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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탕물 계시
저수지
<2008. 3. 31일 본 환상>
이 계시는
“하나님!,”
‘왜 맞지도 않는 계시를 내려 보내십니까!, 왜 펑크가 나는 계시를 내려 보십니까!”, 라고 기도를 하자 보여주신 계시이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시한부 종말론 자들 치고, 누가 하나님께서 맞지도 않는 거짓 계시를 내려 보내신다고,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세상이 다 변한데도, 이 말씀만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굳게 믿고, 그 많은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아가면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굳게 믿고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를 않고 펑크를 낸다면, 그 예언자가 얼마나 크게 당황을 하게 되겠는가!, 하나님께서 맞지도 않는 거짓 계시를 내려 보내신 다고야,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그 말씀을 굳게 믿고, 그 많은 박해를 받아가면서 예언을 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전한 말씀이 맞지를 않고 펑크를 내다니!,
하나님께서 펑크를 내시다니!,
그 답답함!,
그 당황함!,
그리고 그 허탈감!,
목숨을 건 그 예언이 빗나가다니!, 생애를 걸고 전한 복음이 빗나가다니!, 도대체가 하나님께서 그런 계시도 내려 보내실 수가 있는 것인가!
와,
그 답답함!,
그 당황함!,
그리고 그 허탈감!,
하여튼
텅 빈 가슴을 안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다.
“하나님, 왜 맞지도 않는 흙탕물 같은 계시를 내려 보내십니까!”
이때다.
환상이 보인다.
작은 저수지 이다.
사방이 들판이고 넓은 들판 한 복판에 작은 저수지 하나가 있다. 저수지라야 겨우 백여 평 될까, 아니면 그보다 두 세배 정도 더 될까? 저수지라는 말보다는 웅덩이라고 보는 것이 낳을지 모른다.
하여튼
큰 저수지는 아니다. 그런데 이 저수지가 사방 밭으로 둘러싸였다. 바짝 마른 밭으로 둘러 싸여있다. 밭의 흙을 보니까, 아주 완전 모래땅이다. 저수지만 곁에 없다면, 이런 밭은 그대로 두면, 순식간에 황무지로 변해 버리고 말 땅이다. 이런 밭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농부가 꾀 힘이 들것 같다.
그나마
곁에 저수지가 하나 있어서 다행이다. 저수지의 물이 끓이지 않고 물을 흘리고 있어서, 밭고랑 사이사이로 흐를 수 있는데다, 밭의 모래밭 속으로도 흙과 흙 사이로 얼만가 목을 축여주고 있어서, 농작물이 자라는데 여간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물이 틀렸다.
좀 썩은 물이다. 맑지를 못하다. 흐리다. 약간 푸르스름한 것이 마치 휘발유처럼 기름기가 흐른다. 멀리보기엔 휘발유라기보다, 오히려 모빌유라고 보인다. 완전 흙탕물이다. 사방 모래밭에서 항상 모래바람이 몰려와가지고, 웅덩이의 물을 흙탕물 천지로 만들어놓기 때문이다.
썩은 물인지 기름 물인지 영 맘에 안 든다. 꼭 흐릿한 모빌유를 저수지에 가득히 부어 놓은 것 같다. 아무리 보아도 답답하다. 생수가 아니다. 맑은 생수가 아니다. 맑은 강물과는 비교도 안 된다. 흐르는 시냇물과는 비교도 안 된다. 탁하고 탁한 흙탕물일 뿐이다.
그나따나
이 밭에 이 저수지가 하나 있는 것이 다행이다. 이 저수지라도 없다면, 이 밭은 당장 모래사장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곳은 동쪽으로나 서쪽으로나 어디를 보아도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막뿐, 어디 물이라곤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는 곳이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모래사막이 끝없이 펼쳐져있을 뿐, 물이라곤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는 곳이다. 만약 이곳에 이 웅덩이 물이 없다면, 이 들판은 반드시 모래바람만 부는 사막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썩은 물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 근처의 밭들은 그래도 이 물로 지탱하며, 옥수수를 맺고, 감자가 자라고, 그리고 밀과 보리가 자라고 있다. 그리고 각종 채소들이 자라고, 모든 곡식들이 주렁주렁 열매를 맺으며, 충실하게 알곡들을 산출해 내고 있다.
이 물이 없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이 물이 탁한 흙탕물로 보일지 몰라도, 이 물로 말미암아 주변의 모든 밭에서 충실한 열매를 맺고 있다. 참외며, 수박, 그리고 도마도, 포도, 또 고구마, 고추, 가지, 오이, 콩, 수수, 등등, 끝없이 펼쳐진 사막 가득히, 이루 말할 수 없는 곡식 들이 충실한 열매들을 맺고 있다.
아무리
맑은 물이 라고 해도, 멀리서 흐르는 시냇물은 이 밭과는 상관이 없다. 멀리 잘 보이지도 않는 곳에, 아무리 생명강물이 흘러간다고 해도, 이 밭과는 상관이 없다. 이 밭에는 이 썩은 물만 못하다. 이 물로 모든 곡식들이 충실하게 알곡을 산출해 내고, 모든 과목들이 주렁주렁 열매를 맺혀낸다. 보이지도 않게 멀리 지나가 버리는 생명수 물과는, 비교도 안 된다. 뭐니 뭐니 해도, 이 밭에서는 이 탁한 흙탕물이 생명의 물이다.
탁한 흙탕물이 아니라 맑은 물이다.
생수다.
세상 최고의 물이다.
그리고
세상 최고의 약수다.
세상 최고의 양식이다.
무슨 뜻일까?
하나님께서는 가끔 탁한 흙탕물로도 농사를 지으실 때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 계시이다. 다시 말해서 맞지 않은 시한부종말론 자들의 예언으로도, 당대의 성도들을 양육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양계장
<2008. 3. 31일 날 본 환상>
양계장의 크기가 대략 글쎄, 어림잡아 넓이가 약 30평정도!,
높이가 대략 사람의 키로 두 키 정도로 꾀 높다. 재료는 통나무를 사용해서 직사각형으로 지어놓았다.
바로
물이 가득한 웅덩이 위에다 지어놓아서, 우선 시원한 물을 바라볼 수 있어서 좋다. 아무 때나 목이 마를 땐 얼마든지 시원한 생수를 마실 수 있어서 좋다.
더욱이
순 통나무만 사용해서 집을 지어놓았기 때문에, 닭들에게는 시멘콘크리트보다 질감이 아주 그만이다. 아무래도 닭들에게는 콘크리트보다는 나무가 정감이 가기 때문이다. 한 아름들이 굵직굵직한 통나무들을 사용해서, 양계장을 아주 튼튼하게 잘 지어놓았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지붕이 없다. 지붕이 뻥 뚫려서 따듯한 태양을 직접 받을 수가 있게 되어있다.
19년 동안이나 창문 하나 없는,
빠삐용 감옥 같은 지하실에서 살아온 내가 보기에는, 하늘의 태양을 직접 받을 수 있게 지어진 양계장이, 얼마나 시원하고 위생적으로 보이는지 모른다.
태양이 따끈따끈하게 비취니, 저절로 모든 세균들이 살균이 된다. 그런데다 사방에 담벼락도 없다. 그저 통나무사이로 틈새가 듬성듬성 있어서 사방으로 바람이 시원하게 통한다. 바로 아래로는 흙탕물이기는 하지만, 풍부한 저수지의 물이 솟아오르고 있어서, 목이 마를 땐 언제든지 내려가서 물을 원대로 퍼 마실 수가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빠삐용 감옥 같은 지하실과는 비교도 안 된다.
그리고 직사각형으로 되어있는 사방에는, 이곳저곳에 통나무들이 나란히 얹혀 있어서, 닭들의 특성에 맞게 나무에 나란히 앉아있기 편하게 만들어져 있다. 이렇게 나란히 박혀있는 통나무위에 큼직큼직한 암탉, 수탉들이 나란히 앉아있다. 통나무들 위에 한 치의 여유도 없이 촘촘히 박혀 앉아있으면서, 당장이라도 알을 낳을 자세로 암탉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무슨 뜻일까?
흙탕물을 먹고서도 닭들이 토실토실하게 잘 자란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이 닭들은 바로 밑에 있는 웅덩이의 흙탕물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이 흙탕물이 없으면 이 많은 닭들이, 이 넓은 사막 한 복판 어디에서 물 한 모금 얻을 수가 있을 것인가!,
시한부 종말론 자들
이제까지
수많은 시한부 종말론 예언자들이 시한부 종말의 날을 예언했다. 그렇지만 그 수많은 예언자들의 예언이 한 번도 맞은 적이 없다.
왜일까!?,
그 예언자들은 사탄에게 속아서 종말의 날을 예언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들의 말대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그대로 전했는데도 예언이 맞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계시를 똑바로,
정말로 분명히 하나님의 계시를 정확히 받고 전했다면, 과연 그 계시가 빗나갈 수 있을까!, 정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가 맞지 않고 펑크를 낼 수 있을까!,
우리는 생각도 해 볼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분명한데도 그 계시가 펑크를 냈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가 없는 일이다.
나는 실제로 시한부 종말론 예언자들과, 한두 번 전화 통화를 해 본적이 있다. 전화를 하기 전, 나의 감정이 어떠했겠는가!, 거짓 예언을 한 사람이니까, 얼마나 음흉하고, 가증한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들일까!,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전화벨을 울렸다.
찌르릉, 찌르릉!,
“여보세요!,”
“익크!,”
“아니!,”
무엇보다 나는 그 보들보들하고 나긋나긋하면서도, 솜사탕처럼 고운 목소리에 놀랐다.
“여보세요. 안녕 하십니까!” 하고 대화가 시작 되었는데, 정말이지 놀랐다. 내가 생각한 그 음흉하고 궤휼에 능한 그런 사람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궤휼에 능하다니!,
도리어 우리가 보는 보통 목사님들보다도, 두 배, 세배, 어쩌면 그보다도 더 곱고 따듯한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런 사람은 땅바닥에 만 원짜리 돈이 떨어져 있어도, 성큼 줍지를 못할 분들이었다.
성격이 어찌나 고왔는지,
대화를 하는 동안, 마치 예수님의 동생쯤 되는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곱고, 부드럽고, 악이 없고, 욕심이 없고, 사심이 없고, 희생적이며, 헌식 적이고, 그러면서도 믿음이 있고, 정말이지 예수님의 동생쯤하고 대화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두 번째로 대화를 한 사람은
여자 예언자였는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나이가 30대 후반의 여자 분이었는데, 어찌나 마음이 곱고 천진스러웠는지, 마치 5살짜리 어린아이와 대화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린 아이처럼, 천진스럽고, 착하고, 곱고, 귀엽고, 예쁘고, 순하기만 한, 정말이지 믿음을 가진 분이었다. 그의 마음은 흰 눈 덮인 벌판, 하얀 벌판, 눈 덮인 산야, 티끌 하나 없는 하얗고 하얀 들판 그대로 이었다. “이런 분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예언을 했다니!”, 정말이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좀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런던 올림픽 때의 일을 기억할 것이다. 북경 올림픽 전이니까 지금부터 대략 15년 정도는 된 것 같다. 그때 마라톤 대회가 한창 열리고 있을 때였다. 두 시간 반의 코스를 다 돌고, 선두를 달리고 있던 선수가 골인지점에서 흰 테이프를 막 끊기 직전이었다. 2등으로 들어오고 있는 선수는, 저 멀리 뒤따라오고 있었고, 선두로 들어온 선수가 막 흰 테이프를 끊기 직전의 숨 막히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바로 몇 초를 남겨놓고 어떤 남자가 갑자기 도로로 뛰어들어서, 선두로 진입한 선수를 와락! 끌어안아 버리고 말았다. 순간 적이었다. 어디선가 이상한 남자가 불쑥 라인 안으로 뛰어들어서, 선두로 들어오는 선수를 와락 끓어 안아 버리고 말았다. 주변은 난리가 났고, 사람들이 미친놈을 잡이라고 아우성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부리나케 경찰이 달려들어서 그 사람을 체포를 해 버렸고,
이때
그 선수를 끌어안은 사람에게, 매스컴 기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카메라를 들이대며 질문들을 던져댔다.
“왜 1등으로 들어오는 선수를 끓어않았습니까!”,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저는 시한부 종말론을 전하는 예언자입니다. 앞으로 며칠 후, 그러니까 몇 월 며칠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게 되는데, 사람들에게 아무리 이 일을 전해도 듣지를 않기 때문에, 지금 전 세계 매스컴이 집중된 자리에서,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좀 무리한 짓을 했습니다.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 대신 오늘 1등 하지 못한 분에게는, 그보다도 더 많은 축복으로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줄로 믿습니다. 정말로 그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과를 드립니다!.”
와,
정말이지!,
그 종말론 예언자가 얼마나 성령님의 감동으로 뜨겁게 닳아 올랐으면, 그런 무리한 일까지 저질렀겠는가!, 얼마나 성령의 감동으로 온 몸이 달아올랐으면, 그 어마어마한 일을 다 저질렀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까지 충성스럽게 복음을 전했는데도!, 그 날짜에 예수님은 오시지를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정말로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전했는데도!,
감옥에 들어가는 것도!,
사람들에게 매를 맞아 죽을 것도 각오하고, 복음을 전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그 날짜에 오시지를 않은 것이다.
왜 그의 예언은 빗나갔을까!,
그가 하나님의 예언을 잘 못 받았기 때문일까!, 혹 사탄에게 속아서 거짓 예언을 했기 때문일까!,
만일 그 예언자가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면, 그의 예언은 왜 맞지를 않았을까!,
그 답변을
나는 성서에서 천천히 찾아보고자 한다.
예수님의 예언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 들도 있느니라.” 마16:28
‘볼 자들도’
라는 말씀 속에는, 대개는 늙어죽고, 몇 사람만 본다는 뜻도 내포 되어있다. 결국 20~50대 사람들이, 살아있을 기간인
20~30년 내에 일어날 일은 아니란 말씀이다.
또
20~50대 사람들이 조금은 살아 있어야 됨으로, 앞으로 40년이나 50년 후에 될 일도 아니다. 하물며 2,000년 후에 될 일은 더욱 아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30~ 40년 후에는 반드시 재림을 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가!,
그 30~ 40년이란 기간이 30~40번도 더 지났는데도!, 심지어 2.000년이나 지난 오늘까지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재림하시지를 않고 계신다. 좀 심하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그 예언을 크게 펑크를 내신 것이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마10:28
이스라엘
동네를 다 다니기 전이므로, 내일이나 모래 잃어날 일은 아니다. 더욱이 이스라엘 동네를 다 돌아다니는데, 2,000년이나 걸리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2,000년 후에 될 일은 더욱 아니다.
또
제자들이 이스라엘 동리를 돌아다니고 있을 때, 주님께서 오셔야 되기 때문에,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등 제자들이 살아있을 동안에 재림을 하셔야 된다. 최소한 40년~50년 안에는 반드시 재림을 하셔야 된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과연 예수님께서 이 약속을 지키셨는가!, 이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 졌는가!,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마23:35
분명히
다 너희에게 돌아간다고 했다. 100년 후 또는 2,000년 후 시대에 될 일은 아니다. 이 시대다. 베드로와 요한이 살아있는 동안에, 종말심판은 분명히 이루어 져야 된다. 그런데 어디 그대로 예언이 성취되었는가!, 예수님께서는 이 예언도 펑크를 내신 것이 아닌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 24:34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3일전 화요일 밤에, 감람산에서 베드로의 질문에 대답하신 말씀이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3제자가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아오리이까!,” 라고 질문을 하자 하신 답변이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제자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재림을 하시겠다고 굳게 약속을 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얼마나 확실한 일이면 “진실로” 라는 말을 서두에 넣었겠는가!,
그런데도
이 예수님께서는 이 예언도 역시 펑크를 내고 마신 것이다. 당시에 예수님께서는 재림을 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얼마나 당황을 했겠으며, 얼마나 크게 실망을 했었겠는가!,
베드로
더군다나,
베드로는 이 말씀을 굳게 믿고 사람들에게 가서, 주님께서 곧 오실 테니까 집과 땅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자고 설교를 했다. 그리고 그 설교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집과 땅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를 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렸는데, 그해 겨울이 다 지나도록 예수님께서는 오시지를 않았다. 집과 땅을 다 팔아서 구제해버린 사람들이, 집도 땅도 없이 그해 겨울을 얼마나 고생스럽게 지났겠는가!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들이 늙어죽을 때까지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다. 결과는 어떠했겠는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집과 땅을 몽땅 다 팔아서 구제를 해버린 성도들이, 가족을 데리고 몇 년을 참다못해, 베드로에게 왜 예수님의 재림이 이렇게 늦어지고 있습니까!, 라고 항의 질문을 하자,
베드로의 어설픈 대답,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8
자,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베드로에게 물어보자,
그렇지 않은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면 그렇지 않은가!, 하루가 천년 같다면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몇 천 년이 지나야 오실지 모르는데, 그렇다면 집과 땅은 왜 팔아서 바치라고 했는가!,
또
아무도 멸망치 않기를 바라신다면,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몇 천 년이 지나도록 오시지를 않을 텐데, 집과 땅은 왜 팔아서 바치라고 했는가!,
정말이지 베드로는, 답변을 하면 답변을 할수록 더욱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게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때 베드로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런 구차한 변명을 하며 당시의 성도들을 달래고 있었겠는가!,
왜일까!,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베드로의 시대에 다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시고는, 왜 그대로 이루시지를 않으셨을까!,
주님께서 재림하시지를 않았으니, 그 당시 집과 땅을 다 팔아서 구제해버린 성도들이, 일생동안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었겠는가!,
밤마다 교회에 가서 철야기도는 얼마나 했겠으며, 금식하며 울부짖는 기도는 얼마나 많이 했었겠는가!,
뿐만 아니라 교회내의 후진 일이란 일은, 이 사람들이 다 도맡아서 하지 않았겠는가!, 일생동안을 집도 땅도 없이 거지처럼 가난하게 살며, 눈물 흘리며, 금식, 철야기도를 하며, 전도, 봉사, 헌신의 생애를 평생 동안 보내지 않았겠는가!, 그들은 죽는 날까지도 하늘을 바라보며, 오직 예수님께서 오실 날만 바라보며 철저히 이 땅과는 구별된 신앙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이 세상 삶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올라갔을 것이다.
자,
그 후 2.000년이 지난 오늘, 오늘에 와서 그들의 총 생애를 다시 한 번 저울에 올려놓고 한 번 달아보자!.
그 당시 베드로의 예언을 믿지 않고, 집과 땅을 팔아 바치지 않은 사람들은, 일생동안 호위호식을 하며, 좋은 집에서 많은 전답을 가지고 부요하게 생활을 했을 것이다. 신앙생활보다는 이 세상사는 재미에 더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세월은 지나갔기 때문에, 지금은 그들이 다들 고인들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그들이 다들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아브라함의 품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당시 세상 적으로 살아온 사람들과, 베드로의 말을 듣고, 집과 땅을 다 팔아서 구제를 하고, 오늘이라도 예수님이 오실까하고 매일매일 하늘만 바라보며 살던 성도들 중, 누가 하늘나라에서 더 많은 상급을 누리며 살고 있을까!
과연 지금 그들 중, 누가 하늘나라의 영광의 자리에 더 깊이 들어가서 살고 있을까! 영광의 광체가 빛나는 하나님보좌 앞으로 누가 더 가까이 가서 살고 있을까!, 지금 이제 그들의 생애는 다 끝이 났다. 지금은 그들이 둘 다 하늘의 상급을 누리고 살고 있다. 그런데 누구일까, 하나남의 보좌 앞 영광의 광채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간 성도들이!,
당시의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집과 땅을 다 팔아 바치고 일생동안 위를 바라보며, 금식, 철야, 헌신, 봉사, 전도로 일생을 보낸 사람들일까!, 아니면 베드로의 설교를 믿지 않고 부요하게 세상 적으로 산 사람들일까!,
말할 것도 없다.
당시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집과 땅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를 해 버리고, 날마다 금식, 철야, 헌신, 봉사, 전도를 하면서 일생을 산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상급을 받아 누리며, 영광의 광채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서 살고 있을 것이다.
당시에는 베드로에게 속은 것이 좀 서운했을지 몰라도, 지금 그들은 하늘에서 많은 상급을 누리며, 당시에 베드로에게 속은 것을 감사하고 있을 것이다. 베드로가 그렇게 설교하지 않았더라면, 자기들이 그렇게 까지 일생동안 철야, 금식, 전도, 헌신, 봉사하면서, 날 마나 하늘만 바라보며 일생을 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당시에는 일생동안 베드로에게 속고 살았지만, 그 일생동안 속아서 산 삶이, 오늘날 하늘나라에서 그렇게 많은 상급을 누리며, 몇 천, 몇 억년 끝없이 영원한 축복을 누리며 살게 된 것이다.
지금
그들은,
당시 베드로에게 속은 것을 무한 고맙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도 그들은 베드로에게 감사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절대로 손해를 본 것이 아니다. 오늘이라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니까, 집과 땅을 다 팔아서 구제하자는 베드로의 설교에, 그들은 오늘도 당시에 그렇게 설교를 해준 베드로에게 감사를 드리고 있을 것이다.
과연
오늘 밤이라도 예수님께서 곧 오실지 모르니까, 우리는 집과 땅을 다 팔아서 구제를 하고, 하늘을 바라보는 생활을 하자는 베드로의 설교는, 당시에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설교를 믿고 그대로 일생동안 믿음으로만 산 사람들은, 지금 하늘에서 얼마나 많은 상급을 누리고 있는지 모른다. 당시의 베드로에게 얼마나 감사를 드리고 있는지 모른다.
오늘날도 그렇다.
매 시대마다,
이 베드로가 필요한 것이다. 베드로처럼 당시의 신자들을 일깨워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금식, 철야, 전도, 봉사, 헌신 하며 일생동안 살 수 있도록, 강력한 파워를 가진, 시한부 종말론 예언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 예언이 맞든 맞지 않던 상관없다. 매 시대마다 베드로와 같은 강력한 시한부 종말론 자가 나타나서, 그 당시의 성도들을 일깨워서,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생을 살며 하늘만 바라보는 생활을 하도록 도와주어야 된다.
그의 예언이 멎든 안 맞든 상관없다.
그리고 당시의 성도들은, 당시의 시한부 종말론 예언자의 예언을 듣고, 그대로 따라야만 된다. 그래야 세상을 다 살고 하늘에 올라갔을 때, 당시의 시한부 종말론 예언자에게 속은 것을 감사하며, 하늘의 상급을 누리며, 영광의 광채 앞으로 가까이 나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종말론 예언자의 예언이 맞지 않으면, 그대로 이단으로 몰아버리고 만다. 그렇지만 아니다. 정말로 시대마다 강력한 시한부 종말론 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당시의 성도들을 일깨워 주어야 된다. 왜냐하면 지금 세상에 살 동안은 세상이 귀한 것 같아도, 막상 하늘에 올라가보면 “아, 내가 왜 세상에 있는 동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을까! 하고 후회를 하기 때문이다.
결론 적으로
예수님의 예언도 맞지 않았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은, 무한한 깊이의 영적 뜻을 함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직설적으로 말씀하신“이 시대에 다 이루어진다.”는 예언은 맞지를 않았다.
베드로의 예언도 맞지 않았다.
사도요한, 바울, 그 외의 모든 사도들의 예언은 맞지를 않았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요엘, 미가, 요나,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치고 당시에 그 예언이 이루어진 선지가 몇 명인가!, 그들은 분명히 당대에 이루어질 것을 굳게 믿고 하나님의 계시를 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한부 종말론 예언자들의 예언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함부로 이단 취급해서도 안 된다. 예수님의 예언이 맞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이단은 아지 잖는가!, 베드로, 요한, 바울이 이단은 아지 잖는가!, 오히려 베드로의 설교를 100% 받아들이고, 일생동안 위를 바라보면 산 사람들이 그의 생애를 성공한 사람들이 아닌가!
깨자!, 알자!, 이 세상은 존 번연이 천로역경에서 말 한 대로, 허영의 도시이다. 오직 위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산 것만, 하늘로 가지고 올라갈 수 있는 상급이 될 뿐이다.
아브라함
분명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시고, 아브라함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내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은 돌밭, 자갈밭, 사막, 황무지뿐이었다. 거기에다 기근이 들어서 종들이고, 양떼고 할 것 없이 전멸을 할 위기를 당하기도 했다.
그 뿐이 아니다.
밤이고 낮이고 원주민들의 습격이 보통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밤에는 원주민들이 횃불을 들고 쳐들어올 위험이 있었다.
결국 아브라함은 일생동안 이 황무지에서 고생만 하다가 갔다. 고향 갈대아 우르와는 비교도 안 되는 땅에서, 생고생을 하고 생애를 마쳤다. 좀 지나치게 말한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속은 것이다.
왜일까?
아브라함의 성화를 위해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갈대아 우르보다는, 사막이 더 낳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구절이 아브라함의 인격의 성화를 위해서는, 탁한 흙탕물도 가끔 사용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한 예이다.
바 울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 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 하는 것이니라.” 고전 7:37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롬13:11
사도바울은,
고린도 밑 아시아 교회의 처녀들을, 시집도 보내지 말라고 권했다.
예수님이 곧 오시니까 시집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조금 기다렷다가 신부단장을 하고 예수님을 맞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설득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초대교회 신자들은, 시집을 가지 않았다. 그중 대표자가 빌립의 딸 넷이다. 그렇지만 그 처녀들이 늙어죽을 때까지, 그렇게 기다리던 예수님은 오시지를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바울에게 속은 것이다. 예수님께 속았거나, 아니면 사도 바울에게 속은 것이다.
바울 역시,
적어도 30~40년 후에 주님의 재림이 이루어진다면, 시집보내지 말라고 권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헛 예언을 한 것이다. 잘못 예언을 한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이 30~40년 후, 또는 2,000년 후라면, 누가 처녀 딸을 시집보내지 말라고 했겠는가!
그렇다면
바울은 거짓 예언을 한 것인가!, 아니면 사탄에게 속아서 잘못 예언을 한 것인가!,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서 한 예언이 아니고, 사탄에게 감동을 받아서 한 예언인가!,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으니, 시집보내지 않는 것이 더 잘 하는 것” 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이 대목이 바로, 하나님께서는 흙탕물로도 농사를 지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한 예이다. 당시의 성도들은 이 예언의 말씀을 듣고,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고 오로지 일생을 하늘만 바라보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금 하늘나라에서 어마어마한 상급을 받아 누리면서, 당시의 바울에게, “헛 예언을 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를 하고 있을까, 아니면 원망을 하고 있을까, 우리는 한번 생각해 보아야 된다.
(2) 사도 요한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1요2:18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계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계1:7, 요19:34, 행2:36,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계22:10
찌른 자가 보기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날부터 계산해서 최소한 40~ 50년 안에는 주님의 재림이 이루어 져야 된다.
그러나
그를 찌른 자들이 다 늙어죽도록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당시의 성도들은 사도요한에게 속았거나, 아니면 이단한테 속아 넘어갔던 것이다.
왜 일까?
사도요한이 과연 이단일까!
이단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흙탕물 계시를 통해서도 성도들을 양육하신다는 뜻이 된다. 왜냐하면 당시의 성도들은, 정말로 예수님이 곧 오실 줄 알고, 시집도 가지 않고 장가도 가지 않고, 집도 사지 않으면서, 오로지 신앙생활만 열심히 하다가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애굽에서 이끌어낸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막에서 일생을 마쳤다. 좀 심하게 말한다면 하나님께 속은 것이다. 그들이 과연 사막에서 죽을 줄 알았다면 그 땅에서 출애굽을 했었겠는가!,
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그들이 원망하며 불평할 것을 사전에 알지 못했었겠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원망과 불평을 할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그들을 광야로 끌어내신 이유는, 그들에게 손해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드시 그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하심이었을 것이다.
성도의 성화를 위해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보다는, 사막이 더 낳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광야생활 40년을 지나면서 인격의 성화를 이루어서, 하늘의 상급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쌓아가지고 올라갔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탁한 물도 사용하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신 대목이다.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신 대목이다.
이사야
“주여 어느 때 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있는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사 6:11~13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외쳐라.”
웃시야가 죽던해: B. C 739년
예루살렘 멸망 : 586 = 153년 후에 일어날 일,
분명히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외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굳게 믿고 이사야는 죽을 때까지 유다의 멸망을 외쳤다.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라고 하셨으니까, 그가 외치는 동안, 다시 말해서 그의 생애에 이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 이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사야는 거짓 예언을 한 것이 된다. 만약 이 예언을 믿고, 이사야의 예언대로, 집과 전토를 정리하고 환난을 준비한 성도들은, 죽을 때까지 수 십 년 동안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며 살았었겠는가, 얼마나 많은 원망을 이사야에게 퍼 부었었겠는가!,
“거짓으로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찐저,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그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로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는 그 도모를 속히 임하게 하여, 우리로 알게 할 거이라 하는 도다.” 사5: 18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사10:22.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저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왕하20:1
이사야의 예언은,
당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그 일들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로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는 그 도모를 속히 임하게 하여 우리로 알게 할 거이라 하는 도다.” 라고 이사야에게 야유를 퍼부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사야의 예언이 당시에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이사야가 거짓 선지자 인가, 이단인가!, 분명히 이사야는 그 일이 당대에 이루어질 줄을 믿고 예언을 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언제까지 외칠까요”, 라고 질문했을 때,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외쳐라.” 라고 명령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이단이거나, 거짓 선지자 이거나, 아니면 좀 심하게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거짓 계시를 이사야에게 내려 보내셨을 것이다.
이사야는 일생동안 헛 예언을 했던 것이다.
이사야의 말을 듣고,
집을 살 사람들은 집을 사지 않고 도리어 집을 팔고, 재산을 정리한 후에, 모든 준비를 했던 사람들은 쫄딱 망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사야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을 쫄딱 망하게 만들어 놓은, 거짓 선지자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었다.
또
자기가 죽을 때 까지도 이루어지지 않는 예언을 외쳤다면, 이사야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했겠는가?
또 그가 153년이나 살기는 했는가?
죽을 때까지 그는 미친 선지자, 거짓 선지자로 낙인찍히며 죽었을 것이다.
믿음 있는 사람들은
시집, 장가도 못가고,
공부도 못하고,
집. 재산도 다 팔아서 구제하고,
땅도 안사고,
사업도 다 정리하고,
아기도 안 낳고,
교회에만 열심을 내며,
이렇게 믿음 지킨 사람들은, 몽땅 다 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사야 때문인 것이다.
왜일까!
이 대목이 바로 흙탕물 계시로도,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성도들을 양육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예가 된다.
예레미야(B.C.627~ 586)
“너희는 열방 중에 광고하라 공포하라. 기를 세우라 숨김이 없이 공포하여 이르라. 바벨론이 함락되고 벨이 수치를 당하며, 므로닥이 부스러지며, 그 신상들은 수치를 당하며, 우상들은 부스러진다 하라. 이는 한 나라가 북방에서 나와서 그를 쳐서, 그 땅으로 황폐케 하여 그 중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함이라. 사람이나 짐승이 다 도망하여 가느니라.” 렘50:2
“내가 벨을 바벨론에서 벌하고, 그 삼킨 것을 그 입에서 끌어 내리니, 열방이 다시는 그에게로 흘러가지 아니하겠고, 바벨론 성벽은 무너지리로다. 나의 백성아 너희는 그 중에서 나와, 각기 나 여호와의 진노에서 스스로 구원하라.” 렘51:4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내가 그 땅에 대하여 선고한바, 곧 예레미야가 열방에 대하여 예언하고, 이 책에 기록한 나의 모든 말을 그 땅에 임하게 하리니,” 렘 25:12
“그들이 여호와를 인정치 아니하며 말하기를, 여호와는 계신 것이 아닌즉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요, 우리가 칼과 기근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 선지자들은 바람이이라. 말씀이 그들의 속에 있지 아니한즉, 그같이 그들이 당하리라 하느니라.” 렘5:12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그 후에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신하들과 백성과, 및 이 성읍에서 염병과 칼과 기근에서 남은 자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그 대적의 손과, 그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칼날로 그들을 치되,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렘 21:7
렘 25:11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렘 25:1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 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렘 29:1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뇨.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하나이다.” 렘17:15
요시야 13년(B.C. 627)~ 예루살렘 함락(586)년까지 약 41년 동안이나, 예루살렘의 멸망을 외쳤으니, 만약 41년 전에 피난준비를 마친 사람들은, 일생을 헛고생만 하다가 죽은 것이 아닌가!, 이 사람들이 일생동안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하며, 예레미야에게 비난을 퍼 부었었겠는가!
에스겔(B.C. 593~570)
“인자야 이스라엘 땅에서 이르기를, 날이 더디고 모든 묵시가 응험이 없다 하는 너희의 속담이 어찜이뇨”. 겔12:22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말이 그의 보는 묵시는 여러 날 후의 일이라. 그가 먼 때에 대하여 예언하는 도다 하나니,” 겔 12:26
에스겔의 예언은, 당시에 도무지 속히 이루어지는 것이 없었다. 이 말씀은 참다못한 당시의 사람들이, 에스겔에게 퍼부은 야유이다.
미가
B.C.728~697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미 3:12
* - B. C. 728~697년의 히스기야 시대 중 대략 700년경의 예언. - *
미가는 시온이 밭같이 갊을 당한다고 예언했지만, 예루살렘은 돌 하나도 옮기워지지 않았다. 성 모퉁이 하나도 무너지지 않았다. 미가는 일생동안 헛 예언을 한 것이다. 허궁을 치는 예언을 한 것이다. 오늘날 이런 선지자가 있다면 반드시 그는 이단으로 낙인이 굳게 찍히고 말 것이다. 아마 이런 사람을 돌로 쳐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람들도 수없이 많을 것이다.
요엘
B.C. 830년경, 혹은 598, 또는 400년경 기록.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 같은 것이 자고이래로 없었고, 이후 세세에 없으리로다.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 전의 땅은 에덴동산 같았으나 그 후의 땅은 황무한 들 같으니, 그 들을 피한 자가 없도다.” 욜2:1
요나
B.C. 760녀 경에 기록.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욘3:4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 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 이니이다.”
요나는, 하도 여러 차례 펑크를 내는 계시를 전했기 때문에, 이제부턴 하나님의 계시를 전혀 믿지를 않고, 선지자 노릇을 포기하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시한부 종말론을 외치는 선지자들은, 정말로 외로운 길을 걸었다.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온 계시를 전했지만, 그 예언은 번번이 빗나가고 말았다.
왜일까!
당시의 성도들을 일깨워서 양육하기 위해서는, 그 예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예언이 맞든 맞지 않았든, 그 예언대로 산 사람들은 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예언자에게 속은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하늘에 올라가서 보면 “과연 내가 그때 그 예언자에게 속아서, 믿음을 지킨 것이 참 다행한 일이었구나!" 하고 만족한 미소를 짓게 될 것이다.
만약
그 당시 그런 시한부 종말론 자들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당시의 성도들이 얼마나 나태하며, 게으른 신앙생활을 했었겠는가!, 그리고 하늘에 올라가서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겠는가!,
그렇다.
우리는 시한부 종말론 자들의 예언이 맞고 안 맞고를 떠나서, 그의 예언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알아본 후, 그의 예언이 하나님의 예언이라면, 그 예언을 믿고 따라야 된다. 그렇게 한 후, 하늘에 올라가서 보면, 과연 내가 그 시한부 종말의 예언을 믿고, 일생동안 믿음을 지키며 살아온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시에 예언을 해준 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재림이, 앞으로 2,000년이 남았지만, 내일 오신다고 믿고 하루하루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자.” 라고 한다면, 누가 그의 말을 듣고 열심을 내겠는가! 우리는 연약한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거짓 예언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우리 육체에 맞추어서 우리를 양육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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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신앙고백(信仰告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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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tminster Confession 웨스트민스터 신조 신봉,
John Calvinist 존 칼빈주의 신봉
Dordrecht Confession of Faith 도르트레히트 신조 신봉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루이스 벌 코프 조직신학 신봉
첫댓글 감사합니다^^
우리 하니님의 축복이 온 가족위에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참 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생들이 어찌 다 알수 있으랴...
이해하기 힘든 사역이 이 예언 사역이 아닐까 합니다...
이 예언 사명을 받으신 목사님의 심정이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 있네요...
아멘, 천군만마를 대하는 느낌입니다. 힘을 합해서 힘껏 잃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