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적 주말의 명화로본 '오메가맨'이 기억나네요 이걸 최근 리메이크한게 '나는 전설이다'라고... 하지만 이영화는 원작과 다른 결말로 맺고 제목조차 긍정적인게 아니라 원래는 부정적인 제목이다....라는것도 흥미롭군요
백년전 SF작가들조차 지구에 인간이 기하학적으로 늘어나면 자연의 어떤 원리로 역병이 돌고 인구수를 조절하는 시스템이 작동한다고 생각했었다는군요
바이러스로 인한 인류종말, 20세기 중반의 SF
SF관광가이드/대재앙 이후 이야기 (17)
SF 관광가이드 조지 R. E스튜어트(George R. Stewart)의 장편 <지구는 잘 있다 Earth Abides, 1949>는 어느 날 갑자기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세상을 휩쓸어 인류 대다수가 사라진 가운데 일부 생존자들 중 한 사람인 이셔우드 윌리엄스(Isherwood Williams)가 고향으로 돌아가 작은 공동체를 꾸리며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다.
소설의 상당 분량이 인간의 손때가 묻은 흔적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에 할애된다. 식물들이 도로를 부수며 자라나고 가축들은 야생으로 돌아간다. 전기와 수돗물이 끊기고 문명의 퇴행은 세대에서 세대로 넘어갈수록 심해져 이셔우드의 증손 세대에는 농경과 수렵으로 살아가는 야만사회로 돌아간다.
문명의 이 같은 퇴행 과정에 대한 추적은 일찍이 19세기 말 발표된 영국작가 존 리처드 제퍼리스의 <런던 이후 After London, 1885>를 떠올리게 한다.
<지구는 잘 있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색은 역병을 인구조절을 위한 순기능 측면에서 바라본다는 점이다. 겉장을 넘기자마자 영문판 속표지에는 구약성서의 전도서 1장4절 “사람들은 오가든 말든 지구는 잘 있다.”는 문장이 인용되어 있다.
이는 대재앙 이후 살아남은 이들의 투쟁을 다룬 이 소설이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전개될지 시사하는 노골적인 힌트에 다름 아니다. 즉 <지구는 잘 있다> 전체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주제는 인간들이 자연에서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대자연이 때때로 들이미는 인구조절 수단(역병)에 결코 면역이 아니라는 관점이다.
▲ 붕괴된 문명. 주민 다수가 떠난 도시는 급속히 자연으로 회귀한다. ⓒmoonworker
작가의 이러한 시각은 남자 주인공의 입을 빌어 “뭐든 수가 늘어나면 역병의 공격을 받게 되어 있지.”라고 담담하게 표현되기도 한다. 이 책의 도입부는 역병이 어떻게 인류를 삽시간에 종말의 위기로 몰아넣었는지에 관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화학자이자 바이러스 전문가인 W.M. 스탠리(Stanley)가 1947년 12월 22일자 [화학과 공학 뉴스 Chemical and Engineering News]에 실은 논문의 일부를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스탠리와 위 학술지는 둘 다 실존하며 허구가 아니다.)
“살상력 있는 바이러스 계통이 돌연변이로 인해 갑자기 출현한다면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의지할 수밖에 없는 신속한 교통수단 덕분에 지구 구석구석에 전달되어 수백만 명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
--- <지구는 잘 있다>, 영문판 본문 1쪽
스탠리의 주장은 항공교통망이 세계를 거의 실시간으로 연결하는 최근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조류독감이 지난 몇 차례 일으킨 국지적인 패닉 현상은 <지구는 잘 있다>의 가정이 결코 소설 안에만 적용되는 현상이 아님을 반증한다.
21세기 들어 호주의 공중보건 전문가 앤서니 맥마이클은 롤러코스터 같은 속도로 돌아가는 세계무역과 관광산업의 여파로 생태계가 파괴되어 본래의 터전을 잃어버린 생물이 엉뚱한 곳에 나타나 문제아가 될 위험성을 오래 전부터 역설해왔다.1)
여기에는 황소개구리 같은 눈에 보이는 생물 뿐 아니라 곰팡이와 박테리아 그리고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들까지 포함된다. 여기서 작가 조지 R. 스튜어트가 주목한 것은 하나로 이어진 지구촌 환경으로 인해 예기치 않은 곳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불청객이 출현하여 토착생물 종(種)의 존립을 위협할 때 그 피해대상에 인류만은 제외되리라고 장담할 근거가 전혀 없다는 통찰이다.
소설을 펼치면 불과 몇 쪽 안에 작가는 자연의 모든 생물에게 적용되는 개체 수 조절의 법칙이 인간이라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천명한다.
“일부 동물학자들조차 생물학 법칙을 제시한다. 하나의 종의 개체 수는 결코 일정하게 유지되는 법 없이 오르락내리락 한다. 개체 수가 늘어나면 출산율이 떨어지고 증감주기도 길어진다. 인간이라 해서 다른 피조물들의 운명으로부터 오랜 동안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변화와 재변화의 생물학 법칙이 존재한다면 인류의 처지는 이제 매우 위험스러운 상황이다. 생물학적으로 인류는 너무 오랜 동안 간섭받지 않은 채 살아왔으니 말이다.” --- 같은 책, 8~9쪽
▲ 조지 R. E스튜어트의 장편 과학소설 <지구는 잘 있다, 1949>는 어느 날 갑자기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세상을 휩쓸어 인류 대다수가 사라진 가운데 일부 생존자들 중 한 사람인 이셔우드 윌리엄스가 고향으로 돌아가 작은 공동체를 꾸리며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다. ⓒH. Lawrence Hoffman
주인공 이셔우드는 자신의 증손자 대에 이르러 지식 기반 위의 구문명이 완전히 종말을 고했음을 절감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그렇다고 해서 활과 화살로 생활을 연명해야 하는 신세계가 반드시 구세계보다 나쁘다고만 볼 수 있는지 반신반의한다. 오히려 그는 신세계가 이전 문명처럼 과오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따라서 <지구는 잘 있다>는 대재앙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이 어렵사리 생존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원시와 야만을 오가는 상태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달리 표현하면 조속히 기계문명을 원래대로 복구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은 심기를 숨기지 않는) 펄프 과학소설의 정서와는 추구하는 바가 확연히 다르다.
작가 조지 R. 스튜어트의 이러한 작풍은 비단 소설가일 뿐 아니라 원래 역사가이자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영문학 교수라는 그의 인문학적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과학소설의 문학사적 관점에서 보건대 1940년대 첫선을 보인 <지구는 잘 있다>는 1960년대에 꾸준히 연작으로 나온 J. G. 밸러드(Ballard)의 <재앙4부작 disaster tetralogy>과 더불어 20세기 중반 전후에 생태학적 관점에서 대재앙 이후의 상황을 그린 이야기들의 전형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독자대중의 주목을 끄는데 성공함으로서 유사한 아류들이 꾸준히 시장에 선보이게 만드는 동인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 리차드 매드슨의 장편소설 <나는 전설이다>는 1971년 <오메가맨 The Omega Man>이란 제목의 영화로 제작/개봉되었으며, 위 책 표지는 영화개봉과 발맞추어 제목을 영화식으로 표기하여 다시 펴낸 것이다. 1971년판 영화는 보리스 샤갈이 연출하고 찰톤 헤스톤이 주연을 맡았다. ⓒBerkley Medallion
한편 리차드 매드슨(Richard Matheson)의 장편 <나는 전설이다 I am Legend, 1954>는 수퍼 바이러스와 전통적인 흡혈귀 개념을 한데 뒤섞어 독특한 설정을 만들어냈다. 여기에 등장하는 흡혈귀는 트란실바니아의 초자연적인 귀족과는 무관하며 면역이 없는 한 누구나 강력한 병원체에 감염되어 조만간 그렇게 되고 만다. 전면핵전쟁과 무차별 세균전의 여파로 생겨난 유전학적 돌연변이가 바로 흡혈귀라는 설정은 훗날 홍수를 이루게 될 좀비물의 선구적 원형이라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그러나 이 장편이 과학소설 문학사에서 그리고 대재앙 이야기의 계보에서 의의를 갖는 것은 아이디어의 참신성 뿐 아니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잣대의 융통성 있는 적용 때문이다. 소설 내용의 거의 대부분은 우연찮게도 흡혈귀 병원체에 면역인 한 사내가 낮에는 자고 있는 흡혈귀들의 몸에다 말뚝을 꽂으며 돌아다니고 밤에는 감옥보다 튼튼하게 개조한 집 안에서 흡혈귀들의 무차별 공세를 견뎌내는 일상을 하드보일드 풍으로 반복해서 보여준다.
마침내 중과부적으로 싸우다 사로잡힌 주인공은 철장 밖에서 자신의 처형을 기다리는 창백한 얼굴들을 보면서 불현듯 깨닫는다. 이제까지 자신이 잘못 생각했으며 이른바 최후의 인간으로서 지금까지 벌여온 투쟁이 결과적으로 무의미했음을.
문득 자신이야말로 비정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상이란 다수의 개념이자 다수를 위한 개념이다.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한 개념이 될 수는 없다. 그러한 깨달음은 그들의 표정에 나타난 감정과 겹쳤다. 경외, 두려움, 형언할 수 없는 공포. 그렇다. 그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그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천벌이었다. 자신들이 끼고 살아야 하는 질병보다도 흉측한 존재였던 것이다. 스스로의 존재를 증거 하기 위해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명 아닌 생명을 앗아간 보이지 않는 유령이었다. 그는 그들의 감정을 이해했고 그들에 대한 증오심을 씻었다.
로버트 네빌은 이 땅의 신인류를 내다보았다. 그는 처음부터 그들에게 속할 수 없는 존재였다. 흡혈귀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파괴돼야 할 저주이자 검은 공포였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는 고통 속에서도 기쁘다는 생각이 들었다...(중략)... 이제 나는 전설이야.
---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 국내 번역판, 221~222쪽
▲ <나는 전설이다>는 2007년 윌 스미스 주연으로 리메이크되었으며 영화제목도 소설의 원래 제목을 따서 “I am Legend”로 지었다. 비극적인 동시에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심적 상태를 그린 원작의 엔딩과 달리, 할리웃 영화답게 영화판 엔딩은 무리하게 해피엔딩을 밀고나간 감이 없지 않다. ⓒWarner Bros.
우리는 보통 어떤 개념이나 논리가 옳다고 생각하면 거기에 세뇌되어 고민 없이 살아간다. 그러나 어떤 시대나 환경에서도 늘 통용되는 개념이나 논리가 반드시 있다는 보장은 없다. 세상이 바뀌면 사람도 바뀌어야 살아남는다. 작가는 흡혈귀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해온 남자의 주관적 기준이 허망하기 짝이 없음을 그의 마지막 결론을 통해 독자와 공유한다.
작가의 시선으로 보기에, 세상의 주류를 형성한 흡혈귀는 이제 신인류나 다름없다. 주인공은 그동안 현실의 단절적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구시대의 패러다임에 얽매여 자기본위로만 세상을 바라봤을 뿐이다.
<나는 전설이다>는 표면상으로는 엽기적이고 괴기스런 사건들의 연속 같지만 작가는 주인공과 흡혈귀들의 대립구도 속에서 은연중 가치의 전복을 이야기한다. 외눈박이 동네에 정상인이 홀로 찾아가면 병신 소리 듣듯이, 구닥다리 인류는 흡혈귀라는 신인류로 세대교체 되면서 새 시대에 맞는 인종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철학으로 세상에 자리 잡는다. 피부색과 머리카락 모양보다는 흡혈귀냐 아니냐가 더 중요한 신분구별의 잣대가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흡혈귀 무리는 세계2차대전 종전 이후의 미국 젊은 세대의 반항의식을 암묵적으로 상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품의 발표시기는 그런 해석을 일면 가능하게 한다.) 이 작품은 여러 차례 영화로 옮겨졌지만 대단원에 담긴 작가의 위와 같은 의도는 거의 무시되고 액션만 살아남아 아쉬움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