지원, 보건교육의료금융 등 필수 서비스 접근성 제고, 사회경제적 위기에 따른 실업 방지 및 완화 프로그램 등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내년에는 지난 7월 타결된 EU 경제회복기금 €7,500억 가운데 30%인 €2,250억이 기후변화 관련 자금집행으로 배정되어 있어 그린본드를 중심으로 발행물량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ESG 투자 수익률은 그동안 그렇게 좋다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만, 최근 코로나 19 사태를 지나면서 수익률이 개선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FT에 따르면 연초부터 4개월 간 S&P 500 ESG 지수는 S&P 500 지수를 0.6%p 상회했고, MSCI Emerging Markets ESG 지수도 비교대상인 동종의 비ESG 지수와 비교했을 때 0.5%p 높았습니다. 이처럼 투자 성과가 좋았던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자금유입이 크게 늘어 ESG 자산매입 증가 → 관련 자산 가격 상승 → 자금유입 확대의 선순환이 형성되었고, 더 나은 공급망과 지배구조를 위해 노력한 기업들의 주가가 코로나19 위기에 상대적으로 강한 회복력을 보였다는 점 등에 따른 것이라고 FT에서는 평가하고 있습니다.
ESG 투자, 지구를 살리는 해결사가 될 수 있을까
ESG에서 E(환경)가 첫 글자인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사회와 지배구조 모두 중요한 이슈이지만 환경은 인류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기후변화’라고 하면 지금 당장이 아닌 50년후, 100년 후 리스크로 보는 경향이 아직까지 강하지만, 최근 세계 곳곳에서 빈발하는 가뭄, 홍수, 태풍, 폭염, 한파 등 이상기후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당장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는 전세계에 맞닥뜨려진 공통의 숙제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차원에서의 공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2021년부터 발효될 파리기후협약은 2019년 미국의 탈퇴와 선진국과 신흥국 간 뿌리 깊은 의견대립 등으로 제대로 출범할 수 있을 지 조차 의심받고 있고, 각국의 얽히고 설킨 이해관계는 글로벌 협력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해결해야할 난제가 하나 둘이 아니어서 그런지 앞으로 갈 길이 멀게만 느껴집니다.
하지만 국제금융시장에서 ESG 투자가 증가세를 지속하고 있다는 점은 희망적입니다. 민간부문을 중심으로 기후변화 문제에 대해 기본적인 인식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년 10월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렸던 국제금융협회(IIF: Institute of International Finance)에서 한 발표자가 ESG에 대한 월가의 분위기를 전하면서 “지구를 지키면서 수익도 얻을 수 있는데 관심을 안 가질 수 없죠.”라고 언급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기업과 금융기관의 입장에서 기후변화 리스크, 즉 재난위험, 평판위험, 대출위험, 투자위험, 조달위험, 법적위험 등 6대 리스크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ESG 투자는 더 많은 관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사회적책임투자 규모는 2018년말 기준으로 약 27.8조원, 국내 자본시장 규모 대비 2%에 못 미치는 미미한 수준입니다. 유엔 PRI에 서명한 기관도 국민연금 등 극소수에 불과해 G20 일원으로서 민망합니다. 기후변화는 다른 위기와 달리 세대를 넘어 영향을 미치는 이슈인 만큼 ‘내일’이 아닌 ‘내 일’로 인식하고 ‘오늘’부터 당장 실질적 대비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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