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원더풀 라이프>
1. 죽음이 도달한 순간 사람들은 좀 더 사랑하지 못했음을, 하고 싶었던 일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고 한다. 반면 삶에서 가장 소중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묻는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행복에 관한 기억일까? 성취에 대한 만족감일까? 사랑했던 사람과의 추억일까? 일본의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1998년 만든 <원더풀 라이프>는 우리가 삶을 끝냈을 때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마지막까지 ‘나’라는 존재를 지탱시켜줄 수 있는 것에 대한 탐색이며 스스로 선택한 인생의 가치에 대한 평가이다.
2. 영화 <원더풀 라이프>는 독특한 환타지로 우리를 이끈다. 사람이 죽으면 저승에 가기 전, 중간 기착점에서 자신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결정하고 그것을 영상으로 만든 후에 오로지 그에 대한 기억을 안고 저승으로 간다는 설정이다. 일주일의 시간이 주어지면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고 그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선택한다. 그리고 기억은 중간 기착점 센터 사람들의 작업을 통해 영상으로 만들어지고 죽은 자들은 영상에 담긴 행복한 기억만을 안은 채 저승으로 가는 것이다. 사람들이 선택한 행복했던 순간은 특별하지 않다. 배우자와의 평범했던 일상이며, 어린 시절 따뜻했던 가족과의 기억이며, 맺어질 수는 없었지만 뜨거웠던 애정의 기억들이 ‘행복의 순간’으로 선택되는 것이다.
3. 하지만 모두가 ‘행복의 순간’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최고의 행복한 순간을 찾기 위해 그의 일생이 담긴 비디오를 일주일 내내 시청하고 있으며, 또 다른 젊은이는 이제까지의 삶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미래의 희망을 행복한 순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행복’은 철저하게 주관적 감정이기에 ‘행복’에 대한 선택도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는 없는지 모른다. 사실 기착점 센터의 직원들도 ‘행복’의 순간을 찾지 못해서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다.
4. 센터의 한 남성 직원은 태평양 전쟁의 와중 속에서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다. 그에게는 행복한 기억이 없다. 그런데 우연히 비디오에서 행복한 순간을 찾는 한 노인과의 만남을 통해 노인의 아내가 과거 그와 결혼을 약속했던 여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여인이 일생동안 자신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에게 선택할 수 있는 ‘행복의 순간’이 나타난 것이다. 결국 직원은 그녀와 마지막 만났던 데이트 날의 기억을 선택하고 저승으로 떠난다. 하지만 그런 선택은 같은 센터에서 근무하던 한 여인에게는 커다란 아픔을 주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게 가장 큰 행복은 현재 기착점에서 만나고 있는 남자와의 추억이기 때문이다.
5.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사람들과의 만남이며 그들이 맺는 인연이다. 인간의 만남은 수많은 복선과 인연의 관계 속에서 예측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전개된다. 잊혀 졌다고 생각한 나의 모습이 누군가에는 영원한 기억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하고, 새로운 선택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만남에 고통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만남을 지배하는 정서는 ‘인정’이다.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대부분의 경우는 타인의 인정을 받았을 때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행복을 찾은 사람들 또한 그때만큼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며, 알지 못했던 기억을 다시 발견했을 때 그것을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내가 인정받았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행복한 기억을 찾고 떠나는 남성을 보내는 여성에게도 가장 큰 아픔은 그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6. ‘행복’은 이렇듯 철저하게 혼자만의 영역은 아니다. 행복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만들어지는 주관적 감정의 소산이다. 어떤 사람의 행복은 다른 사람에게는 아픔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행복’은 표현된 세계이다. 기착점 직원은 다른 사람의 추억을 통해 자신이 인정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과거의 객관적 사실은 동일하지만 그에게 인지되었기에 새로운 결과가 발생하였다. 이렇듯 모든 것은 표현되고 인지되어야만 가치가 있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세계 또한 그렇다. 표현할 수 없다면 이해되지 않은 것이며, 인지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은 ‘언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전제는 그런 점에서 적절하다. 우리는 감각적으로 수용하고 언어적으로 표현된 것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할 뿐이다. ‘행복’ 또한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을 때 파악된다. 영화 속, 행복한 장면을 영상으로 촬영하는 장면 또한 구체화되지 않은 행복한 순간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명확한 영상이 만들어져야만 그에 대한 기억을 안고 저승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7. ‘행복한 기억’만을 담고 사라지는 삶의 마무리, 상당히 멋지고 환상적인 죽음의 설정이다. 공포와 혐오를 통해 인간을 겁박하는 특정 종교의 교리와는 다른 아름답고 따뜻한 죽음의 세계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행복한 기억’만이 삶에서 가치 있고 남겨야 할 순간들일까? 행복만이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일까? 영화는 ‘행복’의 소중함을 잘 표현했지만, 행복에 너무 집중함으로써 전체적인 삶의 의미를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행복의 조건을 독립적인 자아가 아닌 타인과의 관계와 인정에 너무 무게를 두는 것은 아닐까? 삶에서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그저 살아가는 것일지 모른다. 행복과 불행에 대한 평가와 판단없이 순간순간 최선을 다했을 때 그 결과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던 간에 그것은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삶은 ‘행복’했기 때문에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냈기’ 때문에 가치있는 것이며, 타인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하더라도 ‘자신’이라는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의미있는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 "표현할 수 없다면 이해되지 않은 것이며, 인지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삶은 ‘행복’했기 때문에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냈기’ 때문에 가치있는 것이다!"