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의 대명사로 불리는 녹차는 온대 아열대에서 자생하는 상록 대엽 식물이다. 인도의 '아삼' 지방과 중국의 '윈난'에 걸쳐 넓게 분포하여 자생했던 동백과에 속하는 다년생 식물이다. 겨울에 꽃이 피고 봄에 일찍 새 촉이 돋아나는데 그 새순을 채취해 차를 만든다. 차에 대한 기록은 중국에서 당나라 때 조주(778~897)스님의 '긱다거'가 간화선의 화두가 될 정도로 스님들이 많이 마셨던 것으로 기록 되고 있다. 매우 오래된 차로 여겨지는 철관음은 많은 오룡차 중 하난데 조주스님 시절에 스님들이 많이 드셨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사어록에 간간이 철관음이 등장한다. 당나라의 '육우(760)'가 쓴 '다경(茶經)'이 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자 본격적 기록으로 보는데 삼황 오제의 고대에 신농씨 시대부터 차를 마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나라에선 충담(765)스님이 남산의 삼화령 부처님께 차공양을 올렸다는 기록이 차에 대한 최초기록이다. 이때 충담스님이 올린 차가 녹차인지 다른 고유차인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우라나라의 전통 차 종류가 옛부터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충담스님이 올린 차가 녹차의 최초 기록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지리산의 쌍계사를 창건하신 '진감(774~850)'선사가 당에서 유학하고 돌아올 때 녹차 나무를 들여와 하동에 심은 것이 우리나라 녹차의 시원이라는 것이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 또 다른 이설이 있기도 한데 경주의 기림사를 창건한 광류(643)스님이 인도에서 직접 차 씨를 가져다 심었다는 설이다. 광류스님이 기림사에 심었다는 설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최초의 차나무 식재가 된다. 그러나 기림사는 위도가 높아서 차나무가 잘 살지 못하는 곳이다. 차에는 기름기를 중화 시켜서 비만을 줄여주는 효능이 있고 졸음을 물리쳐주고 머리를 맑게 해주는 성분이 있어 공부하는 스님들이 옛부터 많이 드셨다. 아시아에서의 차문화 발달과 차의 대중화에 일등공신은 당연 스님들이다. 조선 후기의 초의(1786-1866) 선사 다경인 동다송(東茶頌 1837)은 차인들의 교과서에 해당할 정도로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밥먹고 숭늉 마시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숭늉은 누구나 마실 수 있지만. 녹차. 오룡차, 발효차. 보이차 등 제법 이름 있는 차는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사실 한정적이다. 시간에 쫒기지 않아야 하고 차를 살 여유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도자기 전쟁 혹은 '차 전쟁'으로 까지 불리던 임진왜란 때 저들 일본인들이 도공들과 차인들을 모조리 잡아가서 우리는 차의 맥이 완전 끊겼었다. 조선 후기 '초의' 등 스님들과 '추사' 등에 의해 점차 차가 새로 보급되기 시작하고 해방기 다솔사의 범술스님 등에 의해 본격적으로 차문화가 다시 살아났다. 나라마다 차를 만드는 방법이 다르고 지방마다 보관 방법이 달라서 수많은 차가 생겨났고 먹는 법도 다양해졌다. 당연 그에 따른 각종 단체도 제도도 생겨나서 서로 연대를 이루어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건 차가 중요 문화의 축을 이루게 되었다. 대광사의 다도반 '시라회'는 삼십여 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간의 일관된 차 교육은 회원 각자의 품위를 높여주고 차를 널리 보급하는데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원근의 여러 중요 행사에 많이 초청되고 있는 자랑스런 단체다. 이제 우리는 다양한 차를 원하는대로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여유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가능하면 몸에 이롭고 정신을 맑게하고 삶의 품격도 높여주는 좋은 차를 마셔야 한다. 더불어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한 차를 마시고. 생의 여유와 낭만을 즐기기 위한 차를 마셔야 한다. 한 잔의 차를 마시며 그윽히 자신을 바라보는 햇살 다사로운 아침은 스스로를 사랑하는 아침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