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줄 위의 잠자리
유기섭
가까운 인척의 병 문안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해 저무는 저수지둑길을 끼고 걸었다. 모든 생명체가 약동하는 계절. 병실에 누워 천장만 쳐다보는 희멀건 눈동자. 만물 중 가장 강인하다고 하는 사람도 저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구나. 생의 마지막 촛불이 꺼져 가는 길목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보았다.
망초가 만개하여 하얀 바다를 이루고있는 오뉴월 들판. 그들 사이에 거미줄이 쳐진 가지 앞에 섰다. 거미는 보이지 않지만 여러 겹으로 쳐진 하얀 줄에 방금 걸려든 듯한 어린 잠자리 한 마리가 파드닥거리며 필사의 탈출을 시도한다. 몇 번이고 시도하지만 그럴수록 더 팽팽히 조여오는 거미줄. 몇 겹으로 몸을 에워싼 거미줄에 그만 잠자리는 기진맥진하여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든다. 이윽고 풀속 깊이 숨어있던 거미가 기동을 시작한다. 팽팽해진 줄을 타고 손살같이 잠자리에 접근하여 상태를 점검한다. 그리곤 몸에서 나온 하얀 진액으로 다시 한번 실신한 잠자리의 몸을 몇 겹 동여매곤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바둥거리는 잠자리를 바라보며 쾌재를 부른다. 양식거리를 구한 기쁨의 춤을 추고있다.
해는 산등성에 걸쳐 붉게 물들고. 마지막 넘어가는 해이기에 그 붉음이 더한 것일까. 문득 잠자리가 안쓰럽게 여겨졌다. 생과 사의 경계가 하늘거리는 외줄에 걸려있다. 알에서 깨어나 성충이 된 후 처음으로 세상에 비행을 시작했지만 뜻밖의 암초를 만나 비상의 꿈이 산산조각 나는 현장. 거미는 얼굴을 내밀지 않은 채 여름을 날 먹이를 하나하나 저장하기에 바쁘다. 그들에게도 더위만큼이나 치열한 생존경쟁의 피비린내가 그치지 않는다.
어렸을 때는 거미줄에 걸려서 도움을 청하듯 안간힘을 다하는 잠자리가 좋은 볼거리였다. 도와주기는커녕 거미와 합세하여 잠자리가 숨을 거두는 것을 보고 싶어했다. 덩치가 훨씬 큰 잠자리가 새끼거미가 쳐놓은 덫에 걸려 꼼짝못하고 온몸이 시들어 가는 것을 보며 재미있어했다. 그러나 요사이는 이러한 것들이 흥밋거리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거미의 특성상 음침한 곳에 덫을 놓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유유자적하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먹이가 걸려드는 행운을 잡는다. 아무리 그것이 자연현상이라고 하더라도 마음한구석이 씁쓸하다. 우리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오랜 기간의 노력 없이도 행운을 잡으려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따가운 시간이 경과할수록 잠자리의 몸은 굳어진 채로 바람에 일렁인다. 거미는 가끔 나타나서 줄을 점검하곤 다시 숨어서 기다린다. 거미는 목 좋은 곳에 줄을 치기만 하면 먹이걱정은 별로 하지 않는다. 잠자리는 수많은 경쟁을 헤치고 나온 세상에서 제대로 날아오르지도 못하고 꿈을 접어야한다. 어찌 이러한 슬픔이 곤충의 세계에만 있는 일일까. 거미의 먹이 구하는 유일한 길이 이것이라면 이길 또한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으리라.
오래 전 시골에서 눈오는 날 새벽이면 토끼사냥을 나간다. 평소에 보아온 토끼가 즐겨 다니는 길에 발목까지 차 오르는 눈을 헤치고 좁을 길을 낸다. 길이 끝나는 곳에 덫을 놓고 먹이를 매단다. 먹이 구하기 어려운 겨울철 토끼는 그것이 덫인 줄도 모르고 덤벼든다. 큰 눈이 애처로운 토끼사냥. 사람들은 무심코 즐기는 놀이 같지만 토끼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길로 내닫는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사냥의 재미에 취해 가는 사람들은 토끼의 심정을 얼마나 헤아렸을까.
병원 중환자 실에 누워 얼마 남지 않은 생인 줄도 모르고 빨리 나아야지 한다. 어서 자신이 자란 시골을 다녀오겠노라고 나직이 속삭인다. 그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길 빌어본다. 젊은 날 빈 몸으로 상경하여 온갖 일을 전전하며 기반을 잡기까지 오랜 세월을 달려온 그였지만 마지막 가는 길은 홀로 더듬는다.
저수지에서 불어오는 한가닥 실바람이 답답한 마음을 쓸어안는다. 거미와 잠자리의 끝없는 투쟁. 잠자리는 기꺼이 몸을 바친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싸움이라지만 결코 공생의 길은 없을까. 병마와 힘든 싸움을 벌이는 그의 얼굴빛이 파리해진다. 거미줄에 걸려서 점점 힘이 빠져 축 늘어진 잠자리. 거미는 아무 일없는 듯 유유히 외줄을 타고 다닌다.
-국제PEN 181호(2024년)게재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