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에서 중국음식점을 운영하는 임아무개(48)씨는 최근 신용카드 발급을 위해 은행을 찾았다. 음식점이 아들 명의로 돼 있기 때문에 당연히 신용카드 발급도 아들 이름으로 신청했다. 그러나 결과는 ‘발급불가’였다. 이유는 은행 거래실적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임씨는 “어떻게 바로 코앞에서 영업하는 음식점에 신용카드를 발급해주지 않을 수 있느냐”며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명의만 아들 이름으로 돼 있을 뿐 은행거래는 자기 이름의 계좌로 해왔기 때문에 입증할 수 있는 은행 거래실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법적으로 사업자가 아닌 자신이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는 길도 없었다. 결국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잠재적 신용불량자 취급받는 자영업자들
경기도 과천에 사는 개업약사 조아무개(39)씨도 신용카드 발급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장벽과 마주쳤다. 도매상으로부터 구입하는 약품 대금을 카드로 결제하기 위해 신규회원 가입을 신청했으나 이용한도가 480만원밖에 안 된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약국은 어느 업체보다 안정적이고 매월 말일 결제하는 금액은 1천만원을 넘기 때문에 당연히 1천만원 정도의 한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은행쪽에서 제시한 초기 한도는 기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불과 7~8개월 전만 하더라도 전화 한 통화면 달려와 700만~800만원 한도의 신용카드를 발급해준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이들뿐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최근 들어 신용카드 이용에 어려움을 겪는다. 특히 신규로 카드를 발급받으려는 사람들은 연체 경력이 없어도 까다로운 조건들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 하반기 들어 가계금융 부실 우려와 정부 당국의 감독 강화로 신용카드 업계에 불어닥친 찬바람 탓이다.
신용카드 회사들은 지난 11월 말 금융감독원이 ‘신용카드회사 건전성 감독 강화대책’을 발표한 이후 서둘러 이용한도를 줄이고 있다. 물론 연체자들이 첫 번째 대상이다. 국민은행은 이미 신용불량 회원 40만명의 현금서비스와 신용구매 한도를 0원으로 줄여 사실상 이들을 퇴출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LG카드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30만여명의 신용불량 회원을 정리할 방침이다. 똑같은 방식은 아니지만 삼성카드·비씨카드 등 대부분의 신용카드 회사들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신용불량 회원들의 카드 이용한도를 꾸준히 줄여간다는 데는 이론이 없다.
문제는 신용이 괜찮은 일반회원들도 엄격한 조건 때문에 신용카드 사용이 이전처럼 쉽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거래가 없는 회사나 은행으로부터 신용카드를 신규로 발급받으려면 의외의 장벽에 부딪힐 수 있다. 대기업체 신입사원의 경우 지난해 300만원 안팎이던 초기 이용한도가 요즘은 200만원 정도로 크게 줄었다. 신용등급이 좋은 공무원들도 마찬가지다. 신규 발급 때 허용되는 초기 한도가 얼마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이용실적이 없으면 추후에도 한도가 늘지 않는다. LG카드 관계자는 “급여 생활자에 대해서는 요즘 신용카드 회사들이 대체로 월수입의 한도 안에서 이용한도를 부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도 상한이 그렇다는 것일 뿐 개인에 따라 한도는 천차만별이다. 월 수입이 500만원 정도고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더라도 이용한도가 300만~400만원밖에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신용카드 이용실적이 저조하면 그만큼 한도도 제한된다.
가장 타격을 받는 쪽은 자영업자들이다. 앞서 예로 든 중국음식점 주인이 대표적 사례다. 예전에는 사업자등록증만 있으면 카드 발급은 식은 죽 먹기였다. 심지어 특별한 직업이 없는 사람도 형식적으로 사업자등록증을 내 카드를 발급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젠 완전히 달라졌다. 신용카드회사와 은행들이 자영업자를 잠재적 신용불량자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자영업자들은 물품대금을 결제하기 위해 5~6장의 신용카드를 만들어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장사가 잘 안 되고 돈이 급할 때 날아드는 대금청구서를 처리하기 위한 돌려막기 수단으로 카드처럼 좋은 게 없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잘 아는 은행쪽에서 먼저 이들에 대한 신규 발급을 차단하고 나섰다. 국민은행이 자영업자에 대한 카드론 대출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국민카드 역시 마찬가지다. 자영업자들을 ‘다중채무자’로 분류해 경계하고 있다. 다중채무자란 말대로 여러 개 카드로 현금을 빼내 돌려막기를 하는 회원이다. 신용카드 회사들은 이 가운데 3개 이상의 카드를 통해 매월 200만원 이상의 현금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악성채무 발생 가능성이 높은 회원으로 분류해놓았다.
학생·노인들도 카드 발급 어려워져
사진/ 신용카드 회사의 부실채권 관리부서. 연체율이 높아지면서 부실채권을 처리하기 위한 커드회사들의 업무부담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학생과 노인층도 신용카드 발급이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대학생이더라도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 소득이 있을 수 있다고 여겼으며, 소득이 없더라도 자동차 소유자나 보험가입자 등 소득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근거가 있으면 쉽게 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소득이 직접 확인돼야만 한다. 자영업자는 소득세납입증명을 첨부해 연간 1천만원 이상의 소득이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다. 그러나 자영업자 소득이 연간 1천만원을 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 소득을 실제보다 낮춰 신고하기 때문이다. 또 어렵게 신용카드를 발급받더라도 자영업자들은 초기 한도가 100만~200만원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회사에 따라서는 재산세증명서나 통장사본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좀 나은 편이지만 어쨌든 신규 발급과정에서 어려운 통과절차를 거쳐야 하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이처럼 신규 발급이 어려운 것은 금융감독원이 지난 11월 말 무분별한 신용카드 발급에 단속의 칼을 빼든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됐다. 10월 말 현재 카드회사들의 연체율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9개 신용카드 회사 가운데 연체율(1일 이상 기준)이 10% 미만인 회사는 삼성카드(7.81%)와 비씨카드(8.7%) 두개 회사밖에 없다. 전체 자산의 10% 이상이 연체자산인 셈이다. 신용카드 회사들의 평균 연체율도 10.4%에 이른다. 물론 심각한 연체는 30일을 넘긴 경우다. 1~2주일 연체는 누구나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실채권화할 가능성이 높은 30일 이상 연체율 추이는 사태의 심각성을 엿보게 한다. 지난 6월 말 5.1%인 것이 9월 말 6.6%, 10월 말 7.7%로 급격히 높아졌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의 감독 강화가 아니더라도 신용카드 회사에서도 연체율 억제를 위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할 상황이었다.
신용카드 회사들의 신용평가 방법의 변화도 소비자들이 알아야 할 중요한 대목이다. 예전에는 일반카드·골드카드·플래티넘카드 등으로 카드의 등급을 나눠 이용한도를 부여했다. 물론 골드나 플래티넘 카드에 가입하려면 그만한 조건이 돼야 한다. 조건은 직군별 신용이다. 예를 들면 의사·변호사 등 전문직 종사자, 대기업 임원, 공무원, 자영업자 등 직업과 직장의 성격에 따라 회원들의 신용을 평가했다.
그러나 이젠 사정이 달라졌다. 직장이 안정적이라고 해서 공무원에게 무조건 이용한도를 많이 주는 일은 없다. 대기업 임원도 마찬가지다. 거래실적이 없으면 초기 한도는 자기 등급의 최저 수준으로 나간다. 그리고 추후 이용실적을 감안해 한도가 올라간다. 그래서 전문직 종사자나 공무원들 가운데 신규로 신용카드를 발급받는 사람들은 “신용도가 높은 내 이용한도가 왜 이것밖에 안 되나”라는 항의성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다. LG카드 관계자는 “지난해만 하더라도 회원들의 신용을 평가할 때 직군평점과 행동평점의 배분이 5 대 5 비율이었는데, 지금은 2 대 8 수준이다. 이제 회원의 직업보다는 평상시 카드 이용행태와 실적을 감안하는 행동평점이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회원 신용 직업보다 실적을 우선한다
연체율이 올라가면서 회원들이 어려워졌지만 신용카드 회사들도 어려워졌다. 신용카드 회사들은 9~10월을 거치면서 월별 수지가 상당수 적자로 돌아선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시장 지배력이 강한 비씨·LG·삼성·국민 등을 제외한 군소 신용카드 회사들은 존립의 위기의식까지 느끼고 있다. 잘못했다가 부실 금융회사로 경영개선 명령을 받기라도 하면 회사로서는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한 전업계 신용카드 회사 관계자는 “9개 신용카드 회사 가운데 2~3개를 제외하고 대부분 회사가 적자로 돌아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신용카드 업계가 조만간 큰 폭의 구조조정을 거칠 것이라는 예측을 한다. 지난 몇해 동안 초고속 성장을 거듭해온 신용카드 업계가 그로 인한 반작용으로 혹독한 겨울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