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컴컴한 지하실 안. 지독하게도 어둡고 차가운 바람이 스미는 그곳을 흔히 감옥이라고 부른다. 땀이 질척한 얼굴로 실눈을 뜨고서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가장자리에 손을 더듬어 물을 찾았다. 햇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지하실 안은 5분만 있어도 땀이 비오듯 흐르고 등골이 오싹하다고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곤 했다. 흰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상처들이 오밀조밀 붙어있는 여자의 얼굴엔 알 수 없는 근심이 가득했다. 눈물을 흘릴 법도 한데 몸을 벽에 기댄 채로 작게 탄식을 내뱉는 여자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터벅 터벅. 곧이어 구둣 소리가 들려왔고 자물쇠를 따는 듯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일말의 움직임도 없이 시선을 한 곳에 모으는 여자.
“잘 잤나?”
“……”
“평온한 얼굴이군.”
아무런 말도 않는 여자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남자가 천천히 여자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더욱 가까워진 자리에서 여자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이윽고 여자의 고개가 돌아갔고 떨려오는 눈동자에서는 여느 여자도 이런 상황에서는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다는 걸 나타내는 듯 했다. 두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고 남자는 별안간 여자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나약한 여자의 몸은 구석으로 나가 떨어졌고 몸을 푹 숙인 채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 행동 모두가, 남자의 심기를 건드린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로.
“점점 상처가 아무는 얼굴은 원치 않아.”
“……”
“입 열어.”
“……”
“입 열으라고!”
남자의 목에 핏대가 세워졌다. 멍했던 눈빛에서 한결 맑아진 듯한 여자의 시선이 남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빛 속에는 강한 뜻이 담겨있는 듯 했지만 여자의 턱을 잡고 강요를 하고 있는 남자 앞에선 무용지물이였다. 분노로 일그러진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던 여자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살기 위해서, 이곳에서 꼭 살아 나가야만 했기에 그렇게 남자의 강요에 못 이기는 척 입을 열고 만다.
“말씀 하세요.”
“정말이지 까탈스런 계집이군.”
“……이름.”
“뭐라고 했나?”
좀처럼 남자와 같이 있는 시간에는 침묵으로 일관하던 여자가 피딱지가 앉고 다 부르튼 입술을 열었고 남자를 향해 똑바른 발음으로 말했다. 한동안 말을 하지않아 입이 뻑뻑했지만 저 남자에겐 무슨 말이든 하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다. 바로 그 날이 오늘이였다.
“이름을 알려줘요.”
“……왜지?”
“………죽는 날까지 저주할 수 있게.”
“……”
“료이치.”
희미한 비소를 흘리며 잡았던 여자의 턱을 거칠게 놓았다. 제법 생긴 얼굴에 훤칠한 키. 길게 내려온 앞머리가 일본 순사의 대표적인 이미지를 나타내주는 듯 했다. 흑갈색 눈동자가 작게 일렁였다. 짧은 순간이였지만 여자가 모르는 사이에 안쓰럽고 슬픈 눈동자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채령. 기억 해둬요. 언젠가는 다시 만날지 모르니까.”
“……이미 알고 있어.”
“……다시 태어난다면 당신같은 남자 절대 안 믿어요.”
“이름도 모르는 남자한테 정을 줘버린 네가 할 말이 그토록 많을 줄은 몰랐군.”
“항일 투쟁 속에서 당신을 만난 내가 참으로 어리석었어요.”
잔미소가 남자있는 료이치의 입가엔 어떠한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닫혀있던 문을 열고서 밥을 갖다 주는 아낙이 들어왔고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려 등을 돌리는 채령을 바라보던 료이치는 아낙을 지나쳐 빠른 걸음걸이로 지하실을 나갔다. 곧이어 따뜻한 김이 나는 밥을 놓고 아낙이 말 없이 나갔고 채령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아낙 조차도 자신을 동정과 가여움이 담긴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그를 만났고 남모르게 정을 줬고 남부럽지 않게 따뜻한 사랑을 받았었다. 우리 사랑의 종착지는 일본 순사가 들끊는 차디찬 취조실 안이였고 끝끝내 입을 열지 않는 날 흥미로운 시선으로 쳐다보던 료이치의 눈길을 잊을 수가 없다. 그동안 계획적인 만남 아래에서 난 그에게 길들여져 갔고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에 대한 신뢰로 이곳까지 제 발로 들어왔던 것이다. 이름 한번 불러준 적 없었지만 날 따뜻하게 안아주던 그의 품이 지금 이곳에서 조차도 그리운 것은 정녕 미친 것이다. 그에게 속았다.
“한번이라도 날 사랑한 적이 있었나요?”
“하찮은 조선 계집에게 그런 감정을 느꼈을 리가 없지 않나.”
앞에 놓인 밥그릇을 멍하니 쳐다봤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봤고 불현듯 꼭 살아서 나가야만 한다는 무언의 확고한 신념이 생겼다. 입 안으로 미친 듯이 밥을 꾸역꾸역 집어 넣으면서 좀처럼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은 얼굴을 타고 목까지 흘러내려 옷깃을 적셨고 무턱대고 집어 넣었던 밥알들이 뱃속에서 요동을 치는 듯 했다. 밥이 얹혀 더이상 목구멍으로 삼킬 수 없을 때까지 밥만 열심히 씹어 삼켰고 눈 앞에 그가 날 쳐다보며 비웃는 환상까지 겹쳐 보인다. 이겨 내야만 한다. 이겨 내야만 해.
정말 사랑했었다고. 잊지 못할 거라고. 배신이란 이름 앞에서도 당신을 마음 놓고 원망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스러워 보이나요. 당신의 앞에 꼿꼿히 서서 뺨이라도 세게 내려쳐야 정녕 내가 마음이 편할 거라 생각 했었죠. 내가 당신과의 사랑 안에서 그토록 많은 것을 원했던가요. 다시는 쉽게 마음을 품지 않을 겁니다. 당신같은 사람 앞에서 행복한 듯 웃음지었던 내가 바보였어요. 료이치.
미숙했던 사랑이라 마음 속에 간직 조차 할 수 없다는 걸, 당신은 알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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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스캔들에 한동안 푹 빠져 있었습니다. 제가 워낙에 즐겨봤던 드라마여서 다시 한번 진지하게 보았는데 참 여운이 많이 남더군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와요. T_T 경성스캔들이란 드라마에서 항일 독립 투쟁이란 배경을 얻었고 나여경이란 캐릭터에서 채령이를 얻었고 료이치는 누굴까요…? 그냥 일본인과 조선 여자를 모티브로 해서 소설을 쓰고 싶었답니다. 사실 소설은 이것보다 많이 긴데 다음 이야기가 더 관건이죠. 미숙했던 사랑 이야기와 그 결말을 써 나갈 예정입니다. 아직 반 밖에 못 썼어요T_T 뒷 이야기와 과거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코멘트 하나 정도는 남겨 주세요. 댓글이 안 달려도 전 올릴 겁니다, 뭐. 소설에 대해 짤막한 궁금증이나 오타 지적해주실 분들은 댓글로 남겨주세요. 쪽지는 잘 못 봐요. T_T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채령이란 캐릭터로 ‘배신’이란 감정을 표출하고 싶었다는 것만 알아 주세요. 다음 이야기 때 뵈요.
첫댓글 료이치는. 이강구같은느낌이들어요.ㅅㅅ 이강구는일본인은아니지만요..;저도 경스되게좋아하는뎅ㅋㅋㅋㅋ다음이야기너무기대되요
아이런스타일넘조아요소설..^6^다음편얼른써주세요
진짜 궁금해요!! 저도 이런스타일 소설 좋아하는데.. 설마 이강구같은 찌질이가 남자주인공의 모티브는 아니겠죠!? ㅎㅎ
아.....다음편 빨리 보고싶군녀 ....저두이런스톼일조아여
담편 빨리용
와~저도 경스에 푹빠져서 강지환한테 빠졌다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이게 아니군뇨..무튼 잘봤어요 이런 소설 디게 좋아하는데ㅋㅋㅋ정말 적과의 동침인듯..<-..???? 무튼 다음번에도 나오면 꼭 보겠슴ㄷㅏ!!!!!!!!!!!!!!!11
저도 한때 경성스캔들에 푹 빠져서....결국엔 강지환씨 팬이 되버렸답니다ㅋㅋ 너무 재밌게 읽고 갑니다.
아아. 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요..과거이야기보다.............ㅋㅋ
슬퍼요ㅠㅠ.. 내친구도 경성스캔들 팬이였는데 저보고 꼭 보라고 했는데 귀찮아서 안봤는데 한번 봐야겠네요ㅋㅋㅋㅋㅋ
한때 경스에게 푹빠져 살았었는데 ㅋㅋ아~ 다음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요~~~~
경스보지는않았는뎁^.^너무재밌어요!
ㅠㅠ 남자도 그여자 사랑하는것 같던데ㅠㅠ 여자도 불쌍하고 남자도 불쌍해요ㅠㅠ 다 시대탓이지 뭐ㅠㅠ 여튼 다음편도 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